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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 한 묶음의 겨울 이야기

피터 브뤼겔(Pieter Brueghel) & 추사 김정희 

세상에서 가장 따뜻했던 저녁/복효근 


어둠이 한기처럼 스며들고

 배 속에 붕어 새끼 두어 마리 요동을 칠 때


 학교 앞 버스 정류장을 지나가는데

  먼저와 기다리던 선재가 

 내가 멘 책가방 지퍼가 열렸다며 닫아 주었다. 


아무도 없는 집 썰렁한 내 방까지 

 붕어빵 냄새가 따라왔다. 



학교에서 받은 우유 꺼내려 가방을 여는데 

아직 온기가 식지 않은 종이봉투에 

붕어가 다섯 마리



 내 열여섯 세상에 

가장 따뜻했던 저녁 


-복효근, <세상에서 가장 따뜻했던 저녁>, [운동장 편지}, 창비 교육, 2016-


가족이 대중탕을 이용하는 날 벌게진 얼굴이 시린 겨울바람을 맞아 시원함 마저 느낄 때 어김없이 솔솔 풍겨오던 붕어빵 냄새!  글 속의 선재라는 아이는 주변을 항상 살피던 아이였나 봅니다. 친구가 도시락을 싸 오지 못한다는 사실, 몇 번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는지 알고 있는 걸 보면 말입니다. 본인이 한 개쯤 먹고 나머지를 줘도 사정 모르는 친구는 고마워할 듯도 한데 꾹~참고 붕어빵 다섯 개를 온전히 친구에게 건넵니다. 그것도 친구가 자존심 상할까 봐 아닌 척하면서 말이죠. 살피고 나누고 배려해 준 글 속의 선재라는 아이! 능청스러운 연기가 대종상 감입니다.




기독교라는 키워드로 중세 천 년이 지나고 십자군 원정으로 다른 세계를 접하게 된 사람들은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한 영주가 다스리는 지역에서 낳고 성장하고 죽는 일이 더 이상 당연한 일이 아니게 된 거죠. 전 유럽의 환율을 결정지을 정도로 돈이 많았던 이탈리아 피렌체 지역, 메디치 가문을 중심으로 르네상스가 활짝 피어납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 젤로, 그리고 라파엘 같은 천재 예술가들이 먼저 떠오르실 겁니다. 




전쟁과 흑사병으로 죽음이  만연해서 내세에 대한 불안감이 증폭되기 시작합니다. 화려한 교회 건물 건축 비용 마련을 위해 내세에 대한 불안감을 이용해 면죄부를 발행하고요. 면죄부 판매와 헌금을 유도하기 위한 성경의 왜곡이 시작됩니다. 반면에 성경의 본질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증가하기 시작합니다. 과학의 발전과 신대륙의 발견으로 교회의 권위가 추락합니다. 그리스어 신약 성경을 연구한 학자들에 의해 성경을 왜곡하는 교권주의자들의 행태가 폭로되기 시작하지요.




 영국의 존 위클리프와 보헤미아(체코)의 얀 후 센 같은 이들입니다. 이들이 종교개혁의 1세대쯤으로 세례자 요한처럼 길을 낸 선구자적 인물들입니다. 깊이 있는 성경연구가 부족했던 중세 교회의 문제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인물이  에라스뮈스(1466-1536)입니다. 1516년 그는 그리스어 원전과 라틴어를 함께 실은 출판물 하나를 발행하게 됩니다. 1세대와 마틴 루터 사이의 종교개혁의 씨앗이 뿌려지는 징검다리를 놓으신 분이죠. 1517년 독일 비텐베르크 신학교수인 마틴 루터의 95개 반박문이 인쇄술의 발달과 함께 전유럽에 삽시간에 퍼지며 엄청난 반향을 일으킵니다. 



