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잠시 심드렁해질 때 누군가는 재래시장을 떠올리고 나 같은 이는 다큐멘터리 속 날 것의 세상에서 툭툭 털고 일어 설 실마리 하나를 찾는다. 유명 디자이너의 다큐멘터리였다. 그는 불규칙한 생활로 에너지바를 입에 달고 살았다. 뻐끔거리는 줄 담배는 기본이고 늘 시간에 쫓기어 쪽잠은 덤이었다. 한 시즌을 앞서가야 하는 그들에게 트렌드를 파악하고 접목시키고 쇼라는 이름으로 대중에게 보이기까지 삐걱거림은 디폴트 값이었다. 화려한 조명과 세련된 음악으로 관람객의 오감을 자극하지만 실상 무대 뒤 표정은 상상이상의 아수라장이었다. 마치 혼돈 속의 질서를 부여하는 신의 한 수 같은 시간이었다. 새로움을 무기로 시대의 흐름을 재해석해 가는 그들의 시간, 노력, 열정이 내게는 다양한 색깔을 버무린 샐러드 한 접시 같았다. 엑기스만 담아낸 메인 요리가 대중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환상 속의 그와 그녀가 그려내는 유혹의 시간이기도 했다.
'3초 백'으로 불리는 루이비통(Louis Vuitton)이 지금과 같은 위상을 갖게 된 결정적 계기는 가족 경영이 아닌 외부경영인으로부터 시작된다. 1987년 샴페인 브랜드 모엣&샹동, 꼬냑 브랜드 Hennessy와 합쳐져 LVMH라는 종합 명품 집단으로 탈바꿈하면서부터다. 당시 크리스천 디올을 소유하고 있던 베르나르 아르노(Bernard Arnault)가 Louis Vuitton 측 요청으로 지분을 투자하여 지분 싸움에 참여하게 되면서 그룹의 역사와 뿌리 자체를 바꾸는 선택이 이루어진다.
아르노는 경영자였지만 누구보다 변화의 중요성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관습을 거부하고 매력적인 캐릭터 디자이너의 중요성을 알고 있던 사람이기도 했다. 돈을 벌기 시작하고 조금만 유명해지면 태도가 바뀌는 디자이너들이 대부분이었던 시절이다. 그는 소수의 특별한 창조적인 디자이너들은 돈을 벌어도 태도가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돈보다 소수의 특별한 이미지와 캐릭터에 소비자들이 더 끌린다고 보았던 거다.
마크 제이콥스(Marc Jacobs)/www.sportsseoul.com
아르노 경영자는 1997년 젊은 천재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Marc Jacobs)를 영입하고 동시에 그를 그룹의 총괄 디자이너로 임명합니다. 이때부터 루이 비통이 대격변을 맞기 시작합니다. 매출이 기하급수적으로 뛰기 시작했고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큰 규모까지 말이죠.
평소 광적인 아트 컬렉터였던 제이콥스는 무라카미 다카시, 리처드 프린스, 스테판 스프라우스 등의 현대 미술가들과의 협업을 시작합니다. 더 나아가 페렐 윌리엄스를 시작으로 마돈나, 카니예 웨스트 같이 떠오르던 셀렙과도 협업을 진행하며 유행을 선도합니다. 그는 탁월한 캐릭터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주목하게 만드는 그런 디자이너였던 거죠. 제이콥스 덕분에 콜라보 라인을 적절하게 결합시켜 루이비통이 명품 가방 업체에서 명품 브랜드로 우뚝 서게 되는 계기가 마련됩니다. 이 정도면 디자이너의 캐릭터를 중요시했던 아르노 회장의 베팅이 보기 좋게 맞아떨어진 거지요. 마크 제이콥스(Marc Jacobs)가 수장으로 있던 기간 동안 (1997-2013) 루이비통이 5-10% 매출 성장을 꾸준히 기록한 걸 보면 말입니다.
