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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놈놈놈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실레, 오스카 코코슈카


2016년 2월 29일 영화계 최고 권위의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화제를 모은 것은 다섯 번 도전 끝에 남우주연상 트로피를 받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였습니다. 그보다도 더 큰 화제를 모은 것은 바로 영화음악의 거장이자, 영화음악 그 자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엔니오 모리꼬네의 수상소식이었습니다. 87세의 거장이 오스카 트로피를 거머쥐는 날 관객들은 힘찬 기립박수를 쳐주며 경의를 표해 뭉클한 감동을 선사한 적이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세르조 레오네 감독의 영화 <석양의 무법자(원제목:The Good, The Bad and The Ugly)>라는 스파게티 서부극을 통해 그의 음악을 처음 접했습니다. 주말이나 명절 때 성우들이 더빙해 내보내 던 영화로 채널선택이  어른들에게 주어지던 그 틈바구니에서 별 감흥 없이 보았 던 총잡이 영화였지요. 왜 총을 들고 서로 싸워야 하는지 정확한 디테일은 당시 이해할 수 없었으나 거친 배경에 어울리지 않게 세련되고 섬세하고 웅장함까지 곁들인 영화음악 OST가 오랫동안 제 기억 저장고 밑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었습니다.



그러다 한국형 퓨전 서부극 <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석양의 무법자>와 비슷한 줄거리, <인디아나 존스>를 패러디한 것 같은 영화 중후반부의 사막 추격전 장면 등 돈 많이 썼겠구나 싶은 그런 영화였지요. 



1930년대 무법천지 만주를 배경으로 합니다.


 우월한 기럭지, 현상금 사냥꾼 박도원(정우성)

 과거의 콤플렉스가 있는 마적단 두목 박창이(이병헌), 

 모자라 보이지만 나름 순박한 열차털이범 윤태구(송강호)


모두가 정체불명의 지도 한 장을 놓고 펼치는 추격적이 관객들도 말 타고 달리는 듯한 시원스러운 영상을 선보인 영화이지요.  영화는 2008년 개봉 당시 668만 명의 관객을 불러 모으며 그 해 최다 관객동원을 기록했다고 합니다. 제29회 청룡영화상에서는 4개 부분을 석권하는 등 최고의 영화에 등극했고요. 서부극 본토인 미국 극장가에 상륙해 흥행몰이를 하며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힘을 유감없이 과시하기도 했습니다.



나쁜 놈인 박창이(이병헌)는 친일 반민족행위자 갑부에게서 지도를 찾아줄 것을 의뢰받고 제국 열차에 올라탑니다. 한편 독립군에게 의뢰를 받은 좋은 놈 박도원(정우성)도 같은 열차에 올라타게 됩니다. 그러나 엉뚱하게도 지도를 손에 넣은 놈은 그냥 열차털이범 이상한 놈(송강호) 윤태구입니다.



