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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겨자씨의 비약

점묘화법(조르주 쇠라, 폴 시냐크, 테오 반 리세베르그)

"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

 (루카 13장 18-19절)


 

겨자씨는  눈에 띄기 어려울 정도로 작은 것입니다. 세상 셈법은 보이는 큰 것을 희망하고 거기서 결실을 이루리라고 기대합니다. 다른 인기 없는 셈법은 현실의 아주 작은 것이라도 가볍게 보지 말고, 오늘 내게 주어진 별 것 아닌 하루도 무심히 지나치지 말라는 말씀이기도 하지요. 




오늘 하루는 나의 전체 삶에서 점 하나에 불과할 지도 모릅니다. 무수히 면적을 넓히며 찍은 점 하나가 선이 되고 그 끝에 화살표를 붙이면 방향성을 갖게 되지요. 아무리 위대하고 똑똑한 사람도 그 하루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지루할 정도로  같은 일을 무한 반복하며 삽니다.  오늘 잘 지낸 하루가 잘 지낸 삶으로 이어지듯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제 삶의 터닝포인트가 되어 준 분이 계십니다. 첫 만남은 '산 같은 사람이네!'였어요. 만남의 횟수가 잦아질수록 그분 옆에 서면 제자신이 초라해지는 것은 기본이고 부끄럽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습니다. 옆에 나란히 서면 비슷한데 왜 이렇게 사람이 산처럼 커 보이는 것일까 싶었습니다. 결코 큰 키가 아니셨거든요. 




제 딴에 좋은 인상을 남기고 싶어 짬짬이 부족한 구멍을 메꿔가기 시작했습니다. 옆에서 누군가 쿡 찌르며 "너 그것도 몰라?"하고 지적할 까봐 엄청 쫄기도 했습니다. 모르는 내용을 묻기라도 하면 머릿속이 하얗게 되고  변명거리조차 떠오르지 않아 '얼음땡' 한 적도 있습니다. 차라리 초보자였다면 시간이 덜 걸릴 수도 있었을 텐데. 어설프게 적당히 알고 있는 내용들이 오히려 방해가 되었습니다. 




기존의 얼기설기 짜 놓은 틀을 촘촘히 집어넣어야 했고 잘못 알고 있는 내용들은 빗자루로 싹 쓸어 내다 버려야 했거든요. 몸에 붙은 관성이 51;49 정도로 자꾸 싸우기 일쑤고요. 동심원이 좀 넓어질 만하면 무심코 던져진 돌에 '어, 이거 그만하라는 신호야!' 하며 자기 합리화도 해었고요. 좋은 습관 들이기가 얼마나 힘이 들던지요. 5년이 지날즈음 제 어깨 높이 정도로 내려와 있는 상대를 확인했을 때 허파에서 휘파람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답니다. 그분은 더 좋은 자리로 옮겨 가셨고, 저는  제가 경험한 겨자씨 같은 하루의 결론이 우아하게 끝을 낼 수 있어 감사한 시간이었답니다.





미술사에도 점을 찍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 화가들이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창작자들은 처음에 모방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지만 결국 그 모방을 넘어서 자신 만의 필살기로 승부를 내야 하는 일이 그들의 숙명임을  잘 압니다.



19세기 중반 파리 사회는 기술문명과 교통수단이 혁명적으로 바뀌어 한 나절 여행이 가능해졌습니다. 튜브물감의 발명으로 빛을 찾아 화가들은 야외에서 하루 종일 거친 붓터치로 '순간포착'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었고요.



모네, 르누아르, 피사로, 시슬레 같은 인물이 그들입니다. 이것이 인상주의의 시작점이 되고요. 쇠라가 활동하던 시절 광학이론이나 색채론 같은 과학적 연구가 활발해지기 시작합니다. 인상주의를 계승하면서도 과학적 이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색채분할'이라는 개념을 만들고 방법론으로 찾은 실행기법이 점찍는 기법인 셈이지요. 일명 점묘법입니다. 말 그대로 점을 하나하나씩 찍어 그림을 완성했다는 얘기입니다. 당연히 시간도 오래 걸렸고요. 그것도 3m*2m짜리 대작을 무려 2년 걸쳐 완성합니다. 이것을 열심히 실행한 쇠라나 폴 시냑 같은 화가를 신인상주의라 합니다. 기존의 인상주의를 계승하면서 부족함을 느낀 부분을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로 풀어낸 화가들입니다.