혁신(革新, innovation)이란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사물, 생각, 진행상황 및 서비스에서의 점진적인 혹은 급진적인 변화를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혁신의 결과를 발명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예술, 경제, 사업 및 정부정책과 같은 것을 세상에 내놓은 것을 말한다.) -위키피디아-
유럽의 다다이즘, 피카소가 판을 칠 때 예술의 깊이가 어디까지 인지 실험해 본 화가가 하나 있습니다. 남들 할 때 휩쓸리지 않고 나답게 예술이란 영역을 풀어 가고자 했던 이단아 이기도 하지요. 평론가들은 그를 추상화가 혹은 색면화가 (컬러 필드 페인팅)라고 부릅니다. 비교적 우리와 가까운 시대에 살다 간 화가이고, 한 번쯤 들어보았거나 그의 그림을 보았을 확률이 높지요.
바로 마크 로스코(Mark Rothko:1903-1970)입니다.
2014년 그의 그림 중 하나가 1억 4천만 유로(한국돈: 1925억), 지금으로 따지면 2천 억 정도에 거래가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단순한 색 그림이 도대체 왜 이렇게 비싼 거야? 하며 의아해하시는 분들도 많을 것 같습니다. 저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거든요.
배경지식 없이 그의 작품을 관람하신 관객들의 평은 다양합니다.
"꿀 빤다."
"이거 뭐야, 포장지도 아니고?"
"어, 네모가 많네."
언뜻 보면 그림이 성의 없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큰 화면에 툭툭 붓질 몇 번 하고 그려낸 그림 같아 말이지요. 실제로 그의 그림 대부분은 사이즈가 큽니다. 2m가 넘는 작품들도 많거든요.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보다 큰 뭔가를 보면 압도당한 느낌을 받는다고 합니다. TV, Mobile phone에서 보는 느낌과 달리 미술관에 걸린 그의 실제 작품 앞에 서면 바로 그런 느낌이 든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45cm 거리,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서 작품과 대면하길 바랐다고 해요. 그의 그림 가까이에 서서 평면 캔버스에 그려진 단순한 색들을 바라보며 작품이 쏟아내는 고요하고 정적인 에너지 때문인 지 울고 가는 관람객들도 많다고 합니다.
그림은 사람과 교감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며
감상자에 의해 확장되고 성장한다.
-마크 로스코(Mark Rothko)
초기작품: <in the subway>,출처:Arthive #과도기 작품: <멀티 폼,1948> 원숙기 작품: 출처:Getty Images/Justin Lorget
러시아제국(현:라트비아) 출신 이민자입니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반유대정서를 피해 10살 무렵 가족이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이민생활을 시작합니다. 이민자의 아들이라 경제적 풍요로움은 없었지만 영특했던 지 예일대학교 장학생으로 입학합니다. 지금도 그런 특성이 남아있지만 당시 학교의 엘리트주의적 정서와 인종차별적인 영향으로 장학금 지급이 중단되자 자퇴합니다.
1923년 뉴욕으로 온 뒤 전설적인 예술학생연맹에서 공부한 것을 제외하면 마크 로스코는 정식 미술 수업을 거의 받지 않았습니다. 1920-1930년대 뉴욕은 번영 그 자체였습니다. 세계대전을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많은 유럽 예술가들로 그득했고요. 당시 색면화가이자 마티스 추종자였던 화가 밀턴 에버리(Milton Avery)에게 큰 영향을 받게 됩니다. 에버리의 절제된 형상, 미묘한 색감은 젊은 로스코의 작업 방향에 심오한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초창기 그의 작품은 누드, 자화상, 인물 있는 풍경, 수채화, 유화 등 작가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내공 쌓는 시간을 갖습니다.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그려대는 대학생 같은 시절 말이죠. 그 시절 도시 생활의 익명성과 고립된 삶을 뉴욕지하철이라는 공간을 통해 표현하기도 합니다. 지하철이라는 폐쇄된 공간에 그려진 사람들의 표정이 무심합니다. 제갈길 가기 바쁘고요. 길을 묻고 싶은데 상대의 시간을 빼앗는 것 같아 괜히 미안해집니다. 각진 기둥 사이로 자신만의 생각에 빠져있는 그들은 소통자체를 그다지 원하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1930년대 그는 그리스 비극, 셰익스피어의 비극, 니체의 저서 <비극의 탄생>등에 심취합니다. 당시 주류화풍과 거리 두기를 한 셈이죠. 고대신화와 심리 분석서들을 닥치는 대로 탐독합니다. 프로이트가 자신의 심리학을 표현하기 위해 그리스 신화 인물을 사용하듯, 마크 로스코 역시 초기에는 신화를 통해 인간의 내면을 표현합니다. 그런 자신을 '신화 제작자'라고 칭하기도 하고요. 그는 고대부터 내려오는 신화야 말로 모든 문화를 관통하며 인간의 본원적인 감정을 잘 표현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요.