 태구(송강호)가 발견한 정체불명의 지도가 엄청난 자금의 보물이라는 것을 알고 독립군, 도적단 삼국파 그리고 일본군까지 가세하면서 지도를 차지하기 위해 대륙을 누비는 대추격전을 펼치게 됩니다. 박도원(정우성)이 총을 핸드스핀으로 돌려서 장전하는 장면이 후반부 추격전에 등장합니다.  대역이 아니라 본인이 실제로 양손을 놓고 말을 달리며 총을 돌려가며 장전했던 탓에 현장의 촬영팀이 다들 놀랬다는 후문입니다.  잘못하면 손가락이 완전히 꺾이거나 낙마 사고를 당하여 촬영을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지요. 일본군과 대치 상황에서 박도원(정우성)이 갑자기 말머리를 돌려 역주행하는 장면 또한 기억에 남습니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영화가 깊은 의미가 담긴 것이 아닌 오락 장르로써의 성격을 가져 부담 없이 볼 수 있었던 작품으로 기억합니다. 배우들과 스텝진들은 엄청 고생했을 테지만요.   주인공 3인방의 액션 스타일이나 캐릭터의 지향점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각 인물들의 차이점을 비교하는 재미도 쏠쏠했던 것 같습니다. 좋은 놈(정우성)의 등장 동기가 나쁜 놈(이병헌), 이상한 놈(송강호)에 비해 개연성이 부족한 느낌을 받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삼인 삼색의 다채로운 연기 스펙트럼을 한 영화에서 감상할 수 있어 좋았던 시간으로 기억합니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2008, 나무위키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나름 굵은 선 하나를 미술사에 남긴 3명의 화가가 있습니다. 태어난 순서로 나열하자면,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56세), 오스카 코코슈카(1886-1980,94세)그리고 에곤 실레(1890-1918, 28세) 순입니다. 무지개다리 건너간 순서로 구스타프 클림트가 1918, 2월 그리고 에곤 실레가 같은 해 10월에 스페인 독감으로 속세에서 잠시 스승이었으나 하늘나라 동기가 되었지요. 세 명 모두 각각의 특징을 나열하자면 지면이 모자랍니다. 굳이 '한 번 묶어보면 어떨까?' 하는 호기심이 발동해 쓰게 되었음을 작가님들께 먼저 밝힙니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영화처럼 동시대를 살 다간  세 화가들의 개성을 비교해 보는 것도 나쁠 것 같지 않아서 말입니다. 또 기억하기도 쉽지요. 화가들 네트워크 안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이야기도 흥미로울 테니까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미술은 미술가 개인의 창작물이기 앞서 미술가가 속해 있는 시대의 산물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독일의 표현주의 사조를 꺼내려면 프랑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까지 쭈욱 ~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나폴레옹 전쟁(1797-1815)'이란 이름으로 유럽을 휩쓸 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당시 하나의 통일된 독일이 아닌 신성로마제국이란 이름하에 묶여있던 독일은 나폴레옹과의 전투에서 패배해 절망감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습니다. 이로 인해 하나의 통일된 국가를 원하는 민족의식이 싹트게 되었고요. 



특히 독일의 문학, 미술, 그리고 음악 분야에서 낭만주의란 이름으로 가속도가 붙습니다. 이렇게 힘을 키운 독일이 1870년 드디어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독일 제국의 탄생을 선포하게 됩니다.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이 이 전쟁의 여파로 전후의 삶이 많이 바뀌었지요.



당시 독일은 영국이나 프랑스와 달리 해외 식민지사업에도 늦은 상태였습니다. 산업 혁명에도 말할 것 없이 뒤처졌지요. 그래서 독일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 재상아래 산업화와 군사력 강화만이 자신의 나라가 살 길이라고 생각했답니다. 당연히 이것을 모를 리 없는 다른 주변 유럽 국가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조성됩니다. 주변국가들과 긴장 관계가 형성되고, 이념적 갈등과 빈부의 격차는 일상 곳곳에 불안감이 짙게 스며들게 했지요. 이런 긴장의 중심인 독일 땅에서 일어난 것이 표현주의 미술입니다. 개별적으로 오스트리아 출신 오스카 코코 슈카(Oskar KoKoschka)와 에곤 실레(Egon Schiele)가 이 운동에 동참하지요. 




정치적으로 왕정이 무너지고 시민사회가 만들어집니다. 경제적으로 산업혁명으로 인해 생산과 소비, 노동과 자본의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고 있었고요. 대도시의 발달과 노동 환경의 변화는 수많은 사회적 문제를 야기시켰습니다. 예술측면에 주어진 과제들 또한 만만치 않았지요. 




당시 독일의 표현주의 미술가들은 급속한 변화와 정치적 갈등, 무력 충돌의 공포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고요. 게다가 프랑스에서 일어난 인상주의를 비롯해 큐비즘등과 같은 현대 미술의 여러 혁신적 실험들을 수용해야 했고요. 그것만으로 부족해 자기화해야 한다는 예술적 과제도 또한 함께 지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들의 무게감이 느껴지시지요.




출처: Metamorphosis story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
(Der Zeit ihre Kunst, Der Kunst ihre Freiheit)






오스트리아의 지정학적 위치가 보이시나요. 북쪽으로 독일, 체코 동쪽으로 헝가리, 남쪽으로 슬로베니아, 이탈리아, 서쪽으로 스위스와 접해있습니다. 당시 3명의 화가들이 살던 오스트리아는 다른 유럽 나라에 비해 더 보수적이었습니다. 미술도 아직 신고전주의 스타일이 유행할 정도로 말이죠. 


