기다렸다는 듯 술술 말주머니를 푼다. 출근하자마자 아이 눈에 들어 온 장면은 자기만 빼고 손에 일회용 스타벅스 커피잔을 들고 있는 동료들의 모습이었단다. 누구 생일인가 싶어 물었더니 다들 아니란다. 누가 한 턱 쏘는 거냐며 물었더니 들어온 지 얼마 안된 어린 여직원이 쏜거라고 한다. 아들녀석의 말을 빌리면 그녀는 늘상 이런 식으로 자신의 실수를 커피 한 잔으로 입막음 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오늘같은 일을 겪으니 별것 아닌일에 온 종일 마음이 쓰이고 기분이 별로라고 얘기한다. 자신이 뭘 잘못한 게 있나 싶고, 그녀의 페이스에 말려든 공짜 좋아하는 동료들이 살짝 밉다는 얘길 전한다. 전문직으로 한 사람의 몫을 충분히 하는 자리에 있는 걸 알면서도 좁은 공간안에 서로의 마음이 소리없이 부딪혀 누군가를 상처주는 일을 듣는 것은 그자체로 씁쓸하다. 일상의 다반사로 의식하든 그렇지 않든 겪는 일이 아니던가! 그래도 누군가로 부터 , 어디 소속으로부터 분리되고 소외되는 경험은 그닥 유쾌하지 않다. 아이에게 앞으로 한 턱 쏠 일 있거든 동료를 모두 챙기던지 , 특별히 챙기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조용히 살짝 불러 마음을 전하던지 , 양쪽 다 할 수 없는 상황이면 하지말라고 타이르며 하루종일 벌 받은 것 같은 아이의 마음을 다독였다. 이후로 별말 없는 걸 보면 그저 지나가는 해프닝으로 끝난 것 같아 다행이다 싶었다.
관계 안에서 싫든 좋든 살아가야하는 인간들! 아니 어쩌면 네발 달린 포유류들도 무리에서 '왕따'당하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 것 같다. 작년 아빠개‘천둥이’와 엄마개 ‘소리’를 몇 달 사이에 보내며 혼자 남은 아들개 '바람'이의 행동을 보며 놀란 적이 있다. 혼자 남은 아들개 ‘바람이’는 우리 가족을 자신의 무리 정도로 인식했던 모양이다. 갑자기 사라져 버린 부모 개들, 출근하느라 우르르 빠져나가는 가족들을 보며 혼자만 남겨졌다 생각했던 모양이다. 환기를 위해 유리창문을 반 쯤 열어 놓고 간 상태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유리문 안쪽에 설치 된 방충망이 엉망이었다. 밖에서 가족들을 맞이 해야할 ‘바람이’가 거실에 떡하니 버틴 모습으로 퇴근하는 가족들을 맞이하고 있지 않은가!
얼마나 기겁을 했던지!
여기저기 핏자국이 난 다리의 상처를 보고 기를 쓰고 안으로 들어오려 했던 아들 개 ‘바람이’의 하루가 필림처럼 지나갔다. 걱정스러웠다. 아들개가 느끼는 빈 구석을 인간인 우리가 아무리 노력을 하고 메꿔주려 해도 분명 한계가 있었다. 결국 예상에도 없던 얼추 8주 되어가는 허스키와 저먼 셰퍼드 믹스된 털딸 ‘레아’를 입양하며 ‘바람이 ‘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었다.