그리스 신화와 니체를 인용한 그의 철학은 세계가 이원론적인 대립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 신화의 선과 악이 있듯이, 니체의 사상에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있듯이 말이죠. 그는 자신이 그리는 캔버스에 이러한 요소를 모두 담아내려 했지만 한계를 느낍니다. 그즈음 그는 이야기와 형태를 제거하기 시작합니다. 오로지 색조와 명도, 명암의 대비를 통해 색을 해방시킵니다.
소위 '멀티폼(multiform)'이란 것을 만들어 냅니다. 기존의 그림들과 완전히 다른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거지요. 멀티폼이라고 불리는 이 방식은 캔버스에 색 덩어리를 이용하여 공간과 색을 배치하는 방식입니다. 색 구름들이 캔버스에 떠있는 것처럼 말이죠. 자신이 평생을 염원해 온 새로운 형태의 미술을 창조하는 데 성공한 거지요. 이야기를 배제함으로써 제목을 붙일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무제>라는 타이틀로 제목이 붙여지기도 했으니까요. 이때부터 그의 그림은 추상의 세계로 확장되어 갑니다. 작품이 작가의 것이 아니라 관람객들에게 자유로운 해석이 맡겨지게 됩니다. 문제는 도대체 작가가 무엇을 표현하려 했는지 감을 잡을 수 없다는 애로사항이 남아있게 됩니다. 그래서 초현실주의 작품은 난해하다는 평을 받기도 하고요. 개인적으로 이런 종류의 작품은 본인이 느끼고 그냥 즐기시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Henri Matisse <The Red Studio>,1911, 출처:Artsy
자신의 작업실을 단순하고 명료한 채색으로 표현한 앙리 마티스의 작품 <The Red Studio>입니다. 로스코는 뉴욕 현대미술관에 마티스의 작품이 전시되자 수십 차례 방문합니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화실 안에 물건들의 개수가 많습니다. 압도적으로 채색된 붉은색이 모든 사물의 통일성을 부여해 주는 것 같고요. 언뜻 보면 질서 없이 산만하고 어지럽게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들뜨지 않는 뭔가가 느껴지면서 혼란스럽지 않습니다. 마치 얼음땡 시간여행 같은 그런 느낌이 듭니다. 마크 로스코는 마티스의 이 작품을 통해 단순하고 명료한 것이 직관적인 감정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색 구름 같던 멀티폼 스타일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만들며 10여 년의 시간을 보냅니다.
작품에 존재하는 색 덩어리의 수가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합니다. 색면을 단순화하고 캔버스의 크기를 대폭 키우게 되고요. 물 먹은 한지 위에 떠다니는 사각형의 배치가 정돈되기 시작합니다. 특히 알카이드 물감 혹은 아크릴 물감을 도입해 새롭게 작업을 하기 시작합니다. 기존 유화 물감보다 빠르게 건조해 더 많은 덧칠 작업을 할 수 있었으니까요. 흐릿한 경계선에 선명한 색상을 사용해 우리 눈을 깨우는 역할도 하고요. 이러한 추상을 그리기 전, 그는 면의 크기와 색의 농도를 머릿속에 수없이 조합한 후 직관적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생각하는 시간에 비해 실제 그림을 그리는 시간은 매우 짧았고요. 그는 그림을 그리는 것만큼 생각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해왔거든요.
거대한 캔버스에 치열하게 놓인 색채를 보며 작가가 표현하고자 했던 인간의 근본적인 감정을 관람객들은 비로소 마주하게 됩니다. 그림의 밀도, 투명성 그리고 캔버스 위의 직사각형에 올려진 수많은 레이어를 실감 나게 보면서 말이죠. 마치 음악에 젖어들듯 자신의 그림 앞에 서서 깊이 교감하며 내면의 자신과 만날 수 있기를 작가는 바랬습니다. 화해일 수도 용서일 수도 있는 내면의 소용돌이를 잠재우고 위로받고 치유하는 작품과의 특별한 만남이었으면 했고요.
https://youtube.com/watch?v=BZctdJXbg2Y&si=QjN7I8DXKZiJhHG6
10여 년의 로스코의 미학적 여행은 1955년 유력 경제지 <FORTUNE>지에 그의 작품이 추천되면서 대중에게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베니스 비엔날레 미국 대표로 참가도 하게 되고요. 케네디 대통령 취임식에 Top Artists의 자격으로 초대되며 미국 대표 예술가로 인정받게 됩니다.