신고전주의(Neo-Classicism):로코코와 후기 바로크에 반발하고 고전 고대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함께 18세기말부터 19세기초에 걸쳐 프랑스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 나타난 예술 양식.  고대적인 모티브를 많이 사용하고 고고학적 정확성을 중시하며 합리주의적 미학에 바탕을 둔다.
<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 <마라의 죽음>, <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이에 클림트(Gustav Klimt)는 진보적인 예술가들과 함께 '빈 분리파(1897)'라는 단체를 결성합니다. 그리고 전통예술을 추구하는 오스트리아 미술계에 반항적으로 새로운 예술 활동을 전개해 나갑니다.  먼저 자유롭게 자신들의 예술품을 전시할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습니다. 미술, 건축, 음악 등 복합 예술 공간으로 말이죠. 그래서 만든 것이 '제체시온(Secession=빈분리파의 전시관)'입니다. 이 전시관 지하에 구스타프 클림트의 벽화, 베토벤 교향곡 9번 4악장을 주제로 한 <베토벤 프리즈(Beethoven Frieze)>가 있습니다. 



1. 행복의 열망(The Longong for Happiness), 왼쪽 벽면

2. 적대하는 힘(The Hostile Powers), 정면 

3. 온 세계에 보내는 입맞춤(The Kiss to The Whole World), 오른쪽 벽면



이렇게 세 부분으로 이야기가 구성되어 있습니다. 




당시 유럽에서 작곡가들이 후원자들의 눈치를 보기 일쑤인데 베토벤은 그렇지 않았지요. 베토벤 자신이  음악에서 추구하고 싶었던 이념, 철학, 예술성을 마음껏 실험했으니까요. 그런 독립적인 베토벤의 모습이 다른 예술가들에게 영웅처럼 보였나 봅니다. 구스타프 클림트역시 예외가 아니었고요. 그러한 베토벤의 창조성을 기리는 것이 클림트가 그려낸  <베토벤 프리즈>입니다. 추상적인 디자인, 디자인의 단순성, 그리고 응용미술의 극치를 나타냈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전시 개막식 때 관람객들은 구스타프 말러가 편곡하고 지휘하는 베토벤 교향곡 9번 <합창>중 4악장을 들으면서 관람했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해도 아주 멋진 콜라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신선합니다. 이런 파격적인 좋은 경험을 해 본 오스트리아 시민들이 처음에 놀랐겠지만 예술적 안목이 높아지지 않았을까요? 빈분리파는 관람객들이 예술을 총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왔던 거지요.  예술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빈  분리파(비엔나 분리파): '분리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동사 'secedo"를 어원으로 하는 이 명칭은 아카데미즘이나 관 주도의 전시회로부터의 분리를 의미한다. 과거의 전통에서 분리되어 자유로운 표현 활동을 목표로 했으며 그 목적은 미술과 삶의 상호 교류를 추구하고 인간의 내면을 미술을 통해 전달하고자 하는 데 있었다.  





클림트는 8년간 23회의 비엔나 분리파전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일본 미술전, 인상파 미술전 등 훌륭한 외국작품들을 소개하여 비엔나를 문화적 고립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려고 애를 썼지요. 오스트리아에 새로운 예술의 씨를 뿌리고 그것이 다시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갈 수 있도록 기여한 화가입니다.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는 금세공업자였던 아버지와 오페라 가수로 음악적 재능은 많았으나 꿈을 이루지 못했던 어머니 사이에서 7자녀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1873년 주식 시장 폭락으로 인해 나라 전체가 가난해진 상황이었습니다. 이민자였던  아버지는 가족을 데리고 집세가 더 싼 집을 구하기 위해 이곳저곳 이사를 다녀야만 했지요. 그러던 중 클림트의 가족 구성원에게 문제가 생깁니다. 여동생 애나(5살)가 사망하고 또 다른 여동생 클라라가 종교에 심취한 나머지 정신이 이상해집니다. 다행히 클림트와 두 형제 에른스트와 게오르크는  예술적 재능을 보이며 두각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미술과 음악적 재능을 가진 부모님의 유전자를 받았으니 클림트 역시 눈에 띄는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합니다





14살 때인 1876년 빈 응용미술학교에 입학한 후 장식 회화가로 교육을 받습니다. 전액 장학금을 받으며 다닐 정도로 예술가로서의 뛰어난 면모를 발휘합니다. 졸업을 하고 동생 에른스트 클림트, 동료인 프란츠 마치와 함께 공방을 세우고, 이후건축물 벽면의 회화 작품 등을 제작합니다. 전통적이고 사실적인 화풍으로 공예 운동과 상징주의 화가들의 작품에 큰 영향을 받습니다. 





