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색이 어울리는 나이가 있습니다. 싱싱한 젊은 나이죠. 굳이 이 색을 예쁘게 입고 싶으시다면 '마젠타 핑크'를 포인트 칼라로 써 보실 것을 권합니다. 과하지 않은 선에서 말이죠. 진달래색보다 진하고 선명하죠. 권태로우십니까? 일상을 탈출하되 가성비 갑을 원하십니까? 그럴 땐 내 몸 어딘가에 '마젠타 핑크'를 가까이해 보세요. 포인트만 주는 정도로 말이죠. 생기 없던 얼굴이 화사하게 보여요. 나이보다 더 젊어 보이는 것은 기본이고요. 기분 좋은 에너지로 주변을 꽉 채워줍니다. 그 속에는 자유로움과 개성이 녹아있어 모던하면서도 감각적인 인상을 줍니다.
"Hola"(안녕!)
"Buenos dias"(아침인사)
"Gracias"(고마워요)
웬 스페니시? 하실 것 같습니다.
The History of Mexico: Diego Rivera's Murals at the National Palace/ 그림출처:Khan Academy
멕시코 시티에 가면 눈에 띄는 것 중 하나가 공공건물에 그려진 커다란 벽화입니다. 특히 멕시코 시티 독립궁 팔라시오 나쇼날(Palacio Nacional)에 가면 당시 바스콘셀로스 교육부장관이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에게 의뢰한 벽화가 남아 관광객들을 맞이합니다. 제작 기간은 5년 정도 걸렸고요, 벽면 그림 속에 가장 멕시코 적인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마야문명의 전성기, 아즈텍문명의 멸망, 스페인 세력인 코테즈의 침공, 가톨릭의 상륙, 판초 빌라와 자파타의 농민혁명, 미국의 멕시코 침공, 멕시코 독립과정등이 벽화 속 내용들이지요. 미술관을 벗어나 공공영역에 예술을 접목시켜 더 많은 사람들이 미술관의 아름다움을 즐기고 감상할 수 있도록 한 거지요.
중세 교회가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성경의 내용을 알기 쉽게 그림으로 표현해 전달했듯이 ,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의 벽화 또한 외세와 독재정권에 시달리는 멕시코 사람들을 일깨우기 위해 재현됩니다. 멕시코의 신화, 역사 그리고 멕시코 주민들의 생활 등을 민중에게 직접 전달하는 방법으로 말이지요. 문맹의 민중에게 멕시코 혁명의 성과와 민족의 정체성을 가르치는 가장 쉬운 방법이 벽화운동이었던 거지요.
1923년 멕시코 최고 명문인 국립예비학교에서 벽화를 그리던 디에고 리베라는 당시 16살의 소녀 프리다 칼로(Frida Kahlo)를 만납니다. 진보적인 교육부 장관이었던 호세 바스콘셀로스의 정책 덕분에 그 해 여학생 입학이 처음으로 허용이 됩니다. 그 첫 번째 수혜자가 프리다였고요. 당시 전교생 2000명 중 여학생 비율이 35명이었다고 해요. 멕시코 최고의 수재들이자 장차 멕시코의 주역이 될 아이들이 공부하는 곳입니다. 프리다 칼로가 코끼리 닮은 체구의 벽화를 그리고 있던 그와 첫 대면을 한 곳입니다.
나는 죽지 않았어요.
살고 싶었고
깁스를 하고 누워 있는 것이
끔찍하게 지루했지만
그림을 그리는 시간만큼은 그러지 않았어요.
-영화 '프리다 '중에서-
<두 개의 기둥>, 1944/그림출처:시사뉴스
1925년 9월 17일(18살), 당시 남자친구였던 알레한드로와 함께 본가인 코요아칸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버스가 전차와 충돌하는 큰 사고가 났습니다. 척추 세 군데가 산산조각 났습니다. 쇄골과 갈비뼈도 부러졌고요. 골반뼈와 어깨뼈 탈골, 오른쪽 다리에 열한 군데 골절을 입었습니다. 이 정도면 살아있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싶을 정도로 작은 몸이 처참하게 부서져 버렸습니다. 다행히 목숨을 건진다 해도 평생 불구로 살아야 하는 녹록잖은 시간이 기다리고 있는 거죠. 가장 심각한 부상은 쇠로 만든 난간 끝부분이 그녀의 복부를 관통해 생식기를 뚫고 나온 것이었습니다. 출혈이 너무 심해 온몸이 피로 물들었습니다. 그리고 같은 버스를 탔던 사람이 들고 있던 도자기 항아리가 깨지면서 그 안에 든 금가루가 칼로의 온몸을 뒤덮었습니다. 외과 전문의들은 마치 프리다의 몸을 콜라주 작품처럼 다시 붙여야 했습니다.