이건... 널 위로하고 생각하게 만드는 거야.
벽에 거는 장식품이 아니라고...!!
-마크 로스코-
1958년 뉴욕의 시그램 회사에서 마크 로스코에게 회사 신축 건물 1층에 있는 고급레스토랑에 위치할 벽화를 그려 줄 것을 부탁합니다. 30년 동안의 재정적 어려움을 한 방에 해결할 수 있을 정도의 거액의 계약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마크 로스코는 자신이 그린 그림의 위치에 합의를 보지 못해 결국 계약을 파기합니다. 그곳에 큰돈을 내고 레스토랑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작품을 감상하지 않을 거란 판단도 한 몫했고요. 그는 많은 돈을 거머쥘 기회를 자신의 그림에 대한 철학과 다르다는 이유로 거부합니다. 미술품이 단지 장식품이 되는 것을 거부한 거지요. 이 일화는 그가 그림에 대해 어떤 철학을 가졌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현재 그의 작품은 영국 런던 테이트 컬렉션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그의 화려한 전성기입니다.
마크 로스코의 작품이 전 세계를 순회하며 전시되고, 대중은 그의 작품을 이제 소유하고 싶어 합니다. 이렇게 성공한 동료를 둔 친구 화가들은 '부르주아적 성공'이라며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한때 가난한 화가로서 기득권에 대한 저항정신을 발판으로 성공하게 되었으니 로스코 역시 결국 기득권자라는 비난이었던 거지요.
1960년대 앤디워홀, 리히텐슈타인 등 젊은 작가들이 팝아트라는 새로운 미술 형식을 창안해 내기 시작합니다. 뉴욕의 추상표현주의 화가들은 졸지에 진부한 엘리트 미술 취급을 받게 된 거지요. 마크 로스코와 같은 뉴욕화파 출신들은 신진 미술가들의 작품이 매스미디어를 활용한 속되고 도발적인 예술이라고 생각했고요. 자유분방한 것이 최고의 가치로 부상하고 고상한 것은 시대착오적인 생각이라는 젊은 작가들의 출현은 자신이 이대로 잊힐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더 가중시킵니다.
아침 10시부터 마셔대는 술은 알코올 중독으로 이어지고, 습관으로 굳어진 줄 담배는 심장과 간에 무리를 주어 심각한 동맥류가 발생합니다. 이즈음 두 번째 아내와 별거상태가 되고요. 몸도 마음도 망가지며 우울증세가 심해집니다. 초기의 붉은색과 황색 계열의 밝은 색조가 후반기로 갈수록 암갈색으로 어두워 지며 검정이 모든 색을 집어삼키게 됩니다.
이전만큼의 색이 표현성을 가지지 못하는 것에 더 괴롭습니다. 주변의 가까운 동료들과 가족들이 자신과 멀어지기 시작하니 고독해집니다. 자신의 몸이 더 이상 예전 같지 않습니다. 게다가 자본의 거센 폭우에 더는 자신이 소중히 여기던 것들을 계속할 힘이 없습니다. 이때부터 마크 로스코는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한 채 맨해튼 작업실이란 동굴에 들어가 빠져나오질 못하고 자살로 결국 생을 마감합니다.(1970,2.25)
마크 로스코 마지막 작품/출처:Artsy
'피로 그린 그림'이라는 별명을 가진 <무제(레드)>로 마크 로스코가 죽기 전에 그렸다고 알려진 작품입니다. 마크 로스코가 마티스의 작품 <붉은 화실>에서 얻은 영감은 그가 없던 새로운 길을 내는 결정적 영감을 선사했고, 또 그가 마지막 삶을 마감한 자리에서 다시 재연됩니다. 붉은색은 피의 색깔이기도 하지만 생명의 색깔이기도 하지요. 개인적으로 저 붉은 빨강을 보며 마크 로스코는 다시 한번 바닥을 치고 날아오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추측도 해 보게 됩니다.