그 기쁨도 잠시, 매우 사실적인 그림을 그리던 클림트가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 예술적 동지였던 동생의 죽음으로 3년간 작품 활동을 쉽니다. 마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처럼 클림트의 심경에도 많은 변화가 감지됩니다. 어둡고 부정적인 생활이 한동안 이어졌으니까요. 그러던 그의 그림이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1890년대 클림트는 복잡한 패턴, 금박, 에로틱한 이미지를 특징으로 하는 그의 시그니처 스타일을 개발하기 시작합니다. 지금 우리들이 익히 알고 있는 금빛 속의 신비롭고 에로틱한 여인들 모습으로 말이죠. 일상의 다양한 굿즈로 만들어져 우리 삶 가까이에 친밀도를 높인 화가이기도 합니다. 





클림트의 유명 작품 중 하나인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 1,1908>입니다. 클림트가 자신의 후원자이기도 한 아델레에게 초상화를 그려서 선물한 것으로 아델라가 사망한 후 남편이 이 그림을 소장하고 있다가 나치에 몰수당합니다. 남편은 사망할 때 조카에게 그림을 상속한다는 유언을 남겼고요. 나치 때문에 부모를 잃고 미국으로 도피했었던 조카 마리아 알트만은 전후 그 그림을 소장한 오스트리아 정부에게서 반환받기 위해 길고 고통스러운 소송을 걸지요. 결국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은 미국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옆의 노이에갤러리(Neue Galerie)에 소장되게 됩니다. 영화 <우먼 인 골드(Woman in Gold,2015)에 자세한 내용들이 담겨 있습니다.





 

1907년 에곤 실레(Egonschiele)는  구스타브 클림트(Gustav Klimt)를 만나게 됩니다. 젊은 에곤 실레의 데생 능력을 보고 클림트는 그의 가능성을 알아보지요.  그에게 친절하게 멘토 역할도 해 주고 스승역할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림을 사주기도 하고, 자신의 그림과 교환하기도 하고, 모델을 주선해주기도 하였으며, 후원을 해 줄 만한 사람에게 소개하기도 하지요. 또 에곤 실레를 분리주의와 연결되어 있는 미술 공예 workshop인 비엔나 워크숍에도 소개합니다. 




당연히 에곤 실레의  초기작들은 클림트의 그림들과 매우 유사한 작품이 많습니다. 아르누보의 영향도 보이고요. 클림트는 1909년 비엔나 kunstschau에 실레의 작품 몇 개를 출품하도록 초청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에곤 실레는 에드바르드 뭉크(Edvard Munch,1863-1944), 얀 투롭(Jan Toorop, 1858-1928),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의 작품들을 만나게 됩니다. 서서히 클림트를 모방하는 단계를 넘어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아가기 시작합니다. 아카데미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워지자 에곤 실레는 인간의 모습뿐만 아니라 인간의 성(Sexyality)도 탐구하기 시작합니다.

 



에곤 실레(Egon Schiele)는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1890,7월 29일)가 죽기 한 달 전에 태어났습니다.  1890년 6월 12일생입니다. 에곤 실레가 1918년 10월 31일 28살에 사망했으니 37살로 정신병원에 사망한 반 고흐의 삶만큼이나 안타까운 화가이지요.



오스트리아 출신으로 아버지 아돌프 실레는 Trlln 역 역장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남부 보헤미아에 있는 krumlov(kramau) 출생의 체코인이었고요. 자화상을 많이 남긴 화가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는 얌전한 자화상이 아닙니다. 그의 자화상은 메마르고 병적인 색을 띠고 있지요. 보기만 해도 누구의 그림인지 알 정도로 말입니다. 종종 강한 성적 의미를 지닌 도발적인 스타일로 그려질 때도 있었고요.  미남형으로 어머니가 사준 전신거울을 자주 봤다고 해요. 궁핍했을 때조차 차림새만큼은 단정하고 깔끔했다고 전할 정도로 말입니다.




