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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달, 달, 무슨 달?

후기 인상파 폴 고갱(Paul Gauguin)



쓸까 말까 만지작 거리다 그냥 쓰기로 했다. 

왜? 

달을 주제로 하다 보면 <달과 6펜스>가 자연스럽게 떠오르고 그러다 보면 실제 모델이 되었던 화가 폴 고갱의 이야기를 끄집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다지 좋아하는 화가는 아니라 혹시 기우는 느낌이 들까 봐 잠시 망설인 것도 사실이다. 





나에게 달은 부모님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던 아니  나만을 위해 존재할 것만 같은 세상 너머를 그리워하게 해 준 빛나는 둥근달이었다. 미생이 되어 세상바깥에 던져졌을 때  김건모의 <서울의 달> 가사처럼 되는 것 하나 없이 부딪히고 깨지던 시간에도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며 여전히 둥근달의 모습이었다. 세상 때가 끼어 살짝 희뿌였기는 했어도 말이다.  계획에 없던 타국생활을 하며 무식하게 현실에 순종만 하며 살았다. 저 달(꿈), 지나가는 개나 줘버려 하면서 말이다. 




 어느새 그 달은 찌그러진  모습으로 반쯤 생기 잃은 채 내게로 왔다. 참 무력한 모습으로 말이다. 부러질 것 같은  나뭇가지에 걸려 되돌아갈 수도 다시 시작하기도 애매한 딱 그 지점에 걸려있었다. 솔직히 달(꿈)까지 가 본 사람을 보면 부럽다. 아직도 의심하면서 가는 사람조차도 좋아 보인다. 달(꿈)을 주머니에 넣고 조몰락조몰락 함께 하고 있는 시간일 테니까 말이다. 



지금 나의 달은 심하게 찌그러져 귀퉁이부터  펴고 있는 중이다. 둥근달의 모습을 갖추지 못한 채 그냥 영원히 찌그러진 채로 갈 수 도 있다. "그저 살기만 할 수가 없어서 글을 쓴다."는  패티 스미스의 <몰입>의 한 문장처럼, "한 투명인간이 존재감을 찾아가는 편력의 기록이다."라는 서문을 쓴 강원국 저자의 말처럼 일상 안에 감동을 주는 뭔가가 틀림없이 있다고 믿으며 그냥 쓴다.  달(꿈)까지 올라가는 촘촘한 사다리를 알아주는 것과 상관없이 쌓아 올리고 있을 무명씨들의 시간을 기립손뼉 치면서 말이다.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지만 뜨거운 감정이 턱밑까지 차올랐 던  <달과 6펜스>의 챨스 스트릭 랜드의 달(꿈), 파리 시민들을 자신만의 그림 스타일로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었던  폴 고갱의 달(꿈), 디디고 서 있는 땅이 좁다고 IT라는 신 문명을 가지고 메타버스 세상에 쏘아 올려지고 있을 그들의 달(꿈), 지구촌 곳곳에서  상상할 수 있는 힘의 크기를 키워가고 있을  크리에이터들, 그들이 만들어 갈 달(꿈)을 사심 없이 들여다본다.





주위 사람들에게 너는 거부감이 심하니까
언젠가는 혼자 외롭고 고립될 수 있으니
 사람들 사이에서 같이 살아라."




17살  2등 항해사가 되어 지중해, 북극해 이곳저곳을 누비며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이 생활을 하던  폴 고갱에게 어머니가 남긴 유언이다. 죽어가면서도 엄마 알린은 외골수 같은 아들 고갱이 걱정 되었던 모양이다. 어머니가 남긴 힌트만으로도 그의 성격이 어떠했 을 지 짐작이 간다. 빈정거리는 말투, 냉소적이고, 고집불통 등 솔직히 인간적으로  매력은 없다.  그래도 그의 작품은 인상주의에 슬슬 싫증이나  새로운 것들을 찾아 헤매던 젊은 층들에게 획기적이었고, 그런 그들이   나비파(Navis:예언자)를 결성해 활동을 했고, 다수의 표현주의 작가들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불어넣어 준 것만은 사실이다.




