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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이름값 좀 해라, 예루살렘아!

색채의 마술사,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사람의 감정을 격동시키는 종교가 정치화되며 중동지역이 요즘 뒤숭숭합니다. 혹자는 제5차 중동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경고하기도 하고요. 


이스라엘판 9.11, 하루사망자 1000명 이상, 다양한 국적의 인질들, 무차별적 공격... 등


팔레스타인 측 하마스 무장단체의 치밀한 계획과 이스라엘 측 나 탄야 후 총리의 안일함이 맞물려 애꿎은 민간인 사상자 숫자만 속절없이 늘고 있습니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무한루프의 삶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며 살아가는 팔레스타인들 , 하루가 멀다 하게 총소리 난무하며 , 폭탄 터지는 소리가 아침 알람처럼 울려대는 살벌한 그곳 풍경에  지구촌 사람들도 늘 그런 곳이려니 하며 무디어집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판단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배후의 힘 좀 쓰는 나라들의 국제적 이해관계까지 맞물려 상황은 꽈배기처럼 배배 꼬여있습니다. 각 나라의 양심에 호소하기에 이웃집 경제상황도 녹록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항상 욕망 따라 바뀌다 보니 공격당한 이스라엘이 안 됐다 싶은 마음이 들다가도 시간이 차츰 흐르며 팔레스타인 측 병원시설이  공격받았다는 소식에 또 마음이 반대편으로 기웁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전쟁 중에도 병원은 건드리면 안 되는 곳 아닌가?' 하며 반 이스라엘 감정도 솔직히 올라옵니다. 꼭 이런 식 해결책 밖에 없는 것인지 차가운 평화라도 좋으니 제발 좀 포탄 소리 그만 좀 들었으면 하는 마음도 큽니다. 동정과 지지로 세계여론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던 시기는 지난 것 같습니다. 팔레스타인 무장 단체도 이스라엘도 둘 다 나쁩니다. 이제 그들의 민낯이 아래로 향해 명분이 아닌 허덕이는 민심을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길를 희망해 봅니다. 




 개인적으로  세상에서 가장 이름값 못하는 수도 이름이 예루살렘 아닐까 싶습니다. '평화의 마을'에 과연 '평화'가 있었는지 의심스럽기 조차 합니다. 유대교, 기독교, 그리고 이슬람교 세 종교에게  이곳이 신성한 곳으로 알고 있습니다. 시간이란 타임머신은 종교 창시자들의 본래의 뜻에서 한참 벗어나 궤도를 이탈한 지 오래됩니다. 게다가  정치와 힘의 논리에 휘둘거리며 중심을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믿고 사는 이들의 삶 또한 척박한 땅이 되어 더 이상 서로를 다독이거나 품으려 하지 않습니다. 주먹이 쉽게 먹히는 세상이 되었으니까요. 아니꼽지만 힘센 나라 말 들어야 하니까요. 그렇지 않으면 뼈도 못 추리니 듣는 척이라도 해야 하니 말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어쩌면 무자비가 자비로 오인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얀 십자가( White Crucifixion)>,1938, 미국 시카고 미술관(Art Institute of Chicago) 소장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의 그림 < 하얀 십자가>입니다. 98세로 세상을 떠난 보기 드물게 장수한 화가 중 한 사람입니다. 뒤집어보면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1917),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에 이르기까지 굵직한 세계사 안에 출렁이는 한 개인으로 예술가로 흔들거리며 살다가신 분이십니다. 



팔레스타인의 이스라엘 공격 소식을 접하고 이 그림이 가장 먼저 떠 올랐습니다. 유럽 역사 속 환영받지 못한 민족으로 , 크고 작은 일 생길 때마다 동네 북처럼 두들김 당하는 그들 , 신이 선택한 민족이라는 선민의식은 때로 자만심으로 내비쳐지기도 합니다. 세계 정치. 경제, 문화 기타 영역에서 특출 난 그들의 교육방법을 한때 배우고 싶어 안달한 적도 있었습니다. 오랜 핍박으로 단련된 그들도 리더가 누구야에 따라 대응방법이  늘 현명한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십자가 처형을
잔혹하지 않고 희망적으로 표현했다.
 평정심을 가지고
고통을 묘사했다.
내게는
샤갈이 그린 그림 중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아르헨티나 추기경 시절 가장 좋아하는 그림으로 샤갈의 <하얀 십자가>를 꼽은 바 있습니다. 2016년 피렌체 방문하실 때 직접 보고 가신 걸로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지요. 개인적으로 흰색이 주는 느낌도 한 몫했다고 생각합니다. 흰색은 물질성의 완전한 소멸을 나타내지만 동시에 물질에 생명을 부여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흰색은 영적인 치유를 하는 색이기도 하지요. 교황님께서 생각하시기에  흰색의 빛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의 모습이 재난 속에서도 구원을 희망하는 상징처럼 보였나 봅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빛이 땅 끝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불길 속에 사다리 하나가 무심한 듯  걸쳐져 있습니다. 화염에 싸여 잡고 올라가기도 힘들겠지만 말입니다. 