이 사고로 35번 수술대에 누워야 했습니다. 평생 동안 몸을 지탱해 주는 코르셋은 애인이 되었고요. 그림 속 척추 대신 위치한 고대 그리스 건축 기둥은 금이 가 있고 무너질 듯 위태로워 보입니다. 그녀의 몸을 찌르고 있는 검은 못 들은 사고로 부서진 신체 부위를 가리키며 마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의 고통을 생각하게 합니다. 커다란 눈은 깜빡이지 않은 채 갈매기 눈썹의 그녀는 눈물만 뚝뚝 흘립니다. 눈물을 닦지 않는 모습이 마치 자신에게 일어난 고통이 억울하다는 표현 같습니다. 신이 원망스럽다는 듯이 말입니다. 프리다는 이렇게 끔찍하게 부서진 육체를 자신이 평생 보듬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너집니다. 타임머신이 있어 사고 이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돌아가고 싶습니다. 의사가 되고 싶었던 어린 소녀의 꿈은 그날 전차와 함께 산산조각 나버렸습니다. 평생 의료진들의 도움 없이 살 수 없는 군더더기 인생이 되어버렸네요.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침대 위쪽에 매달아준 거울을 올려다보며 회복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하루 종일 병상에 누워 슬퍼하는 딸을 위해 아버지는 침대에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특수 이젤을 제작해 주었고요. 그림작업은 프리다에게 붙들고 싶었던 꿈 한 조각이었습니다. 그림에 몰입하고 있을 때만큼은 환자라는 사실을 잊을 수 있었으니까요. 모르핀 같은 진정제 역할을 그림이 해주었던 거죠. 그녀는 전문적인 미술수업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사진사인 독일계 아버지로부터 배운 사실적인 수법과 판화공방에서 습득한 묘사력이 전부였습니다. 총 143점의 회화 작품 중 55점이 그녀의 자화상입니다. 자신을 가장 오랫동안 보고 관찰했으니까요.
여전히 국립학교에 벽화 작업을 하고 있던 디에고 리베라에게 젊고 당돌한 프리다가 자신의 그림을 평가해 달라며 다가옵니다. 디에고는 프리다의 그림에서 가능성을 본 것 같습니다. 프리다의 예술적 재능을 가정 먼저 알아챘던 사람이고요. 젊고 당돌한 그녀가 매력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합니다. 서로를 향한 감정은 자연스럽게 결혼으로 이어지고요.
뚱뚱한 코끼리
여성편력
공산주의자
나이는 40대
4명의 아이들
2번의 이혼
당시 디에고 리베라의 현주소입니다. 어느 부모가 22살 딸을 이런 남자에게 시집보내고 싶을까요?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프리다 칼로는 명성과 몸집이 모두 산과 같았던 디에고 리베라의 세 번째 아내가 됩니다. 그녀가 그린 <디에고와 본인>이란 그림을 보면 아버지와 딸 같아요. 이미 남편은 멕시코 벽화의 일 인자가 되어있었습니다. 프리다는 이제 그림을 막 시작한 상태고요. 그 차이가 둘의 등치만큼이나 커 보입니다.
프리다는 자신의 힘으로 생계를 유지하고 싶어 했어요. 남편의 동의 아래 남편 성이 아닌 결혼 전 성 그대로 쓰며 살고 싶어 했고요. 부부가 집을 지을 때 건물을 두 채로 분리하고 각 건물을 다리로 연결해 드나들게끔 만듭니다. 상호 독립적이면서 의존적 부부의 독특한 관계를 드러낸 것 같습니다. 주변을 봐도 같은 일을 하는 부부들이 서로의 작업을 간섭받고 싶어 하지 않아요. 가장 가까운 사람의 비평이 다른 사람보다 더 날카로워 상처받기 쉽거든요.
<The Love Embrace of the Universe, the Earth>, Mexico/그림출처: Artchive
과거에 겪었던 교통사고 후유증은 그녀가 평생 아이를 원했지만 세 번 모두 유산합니다. 유산 후 자신이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여동생 크리스티나와 디에고의 관계를 알아채고 이혼을 결심합니다. 그녀는 그 사건 이전과 이후로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내 평생 겪은 두 차례의 대형 사고는
전차가 나를 들이받은 것
리베라를 만난 것
프리다는 잦은 바람기로 소유할 수 없는 디에고의 아내나 애인이 되기보다 그의 최고의 동료가 되는 것이 현명한 일임을 깨닫게 됩니다. 예술적 영감을 여성에게 찾았던 바람기 대마왕 남편 디에고는 프리다의 그림 속에서 순식간에 아이로 등장합니다. 르네상스 시절 20대의 조각가 미켈란 젤로가 <피에타> 작품의 불가능 한 부분을 성모 마리아의 풍성한 옷주름으로 가렸듯이 프리다의 이 작품을 보고 있으면 멕시코판 <피에타> 같다는 생각과 함께 디에고를 모성애로 다듬고 창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 까 추측도 해봅니다. 프리다가 세계를 통찰하는 신(지혜)의 눈을 가지고 있는 남편 리베라를 안고 있는 모습이 오죽하면 그랬을까 연민이 가기도 하고요.