 프랑스의 쇠라(Pierre Seurat 1851-1891), 시냐크(Paul Signac 1863-1935)는 이 점묘화법의 좋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후에 네덜란드 출신 테오 반 리세베르그(Theo van Rysselverghe1862-1926)도 이 화풍에 합세합니다. 점들이 모여서 하나의 면을 이루고 그것이 원근과 공간을 표현해 주는 것이지요. 하나의 점들을 중요시하고 이것을 더 확대해서 화폭에 자신의 그림을 아름답게 완성하는 것입니다.


 

조르주 쇠라(George Seurat), [A Sunday Af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e Jatte],1866




잘록한 허리만큼이나 엉덩이가 뽈록한 옷차림이 우스꽝스러워 보입니다. 나름 당시 최신 유행하는 옷차림일 테니까요. 아름다움을 향한 여인들의 노력은 무죄이나 어쩐지 허세 잔뜩 부린 수꿩 혹은 수컷 공작새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네요. 



그림 속 휴일을 즐기러 온 파리지앵들은 다들 정장차림을 하고 있습니다. 한강 공원에 정장차림으로 휴일을 즐기러 온 사람들도 있을 테니 지금보다 더 보수적이었던 프랑스 사회를 그림을 통해 엿보게 됩니다. 커다란 그림 안에 저렇게 많은 사람들이 표정도 읽히지 않고 움직임도 느낄 수 없어  답답해집니다. 어딘지 모르게 디지털 세계 아바타 느낌이 들기도 하고요. 강에 배 띄워 자연과 일치되는 경험을 그들 또한 즐겼다는 생각에 동질감도 듭니다. 




이 그림의 작가 조르주 쇠라(George Seurat)는 집안 대대로 부유한 상인집안에 아버지는 법률 관련 고위 공무원이었고, 어머니도 꽤 부유한 집안 태생이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전혀 부족함이 없이 자랐습니다. 19살 때 국립미술학교 에콜 드 보자르에 입학하고 징병으로 학업을 잠시 중단합니다. 



보불전쟁 (1871): 통일 독일을 이룩하려는 프로이센과 이를 저지하려는 프랑스 제2제국 간에 벌어진 전쟁



 전쟁으로 인상파 화가들의 운명도 많이 갈리게 됩니다. 프레데리크 바지유처럼 젊은 나이에 사망을 하거나, 알프레드 시슬레처럼 가지고 있던 재산이 전쟁 중에 소멸되어 가난한 화가로 전락하거나, 모네처럼 피난 간 영국에서 영감을 주는 작가를 만나 그림이 더 풍성해지기도 합니다.





햇살 알갱이들이 무수히 부서져 내리는 센 강변의 공원입니다. 얼추 40여 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고요. 점묘주의의 출현을 알린 대표작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입니다. 한 땀 한 땀 손바느질 하는 느낌으로 점을 찍다 보니 어딘지 모르게 인물들이 뻣뻣하고 생동감이 없습니다. 쇠라는 2년 동안 이 그림에 몰두합니다. 유채물감으로도 그려보고, 스케치, 드로잉으로 다시 시도하면서 무려 70점 이상의 예비 작업을 거쳐 완성한 작품입니다. 거대한 캠퍼스에 점을 하나하나 찍어가며 그려야 했으니 2년이란 시간이 어찌 보면 당연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시력은 또 얼마나 나빠졌을까 싶고요. 이런 걸 보면 쇠라는  화가라기보다 과학자나  수도자 느낌이 더 드는 화가입니다. 




 1884년, 8번 째이며 마지막으로 열렸던 인상파 전시회입니다. 피사로의 소개로 전시를 하게 된 쇠라는 그날 열린 인상파 전시회 중  가장 눈에 띄는 작품이었다고 합니다. 그해 말 쇠라의  그림이 독립파 앵데팡당(Independent)에 걸렸을 때, 비평가 펠릭스 페네옹(Felix Feneon)이 '네오 임프레셔니즘(Neo-Impressionism)이야!'라고 흥분해, 처음으로 '신 인상파 주의 '이름이 명명되기도 합니다. 비록 이 전시회를 끝으로 해산이 되어버리는 문제의 그림이 되긴 했지만 말이죠. 