출처: 가톨릭 굿뉴스

 


피터 브뤼겔(Pieter Bruegel the Elder,1525-1569)이 살았던 시대는 종교개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로 유럽이 분열되기 시작하던 시점이었습니다. 그가 살던 플랑드르 지역(벨기에, 네덜란드)은 개신교중 독일의 루터의 영향보다 프랑스 출신으로 제네바에서 활동한  장 칼뱅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습니다. 칼뱅은 제네바에 아카데미를 세워 루터보다 더 많은 나라에 오랫동안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16세기 우상숭배를 반대하는 종교개혁과 함께  더 이상 종교적인 그림을  그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졸지에 북유럽의 미술가들은 새로운 시장을 발견해야 했습니다. 화가들 자신들이 특별히 잘하는 장르로 전문화의 길을 걸어가야 했던 거지요. 작품의 주제를 어느 한 부분으로 한정해서 의도적으로 개발한 그림들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정물화, 초상화, 그리고 피터 브뤼겔은 지금의 용어로 풍속화를 그리기 시작합니다. 당시 그리스 신화나 성화에 길들여져 있던 사람들은 브뤼겔이 그린 그림을  딱히 뭐라 칭해야 할지 몰라 '장르화'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자손들이 모두 화가라서 이름도 같은 인물이 있어 이 화가의 이름 뒤에는 통상적으로 the Elder를 붙입니다. 그에 대해 별로 알려진 것은 많지 않습니다. 작품 수도 그다지 많지 않고요. 하지만 농민들을 위한 화가로 특유의 풍자와 해학으로 시대상을 잘 표현했던 화가입니다. 16세기 플랑드르 사람들의 일상을 2023년 디지털 매체를 통해 우리 일상과 비교해 볼 수 있게 해 준 화가이기도 하고요. 






플랑드르 미술가들은 사실적이고 경험적인 표현을 중시하는 북유럽 회화의 영향을 받습니다. 이들의 작품에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찾아낸 이탈리아적인 완벽한 수학적, 비례적 원근법이 아닌 보이는 대로 그린 색채 원근법이 주로 나타나고요. 시간이 지나 루벤스, 렘브란트로  이 성향은 이어집니다. 당시 화가들이 작업을 공방에서 했어요. 형제들이 함께 공방의 일을 도와 공방의 대표작들을 만드는 과정에서  실력도 늘었고요. 브뤼겔 역시 두 아들이 브뤼겔의 작품을 살짝만 바꿔서 그려내기도 했습니다. 언뜻 보면 아버지 작품인지 아들 작품인지 헷갈리는 경우도 종종 발생합니다. 





Pieter Brueghel <눈 속의 사냥꾼(The Hunters in the Snow)>, 1565, 빈 미술사 박물관/ X.com(그림출처)











피테 브뤼겔의  <눈 속의 사냥꾼> 작품입니다. 그림을 최대한  확대해 보았습니다. 디테일이 강한 화가라서 말이죠. 르네상스 이전의 서양 미술사에서  겨울 풍경을 그린 작품은 뜻밖에도 흔하지 않습니다. 풍경은 회화에서 그 자체로 독자적이고 중심적 소재라기보다는 대체로 인물화의 배경, 역사적 주제, 신화, 종교적 주제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부수적인 차원의 배경으로 사용되었거든요. 미켈란 젤로 같은 경우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경쟁관계에 있다 보니 풍경을 넣지 않았어요. 뒷 배경으로 풍경을  넣어 신비감을 느끼게 했던  다빈치와 비교당하고 싶지 않아서 말입니다. 브뤼겔은 계절 연작을 통해서 미술사에서 풍경화를 회화의 장르 중 비중 있는 분야로 끌어올린 작가입니다. 





그는 네덜란드 북쪽 브라반트주 브레다에서 탄생한 것으로 추정되며, 생의 전반에 걸쳐 주로 안트베르펜에 정착하면서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그는 당시 유명했던 안트베르펜의 히에로니무스 코크(Hieronymus Cock) 공방에서 동판화의 밑그림을 그리면서 화가 수업을 시작합니다. 1551년에 안트베르펜의 화가 조합인 성 루카스 길드에 마이스터로 등록하게 되고요. 이듬해에는 프랑스와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납니다.