달이 주는 상징은 무지개 떡처럼 무채색부터 시작해 점점 색을 물들이며 화자의 마음

따라 다양해진다.  윌리엄 서머싯 몸(William Somerset Maugham,1874-1965)의 장편소설 <달과 6펜스>, (1919)는 자기 꿈을 향해 나아갈까? 말까? 지금도 고민 중인  누군가에게 곰곰이 카드 형태로 질문을 던지는 것 같다. 예술을 위한 예술을 했던  주인공 챨스 스트릭랜드, 그의 삶을 통해 예술이라는 숭고함에 가까운 고통과 환희의 시간을 따라가 본다.  '너, 지금 그렇게 살아도 행복해?' 하며 꾸역꾸역 살다가 먼지만 쌓여있을 누군가의 밑바닥 감정을 건드리면서 말이다.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작가는 직접 타히티를 방문한다. 폴 고갱(Paul Gauguin)이 살았던 집에 가보기도 하고, 그가 데리고 살았던 여자와 얘기도 나누며, 그가 그린 그림을 사기도 했다고 전한다. 타히티보다 좀 더 문명의 손길이 덜 탄 마르키즈 제도의 히바 오라는 먼 섬에서 폴 고갱은 마지막을 맞았다. 유명 화가의 묘역 중에서 아마 찾아가기 가장 힘든 장소일 것이다. 그곳까지 다녀올 정도로 폴 고갱의 삶이 작가에게 매력적이었나 보다. 실제로 이 작품이 성공하며 이미 고인이 된 폴 고갱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한때 룸메이트였던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1853-1890)의 작품도 덩달아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다.

 




<달과 6펜스>는 얼핏 보면 평탄하게 살아가던 한 남성이  처자식 다 버리고 그림에 꽂혀 집을 나가버리는 지탄받기 딱 좋은 상황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이렇게 무책임한 가장이 있을까 싶고, 이기적 이서 시댁으로 반품하고 싶은 남성처럼 보인다.  그러다 중년이란 시간을 지나온 사람들은 작품 속 챨스 스트릭랜드나 폴 고갱을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용기 있고 부러운 시선 말이다. 덕지덕지 삶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붙잡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너무 무거워 쉬이 떼어지지도 않는다. 멀쩡한 삶을 뒤집어엎으면서  새로 무엇인가 시작할 용기도 없기 때문이다. 익숙한 길에서 벗어나 보장되지 않는 길을 가려는 누군가의 삶이 현실적인 눈으로 보면 미친 짓을 테니 사회적 관념을 깨부수지 않으면 어디 가능이나 하겠는가 말이지. 작중 '나'라는 사내를 통해 오로지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욕망을 좇아 떠난 스트릭랜드의 진짜 삶을 대면하게 된다.  결국 궁극의 아름다움을 살고 떠난 찰스 스트릭랜드의 천재성에 작중 '나'는 그저 감탄할 뿐이다.





이 소설의 실제 모델이었던 폴 고갱은 1848년 6월 7일 혁명이 한창 진행 중인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는 34살로 오를레앙에 이주한 사업가 집안 출신 진보주의적 성향이 강한 언론인이었다.  신문에 낸 기고문 하나가 문제가 되어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추방명령을 받게 된다. 혁명으로 왕정이 무너지고 공화정이 들어서면서 클로비스 고갱은 프랑스계 페루인이었던 아내의 친척들이 사는 곳으로 망명길에 오른다. 폴 고갱의 외할머니는"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말로 유명한  플로라 트리스탕으로 사회주의 운동을 했던 여장부셨다. 이런 외할머니를 누구보다 동경하고 좋아했던 인물이 폴 고갱이다. 그래서일까? 할아버지, 아버지 모두 개신교 목사였 던 반 고흐(Vincent Van Gogh)와 9주라는 짧은 동거를 하며 불협화음으로 힘들어했던 것도 서로의 뿌리가 달랐던 탓은 아니었을까 추측해 보게 된다. 물론 반 고흐(Vincent Van Gogh)의 정신적 문제가 더 컸지만 말이다. 