당시 인상파 사이에 두 주류가 있었다고 합니다. 클로드 모네, 르느아르처럼 철저히 야외의 순간적인 빛을 그려야 한다는 외광파가 있었고, 반대편에 사실적인 화풍으로 극단적인 구도를 추구하는 에드가 드가파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당시 쇠라의 그림에 외광파 모네는 반대를 했고, 드가는 찬성을 하며 카미유 피사로 같은 중재자의 부재로 결국 해산하고 맙니다. "어떻게 해야 빛을 잘 표현할 수 있지?"에 대한 접근법이 서로 달랐던 거지요.




찰나와 과감한 붓터치의 그림을 선호한 외광파에게 아틀리에에 처박혀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정적이고 고요한 쇠라의 작품이 이상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쇠라의 점묘법은 색을 팔레트에 섞어서 바르던 기존 유화방식을 거부하고 원색의 점들을 병치시켜 그린 그림입니다. 멀리서 보면 보라색으로 보이는 정체는 파란색과 빨간색이 인접해서 보라색처럼 보이게 하는는 착시효과 때문이지요.




19세기, 과학의 발달로 인간이 어떻게 빛과 색을 인지하는지 분석하기 시작합니다. 광학적으로 색을 분석하는 이론도 등장하고요. 쇠라 역시 그 당시 광학적 색채 이론에 깊은 영향을 받았고 이를 통해 점묘 분할법을 시도한 거지요. 마치 3D이미지를 보는 듯 매우 질서 정연하고 입체적이지만 그로 인해 더 가상현실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당시 전시회에 나온 이 그림을 보고 이집트 고대 그림과 비슷하다며 조롱당했다고 하는 걸 보면 말입니다. 오히려 디지털 세상인 지금 더 어울리는 느낌이 드는 것은 혼자만의 착각일까요?




그림 속 무대가 된 장소는 파리 센 강 북서부에 위치한 유원지로 도시인들이 콧바람 쐬러 가는 피크닉 장소입니다. 한강변 나들이라고나 할까요. 19세기 파리의 부르주아들이 근교로 소풍을 나와 주말에 여가를 즐기는 모습은 근대화 이후 새롭게 등장한 풍경이었다고 합니다. 그랑자트 섬이 부루즈아 계통이 즐겨 찾는 섬이었다면 강 건너편에는 노동자 계층이 즐기는 아스니엘 유원지가 쇠라의 작품 속에 등장합니다. 관심 있으시면 찾아보시고 두 그림의 분위기를 비교해 보는 방법도 좋을 것 같습니다.




쇠라의 그림 속 그랑자트섬에는 브르주아 계층뿐만 아니라 노동자, 군인,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다양한 인물들이 한데 모여있습니다. 쇠라는 근대화 이후 다양한 계층이 모호하게 뒤섞여버린 새로운 시대의 풍경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아무 관심 없다는 듯 강 건너편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정 가운데 흰 드레스를 입은 꼬맹이만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지요.



쇠라는 공간을 근경, 중경, 원경으로 분할하고 화면을 정확히 수평과 수직 대각선 구도로 분할해서 철저하게 계산된 위치에 수학적 질서를 가지고 인물을 배치해 놓았습니다. 감각적이기보다는 분석적이고 즉흥적이기보다는 논리적인 방식으로 완성된 쇠라의 작품은 이런 이유로 신인상주의로 분리되기 시작합니다.




 쇠라의  작품 속 인물 군상을 소개해 볼까 합니다. 아는 만큼 읽히고 보일 테니까요. 작품의 오른쪽을 보시면  옷을 잘 차려입은  남녀가 강 건너를 무심히 바라보고 있는 장면이 보입니다. 여자의 손에는 가죽끈이 들려있고요. 그 끝에 원숭이 한 마리가 묶여있습니다. 당시 원숭이는 방탕함을 암시했다고 합니다. 추측하건대 , 가장 돋보이는 위치의 그와 그녀는 사실 도시의 이목을 피해 그랑자트섬으로 밀회를 즐기러 나온 커플인 셈이지요. 사람 사는 곳이라 시대만 다를 뿐이지 인간의 원초적 욕구는 어쩔 수 없나 봅니다.  