 11살 무렵 인근 Krems라는 도시로 이사하여 두 번째 학교에 들어갔을 때 이상한 아이라고 여겨졌다네요. 부끄럼 많고, 말수 적고, 운동과 그림을 제외하고는 학교 생활을 잘하지 못해 그랬나 봅니다. 15살 때 아버지가 매독으로 사망하자 어머니 쪽 삼촌인 Leopold Czihaczec의 보호를 받게 됩니다. 그는 실레가 공부에 흥미가 없는 것을 염려하다가, 그림에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고 karl Strauch라는 화가를 선생으로 붙여줍니다. 







빨간색 다소 도발적 자세를 취하고 있는 작품 속 여인은  17살의  Walburga Neuzil(Wally)입니다. 그녀는 이전에 구스타프 클림트의 모델이었습니다. 그의 연인 중 한 명이었다는 것 이외에는 그녀에 대해 알려진 것이 거의 없습니다. 나이가 말해주듯 미성년자입니다. 에곤 실레는 그녀를 만나 비엔나에서 같이 살게 됩니다. 그녀는 어린 나이지만 에곤 실레가 원하는 콘셉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충족시켜 준 모델이기도 했습니다. 둘 다 아직 미숙한 연인들이라 함께 지내는 시간은 짧았습니다. 서로를 대하는 표현 방법 또한 에곤 실레의 이기적인 모습이 더 보이고요.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마주침이란 생각을 해봅니다.





에곤 실레와 Wally는 답답한 비엔나의 환경을 탈출해 어머니의 출생지인 남부 보헤미아에 있는 작은 도시 Krumau로 떠납니다. 현재 에곤 실레 기념 박물관이 있는 곳입니다.  Kramau에 도착한  에곤 실레와 Wally의 생활 스타일은 얼마 지나지 않아 마을 사람들 눈밖에 나게 되어 쫓겨나게 됩니다. 그림을 그린답시고 마을의 십 대 소녀들을 억지로 모델로 고용한 것이 화근이 되었지요. 두 사람은 영감을 주는 환경과 작업을 할 저렴한 스튜디오를 찾아 비엔나에서 서쪽에 있는 노이렝바흐로 옮겨갑니다. 하지만 에곤 실레의 창작 목적과 달리 스튜디오는 점점 비행 청소년들이 모이는 아지트가 되어 갑니다. 실레의 생활 방식은 마을 주민들에게 심한 적개심까지 불러일으키게 되고요.



 


결국 미성년의 어린 소녀를 유혹했다는 이유로 실레는 체포됩니다. 경찰들이 실레를 체포하러 스튜디오에 왔을 때 그들이 포르노라고 생각하는 그림 수백 장을 몰수하게 됩니다. 실레는 재판을 받을 때까지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되지요. Wally의 증언으로 재판에서 유괴 혐의는 기각되었지만, 어린이들이 접근할 수 있는 곳에 외설적인 그림을 전시했다는 점에서 유죄로 판결받습니다. 심지어 판사는 재판정에서 촛불에 그의 그림 한 점을 태우기도 했고요. 3일간의 투옥이 선고되고 감방에 갇힌 불편했 던 경험들은 그가 죽음과 부활 같은 주제를 다루기 시작하는 계기가 됩니다.





제1차 세계대전동안 대부분의 작품은 풍경화나 군 장교 같은 사람들을 모델로 그리게 됩니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이었으니까요. 그 무렵 중류층에 속하는 Edith을 만나 결혼도 하면서 안정을 찾습니다. 실레는 비엔나로 돌아와 다시 작품 활동에 집중하게 됩니다. 많은 작품을 내었으며, 작품들은 그의 재능을 원숙하게 잘 드러내 주었습니다.  1918년 비엔나에서 열린 분리주의 49회 전시회에 그의 작품이 초대됩니다. 무려 그의 작품 50개가 선정되어 중앙 홀에 전시되는 영광을 누리지요. 또한 전시회 포스터를 디자인하는데, 최후의 만찬을 흉내 낸 것으로 예수의 자리에 자신의 초상을 넣는 파격적인 시도도 하고요. 다행히 전시회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실레의 그림값은  높아졌고, 많은 초상화 주문도 받게 됩니다.