그가 정착했던 안트베르펜은  세계 최초 증권거래소, 무역회사, 무역 중계  교역소, 환전을 위한 은행, 전쟁자금 마련을 위한 각국의 대사관, 공관등이 있을 정도로 금융, 무역이 유럽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곳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의 영향으로 베네치아가 서서히 몰락하고 유럽의 중심이 지중해에서 북유럽 쪽으로 이동을 한 셈이지요. 플랑드르에서 칼뱅주의가 정착했던 이유도 그들의 경제 규모에 칼뱅의 가르침이 가장 적절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노동과 금욕이 지나치게 강조되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본을 축적한 사회로 변화하는 프로테스탄트 자본 윤리가 부작용을 만들어 낸 측면도 있고요. 기본적인 생존권조차 마련되지 못해 노동자들은 '해고'라는 이름으로 대체되지 않기 위해 지나친 노동에 시달려야 했거든요. 





<눈 속의 사냥꾼> 작품은 1년 동안 변화하는 계절을 총 6개의 그림으로 구성한 연작 중 하나입니다. 한겨울, 초 봄, 초여름, 늦여름, 가을 총 6점 중 현재 5점이 남아있습니다. 이 연작은 안트베르펜의 부유한 은행가 니클라스 용헬링크(Niclaes Jongelinck)라는 사람이 자신의 저택에 장식하기 위해 브뤼겔에게 의뢰했던 작품이라고 합니다. 이 작품은 황제 루돌프 2세가 수집해 보관하고 있다가 스페인(구교)과의 30년 전쟁의로 5점만 남았다고 합니다.  






드넓게 펼쳐진 설경은 이전에 어디에서도 볼 수없었던 미술사상 최초의 눈 온 풍경을 그린 그림입니다.  이 작품은 네덜란드를 비롯한 북유럽 풍경화 전통에 기초가 되었고요. 가장 추운 겨울 12월과 1월 두 달을 나타낸 그림입니다. 자연에 대한 예리한 관찰이 뛰어난 화가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의 그림에 담긴  겨울 이야기를 한 번 볼까요.





높은 곳에서 바라본 전경입니다. 어두운 색 나무, 눈 속에 파묻혀 있는 건물과 사람들 검은 윤곽선으로 처리해 하얀 눈과 무척 대조를 이룹니다. 평면적이라 화이트와 블랙 대비가 명확하게 떨어져 마치 현대미술 같은 느낌도 들고요. 냄새 맡기 바쁜 사냥개들도 흰색과 대비되어 깔끔한 한 무리를 이루는 듯합니다. 개인적으로 일러스트 같은 느낌이 들어 더 좋은 것 같아요. 




왼쪽 길 옆으로 여관이 있어요. 화폭을 가득 덮은 하얀 눈과 여관 집 벽돌담의 붉은 색조가 명료한 대조를 이룹니다. 여관 앞에서 몇 명의 사람들이 건초를 태워 뭔가를 불에 그을리고 테이블로 옮기는 등 열심입니다. 전문가들은 멧돼지 도살이 주로  1월에 하는 연중행사라 돼지를 불에 그을리는 중이라고 설명하더군요.  건초를 태우는 불길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솟구치는 모습이  바람이 세게 불었나 봐요. 여관의 간판은 한쪽 고리가 떨어져 기우뚱하게 걸려 있네요.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눈길을 힘겹게 헤쳐 나왔습니다. 한 무리의 사냥개들을 이끌고 사냥을 하고 돌아왔지만  별 재미를 보지 못한 모양입니다. 푹 수그린 모습이 추위에 더 지쳐 보이기도 하고요. 개들을 저리 많이 풀어놨는데 어깨에 멘 사냥감은 단출합니다.  세 명의 사냥꾼이 나눠 같기에 터무니없이 적은 양이고요.  한 겨울에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르죠. 야생 동물이 겨울 숲이나 들판에서 먹이를 찾기가 어디 쉽겠어요. 사냥꾼 또한 그 혹독한 겨울을 나기에 적당한 사냥감을 구하기가 어렵겠지요. 그런데 눈밭에 토끼 발자국 보이시나요? 토끼마저 놓친껄까요? 깨알 디테일이 놀랍습니다. 그런데 내려갈  마을 풍경은 사뭇 분위기가  다릅니다. 