당시 이 섬이 성을 파는 직업여성들의 활동 장소였다고 합니다. 그림 속에 등장하는  두 명의 경찰관이 이들의 문란한 행위를 순찰하고 있는 중이고요. 이런 배경지식을 먼저  알고 그림을 다시 보면 새롭게 다가오는 것들이 있을 겁니다. 그림 속 이 섬이  도시인들의 은밀한 욕망을 상징하는 곳으로 말이죠.  사람의 얼굴은 누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없게 뭉특한 가면처럼 그려진 이유를 알 듯도 하고요. 이들은 그저 옷차림 만으로 직업과 신분을 파악할 수 없는 익명의 존재들입니다. 무표정한 얼굴 뒤에 숨겨진 도시인의 욕망이 느껴지실까요? 



가까이 다가가면 작은 점으로 산산이 부서지는 이 작품 속에서 도시의 작은 부속품처럼 살아가는 현대인의 고독한 마음까지 엿볼 수 있을 겁니다. 이 작품으로 무명화가였던 쇠라는 일약 스타가 되었습니다. 같은 시기 작품을 내었 던 고갱은 쇠라에게 온통 관심이 끌리자  미련 없이 타히티로 떠나버립니다. 그러나 그의 행운은 여기까지였습니다. 화가로서 본격적인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던 31살의 나이에 병으로 갑작스럽게 사망하거든요.




쇠라의 점묘법은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들>, 피카소의 큐비즘, 브라크, 마티스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20세기 회화의 시작점에 점하나 찍고 홀연히 떠나가 버린 점묘법의 화가 쇠라! 그가 이른 나이에 갑작스럽게 사망하자 그의 어머니가 이 그림을 프랑스 정부에 기증하려 했으나 거절당하고 현재 미국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드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우물가의 연인 1892, 오르세미술관], 폴 시냐크(Paul Signac)




폴시냐크(Paul Victor Jules Sugnac 1863-1935)는 모네의 영향을 받아 인상파 화가로 출발합니다. 그러다 쇠라와 함께 점으로 그리는 '점묘법'을 사용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지요. 젊은 나이에 요절한 쇠라를 대신해 신인상주의의 리더가 되기도 합니다. 파리태생이고 건축에도 관심이 있었던 그는  18살 때 모네의 작품을 보고 화가로서의 길로 들어섭니다.  '앙데팡당전'을 창립한 멤버이기도 하고요. 




앙데팡당(independant): 심사가 매우 엄격하던  살롱 전에 대항하여 낙선자들과 아카데미즘에   반대하던 화가들이 1884년에 조직하여 제1회 전시를 개최한 이후 지속되고 있는, 시상식도 없고 심사도 없이 소정의 참가비만 내면 일정한 수의 작품을 제출하고 대중에게 보일 수 있도록 한 전시회이다.




그는 쇠라의 조직적인 작업 방식과 색에 대한 이론에 충격을 받아 쇠라의 열렬한 지지자이자 친구가 됩니다. 신인상주의와 분할주의 방법을 묘사함으로써 쇠라의 든든한 후계자가 된 거지요. 쇠라의 영향으로 인상주의의 짧은 붓터치를 포기하고, 원색의 작은 점을 과학적으로 이웃하게 캔버스 위에서가 아니라 관람자의 눈에서 색이 섞이도록 열심히 점을 찍습니다. 특히 색조의 순도는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보는 이의 망막에서 중간색이 형성되므로 더욱 강렬하고 밝은 색채 효과를 거두게 됩니다. 




이렇게 절친이었던 쇠라가 갑작스레 죽게 되자, 그 영향은 그의 그림에도 고스란히 묻어납니다. 폴시냑이 이듬해 그려낸 < 우물가의 여인들>이란 작품입니다.  전문가들은 시냐크의 이 작품이 쇠라의 유작이 된 <서커스> 작품의 영향을 은연중 많이 받았다고 평가합니다.  제9회 앙데 팡당 전시회에 출품됐던 작품으로 지중해의 작은 항구 마을 생 트로페를 배경으로 한 점묘법 그림입니다. 




황금 언덕, 푸른 바다, 두 명의 여인, 그리고 이미 물을 길어 언덕길을  오르는 여인 등 이야깃거리가 풍성해 보입니다. S자 모양의 황금 언덕을 기준으로 움직임이 없어 보이는 푸른 바다를 쇠라의 유작인 <서커스> 작품과 비교해 관객들이 앉아있는 정적인 공간과 같은 느낌으로 표현하고자 했다고 합니다. 반대편 여인들이 움직이고 있는 동적인 공간을 <서커스> 작품에서 서커스 단원들이 말위나 채찍을 휘두르는 동적인 구조와 정확히 일치하듯 그려졌다는 평가입니다.(제목 부분 그림 참조)