가족을 동반하고 여행길에 올랐으나 심장마비로 아버지는 사망하고 페루에 아내 알린과 18개월 된 폴 고갱(Paul Gauguin) 그리고 2살 반이었던 누나 마리만 도착하게 된다. 다행스럽게 페루 리마에서 5살까지 보낸 그의 유년시절은 폴 고갱의 삶에서 가장 풍족하고 자유로우며 행복했던 시절로 기억되고 있다. 마추피츄(Machu Picchu), 쿠스코 (Cusco)등 고대 화려했 던 잉카 문명을 보았고 원주민들이 입고 다니는 총천연색  색감들에 수없이 노출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거의 구걸하다시피 친구들에게 신세를 져야 했던 고갱으로서 자신을 받아들여 주지 않는 문턱 높은 도시를 떠나 차라리 원시 세계로 가고자 했던 그의 밑바닥에 페루에서 지낸 유년 시절도 한몫 거들지 않았을까! 





페루에서 자란 어린 시절 못지않게 구스타브 아로사라는 인물을  만나 폴 고갱(Paul Gauguin )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갖게 된다.  그는  금융업에 종사했으며, 아마추어 작가, 사진작가, 현대 미술을 수집하는 취미를 갖고 있었다. 그런 그로부터 소개받고 들어간 증권회사에서 어릴 적 배운 스페인어를 구사하는 장점을 보태며 소위 잘 나가는 파리지앵으로 덴마크 여성과 결혼도 하고 아이들을 두며 11년 동안  평탄한 중산층의 삶을 이어간다. 여유로운 아마추어 미술 애호가로 당시 인상파들의 그림도 사 주고 고갱과 세잔에게 직접 인상주의를 가르쳤던 큰 형님뻘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1830-1903), 현대 미술의 아버지 폴 세잔(Paul Cezanne,1839-1906),  인상주의를 삶으로 살다 간 클로드 모네(Claude Monet,1840-1926) 등과 친분도 쌓으며  "주말 화가"로 활동하게 된다. 






1882년 11월

경기침체로 파리 주식시장이 붕괴되고 실업자들이 대량발생하게 된다. 풍경화를 가르쳤던 까미유 피사로의 조언으로 고갱은 전문 화가의 길로 들어선다. 그러나 점점 재정은 바닥이 드러나고 경제적인 문제로 아내와의  다툼이 잦아진다. 급기야 생활고로 아내 메테는 친정인 덴마크로 가족과 함께 이주한다. 무능력해 보이는 사위가 친정 식구들 눈에 들어오겠는가!  쫓겨가다시피 혼자 파리로 돌아오게 된다. 소설 속 챨스 스트릭랜드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의 처자식을 버리고 나왔지만, 현실 속 폴 고갱은 그의 아내와 계속 연락도 하고 지냈다는 점이 다른 부분이며 오해가 많은 부분이기도 하다. 






<설교 뒤의 환상(Vision After the Sermon),1888>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THE YELLOW CHRIST), 1891>

<우리는 어디서 왔고 ,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1897>

#그림출처: 위키피디아, 구글아트 앤 컬처, 위키아트




자연을 너무 곧이곧대로 베끼지 말라.
예술은 추상적이고
 자연에서  추상을 뽑아내라.



폴 고갱은 그림이 본인의 삶의 목적이 되기 시작하자 프랑스 서부 부르타뉴 지방 퐁타방에서 농민들의 삶의 모습을 연구하고 미술계의 최신 트렌드를 파악하고자 노력한다.  고갱은 인상파가 처음 파리 시민들에게 엄청난 지탄을 받고 충격을 줬던 것처럼 자신의 작품으로 파리 시민에게 엄청난 쇼크를 주는 작품을 만들어 미술계 넘버원이 되고 싶어 했다. 