마크 샤갈은 러시아의 가난한 유대마을 비테프스크(현 벨라루스)에서 태어났습니다. 청어를 파는 생선가게 종업원이었던 아버지와 야채가게에서 일하시는 어머니 사이에서 

9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당시 유럽에서 2등 시민 취급받던 유대인으로 통행증이 없으면 출입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고 제대로 된 교육도 받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림이 너무 그리고 싶었던  샤갈은  친구에게 임시통행증을 얻어 2년 동안 초상화와 풍경화 공부를 합니다. 그곳에서 '레옹 박스트'라는 성공한 유대인 롤모델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장식예술 디자이너이자  발레 무대배경과 의상 디자이너로 유명한 유대인이었습니다. 샤갈의 그림을 본 그는 마치 색채가 춤을 추는 것 같다고 표현할 정도로 색에 대한 감각이 뛰어난 화가였습니다. 




마티스 이후
 진정 색채가 무엇인지
이해한 화가는
 샤갈뿐이다.
- 파블로 피카소-





색채의 마술사라는 별칭을 지닌 샤갈이 <하얀 십자가> 작품에서 최대한 색을 절제하며 쓰고 있습니다. 샤갈이 주로 작품에 쓰고 있는 빨간색은 고향 러시아에 대한 향수를 나타내거나 유대인에 대한 형제애를 표현할 때 주로 사용한다고 합니다. 파란색은 자유의 상징으로 노란색과 초록색은 기쁨과 평화의 상징으로 쓰고 있습니다. 샤갈이 프랑스 시민권을 획득했을 때 그 해에 제작된 작품들은 유난히 빨간색, 파란색, 흰색이 많았다고 전해집니다.





<하얀 십자가>는 샤갈 자신이 고향 땅 비테프스크에서 겪은 볼셰비키 혁명과 나치의 '수정같이 빛나는 밤의 공격사건' 두 가지를 십자가를 중심으로 왼쪽과 오른쪽 한 화면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정 중앙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흔히 보는 가시관 대신 두건을 두르고 있습니다. 하의 부분은 유대인들이 기도할 때 두르는 흰색과 검은색 줄무의 모양의 숄로 가리어져 있고요. 누가 봐도 유대인 표식을 금방 알아볼 수 있도록 말이지요. 머리위쪽으로 성인들에게 나타나는 둥근 광채가 보이고 발치아래 촛대가 있고 희미하게나마 불꽃이 살아있습니다. 희망을 보고자 함일까요? 나치의 참혹한 박해 속에서 

 화해의 날이 올 것이라 굳게 믿고 싶었던 간절한 샤갈의 믿음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왼쪽그림의  붉은 깃발이 나부끼고 한 떼의 무리가 손에 망치나 칼을 들고 달려오고 있습니다. 적군인지 아군인지 알 수도 없습니다.  불타고 있는 집, 이미 죽은 듯한 사람, 죽은 이들 곁에 애도하는 가족들, 무방비로 나와있는 의자와 염소(샤갈의 단골 소재), 가까스로 탈출해 배를 탔지만 노가 하나밖에 없습니다. 어찌 저어가란 말인지. 내릴 수도 갈 수도 없는 상황에 그저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린 채 살려달라 기도밖에 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급하게 도망을 쳤는지 중요한 두루마리 율법책은 챙겼는데 신발 한 짝이 보이지 않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전쟁이 장기화되자 러시아군 사이에 전쟁에 대한 반발심과 피로감이 누적되어 갑니다. 19세기말부터 20세기초를 거치며  러시아 차르체제에 대한 불만도 점점 높아지고요. 전시상황이라 철도 시스템이 붕괴되며 수도권으로 식량이 제대로 공급되지 못합니다. 유난히 추운 겨울을 보내야 했던 그들의 시간은 혁명으로 이어집니다.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이 성공을 한 셈이지요.




