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10. 하늘로 소풍 떠난 큰 형님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Clemente Modigliani)

귀천


 천상병 



나 하늘로 돌아가리 

새벽빛 와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큰 아이의 늦은 여름휴가 일정에 핑계 대지 않고 따라나섰다. 앞만 보고 뛰기 바빴던 큰 아이의 시간이었다. 동굴 속에 나를 가두고 부족한 내면을 무조건 채워 넣기 바빴던 나의 시간이었다. 그런 두 사람에게 잠깐의 여유가 주어졌다. 아들의 쉼의 시간과 다시 사람들 삶 속으로 들어가는 나의 시간이 운 좋게 맞아떨어져

 함께 할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다.   






여행  3일 차 

뮤지컬 한 편을 보고 밤늦은 시간 숙소로 돌아오는 우버 안에서

한국에 계시는 큰 형님의 부고 소식을 전해 들었다.

나는  그 시간 박수를 치고 열광을 하며

이 작품 안 보고 떠났으면 후회했겠다 싶었던 순간이었다. 

마음이 아직도 붕 떠 있던 내게 바늘로 콕하고 바람 빼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미안했다. 

분명 서로 감당하고 살아야 할 시간의 몫이 다르다는 걸 안다. 

내가 웃고 떠들었던 시간에

 큰 형님은 생의 마지막 거친 숨을 몰아 쉬고 있었을 거라 생각하니 

그냥 미안해졌다.

 아직 일정이 남아 있어 어찌할 수도 없고 일정을 마칠 즈음이면 

이미 모든 과정이 다 끝나있을 터였다.

멀리 산다는 건 

가까운 가족, 친지들의 대소사를 

함께 할 수 없어 

불효자가 되고 정 없는 사람이 되기 쉽다. 

어쩌겠는가!

 손에 꼽아 볼 정도의  아들과의 귀한 시간도 

내겐 소중하니 말이다.








췌장암이셨다. 

일 년 반 정도를 항암치료와 함께 잘 참아내셨다.

최근 강단 있던 큰 형님이  복수를 빼고 엉엉 우셨다는 말에 마음 한편이 내려앉았다. 그 뒤로 급속도로 나빠지기 시작하셨고 중환자실에서 겨우 의식을 회복하셨을 때 

당신 큰 딸에게 왜 살려냈냐며 오히려 가슴을 쓸어내리는 자식들에게 

정 떼는 말을 하셨단다.


‘얼마나 아팠으면….’


생전  화내는 법 없는 큰 형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까 싶어

 뜨거운 뭔가가 명치끝에 걸려 내려가질 않는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호스피스 병원으로 옮기셨다 했다.  





당신 사랑하는 막내아들 남은 날이 언제일지 몰라 

따뜻한 봄날 5월에 서둘러 결혼식을 치렀다.

큰 형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며 

살아있을 때 보고 와야겠다고 막내인 남편과 둘째 시숙님이 한국에 다니러 갔었다. 

결혼식장에서 정작 큰 형님은 잘 참고 계시는데

 막내인 남편이  큰 형수를 보고 있자니 그렇게 눈물이 나더란다. 

옆에서 왜 우냐며 핀잔을 들을 정도로 말이다.





정 많은 막내 도련님, 우리 남편이 살가운 큰 형수를 참 좋아했었다. 

결혼해서 들었던 얘기 중 하나가 

군대 마치고 백수 시절 신혼집에 들어가 눈치 없이 몇 달을  살았었단다. 

남편에게 돌도 안 된 첫 조카가 그렇게 이쁘더란다. 

지금은 삼촌이랑 조카가 같이 늙어가고 있지만 말이다.






<어깨를 드러낸 잔 에뷔테른>,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1919, 개인




가늘고 긴 목, 마른 체형, 분위기까지 정갈하신 큰 형님을 참 많이 닮은

 아마데오 모딜리아니의 작품이다.




큰 형님은 검소한 분이셨다.

하필이면 우리 신혼 여행지로 굳이 큰 형수 사시는 곳을 들려서 갈 건 뭐란 말인가!

 하룻밤을 얼떨결에 묵었을 때 

내 눈에 들어왔던 물건 하나가 있었다.

꾹꾹 끝까지 눌러 짜 쓴 다양한 종류의 생활 용품 상자였다. 

보기보다 참 알뜰한 사람이란 것을 그 물건통을 보고 알아챘었다.




큰 형님은 맵시 있는 분이셨다.

알뜰하게 치장해도 태가 참 고운 사람이었다. 

돈 들여 명품 입지 않아도 명품 입었을 거라 착각하게 만드는 그런 분이셨다. 

그 사람자체가 가지고 있는 삶의 이력서이겠지 싶다. 