오래 전 흥미롭게 보았던 영국 드라마 <다운튼 애비(Downton Abbey)>가 있다. 2011년 에미상 11개 부분 후보에 올라 6개의 상을 수상한 대작이다. 20세기 초 한 귀족 가문의 이야기로 윗층에 사는 귀족들과 아래층 하인들 에피소드가 적절히 어우러져 재미와 공감대를 함께 잡은 드라마로 기억한다. 다운튼 애비의 주인장 로버트 크로울리와 부인 코라 그리고 그들의 개성강한 세 딸들 메리, 이디스, 막내 시빌이 등장한다. 이 집에 아일랜드 출신 운전수 '톰 브랜슨(알렌 리치)'이 집안의가장 현대적인 생각을 지닌 막내딸 시빌과 결혼해 얼떨결에 귀족집 사위가 되었다. 종교도 다르고 자라온 환경도 너무 다른 두 사람은 사랑이란 이름으로 넘어야 할 산이 가파른 자갈길임을 깨닫는데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당장 식사 자리에서 오고가는 얘기들을 막내 사위 톰은 따라가기도 벅차다. 가족들의 배려를 충분히 느끼면서도 사고의 차이, 생활 환경의 다름이 쉬이 좁혀질 것 같지 않다. 체할 것 같은 식사자리를 피해 아래층 하인들이 밥을 먹는 자리에 함께 하며 비로소 웃고, 떠들고, 제 모습을 찾아간다. 그러나 이마저도 잠깐 , 그 집 집사의 따끔한 한 마디로 앉은 자리가 바늘 방석이 되어 어쩔 수 없이 일어나는 톰의 얼굴이 소리없이 일그러진다. 분위기 싸해진 식탁 자리를 애써 털고 일어나며 마음은 그들과 격이없이 지내고 싶으나 이미 신분 상승한 자신의 정체성이 혼란스럽기만 하다. 누군가 얘기했다. 항해술의 시작이 자기위치파악하는 것 부터라고 말이다. 아이를 낳다 너무나 일찍 세상을 떠나버린 아내 시빌, 자신을 향해 웃고 있는 힘없는 존재 딸아이를 생각하며 고향인 아일랜드로 돌아갈 지 아니면 귀족집 처가집에 남아 있을 지 갈등한다. 톰은 처가에 남아 그들의 부족한 부분을 자신이 채워주는 방법으로 그들 사이의 놓인 커다란 틈을 메꿔가기 시작한다.
원하든 원치않든 가벼운 왕따 비숫한 경험들은 일상 속에서 수시로 경험합니다. 점점 더 커지는 동심원 처럼 뒤틀린 관계 속에서 힘들어 하거나 극단적인 결정을 내리기도 하고요. 법으로 규제를 한들 인류가 존재 하는 한 쉽사리 사라질 것 같지 도 않습니다.교과서 같은 말이고 허공에 대고 하는 그저 그런 얘기로 들릴 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서있는 위치를 제대로 알고 좋은 사람이 먼저 되어 주는 것이 정답은 아니지만 괜찮은 해답은 될 수 있지 않을 까요? 기본이 중요한 것처럼 말입니다.
<The Poker Game>,1902
개인적으로 펠릭스 발라통(Felix Vallotton, 1865.12.28-1925.12.29)의 작품<The Poker Game,1902>을 보면 ‘왕따‘라는 단어가 자연스럽게 떠올려집니다. 발라통이 처가와의 관계가 틀어지기 직전 그려진 작품이라 더 그렇게 느껴지나 봅니다. 귀퉁이에 상류층으로 보이는 남녀가 의자에 몸을 바짝 붙인 채 포커 게임에 열중하는 모습입니다. 왼쪽에 보이는 이들이 발로통의 장모와 그녀의 친정 가족들 모습이고요. 그림을 그리기 위해 발라통은 어느 위치 쯤 자리를 잡고 있었던 걸까요? 작은 공간일텐데 유난히 멀리 떨어진 느낌입니다. 소실점을 높게 잡아 카펫깔린 바닥이 살짝 상승하는 것처럼 보이고요. 게다가 유난히 크게 그려진 테이블 위의 램프는 포커를 치는 처가 식구들의 공간과 발라통이 있을 법한 공간을 이등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치 그들과 발라통 사이의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멀어진 심리적 거리감을 표현하듯이 말이죠. 어딘가 모를 불편함과 긴장감이 화면 전체에 흐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스위스 출신 화가 펠릭스 발라통(Felix Vallotton)은 세 자녀를 둔 파리의 젊은 미망인 가브리엘 베른하임 죈과 결혼을 합니다. 그녀는 부자였고, 그녀의 아버지와 오빠들은 인상파 화가들과 관계가 깊었던 유명한 화상들이었지요. 알렉상드로 베른하임 죈, 조스 베른하임 죈, 그리고 가스통 베른하임 죈이 그들이지요. 한마디로 인상파 화가들과 의 교류도 많았던 화상 가문인거지요. 가브리엘과의 결혼은 발라통에게 날개를 달아주는 것 같았습니다. 돈 걱정없이 그림을 실컷 그릴 수 있었으니까요. 모든 화가들의 꿈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발라통은 이 행운을 아주 영리하게 활용합니다. 결혼과 동시에 주 수입원이었던 목판화 작업을 그만두고 회화에 몰두하는 식으로 말이죠. 결혼 초 발로통은 아내에 대한 사랑과 고마움의 표시로 아내와 아이들, 처가 가족들의 모습을 자주 화폭에 담았다고 합니다. 적어도 1902년 처가와의 관계가 틀어지기 전까지 말이죠. 이 시기 이후로 더 이상 발라통 그림 속에 처가 식구들은 등장하지 않게 됩니다.