 더 이상 인간에 대한 착취가 없을 거라 했습니다. 오랜 세월 무시당해 왔던 유대인들도 소수라고 차별받지 않을 거라 믿었습니다. 당시 샤갈은 자신의 고향 비테프스크 마을의 교장을 하며 그들에게 적극 협조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세상은 결코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샤갈의 그림 속 하늘 위에 떠 있는 사람과 레닌이 무슨 관련이 있느냐며 이해해 주지 않았습니다. 자율성 확보는커녕 오히려 정치 선전 도구로 그림이 이용되기 일쑤였습니다. <혁명, 1937>이란 작품은 샤갈이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나 파리로 와서 당시 경험했던 러시아 혁명을 생생하게 화폭에 담아낸 그림입니다. 그의 그림 속에 이데올로기로 인한 이념과 현실사이의 혼란이 담겨 있습니다.





 십자가 오른쪽 그림은  히틀러로 시작된 유대인 인종청소의 한 장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른쪽에 붉은 모자를 쓴 나치당원들이 유대인 회당을 부수며 불태우고 있습니다. 지붕 위에 벌써 다른 나라의 국기가 화염 속에 펄럭이고 있고요. 밖으로 팽개쳐진  촛대, 성물들, 그 아래에 자루를 들고 탈출하는 초록색 남자,  바닥에는 유대교의 경전인 두루마리 모양의 토라(Torah, 모세오경)가 내동댕이쳐져 불타고 있습니다. 이 상황이 두려운 엄마는 그저 아이를 껴안고  떨고 있고요. 





십자가 위의 하늘나라에서는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보이는 이들이 사람 목숨이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이 참상에 어찌할 바 모릅니다. 그들 역시 한 인간의 광기와 탐욕이 얼마나 무서운 지 정나미가 뚝 떨어졌을지도 모르지요. 불완전하고 영악한 인간을 '사랑'이란 울타리 하나로 묶기에 인간의 감정은  구멍도 많고 허술해 보입니다. 샤갈의 이 작품 덕분에 유대인들에 대한 편견이 많이 수그러진 것도 사실입니다. 고향 마을의 러시아 혁명을 피해 파리에서 그림 작업을 하던 샤갈 역시 당시 예술가들처럼 나치 당원들로부터 '퇴폐 예술'취급당합니다. 그의 작품이  홀대받고 불태워지자 위기감을 느낀 샤갈은 1941년 가족과 함께 미국 뉴욕으로 망명길에 오르게 됩니다.






샤갈에게도 그의 색채만큼 화사하고 행복했 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창문 너머 파리의 모습>, 1913




러시아 출신 유대인 변호사 막심 리버의 후원으로 23살 때 프랑스 파리로 미술 공부를 하러 떠납니다. 후원자의 도움으로 동경해 오던 예술의 도시 프랑스 파리로 드디어 건너왔습니다. 하지만 언어가 수월하지 않으니 답답하고, 자고 나면 낯선 이국의 자연환경이 소중한 것들을 두고 온 것만 같아 일이 쉬이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어쩌다 내가 이곳에 와 이 고생인가?' 싶기도 하고요. 낯선 곳의 이민자로 유학생으로 생활하신 분들은 충분히 공감하실 겁니다. 밤이 되면 두고 온 고향이 그립고 가족이 보고 싶습니다. 사람들 마다 풀어 가는 방식이 다 다를 테지만 샤갈은 꿈속으로 그들을 만나러 갑니다. 꿈을 꿀 때 그리운 고향의 풍경과 가족들의 잔상이 사라지기 전에 그림으로 얼른 옮기는 방법을 생각해 냅니다. 머릿속 생각이 손가락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메모를 하듯이 말입니다. 




저는
오직
 제  경험과 추억만을
그림에 담아냈습니다.




샤갈의 작품 대부분은 그가 어떤 감정, 어떤 추억을 기억에 담아 내려했을지 그의 입장에서 감상하면 오히려 쉬울 겁니다. 당시 샤갈이 유학하던 파리는 피카소로 대변되는 큐비즘과 야수파의 마티스 이렇게 두 거장이 중심을 이루던 시절이었습니다. 슬쩍 자신의 이름도 그들 곁에 나란히 불리길 샤갈은 희망했지만 사람들은 두 화가만 입에 올리던 시절이었지요. 



 입체파( 큐비즘, Cubism): 20세기 초에 일어난 가장 중요한 예술 운동, 사람과 사물의 모양을 기하학 형태(네모, 세모, 동그라미 등)로 단순화, 원근법 거부, 기원은 폴 세잔의 후기작품에서 찾음



야수파(fauvism, 포비즘): 강한 붓질과 과감한 원색처리. 대상에 대한 고도의 간략화와 추상화. 눈에서 보이는 색채가 아닌 마음에 느껴지는 색채를 밝고 거침없이 표현함. 