마크 로스코가 삶을 마감한 1970년대!
경청지수 빵점
약속파기를 밥 먹듯이 하기
모든 아이디어는 얘기하는 순간 자기 것
애플의 CEO 스티브 잡스의 젊은 시절과 겹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엄청난 부를 쌓은 미국은 경제적 부가 높아지면서 능력 있는 백인들이 복잡한 도심을 벗어나 신도시를 만들어 자기들끼리 살기 시작합니다. 이로 인해 인종차별은 더 심해지고 노예 해방 문제도 수면 위로 급부상하기 시작하고요. 아버지들이 돈을 많이 벌어오기 시작하며 엄마들이 굳이 돈을 벌러 나갈 필요가 없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집안일은 여성의 차지가 되었고 경제적 주체가 되지 못한 여성들은 이때부터 차별이 심해지는 상황을 겪게 됩니다. 그야말로 백인 꼰대들이 우후죽순 나오기 시작한 시기이지요.
하지만 자식 문제만큼은 그들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청년들은 상업화된 자유와 쾌락에 몰두해 기성사회의 가치와 규범을 받아들이는 것을 굴종과 노예화로 받아들였습니다. 냉전체제와 함께 소련의 핵미사일이 서부를 통과할지 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살아갑니다.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 언론 탄압을 반대하며 UCBerkeley를 중심으로 시작된 언론 자유 운동, 흑인 시민권 운동, 게이 해방운동, 히피 문화, 그리고 환각을 통해 인지의 영역을 확장하고 인간에 관한 정의를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하는 LSD체험 등 혼란스러운 시기였습니다.
이와 같은 사회적 분위기에 영향을 받고 젊은 시절을 치열하게 살아낸 이들이 있습니다. 자신들의 꿈을 만질 수 있는 제품으로 현실화시키면서 말이죠. 빌 게이츠(Bill Gates), 스티브 잡스(Steve Jovbs), 그리고 에릭 슈미트(Eric Schmidt) 같은 1955년 동갑내기 글로벌 CEO들입니다. 그들이 겪어낸 뜨거운 20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질적 요소와 결합되어 지금 같은 디지털 세상으로 더 크게 확대되고 상상해 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로 우리를 이끌어 가고 있지요. 빠른 기술의 변화와 속도감에 쩔쩔매면서 말이죠.
Stay Hungry
Stay Follish
(Whole Earth Catalog)
2008년 맥월드 컨퍼런스&에스포에서 맥북 에어를 들고 있는 잡스, 위키피디아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스탠퍼드 졸업 연설에 언급해 유명해진 말입니다. "계속 갈망하라, 여전히 우직하게" 구석진 곳에 숨죽여 있던 열정을 햇빛 속으로 잡아 끄는 말이지요. 이 짧은 문장의 출처는 스티브 잡스가 아닙니다. 70년대 중반 먼로 파크에 살던 스튜어트 브랜드(Stewart Brand)에 의해 만들어진 잡지로써 마지막 회 뒤쪽 표지에 실린 문장입니다. 스티브 잡스라는 혁신의 대명사를 통해 널리 회자된 짧지만 깊이 있는 문장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이 잡지는 히피들에게 공동체 생활에 필요한 다양한 정보 및 상품에 대한 정보 제공이 주된 역할이었다고 합니다.
언론을 통해 스티브 잡스(1955-2011)가 죽기 전 마지막 해에 추상표현주의 작가 마크 로스코(1903-1970)에 집착해다는 얘기는 알고 계실겁니다. 간디를 좋아하고 명상을 즐겼으며 티벳 오색깃발과 부처상이 방안을 채우던 특이한 이력의 사람이 스티브 잡스입니다.철저히 자신의 이익에 따라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대하는 냉혈한이라는 인성적 비판도 수없이 들었던 사람입니다. 세상을 바꿀만한 물건을 만들기 위해 선택과 집중에 능했던 사람이기도 하고요. 프리젠테이션 만큼은 탁월해 따라올 사람이 없습니다. 스티브 워즈니악(Steve Wozniak)같은 A급 인재에 대한 열정과 완벽을 추구했던 그의 벤처 기업가로서의 면면은 엄지척 해주고 싶습니다.