 시냐크는 산업화로 인해 부의 양극화와 신흥 자본주의가 사회의 조화를 파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19세기 후반 많은 예술가들이 그러하듯 그 역시 프랑스 무정부주의 사상에서 사회체제의 변화 방향성을 찾으려 한 적도 있었습니다. 세일링을 좋아해 

특히 물이 있는 그림을 많이 남겼습니다. 생트로페에 주로 머물며 지중해 연안을 돌아다녔고, 물과 돛단배는 자연스럽게 그의 주요 소재가 되었습니다. 강렬한 색조는 더할 나위 없이 화면 전체에 풍부한 색채감으로 새로운 풍경을 만들어 냅니다.




그의 이런 노력들이  신 인상주의가 야수파의 시작을 알리는 사조로서 한몫했다는 평가입니다. 또한 이 시기는 고흐를 만나 정기적으로 파리 외곽의 강과 카페 등을 그리기도 했고 고흐는 그런 시냐크의 기법에 감탄했다고 합니다. 시냐크가 없었다면 쇠라의 '점묘법'은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을지도 모릅니다. 끊임없는 실험정신과 '점묘법'을 알리기 위한 저술활동, 그리고 독립미술가 전'앙데팡당'을 기획해 젊은 작가에게 미술공간을 제공한 점 등은 우리가 꼭 기억해 줘야 할 부분인 것 같습니다. 그의 그런 노력 덕분에 인상주의로 시작했지만 개성 강한 화풍을 지닌 빈센트 반 고흐, 고갱 같은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이 나 올 수 있었으니까요. 마티스와 같은 야수파도 생겨날 수 있었던 것 배경이 되었고요.



 후기 인상주의: 탈인상주의(Post-impressionism)는 인상주의에서 시작했지만, 그 영향에서 벗어나 새로운 작품 세계를 확립하려고 한 예술 사조입니다.(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폴 세잔 등)


야수파(fauvism): 강한 붓질과 과감한 원색 처리, 그리고 대상에 대한 고도의 간략화와 추상화가 특징 입니                          다. 눈에 보이는 색채가 아닌 마음에 느껴지는 색채를 밝고 거침없이 표현합니다.
                       (앙리  마티스, 앙드레 드레인)                        




<과수원의 가족(Family in the Orchard)>, 1890, 테오 반 리세베르그(Theo Ban Rysselverghe)





 테오 반 리셀베르그(Theo Van Rysselberghe, 1862-1926)


1862년 벨기에 북동쪽에 위치한 작은 시골 마을 겐트에서 태어났습니다. 

겐트 아카데미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해 , 브뤼셀 아카데미 장-프랑수아 포타엘(Jean-Francois Portaels)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19세가 되던 1880년 초에 부뤼셀에서 열렸던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의 전시회를 보고 큰 감명을 받은 리셀베르그는 그들의 기법을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1883년 부뤼셀의 아방가르드 그룹'20인회(레뱅 Les-Vingt)'을 공동 창립해 활동하기 시작합니다. 1887년 폴 시냑이 '20인회'가 주최한 부뤼셀 전시회에 쇠라와 함께 참가했다가 1890년 외국 화가로는 최초로 이 그룹의 정식 회원이 됩니다.




리셀베르그는 1886년 파리를 여행하다 조르주 쇠라(Georges Seurat)를 만나 그의 대표 작품인 '그랑드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Sunday Afternoon on the island of La Grande Jatte)'를 보고 크게 감명을 받고 점묘법에 심취하게 됩니다. 그는 파리에서 신인상주의 화가들과의 만남 이후 자신의 화풍에 자신만의 점묘법을 개발해 파리에 정착하며 이전의 사실주의 경향에서 신인상주의 화풍으로 방향을 선회합니다. 그런 그의 노력도 쇠라가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사망하자 점묘화법에서 점차 멀어지고 대신 장식 예술 분야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합니다. 



 이만하면 겨자씨 같은 하루를 살았던 점찍는 점묘법 화가들의 의미 있는 시간을 충분히 감상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뭐든 쌓이면 스토리가 됩니다. 주식도 장기투자자들을 이길 수 없듯이 겨자씨 같은 일상 꼬박꼬박 챙기다 보면 어느새 품 넓은 사람으로 성장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나무로 치면 큰 나무에 많은 새들이 깃들일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림출처: 위키피디아. 위키아트, 구글아트 앤 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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