샤갈은  두 사조의 영향을 분명히 받았지만 자신만의 스타일로 소화해 냅니다. 실제로 샤갈은 어느 유파에도 속한 적이 없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파리파(Ecole de Paris) 정도로 기억하시면 좋을 듯합니다.


파리파:1883~1900년 사이에 출생한 유대계 외국인들로 제1차 세계대전 후 조국을 떠나 파리로 이주하여 몽마르트르와 몽파르나스에 거주하면서 활동하였던 파리에 모여 예술활동을 하던 외국인 예술가집단. 파리화파는 양차대전사이에 자유로운 창작활동이 가능한 파리에서 실행되었던 모든 종류의 미술-형식에 대해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초현실주의부터 추상, 창조 그룹의 철저한 형식주의에 이르기까지-를 포괄하는 개념.


언뜻 보면 아이들 그림 동화 속 삽화인가 싶을 정도로 보는 이들은 초현실주의 느낌으로 받아들이기 쉽습니다. 동물이 나오고 , 여인이 두둥실 떠다니기도 하고, 바이올린이 염소와 함께 그려지기도 하지요. 샤갈 자신은 초현실주의 작가로 불리는 것을  극도로 싫어했다고 합니다. 전문가들은 샤갈이 파리에 머물던 5년 동안 이미 자신의 스타일을 충분히 완성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나머지는 80년 동안 무한 반복해서 그렸다는 말이지요. 




<생일(The Birthday)>, 1915> , 뉴욕 현대미술관  #< 산책>, 1918, 국립 러시아 미술관
<도시 위에서>, 1914-1918




위 세 작품은 샤갈의 영원한 뮤즈 첫 번째 아내 벨라 로젠펠트(Bella Rosenfeld:1895-1944)입니다. 그녀는 러시아 출신 유태인 보석 도매업을 해서 부를 축적한 부모 덕분에 유복하게 자랐습니다. 샤갈과는 8살 나이 차이가 있고요. 첫 만남은 14살 (샤갈 22세)로 작가 지망생이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침묵은 내 것이었고,
그녀의 눈동자도 내 것이었다.
 부모님, 내 미래를
모두 알고 있는 것 같았고,
 나를  관통해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제삼자가 읽으면 닭살 돋는 내용입니다. 한마디로 첫눈에 반했다는 말일테지요. 샤갈이 파리에서 유학할 당시 그녀가 보고 싶어 상사병이 날 정도였다 합니다. 벨라 부모님의 심한 반대에 부딪힙니다. 샤갈이 유명세를 타고 몸값이 올라갔어도 한참 동안 힘들었을 정도로 오랜 설득의 시간이 필요했다고 하네요. 잘 기른 엘리트 딸아이를 가난뱅이 유대인 화가에게 선뜻 내 줄 부모는 없을 테니까요.




<생일> 작품은  사랑하는 여인 벨라가 꽃을 들고 샤갈의 작업실을 찾아옵니다. 자신의 생일도 잊은 채 그림을 그리는 샤갈의 모습을 나무라며 들고 온 꽃을 전해줍니다. 꽃을 들고 축하해 주러 온 벨라가 샤갈 눈에 얼마나 사랑스러웠겠어요. "잠깐만"을 외치며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그린 그림이라고 합니다. 당시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작업실 위를 둥둥 떠다니는 샤갈의 마음이 이해들 가시죠. 공중부양도 불사하고 현실에서 불가능한 초능력자 입맞춤이 가능했을 정도로 기뻤다는 뜻으로 받아주시면 좋겠네요. 





 사랑하는 벨라와 드디어 결혼도 하고 예쁜 딸 '이다'도 낳았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개인적으로 가장 행복했을 때 외부 상황은 전쟁과 혁명으로 지각변동이 일고 있었습니다. 고향 마을을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했고, 가족과 함께 온 파리에서 샤갈 생애 가장 행복한 기간을 보내지만 히틀러의 등장으로 미국 망명길에 오릅니다. 1941년 잠깐 피하러 왔다 생각했 던 뉴욕에서 원인 모를 바이러스로 아내 벨라가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전쟁 중이라 제대로 된 약을 구하기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아내를 잃고 벽에 걸린 벨라의 그림을 모두 벽으로 돌려놓아 버릴 정도로 폐인에 가까운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샤갈 그림 대부분이 러시아 고향 마을, 아내 벨라, 그리고 성서 내용들이었으니 그 상심이 얼마나 컷을 지 공감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보다 못한 딸 '이다'의 위로와 제안으로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잔뜩 담아서 말입니다. 