우뚝 선 나무들은 자연의 위풍당당함을 과시하는 것 같습니다. 이 나무들이 자연스럽게 사냥꾼이 있는 왼쪽에서 오른쪽 마을로 보는 이들의 시선을 유도합니다. 계곡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 사람들은 얼어붙은 연못에 생긴 스케이트장에서 여유롭게 놀고 있습니다. 얼음썰매, 컬링을 하기도 하고요. 하키, 스케이트는 기본이고 꽁꽁 언 강바닥을 배경 삼아 창작할 수 있는 모든 놀이를 다 동원한 듯합니다. 팽이치기도 혹시 했을까 싶고요.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 속 노는 아이도 생각이 나네요. 혹독한 추운 겨울도 재미난 놀이문화를 통해 일상을 즐겼던 그들의 조상님들 덕분에 동계올림픽에서 네덜란드가 상위권을 차지하는 가 봅니다. 




큰 도로가로 짐을 잔뜩 실은 짐마차가 지나갑니다. 검은 새는 하늘을 날고 있어 전체적으로 차갑지만 평온한 느낌을 줍니다.  땔감을 이고 가는 아낙네가 보이시나요. 꽤 무거워 보이는데 씩씩하게 들고 가는 모습이 삶의 무게를 지고 가는 듯 보입니다. 그녀 덕분에 그 집 가족들 따뜻한 저녁 시간을 맞이할 수 있겠지요. 아래쪽 여인네들도 흥겹습니다.  애나 어른 할 것 없이 꽁꽁 언 강은 장난기 발동이 기본인가 봅니다. 


 


오른편으로 멀리 있는 정수리가 뾰족한 눈 덮인 산 봉우리들이 보이시지요? 네덜란드는 높은 언덕이나 야산이 드물어요. 당연히 험준한 산맥은 없지요. 작가가 여행지에서 보았던 자연 풍경을 하나의 화폭에 조합하여 구성한 작품인 거지요. 브뤼겔이 1550년대 이탈리아 여행길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알프스 지형을 그렸다는 설이 있어요. 단순한 네덜란드 풍경에 알프스 산맥을 그려 넣은 까닭은 당시 풍경화는 단순히 특정 장소를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화가 자신의 의도를 복합적으로 알리기 위해 다른 풍경과 접목시켰기 때문입니다.





 

브뤼겔은 북유럽 전통의 사실성과 이탈리아에서 배운 엄격한 선의 묘사를 통해 그만의 독특한 스타일의 화풍을 만들어 냈습니다. 네덜란드 특유의 전통적 기법을 발전시키면서도 새로운 관점에서 자연과 인간에 관련된 주제를 작품에 도입한 화가로 평가받습니다. 놀라운 정도로 정교하고 다양한 세부 이미지로부터 차츰 물러나서 다시 그림 전체를 보면 이 작품 자체가 우리가 살고 있는 하나의 소우주처럼 느껴집니다.

마치 혹독한 추위의 겨울을 견뎌야 향기로운 새 봄을 맞을 자격이 주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당시 북유럽의 역동적이고 과도기적 시대와 사회에 대한 냉철한 관찰자였던 브뤼겔의 작품 안에서  사계의 순환과 겨울풍경을 맘껏 느껴보았습니다.





중학교시절 미술 교과서를 통해 추사 김정희 <세한도>를 만났습니다. 사춘기 시절이라 동양화가  별 감흥이 없었습니다. 유명한  것도 당연히 몰랐었고요.  제게는 그저 교과서 시험문제 나오는 그런 정도의 비중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러다 대중매체를 통해 마스크를 쓰고 모자를 눌러쓴 기증자가 휠체어를 타고 마지막으로 이 작품을 보러 온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작품 앞에서 여러 감정이 교차하는 모습이 화면에 잡히더군요. 애인과 작별하듯 90줄의 기증자는 이 그림과 함께 한 세월을 놓아주는 듯싶었습니다. 아무 조건 없이 기증했다고 하니 애틋함이 남달라 보였습니다. 그렇게 시간차를 두고 제게 묵직하게 다가왔던 그림입니다.