40대에 늦둥이를 낳고도 아이를 업고 시댁 식구들 챙기는 모습 보면

 갓 결혼한 새댁처럼 어딘가 여성스럽고, 풋풋함이 있었다. 

부러운 면이기도 했다.

아직도 그런 시간을 내가 기억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큰 형님은 친정 엄마를 닮아 음식 솜씨가 좋으셨다. 

까다롭운 미식가 남편 입맛을 입안의 혀처럼 어찌 그렇게 잘 알아 척척 대령하던지! 

주로 설거지 당번인 내게 띠 동갑 형님은 넘사벽 같았던  사람이었다.




큰 형님은 햇살 같은 분이셨다.

 품까지 넓어 살짝 촌스럽고 고집스러운 어딘가 매끄럽지 못한 

시댁 구성원들의 마음을 살살 잘 다독여 주셨다. 

갑작스러운 췌장암 진단으로 본인도 놀랐지만 주변 식구들도 흠칫한 상태였다. 

운동도 꾸준히 하셨고, 아이들도 자리를 잡아 이제 좀 살만한 상황이셨다.

나 역시 놀란 토끼눈으로 믿을 수 없다는 제스처를 연신 남편에게 보냈다.

더 늦기 전에 뭔가 해야 될 것 같았다.

마치 묵은 숙제를 꺼내 풀어야 하는 사람처럼 

카톡으로 큰 형님께 장문의 문자를 보낸 적이 있다. 

늦게 철이 들었고,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였던 것 같다.

발등에 불 끄기 바쁘다는 핑계로 며느리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살았다. 

그저 형님이 알아서 잘하고 계실 거라 넘겨짚었었다. 

지금 와 생각하니, 큰 형님도 의무와 책임만 많은

 큰며느리 자리를 내려놓고 싶지 않았을까 싶다.  

혼자 준비하는 명절 음식이 어디 반가웠을까? 

명절 때 다른 집 며느리들은 하하 호호 남편들 흉도 적당히 보면서 

전도 부치고 , 나물도 무치고, 탕도 끌이고 …

며느리들끼리 단합대회라도 했을 텐데 말이다.

 허울 좋은 큰며느리 노릇하느라

 애 많이 쓰시며 산 세월임을 안다.

그래서

멀리 사는 두 동서가 표현은 못했어도 몹시 서운했을 것이다. 


 




반성문처럼 써 내려간 내 카톡 메시지가 

 이심전심으로 통했던 모양이다.

형님도 내 마음을 읽어 주셨고 , 

나 역시 형님 마음을 온전히 전해받을 수 있었다.

 나는 오랜 숙제를 푸는 배설의 기쁨을 느꼈고 

품 넓은 큰 형님은 당신의  뻥튀기 사랑으로 

커다란 택배 상자에 당신 마음도 함께 넣어왔다.

 말린 생선, 미역, 김,

 남편 좋아하는 떼깔 좋은 중간 멸치, 멸치젓갈, 말린 피 문어 등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꾹꾹 담아  보내주셨다. 

어쩌면 마지막 보내주는 당신 마음이었나 싶다.








깐깐한 시어머니 만나 남편, 시동생, 그리고 두 고모들 사이에서 

싹싹하게 굴었던 마음 넓고 세련된 도시 며느리였다. 

흡족해하셨던 분이 돌아가신 시아버님이셨다고 하신다. 

당신 아내에게 찾아볼 수 없는 

여성성을 큰 며느리가 가지고 있어 이뻐하셨다고 하신다.

 나는 한 번도 뵌 적이 없지만 말이다.






2년이 채 안 된 팔순 넘은 

시어머니 마지막 길도 큰 형님의 정성이 있었다.

당신께서 믿고 사랑하신 큰 며느리 실 텐데… 

너무 일찍 부르신 것 같아 

그럴 리 없을 텐데 괜히 쓸데없는 생각도 들었었다.

한국의 추석 명절은 돌아오는데 

이제 이가 하나  빠져 버린 

빈 그 자리로 

휑한 바람만 소리 없이 드나들 것 같다. 

가족 구성원들의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만 

울컥울컥 소용돌이치는 것 같다.





몇 년의 시차를 두고

 사랑하는 두 여인을 보내 버린 큰 시숙님의 시간,

사춘기 시절 형님 속 끓이던  둘째 딸의 정성 어린 간병의 시간,

큰 형님 성품을 꼭 빼닮은 큰 딸의 책임감의 시간,

장손으로 막내로 엄마 사랑 누구보다 많이 받았지만 

가장 그리워할 막내아들의 시간,

시간이란 묘약이 큰 형님의  기억을 엷어지게 할 테지만 

그리움의 시간은 

각자가 엄마로 아빠로 모습을 달리하며 

내리사랑이 되어 누군가에게 이어질 거라 믿는다.