<신부>,1950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염소가 없다면,
 행복은 행복이 아니다.







유랑의 운명과 역사를 가진 유대인들에게 바이올린은 '생존의 은유'이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담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의 파티나 종교의식에서 바이올린이 빠지지 않습니다. 오랜 세월 간직했던 자신들의 정서를 때로는 유쾌하게 때로는 구슬프고 처연하게 표현합니다. 유독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중 유대계가 많은 이유도 이 때문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유랑 중 정착하는 곳이 그들에게 '고향'이었고, 그 고향도 언제 다시 쫓겨나 정처 없이 유랑의 길에 접어들지 모를 만큼 불안정하게 살아갑니다. 그래도 일단 정착하면 그곳이 자기들의 영구적인 삶의 터전이 되길 희망하면서 말입니다. 불안정하고 냉혹한 생활 속에서도 유대전통을 지키고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들만의 독자적인 생활양식(종교, 문화, 교육)을 철저히 지키면서 말입니다. 지금도 그들의 일부 중요 명절에 미국 연방정부가 공휴일로 지정해 쉬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한 죄인들이라는 원죄가  콘스탄티누스 로마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전유럽에 퍼지기 시작합니다. 수세기에 걸쳐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그들은 어느 기독교 사회에도 정착이 어려웠습니다. 오랜 박해와 추방으로 인해 '농업'과 같은 정착을 통한 삶보다 언제라도 쉽사리 도피할 수 있는 금융, 정보, 지식분야에 올인하며 살아왔지요. 위급할 때 몸에 지니고 도망을 가려면 머리에 넣고 갈 수 있는 전문지식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중세유럽의 기독교 사회에서 노동과 생산을 통해 건강하게 돈을 벌지 않고  남이 번 돈을 갖고 이리저리 이자를 굴리며 돈놀이로 사는 그들을 더러운 일 하는 사람으로 취급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 이 그 대표적인 작품이지요. 시간이 흘러 세계경제가 물건생산을 통해 돈을 버는 사회와 돈 놓고 돈 먹는 사회로 바뀌면서 돈을 다룰 줄 아는 유대인들이 빛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 ' 미국 유대인들이 돈과 언론으로 세계를 지배한다.'는 불편한 진실도 있지만 말입니다.




<서커스>, 1964
<여 곡마사>, 1931




샤갈은  서커스를 좋아했고, 계속해서 서커스를 소재로 한 작품을 그렸다. 샤갈은 민중적인 내용을 도입함으로써 미술의 방식이 더 풍부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민중적인 내용을 발견한 곳이 바로 서커스였다. 그는 후에 어릿광대들과 곡예사들에 대해 감탄하면서 서커스의 곡예사들과 위대한 예술가들의 유사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20세기의 많은 예술가들처럼 샤갈은 익살스러운 인물들이나 어릿광대들처럼 무엇보다 사람들의 마음을 끌고 매혹시키는 일을 샤갈 자신이 직업으로 삼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당시 예술가에 대한 샤갈의 이런 생각은 화가, 곡예사, 악사가 대중의 마음을 끌고 즐겁게 하며 감동을 주기 위해 일한다는 소박한 믿음에 기반을 두고 있다. 샤갈에게 있어  예술은 행복을 부르는 가장 간단한 방법이었던 셈이다.





<메츠 대성당 스테인드글라스>, 1958-1968




샤갈의 작품은 그저 그때그때 자신이 화가로서 활동한 내용을 다루기도 하고, 자신의 감정들 , 여행했던 경험들, 독서한 내용을 다루고 있는 식이다. 그의 작품은 선적인 방식으로 진행하지 않는다. 한 지점에서 다음 지점으로 옮겨가고, 도착지가 출발점에서 아주 멀어지는 그런 방식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의 작품은 순환적으로 펼쳐진다. 같은 인물들, 같은 풍경들, 같은 모티브들이 겨속해서 왕복한다. 그리고 그의 작품이 도달하는 곳은 항상 최초의 출발점이었던 바로 그곳이다. 단지 그들이 다루어진 양식상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문화와  예술의 중심지로 이주한 동유럽 변방의 유태인 남성이 자신의 고향의 흔적은 간직한 채 새로운 미술을 흡수하고 변형하여 탄생시킨 독특하고 아름다운 예술이야말로 샤갈이 남긴 진정한 힘 아닐까 싶다. 



그림출처: 위키피디아. 위키아트, 구글아트 앤 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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