김정희 <세한도>, 나무위키




작품 <세한도> 두루마리는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는 1910년대 초 <세한도 > 소장자였던 김준학(1859-1914)이 오랫동안 앓다가 쾌차한 것을 기념하여 1914년에 쓴 '완당세한도'와 시가 함께 적혀 있는 부분입니다. 두 번째는 1844년 제작된 김정희의 <세한도>입니다. 세 번째가 중국 청나라 문인 16인이 1845년 <세한도>를 보고 쓴 글 16편과 김준학이 1914년 추가한 글 2편이 4개의 종이에 쓰인 부분입니다. 네 번째 부분이 753.7cm로 가장 깁니다. 한국 근대 지식인 오세창, 이시영, 정인보가 1949년 쓴 3편의 글과 함께 비어 있는 부분이 거의 5m에 이른다고 합니다. 




<세한도>가 제작된 배경은 19세기 전반 세도정치와 관련이 깊습니다. 똑똑하고 총명했던 명문가 금수저 김정희는 반대 세력인 안동 김 씨의 모함으로 55세 때 억울하게 제주도로 유배를 떠나야 했습니다. 멀리 떨어진 섬에서 밖으로 나갈 수도 없는 감금형에 처해진 것이지요. 조선시대 유배는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 유배가 풀릴지 기한이 없었습니다. 3년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오지 않고 오히려 그를 사형에 처하라는 상소가 끊임없이 올라올 뿐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죄인 김정희를 변함없이 대하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중국어 통역관 이상적(1804-1865)입니다. 그는 중국에서도 구하기 쉽지 않은 책을 제주의 김정희에게 보내줍니다. 유배 중인 그에게 책은 고독을 달래주는 친구 같은 존재였을 겁니다. 김정희는 이상적의 변치 않는 의를 칭송하며 <세한도>를 그리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app=desktop&v=8CoZdhGQmgU






그림 왼쪽에 종이를 이어 네모칸을 친 부분에 이 그림을 왜 그리게 되었는지를 강하고 굳센 필치로 상세히 적었습니다. 둥근 문이 있는 허름한 집 좌우로 소나무 두 그루, 측백나무 두 그루를 세워놓았고요. 나무줄기와 잎을 표현한 메마르면서 촘촘한 필치가 눈에 들어옵니다.  물기 없는 마른 붓에 진한 먹물을 묻혀 칼칼하게 표현했습니다. 오랜 내공이 아니고서 정말 힘든 것이 마른 붓을 다루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김정희에게 메마르고 곤궁한 자신의 처지를 전달하기에 이만한 필법이 없었던 거지요. 김정희는 자신의 의도를 전달하기 위해 가장 적절한 제목, 소재, 필법, 인장으로 치밀하게 <세한도>를 완성합니다. 







한글로 풀어쓴 내용입니다.


지난해엔 [만학집]과 [대운산방문고] 두 가지 책을 보내주더니, 

올해에는 하장령의 [경세문편]을 보내왔네 그려.

이들은 모두 세상에 늘 있는 게 아니고

 천만 리 먼 곳에서 여러 해를 걸려 입수한 것으로

 단번에 구할 수 있는 책들이 아님을 아네. 

세상 풍조는 권세나 이권 있는 자들에게 쏠리는 법인데 

자네는 그러지 않고 바다 밖 별 볼 일 없는 늙은이에게

 이 귀한 서적들을 보내왔구먼

 태사공의 말씀 있지 않은가?

 '권세나 이권 때문에 어울린 이들은

 권세나 이권이 떨어지면 만나지 않게 된다.' 

태사공의 말이 틀린 겐가? 

자넨 날 애초에 그런 마음으로 대하지 않았던 게야.

 공자께서 말씀하셨지


 '추운 겨울이 되어서야 소나무 잣나무가 시들지 않고 변치 않음을 알게 된다.' 