발로통은 온화하고 정직하고 기품있는 사람이다. 바짝 빗어붙인 머리에 똑바른 가르마가 뚜렷하다. 몸빗은 가장됨이 없고 의견은 복잡하지 않은데, 모든 언사가 꽤나 독선적인 구석이 있다.
-쥘 르나르<출처: 줄리언 반스의 아주 사적인 미술 산책>
인상주의 화가 모네처럼 한 분야에 꽂혀 평생 한 우물만 판 화가가 있었다면, 펠릭스 발라통은 화가로서 다양한 분야에서 재능을 발휘합니다. 이력서를 쓴다면 꽉 찰 정도로 말이죠. 그림, 드로잉. 예술 비평, 희곡, 자서전, 소설, 그리고 풍경화 등 감각적이고 다양한 시도를 통해 끊임없는 화풍의 변화를 겪습니다. 그의 첫 시작은 초상화를 그리거나 실내 풍경을 작고 정밀한 붓터치로 아주 섬세하게 그리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1890년 에콜드 보자르에서 개최된 일본의 우키요에 전시회를 통해 자포니즘을 접하고 그가 하던 목판화 작업에 선택적 수용을 하기도 합니다. 목판화? 나무의 평평한 표면에 밑그림을 그려서 조각칼과 끌을 사용해 공백부분을 파내어 찍어내는 작업을 말합니다. 그의 목판화 실력은 유럽과 미국 전역에 소개될 정도로 유명했지요. 절제된 화면 구성과 담백한 표현으로 단순하면서도 풍부한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지요. 그의 이러한 노력덕분에 시들해진 목판화가 다시 대중으로부터 관심을 받기 시작하고 독자적인 미술장르로 발전하는 계기가 됩니다.
<돌이킬 수 없는> #<자신감>
<친밀한 관계>
발라통의 목판화 작품들 입니다. 촌스럽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아요. 그의 작품은 호불호가 심한 편입니다. 마니아층도 있지만 그의 그림이 너무 건조하고 긴장 속에 묶여 있다는 비판도 받으니까요. 저는 그의 단순하지만 대담하고 솔직한 표현이 참 좋습니다. 부르즈아들의 생활을 연작시리즈를 만들어 과장하게 표현하기도 하고 사회풍자적인 작품으로 비판의식을 담아내기도 했습니다. 작품 속 제목만으로도 남녀의 분위기가 와닿지 않으신가요? <돌이킬 수 없는(The irreparable)> 작품 속 연인들 아니 부부는 침울한 표정만으로도 회복되기 힘들어 보입니다. 같은 공간에 있지만 말도 섞지 않는 듯 보이고요. 누가 먼저 박차고 자리를 털고 가도 붙잡을 것 같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냉랭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흐르고 있습니다.
< 자신감> 무엇에 대한 자신감일까요? 무릎을 꿇고 있는 그는 사랑을 속삭이는 걸까요? 아니면 용서를 비는 걸까요? 여인의 온유한 표정을 봐서 수줍은 남자의 고백을 듣는것 같습니다.
<친밀한 관계> 나이차이가 있어보이는 남녀의 모습이 보입니다. 콧수염을 기른 남자가 제눈에 어린 그녀를 유혹하는 것 처럼 보입니다. 젊은 여성은 신사의 달콤한 꼬임에 반쯤 넘어간듯 보이고요. 남녀의 은밀하고 사적인 감정적 관계 묘사가 보면 볼 수록 발라통의 목판화를 더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 같습니다. 흑백의 색으로 너무나 다양한 이야기를 상상하게끔 하니까 말이죠.