 받아 본 사람이 그 사랑 맛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큰 재주 없는 막내며느리가 

큰 형님의  소풍길을 이렇게라도 기억해 드리고 싶습니다.

큰 형님! 

막내 동서가 많이 좋아하는 것  아시죠?

꿈에라도 잠깐 들르시거든 

 그동안 고마웠다고, 

감사했다고 

꼭 전해드리고 싶습니다.

 따뜻한 기억 오래오래 간직하고 살겠습니다.








가느다랗고 길쭉한 얼굴, 가녀린 목, 아몬드 형 눈, 

노천명 시인의 <사슴>이란 시를  떠오르게 하는 

 아메데오 모딜리아니(Amedeo Clemente Modigliani,1884-1920) 화가의

 굵고 짧은 시간을 살펴봅니다.




모델리아니 출생 당시, 그의 아버지는 사업실패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집안  행정관이 그의 집 물건을 압수하기 위해 집어 들어갔을 때

 어머니가 모델리아니를 낳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유대법에 '임신한 여자나 갓 태어난 아기 엄마의 침대는 뺏지 않는다.'

라는 내용이 있어 

값비싼 물건을 아이를 낳고 있는 어머니 곁에 두어 

재산을 일부 남길 수 있었다고 합니다. 




몸이 약해 늑막염, 폐결핵, 폐렴등

 병치레가 잦아 정규교육을 받기 힘들었다고 합니다.

어머니 에우제니아가 철학자 바뤼흐 스피노자의 혈통을 이어받은 

마르세유의 명문가 출신입니다.

 당시 높은 지성과 교양을 갖추고 계셨던  어머니가 

아들의 재능을 일찍 알아봅니다.

 이탈리아 최고의 미술 선생인

 풍경화가 굴리엘모 미켈리(Guglielmo Micheli)의 아틀리에에 데리고 가

 미술공부를 시키게 됩니다. 

걸림돌이 되는 건강 문제로 

이탈리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요양을 해야 했고요. 





 어릴 때 외할아버지의 권유로 독서량이 풍부한 화가 중 한 명이기도 합니다.

 니체의 사상에 푹 빠져 반항과 무질서를 통해 

진정한 창조력을 발현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작가 이기도 하고요. 

그래서일까요. 

당시 입체파, 다다이즘, 초현실주의 등 다양한 사조가 유행하던 시절

어느 노선도 따르지 않았고 

미술사에서 어느 쪽으로 분류될 수 없는 

독자적인 스타일을 환성 해낸 화가입니다.

파리에서 르누아르, 피카소, 고갱, 세잔, 마티스 등과 같은 

사조에 한 획을 그은 화가들을 만났음에도 

그만의 독특한 작품세계를 지킬 수 있었던 힘도

 생각하는 힘 아니었을 까 싶습니다. 

피카소 같은 거물에 가려  고작 $2-4, 드로잉은 4센트를 받고 

생활고에 그의 그림을 팔아야 했습니다. 

아무에게나 팔다 보니 

그의 사후 어떤 작품이 진품인지 알기 힘든 점이기도 하고요. 





<The Cellist>, Amedeo Modigliani,1909,표현주의 스타일 초상화 #<여자의 머리>,1912, 석회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큰 모자를 쓴 잔 에부테른, <Portrait of Jeanne Hebuterne in a large hat>, 1918



                     

22세 모딜리아니는 1906년 아방가르드 미술의 중심인

 파리의 몽마르트르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됩니다.

콜라로시 아카데미에서 인체소묘와 유화를 공부하는 한편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지노 세베리니(Gino Severini), 

앙리 툴루즈-로트레크(Henri de Toulouse- Lautrec), 

폴 세잔(Paul Ceqzanne) 

등에 영향을 받습니다. 


몽마르트 지역 작은 스튜디오에서 1년 동안 생활하며

 말쑥했던 그의 외모는 홈리스처럼 초라해졌고 

생활이 어려워져 알코올과 마약에 손을 데게 됩니다. 

그림에 대한 열정만은 식지 않아

 하루에 100여 장의 그림을 그릴 정도로

 엄청난 작업을 소화해 내기도 하고요.





  <The Cellist>는 세잔의 영향을 받은 표현주의 스타일의 작품입니다. 비정상적으로 길게 그려진 첼로 연주자의 팔은 훗날 그이 회화 스타일의 특징이 되기도 하지요. 

 당시 그곳에 살았던 가난한 첼로 연주자가 

그림의 모델이라고 합니다. 