자네가 날 대한 걸 보면 예전이라고 더 잘하지도 않았고, 

지금이라고 더 못하지도 않네. 

이전의 자넨 별 특별할 게 없었지만

 이후의 그대가 변치 않음을 보니 

성인의 칭찬을 받을 만하지 않은가?


완당 노인이 쓰네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으며,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이런 분에 넘치는 칭찬을 감개가 절절하게 하셨습니까?

 아!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권세나 잇속을 버리고 초연히 속세를 벗어나겠습니까? 다만 보잘것없으나 제 마음이 스스로 그만둘 수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더욱이 이런 책은 정치판 고관들에게는 어울리지도 않지요.

 결국 이런 책은 청량세계에 있는 사람에게 돌아가게 마련입니다. 

이번에 이 그림을 가지고 연경에 들어가 친구학자들에게 보인 다음 제영(감상문)을 부탁할까 합니다. 

다만 걱정스러운 것은 그림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제가 정말로 권세와 이권을 벗어난 초연한 사람으로 볼까 부끄러울 뿐입니다.


-제자 이상적-






 "국보 그림 동쪽으로 건너가니

 뜻이는 선비들 처참한 생각 품고 있었네.

 건강한 손 군이 한 손으로 이무기와 싸웠네.

 반전되어 이미 삼켰던 것 빼앗으니 

 옛 물건 이로부터 온전하게 됐네. 

그림 한 점 돌아온 것이 

강산 돌아올 조짐임을 누가 알았겠는가."


-정인보 찬문-




이상적은 일곱 번째로 떠나는 중국 출장길에 <세한도>를 소중히 챙겨갔습니다. 그리고 평소 친하게 지내던 청나라 문인 장요손(1807-1863)이 주최한 모임에서 <세한도>를 꺼내어 사람들에게 보여주었지요. 그 자리에 참여했거나, 이후 그 그림을 본 청나라 문인 16명이 감상 글을 적었습니다. 장요손의 매형인 오찬은 "군자는 힘들수록 더욱 굳세어지니 받아주지 않는다 해도 무엇을 걱정하랴."라며 군자의 흔들림 없는 마음을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세한도>를 통해 추사의 곤궁한 상황을 중국의 지인들도 알게 되었고요.  




 김정희가 제자 이상적에게 준 <세한도>는 이후 이상적의 제자 김병선(1830-1891)이 소장하다가, 그의 아들인 김준학에게 전해졌습니다. 이후 민영휘. 민규식이 소장하다 1932년 일본인 학자 후지쓰카 지카시(1879-1948)가 <세한도> 주인이 되어 정년퇴임 후 여러 자료를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1944년 진도 출신의 서예가 손재형(1903-1981)은 일본으로 건너가 두 달 동안 후지쓰카를 설득해 <세한도>를 돌려받게 됩니다. 손재형은 잘 간직하고 있다가 광복 후 1949년 당대를 대표하는 지식인 정인보, 이시영, 오세창에게 <세한도> 감상 글을 청합니다. 손재형 이후 개성의 사업가 손세기(1903-1983)가 1970년대부터 소장하였고 장남 손창근이 소중히 간직하다 2020년 국립중앙박물관에 아무런 조건 없이 기증하게 됩니다. 




 한 시인의 붕어빵으로 시작한  제 겨울 이야기가 피터 브뤼겔을 거쳐 추사 김정희<세한도> 작품으로 매듭을 지어  보았습니다. 피터 브뤼겔은 종교가 현실과 무관하게 관념에 빠지는 것을 경계한 화가였습니다. 그의 그림 중 <바벨탑(1563)> 작품은 목숨을 걸고 그린 그림이기도 하고요. 디테일이 엄청난 북유럽 풍속화가 브뤼겔과 여백미와 담백한 글과 그림으로 자신의 처지를 표현한 최고의 문인화 <세한도>를 함께 실어 보았습니다. 삶의 언저리에 시리도록 한기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을 누군가에게  따뜻한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동, 서양의 차이를 느껴보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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