<암살자> #<게으름>
<폴 베를린의 초상>,1891
<암살자>라는 작품은 19세기 후반의 사회적 혼란과 아나키스트적 폭력등을 기록한 목판화 중 하나입니다.아나키스트? 우두머리가 없고 만인이 평등한 사회를 꿈꾸는 사상입니다. (무정부주의) <암살자>라는 제목에 걸맞게 저 칼끝이 뭐라고 침대 위로 뾰족 나온 날카로운 물건 하나가 갑자기 방분위기에 긴장감을 불어 넣습니다.다시 한 번 그림 곁으로 ‘어, 이게 뭐지?’ 하고 가까이 가게 합니다. 안간힘를 쓰는 손 하나가 불길함을 더하고요. 가리워져 얼굴 표정은 볼 수 없으나 죽이려는 자와 살아 남으려는 자의 한 판 승부가 치열합니다. 당장이라도 금속성 강한 날 선 음악이 깔리기라도 하면 공포영화 저리 가라 할 정도의 스릴러물한 편을 보는 것 같습니다.
<게으름>이란 작품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일상의 모습같지 않나요? 고양이와 장난을 치며 한껏 긴장을 풀고 있는 그녀는 침대에 누워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여인의 엠보싱 몸매에 보너스로 휴일의 나른함이 느껴지고요. 흑백의 대비로 이렇게 풍성하게 이야기를 표현해 낼 수 있다니 그저 놀랍습니다.
발라통의 악기 시리즈 중 하나입니다. 소파에 푹 파묻혀 바이얼린을 켜고 있는 연주자의 모습이지요. 활을 켜는 연주자의 손끝 감각이 느껴지실까요? 음악에 심취한 연주자의 옆 얼굴 , 날카롭고 섬세한 바이얼린 소리가 벽난로의 이글거리는 불꽃과 함께 냉랭한 방 공기를 덮히는 것 같습니다. 특별할 것 같지 않은 일상, 후추가루 뿌려놓은 듯 세상 걱정거리들을 모두 잠재우면서 말이죠.
<The White and the Black>,1913 # < Street Scene in Paris>,1897
<Private Conversation>, 1898
1890년대 후반 파리의 번화한 대로의 보행자 모습들이 보입니다. 평평한 표면 , 패턴, 겉보기에 무작위처럼 보이지만 주의 깊게 정돈된 인물들, 개, 마차의 배치 등 동료 나비파(Nabis)들 사이에서 자신들의 이론을 모범처럼 그려낸 작품입니다. 당시 그래픽 아트스타일을 선보인 작품이지요. 지금봐도 전혀 어색하지 않지요. 당시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과 비교해 보시면 확연히 다름을 아실 겁니다. 나비파는 히브리어로 '예언자'를 뜻합니다.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 싫증을 느낀 당시 젊은 화가들이 고갱의 영향을 받아 모이게 된 예술집단입니다.발로통과 함께 쥘리앙 아카데미에 공부했던 세르지에, 보나르, 드니, 등이 그들입니다. 이들은 고갱의 순수한 색채와 르동의 상징주의, 일본 목판화, 삽화 ,포스터와 같은 응용미술, 장식적인 부분까지 복합적으로 수용을 하지요. 이름처럼 종교적인 주제나 초자연적인 주제를 그리기도 하고, 일상적인 삶을 주제로 다루면서 폭을 넓혀 그리게 됩니다. 단순한 표현, 굵은 윤곽선을 강조해서 작품 속 대상들에게 영혼을 불어 넣는 것이 목표지요. 하지만 고갱이 타이티로 홀연히 떠나 버린후 각자의 길을 가게 됩니다.
<Still Life with Red Peppers on a White Lacquered Table>,1915 # Chrysanthemums and Autumn Foliage>,
The Port of Marseille,1901
요즘화가라도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신비로운 색채와 담백한 구성은 동서양의 조화를 아우르고 그의 작품을 더 개성있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