초 현실주의 거장인 앙드레 브르통이 그녀의 그림을 높이 평가해 주기 시작합니다. 뉴욕의 쥴리앙 레비(Julien Levy)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개최합니다. 그때 화랑 수는 얼마 되지 않았고, 전위적인 작품을 중심으로 다루는 화랑은 더 적었던 탓에 프리다의 전시회는 중요한 문화적 사건으로 여겨졌습니다. 첫 개인전에서 프리다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언론의 주목도 받게 됩니다. 경제공황이 미국 전역을 휩쓸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시된 총 25점 중 반이나 팔려 나갔다고 합니다. 전시장을 방문한 사람 중 상당수가 화가에게 새 작품을 위로했을 정도로 말이죠.
개인으로서는 서로 차고 모자라는 부족한 부부였지만 예술적인 동료로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았던 부분은 간과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숱한 염문으로 바람 잘날 없었던 그였지만 예술가로서의 남편은 존경했거든요. 남편 디에고 역시 마찬가지고요.
점점 약해져 가는 프리다를 위해 지인들과 함께 멕시코에서 첫 개인전을 열 수 있도록 전시회 준비를 합니다. 지인들이 궁리 끝에 카사 아술의 침대를 갤러리에 옮겨 프리다의 그림들 사이에 놓아줍니다. 밖에는 구급차를 준비시켜 놓고요. 그림을 보러 온 갤러리들과 자신의 그림들 사이에서 작가만이 누릴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을 갖게 된 거죠. 개인적으로 '디에고의 아내이자 프리다의 남편'이 둘의 용어가 합쳐져야 진정한 멕시코 예술이 될 테지요.
나의 평생소원은 단 세 가지,
디에고와 함께 사는 것,
그림을 계속 그리는 것,
혁명가가 되는 것이다.
-프리다 칼로-
<디에고와 나>,1949/그림출처:동아일보
2021년 소더비 경매장에서 진행한 '모던 이브닝 옥션(Modern Evening Aaction)'에프리다 칼로의 작품 <디에고와 나>가 경매에 올랐습니다. 남미 현대 미술품 경매 최고가인 3,490만 달러(약 413억 원) 경신해 화제가 되었고요. 2018년 980만 달러 (약 115억 원)에 낙찰된 남편 디에고 리베라의 <경쟁자들>을 훌쩍 뛰어넘는 가격이었거든요. <디에고와 나> 작품은 지혜의 눈이 있다고 여겨지는 중간에 디에고의 그림을 넣음으로써 떨어질 수 없는 둘의 관계와 디에고를 소유하고 싶은 그녀의 마음을 잘 표현해 낸 그림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프리다 칼로의 팬분들은 '칼로 최후의 복수'라며 그녀 편을 들기도 했습니다. 비록 그곳에서 만날 일은 없겠지만 말이죠.
평생 그의 명성에 가려 디에고의 아내 프리다 칼로로 대중에게 잊혔던 존재입니다. 그녀가 죽은 지 약 20년이 지나 1970년대 미국 미술사학자 린다 노클린(Linda Nochlin)< 왜 위대한 여성 예술가는 없었을까?>라는 책을 통해 페니미즘 운동의 아이콘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디에고의 아내 프리다 칼로가 아니라 예술가 프리다 칼로로 말이죠. 그녀의 활활 타오르고 싶었던 삶과 평생 따라다녔던 육체적 고통, 심리적 힘듦을 솔직하게 작품으로 남긴 그녀를 많은 사람들이 기억해 주기 시작합니다.
< The Two Fridas>, 1939/ 위키피디아
남미의 화가로서 처음으로 루브르 박물관에 작품이 소장되는 영예를 안았습니다. <두 명의 프리다 (The Two Fridas)>는 남편 리베라와 결별한 후 3개월 만에 완성한 작품입니다. 사람들은 이 그림이 프리다의 이중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객관적으로 그녀 안에 내재된 두 가지면, 즉 유럽인인 동시에 멕시코 토착인이며, 무덤덤한 동시에 과격하고 상심한 동시에 분노를 터트리는 모습을 한꺼번에 보여주고 있는 점이 그렇게 보이나 봅니다.