하지만 그의 살아서의 행운은 딱 여기까지입니다.  그해 가을 유럽에서 2천만 명의 환자를 발생시킨  스페인 독감이 급속도로 비엔나에 퍼지기 시작합니다. 특히 노약자, 어린이들, 그리고 임산부들이 가장 취약한 계층이지요. 그의 아내 Edith가 당시 임신 6개월인 상태로 스페인 독감에 걸려 사망합니다. 뱃속 아이도 함께 말입니다. 에곤 실레 역시 아내 사망 후  3일 뒤에 죽게 됩니다. 그의 나이 28살이었습니다.




전문가들은 에곤 실레의 작품을 괴상하고, 에로틱하며, 포르노적이고, 불안하며 성에 초점을 두고 있다고 봅니다. 초기에 그는 클림트와 코코슈카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그의 초기 작품에는 그들을 흉내 낸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날카롭게 그려진 각진 선과 색의 조합은 그가 누구인지 존재감 있게 다가옵니다. 당시 유행하던 전형적인 아름다움과 관습을 거부하고 추함과 과장된 감정을 예술에 솔직하게 도입했던 개성 만점 젊은 작가였음을 인정합니다.  불과 10년에 불과한 그의 짧은 예술적 경력을 감안해서 말이지요.  그의 작업 덕분에 비엔날레 표현주의 운동이 더 단단한 토대를 마련했으니까 말입니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Portrait of Adele Bloch-Bauer,1908), # 에곤 실레<생의 욕망>, Art Magazine, Patron-Galler
오스카 코코슈카, <바람의 신부(1914)>, 그림출처:파이낸셜 뉴스






그때 나는 나와 알마의 이인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다.
 운명에 거슬러 나를 광란하게  만드는 것은
질투만은 아니었다.
 나는 임박해 오는 비운의 숙명을 예감했다.
멜랑콜리가 우리의 엑스터시 위에 
 도취와 사랑 위에
 자신의 암울한 그림자를 드리웠고
 아폴로의 칠현금을 침묵하게 만들었다.

- 코수카의 자서전 <내 삶>중에서





그림도 잘 그리고 글도 잘 쓰던 이중천재 오스카 코코슈카(Oskar KoKoschka, 1886-1980)의 작품 <바람의 신부, 1914>입니다. 부러우신가요? 한 여인에게 오랫동안 집착을 보였던 화가이기도 합니다. 요즘 같으면 스토커라며 경찰서를 들락 나락 했을지 모르겠네요.  




당시 20대의 젊은 화가 오스카 코코슈카가 미망인 었던 30대의 알마 말러를 만나게 됩니다. 떠오르는 신인 화가 대접을 받던 오스카 코코슈카는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합니다. 급속도로 연인관계로 발전했지만 연상의 여인 알마 말러는 거칠고 불안한 성격의 젊은  코코슈카가 부담스러웠던 모양입니다. 당연히 인기 많은 미망인을 연인으로 붙잡아 두기에 젊은 코코슈카의 불안감 또한 컷을 테지요. 



그는 뜨거운 사랑의 감정을 거친 붓터치와 차고 어두운 색채로 화폭에 담아냅니다. 어두운 밤 거친 폭풍우가 그들 주위를 에워싸고 여인은 지친 듯 남자의 어깨에 기대 잠이 들었네요. 남자는 휘몰아치는 폭풍우 속에 절대로 이 여인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여인의 한쪽 손을 힘주어 잡고 있습니다. 코코슈카의 불안한 마음과 애절한 사랑이 그대로 감지되는 듯합니다. 코코슈카는 일곱 살 연상이었던 알마와 완전한 결합을 원했습니다. 2년 6개월 동안 4백 여통의 연서를 쓰며 구애도 해보았지요. 하지만  알마는 끝내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녀와 이별 후에도  코코슈카는 알마와 똑같은 크기의 인형을 만들어 유명 디자이너 옷을 입히기도 하고 오페라 구경을 할 때도 좌석을 구해 데리고 다닐 정도로 집착이 심했다고 합니다. 여하튼 실연은 당했지만 이 그림을 통해 국제적으로 큰 명성을 얻게 됩니다. 


 


이쯤 되면 알마 말러라는 여인이 슬슬 궁금해집니다.


 '비엔나의 아름다운 꽃'

오스트리아의 화가 에밀 신들러(Emil Schindler)의 딸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에게서 미술수업을 받다.