"당신들이 이 제품 못 봐서 그래.
이 제품 보기 전 세상과 보고 난 후의 세상이 같은 줄 알아!"
하며 지금도 누군가를 설득하기위해 "One more thing"을 외치고 있을 것 같습니다.
단순한 것이 복잡한 것보다 어렵습니다.
생각을 단순하고 명료하게 하는데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스티브 잡스-
마크 로스코는 단순한 색의 공간감만으로 인간의 근본적인 감정을 표현해 내고 싶어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선택과 집중이라는 단순화를 통해 세상을 바꿀만한 제품을 만들고 싶어했고요. 둘 사이의 공통점이 단순화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한 사람은 캔버스에 형태를 없애고 색을 해방시켜 인간의 근원적인 감정을 표현하려 했지요. 다른 한사람은 군더더기를 빼고 세상을 바꿀만한 제품을 만들어내고 싶었고요.
로스코는 관람객이 자신이 작업하면서 느낀 감정들을 함께 느끼고 싶어했습니다.그래야 자신의 그림이 살아 숨쉬기 시작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로스코의 그림을 보고 관람객들이 자신의 마음에 온전히 집중하길 바랬어요. 죽음을 맞이한 스티브 잡스 역시 로스코의 그림 앞에 민낯의 자신과 대면하는 시간을 분명히 가졌을 거란 생각을 해봅니다. 가까운 거리에서 면밀하게 그려진 색을 들여다 보며 깊은 내면의 자아와 화해하고 용서하고 떠나보내는 시간말입니다. 한 사람은 혁신적인 제품을 만드는 사업가로, 또 한 사람은 한 세기의 예술 흐름을 바꾼 아티스트로, 분야는 다르지만 '산자'는 '죽은자'의 예술혼과 철학에서 자신이 걸어온 길과 걸어갈 길을 읽었는 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색채나 형태에는 관심이 없다.
비극, 아이러니, 운명 같은
인간의 근본적인 감정을 표현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다.
내 그림 앞에서
우는 사람은
내가 그것을 그릴 때 가진 것과 똑같은
종교적 체험을 하고 있는 것이다.
-마크 로스코-
Rothko Chapel/Pinterest
https://www.youtube.com/watch?v=XVw7k5m07NA
마크 로스코의 그림에 대한 철학이 잘 표현되어 있는 로스코 채플입니다. 미국 텍사스 휴스턴에 위치한 공간으로 예배당에 잘 어울릴 만한 회화 연작을 부탁받습니다. 1964년 14개 이상의 작품을 그리고 건축설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주로 검은색 계열로 전성기 때 사용하 던 오렌지 같은 밝은 칼라 대신 어두운 색으로 표현합니다. 로스코는 그 채플을 갤리리이자 사람들의 영혼이 쉬어갈 수 있는 안식처로 탈바꿈해 놓고 싶어던 모양입니다. 관람객들은 이곳에서 그동안 살피지 못해던 '나'와 조우하게 됩니다. 내가 묻어 둔 나의 속 이야기를 풀어헤쳐야하고, 나의 존재론적 고민도 덤으로 하게 되는 곳이죠. 그의 이런 바람은 어느 정도 이루어진 듯 보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명상을 하기위해 이곳을 찾는 걸 보면 말입니다. 비록 그는 완성된 채플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지만 말이죠.
우리는 기술만으로 부족했다.
그래서
기술에 인문학과 인간성을 결혼시켰다.
비로소 고객의 심장이 노래하기 시작했다.
-2010년 스티브 잡스 연설 중-
인간에 대한 이해,배려, 감성을 신흥 종교 수준으로 글로벌하게 영향을 미치고 간 스티브 잡스!
추상화가가 아닌 거시적 안목으로 그림에서 사람의 내면을 끌어내고 스스로를 치유케 만드는 예술을 꿈꿔 온 마크 로스코!
두 사람의 삶을 써내려 가며 자신의 분야에서 자기답게 탁월함을 선사한 그들의 삶에 지구촌 한 사람으로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그림출처: 위키피디아. 위키아트, 구글아트앤 컬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