풍경과 싸움하는 모습은
 설교가 끝나고
기도하는 사람들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네.
( 고갱이 고흐에게 보낸 편지 중)





<설교 뒤의 환상> 작품은 선명한 붉은 색감과 단순한 구성이 눈에 뜨인다. 그림 속 여인들 머리에 쓴 흰색의 쓰개머리 모자 또한 인상적이다. 전통을 지키고 살았던 퐁타방의 여인들 모습이 당시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어 주머니 가벼운 그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단순화된 인물들과 밝은 붉은색은 당시 유럽 화가들 사이에 유행이던 일본식 우키요에의 영향이다. 우키요에? 17세기에서 20세기 초 일본 에도 시대에 성립한 당대 사람들의 일상생활이나 풍경, 풍물 등을 그린 풍속화를 말한다.  중앙에 나무가 이렇게 가로지르면서 이쪽 세계를 이 나무로 갈라서 표현을 하고 있다. 불혹의 나이에 고갱이 그림  속에서 찾은 굵은 윤곽선과 색채다. 자연주의에서 벗어난 원시 미술이 시작된 시기이다. 





[제8회 인상파 전시회]에 19점의 작품을 선보이지만 그때 당시 같이 소개되었던 쇠라(Georges Seurat)의 [그랑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A Sunday Af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e Jatte,1884)]가 거의 모든 관심이 쏠리게 되면서 폴 고갱은 존재감 없는 들러리 신세가 되고 만다. 점을 하나하나 찍어 대작을 2년에 걸쳐 완성한 작품이다. (점묘법) 쇠라 역시 까미유 피사로의 추천으로 대회에 참석했다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입은 고갱은  피사로와 말다툼을 크게 하고 그날 이후로  결별하게 된다. 폴 고갱 입장에서 연거푸 배척당하는 파리생활이 넌덜머리가 나기 시작한다. 당시 매형이 파나마 운하 건설 현장에서 근무한다는 것을 알고  파나마로 떠났지만  파나마 운하 공사 실패로 매형이 파산을 하며 정착하지 못하고 다시 떠난다. 대신 마르티니크 섬에서 몇 달 머물며 자신의 스타일을 찾는 성과를 거두게 된다. 






마르티니크에서 돌아온 후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1853-1890)와 그의 동생 테오 반 고흐를 만나게 된다.  고흐가 고갱을 동경해 그를 스승으로 생각하고 자신이 있는 아를로 와 주기를 간청했다고  한다. 사실 고갱은 당시 화상이었던 반 고흐의 동생 테오가 생활비를 주고 고갱의 그림을 사주는 조건으로 거래가 성사되었다. 형 반 고흐는 이런 사실을 모른 채 말이다. 고흐의 이상인 화가들의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뜻을 동생 테오가 잘 알고 있었기에 가능했 던 시간들이었다. 폴 고갱은 9주 동안 고흐와 함께 지내며 작업을 한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의 성격과 예술관의 차이 때문에 불화를 겪게 되고 고갱은 도망치듯 떠난다.





<황색 그리스도가 있는 자화상(The yellow Christ,1891)> 

당시 42살의 고갱은 이 작품에서 자신의 모습을 정확히 표현하기 위해 거울 맞은편에 서서 고전적인 방식으로 작업을 했다. 길고 검은 머리카락, 매부리코, 야심에 찬 초록색 눈, 턱수염과 짧은 콧수염을 지닌 다소 위엄 있어 보이고 냉소적인 면도 살짝 섞인 모습으로 말이다. 평행한 붓터치와 고르게 분포된 빛 효과 덕분에 그의 모습은 자신감이 지나쳐 교만해 보이기까지 한다. 야성적인 표정도 강조되면서 말이다. 이 자화상을 완성하고 그는 타히티로 미련 없이 떠난다. 자신이 그리던 상상 속 원시세계가 이미 문명화가 진행되고 있음을 모른 채 말이다.





지금까지 그렸던 그 어떤 것보다도
 뛰어날 뿐 아니라
앞으로도
 이를 능가하거나 비슷한 작품은
결코 그릴 수 없다고 믿네.
나는 죽음을 앞두고
모든 열정을 쏟아
최악의 조건에서
고통받으며 정열을 불태워 이 작품을 그렸어."
 