가난한 연주자였지만 

음악에 대한 열정만은 따끈따끈한

 청년의 순수함과 첼로가 혼연일체 된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여자의 머리> 1909년 모딜리아니는 몽파르나스로 이사하여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와 교류하며 조각에 매료됩니다. 

친구이자 이웃인 브랑쿠시에게 영향을 받아

  1909-1914 약 5년 정도 조각 활동에 매진하기 시작합니다. 

이국적인 환경에서 살아온 브랑쿠시의 영향으로

 아프리카를 포함한 부족미술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권에 영향을 받은 작품을 생산하게 됩니다.

  30여 점에 이르는 특유의 길쭉한 석조 두상을 제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여러 질환으로 인해 허약했던 그의 몸은 

조각에서 나오는 돌먼지로 인해 더욱 악화되어 

조각활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의 조각작품 역시 당시 예술계에서 큰 관심을 끌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조각 작업 이후에 오히려 그의 작품세계는 더욱 명확해집니다. 

조각작업을 통해 모딜리아니는 형태를 더욱 단순화하고, 

가능한 한 가장 간단한 방식으로 물체의 정수를  뽑아내는  

조각작업의 영향으로 그의 화풍은 단순하고

 비정상적이지만 개성적인 작품으로 탄생하게 됩니다. 







시인 겸 화상인 폴란드 화상 페오폴트 즈보로프스키의 권유를 받아들여

 회화로 복귀합니다. 

그는 전통적인 회화 기법을 뛰어넘어

 인간의 본질을 조망하는 순수한 형상을 그리는 데 몰두합니다. 

탁월한 데생력을 반영하는

 리드미컬하고 힘찬 선의 구성,

 미묘한 색조와 중후한 소재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작품은 초상화와 누드화가 주를 이루게 됩니다.

 긴 목을 가진 단순화된 여성상은 

무한한 애수와 관능적인 아름다움을 전달합니다. 






1917년 몽파르나스의 카페에서 모딜리아니는 

프랑스에서 활약한 우크라이나계 조각가 하나 오를 로프의 소개로

 19살의 화가 지망생 

잔 에 뷰테린(Jeanne Hebuterne)을 만나 

운명적인 사랑에 빠집니다.

 잔은 로마 가톨릭의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젊은 미술학도로 

부모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헌신적으로  모딜리아니를 돌봅니다.

 그의 작품은 당시 동료 미술가들에게는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미술 시장에서는 여전히 큰 주목을 받지 못했고

 늘 주변인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같은 해 12월 

 모딜리아니는 베르트베이유 화랑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지만 

그마저도 풍기문란으로 일찍 문을 닫아야 했습니다.

  통행인의 눈길을 끌기 위해

 내걸었던 두 장의 누드화로 인한 오해로

 처음이자 마지막 전시회가 어이없게 실패로 돌아갑니다.






꿈을 이루는 것은 의무다.





1918년 모딜리아니는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합니다. 

이 시기 작품에 대한 열정과 헌신만은 더욱 강렬한 빛을 뿜어냅니다. 

잔의 초상화가 주를 이루는데 

단순미가 더욱 강조되는 가운데 

전에 없던 서정미를 엿볼 수 있습니다. 

잠시 떠난 남프랑스 니스에서 요양하며 호전되는 듯싶었습니다.

그의  딸 잔 모딜리아니(Jeanne Modigliani)가 태어난 해이고요. 




'이제 영광을 차지하려는 순간에 죽음이 그를 데려가다.'

(파리 페르 라세즈 묘비명)





1920년 파리로 돌아왔지만 모딜리아니의 건강이 급속도롤 나빠지기 시작했다.

 의사조차 아무런 조처를 취하지 못할 정도로 말이지요.

36살  

결국 모딜리아니는 세상을 떠납니다.

  그의 사망 후 

장례식 문제로 충돌하고 격분한 잔느 역시 다음 날 부모의 아파트 5층에서 투신자살을 하고 맙니다.

당시 8개월의 뱃속의 아이 역시 세상을 보지 못합니다.

다행히 

그의 첫째 딸 잔 모딜리아니(Jeanne Modigliani, 1918-1984)는  미술사가로 성장해 그녀의 아버지의 작품을 토대로 한 <모딜리아니:인간과 미신>이라는

 전기를 세상에 내놓습니다. 




모딜리아니의 36살 짧은 생을 역으로 뒤집어 몇 살 더 보태면

 60대 중반의 며칠 전 돌아가신 큰 형님 나이가 됩니다. 

그림이 유명세를 탈 즈음 세상을 떠나버린 모딜리아니와 

이제 좀 살만하니 떠나버린 큰 형님의 시간을 되짚어 보며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 다시 한번 물어보게 됩니다.





 


작가의 이전글 9.  9•11 그날 이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