 알렉산더 폰 쳄린스키로부터 작곡을 배우다.

 



어떠신가요? 알마 말러(Alma Mahler)의 예술적 재능 또한 코코슈카에 뒤지지 않습니다.  시대의 예술가, 건축가, 시인, 작곡가 등 뭇남성들에게 뮤즈로 통한 이유를 알겠지요. 



당시 작곡가 겸 지휘자로 알려진 천재음악가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1860-1911)가 그녀의 첫 번째 남편입니다. 20대의 그녀가 40대의 노총각이었던 말러와 결혼해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결혼생활은 말러가 51살에 사망하면서 끝이 납니다. 미망인이었던 그녀는 19세기말 20초 활동했 던 예술가들 과의 숱한 염문설이 나기도 합니다. 이때 만난 연인이 젊은 화가 오스카 코코슈카이고요. 짧고 강렬한 만남은 오래가지 못했고 , 바우하우스를 창설한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 1883-1969)와 재혼합니다. 시인이며 소설가였 던 프란츠 베르펠(Franz Werfel, 1890-1945)과 세 번째 결혼해 안정을 찾습니다. 개인적으로 아무리  미모와 재능이 뛰어나더라도 여성에게 특별히 성취할 기회가 없었던 시대에 오히려 가진 재능이 걸림돌이 될 수도 있었겠다 싶은 생각도 듭니다.






코코슈카는 오스트리아 빈 미술공예학교에 재학 당시 '빈 분리파'의 수장이었던 구스타프 클림트에 의해 발탁되어 촉망받는 젊은 아방가르드 예술가로 부상합니다. 또한 그를 지지한 근대 건축의 선구자인 아돌프 로스(Adolf Loss,1870-1933)의 주선으로 독일 표현주의 운동을 주도한 헤르바르트 발덴(Herwqrth Walden)을 만나 독일 베를린으로 이주하는 기회도 갖게 되지요. 그곳에서 코코슈카는 발덴이 발행하는 표현주의 저널 <슈트름(Sturm, 폭풍)의 그래픽 화가로도 잠시 활동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당시 아돌프 로스가 소개해 주는 빈의 귀족들과 부르주아들의 초상화를 그리며 생활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당시 고객들이 그가 그려주는 초상화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고 해요.  멋있고 예쁘게 그려내는 초상화가 아니라 영혼까지 꿰뚫어 묘사하는 심리적 초상화를 그렸다는 점이죠. 불규칙하고 굴곡이 심한 선, 차갑고 어두운 색채, 그리고 강하고 거친 붓터치로 말입니다. 그만의 독특한 표현주의 특징이 되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작가로도 활약한 코코슈카는 인도주의 철학을 표현한 희곡을 몇 번 썼고, 특히 사회의 도덕적 위기와 정치적 불의를 비판한 <살인자, 여인들의 희망, 1907>이 주목도 받았지요. 나치가 집권할 때 대부분의 표현주의 예술가 그룹이 그러하듯 그 역시 퇴폐적인 예술가로 찍혀 전시는 물론 작품 활동까지 제한당합니다. 독재 정권이 탄압이 계속되자 그는 프라하로 이주했다가 영국으로 망명합니다. 





코코슈카의 초기 작품은  클림트와 빈 분리파의 영향을 받은 장식적인 화풍으로 출발합니다. 점차 비극, 죽음, 성 등의 주제를 깊게 다루기 시작하지요. 후기로 갈수록 그는 내면의 시선까지 담아내는 것 같은 풍경화와 인물화로 진화해 갑니다. 삶의 무상함, 전쟁에의 비판 등 다양한 주제 의식을  드러내면서 말입니다.








만주벌판의 <놈놈놈>의 시선을 무리하게 오스트리아로 한 번 옮겨와 봤습니다. <신비한 놈(구스타프 클림트)>, <안타까운 놈(에곤 실레)>, <집착하는 놈(오스카 코코슈카)> '빈 분리파'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구스타프 클림트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자신만의 화풍을 만들어 간 삼인방의 치열한 삶 또한 미술사의 보물들입니다.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이 떠오르셨다면 이제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실레, 그리고 오스카 코코슈카도 함께 기억해 주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림출처: 위키아트, 위키 피디아, 구글아트 앤 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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