- 고갱이 동료화가에게 보낸 편지 중-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1897> 미국 보스턴 미술관에 보관된 이 작품은 가로 4m, 세로 1m로 대작이다. 한 달여 동안 그려진 그림으로 고갱의 마지막 유언 같은 작품이다. 지질한 생활을 버티게 해 준 것도 그림이었고 목구멍이 포도청인 사정으로  물감이 마르기 바쁘게  배에 실려 파리로 보내지는 것도 그림이었다. 고갱의 절박한 상황을 알기에  지인들의 급조로 돈이 보내지지만 경제관념 없는 고갱의 손에 들어가는 순간 허공에 먼지만 날리는 시간이 누적되어 갈 뿐이었다. 그즈음 들려온 딸의 죽음 소식은 폴 고갱에게 현타로 다가왔고 몸과 마음에 우울이 쌓이기 시작한다. 자신이 사랑하는 어머니의 이름을 물려받은 딸아이 아닌가! 먼 곳에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무능한 화가 아빠는 뿜어져 나오는 한숨과 죄책감으로 마지노선이 무너지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날 이후로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한 탐구가 시작되고 인간의 탄생과 삶,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된다.






 타히티에 머물며 자신만의 그림을 체득해 의기양양하게 그림들을 파리 시민들 앞에 내놓았다. 미술계가 쇼킹한 반응을 일으킬 거라 믿으면서 말이다. 하지만 파리 시민들의 반응은 '그래서 뭐 어쨌다고?'라는 식의 반응이었다. 고갱이 붙인 타히티어 그림제목은  유치 찬란하다는 반응까지 더해졌다. 긴 철학적 제목의 <우리는 어디서 왔고, 우리는 무엇이며,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이 그림 역시 르네상스나 바로크 시대의 고전들처럼 귀하게 대접받기 원하며 금테두리 장식을 하고 등장했지만 고갱이 허세를 부린다며 비웃었다.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터벅터벅 걸어가는 폴 고갱의 뒤통수에 어떤 생각들이 스멀스멀 올라왔을까? 아마 수없이 거절당한 기억을 가진 <해리 포터>의 작가 J.K. 롤링( J.K.Rowling)은 폴 고갱의 마음을 이해해 주지 않았을까 싶다. 





궁핍함, 잦은 주민들과 분쟁, 외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투견 본능 때문인 지  쓸데없이 타히티의 정치싸움에 끼어들기도 하고 타히티로 건너온 중국인을 비난하는 글을 현지 잡지에 기고해 물의를 일으키기도 한다.  좀 더 문명의 손길이 덜 탄 마르키즈 제도의 히바오아로 옮겼지만 앞서 정착한 가톨릭 주교와의 다툼, 원주민들을 위한답시고 총독을 비난하는 등 좌충우돌한다. 심해지는  알코올 의존증과 매독으로 결국 숨을 거둔다.





<달과 6펜스>의 소설 속 주인공 챨스 스트릭랜드는 나이 어린 원주민 부인에게 자신의 작품을 불태워 줄 것을 부탁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었다 생각해서 그런 걸까? 창작자가 자신이 만든 작품을 불태워 달라는 심리에 도대체 어떤 마음이  깔려 있는 걸까? 성경의 하느님은 세상창조 후 " 보시니 참 좋았다." 하셨는데 말이다. 타히티에도 고갱의 박물관이 있지만 제대로 된 폴 고갱의 그림들은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고갱은 돈이 필요해 그림을 그리면 말리자 마자 배편으로 프랑스로 보내 팔았버렸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폴 고갱의 작품은 살아남아 당시 주인이 누리지 못한 호사를 누리며 몸값을 키우고 있다. 




이 글을 읽고 있을 작가님들의 달(꿈)은 무사하신가? 자신의 끼와 열정으로 세상을 부수고, 좁히고, 세우고 그리고 넓히며 무한대로 자신을 확장시켜 가길 희망해 봅니다. 

그 좋은 기운으로 세상이 살만해지길...


 #달 #챨스 스트릭랜드 #폴 고갱




  


#불태워진 작품들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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