작품 속 두 Frida의 마음은 정맥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남편 디에고와의 이혼으로 힘들었거든요. 손을 꼭 잡고 있는 모습이 퍽 인상적입니다. 마치 결혼 전과 후를 상징하듯이 말이죠. 또 각각 다른 의상을 입고 있습니다. European Frida와 Mexican Frida로 말이죠. 오른손에 수술용 가위를 들고 있는 유럽인 프리다는 그녀의 아름답고 식민지풍의 하얀 드레스가 피로 물들어있습니다. 멕시코 프리다는 왼손에 남편 디에고 리베라의 어릴 적 미니 초상화를 들고 있고요. (구글에서 줌인해 보면 보입니다.) 프리다의 육체적, 정서적으로 상처 입은 마음을 잘 표현해 놓았습니다.
멕시칸 프리다의 모습을 남편 디에고 리베라가 더 좋아했다고 하네요. 그림의 배경은 검은색과 회색이 결합된 여러 가지 흰색 음영으로 하늘을 표현하고 있고요.
<Viva la Vida, Watermelons>,1954/그림출처:Arthive.com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프리다 칼로의 마지막 일기 중-
사망하기 8일 전 수박들의 단면을 통해 자기 인생의 고통스러웠던 면을 승화시킨'Viva la Vida'라는 그림입니다. 프리다는 다채로운 모양으로 잘라 놓은 수박을 그려 자신의 삶을 묘사했습니다. 그녀는 풍랑 치듯 힘들었던 지나온 시간을 부드러운 수박 속 살에 'Viva La Vida''인생이며 만세'란 말로 예찬합니다. 그녀의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알았던 걸까요? 사랑에 담대했으며, 자신의 인생 자체도 고통스러울 텐데 사는 동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 모습이 우리가 그녀를 주목하는 이유일 것 같습니다. 마치 자신을 찾아오는 방문객들을 향해 프리다는 본인의 삶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주어진 현실 안에서 창조하며 살라고 마지막 한 마디를 건네는 것 같습니다. 1954년 7월 13일 (47세)로 사망하게 됩니다.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가장 잘 아는 이유 때문에
나를 묘사한다....
나는 아프지 않고, 망가져 있다....
그러나 나는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한 살아있는 것이 행복하다...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 사이를 저울질하고 있을 누군가에게 울림으로 다가가지 않을까 싶습니다
첼리스트 재클린 뒤 프레&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사진출처: 멜론
1년에 두 차례 아이들 연주회에 부모들이 초대됩니다. 이곳저곳 맞지도 않는 소리로 삑삑거리는 통에 연습실은 시장통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도 나름 정장차림에 뽐내고 왔으니 일상의 흐트러진 모습과 사뭇 달라 또 다른 아바타를 보는 느낌이 듭니다. 아이들의 어설픈 연주가 부모들의 열띤 환영 차원에서 끝날 즈음 원장님의 첼로소리로 마무리가 됩니다.
일상의 원장님은 밋밋한 중년의 "땡땡이 엄마~."하고 부르면 금방이라도 소리 나는 쪽을 향해 몸을 돌릴 듯합니다. 자기 키만 한 첼로를 안고 현을 켜기 시작합니다. 저음의 묵직한 소리가 밑바닥을 치며 천천히 올라옵니다. 살랑거리는 소리는 작은 몸집의 그녀를 첼로와 부르스 타임으로 바뀌게 합니다. 강하게 현을 켤 때 작은 몸이 들썩거리며 좌중을 쫘악 청소기처럼 빨아들입니다. 일그러진 그녀의 얼굴이 그냥 아름답다 느껴지는 순간입니다.
젊은 엄마시절 첫 번째 첼로와의 만남은 아이들 음악학원 원장님을 통해서입니다. 운전석 한 자리를 제대로 차지하고, 들고 다니는 내내 어른들의 손에 이끌려 옮겨지기 일쑤입니다. 큰 덩치덕에 특별 대우는 기본값이 되었고요. 그렇게 적당한 거리에서 일 년에 한두 번 만나는 것이 전부였지요. 그러다 좋아하는 작가의 에세이를 통해 재클린 뒤 프레를 알게 되었고 그녀의 시간이 궁금해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v9Fbzx6kVE
재클린의 짧았던 42년 인생은 극명한 명암의 대비로 드러납니다. 생애 첫 14년 동안은 사랑하는 부모님 밑에서 행복한 '사랑스러운 딸'로서 장래가 가장 촉망되는 소녀로 보냈습니다. 첼리스트로 데뷔한 14세부터 14년간은 온 국민의 사랑과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자랑스러운 '영국의 딸'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14년 동안, 그녀는 혼자만의 고통과 더할 수 없는 슬픔 속에서 세상에서 잊혀간 '어둠의 딸'로서 생을 보냈습니다.
1987년 이미 사람들의 마음속에 재클린의 미소와 금발의 기억이 희미해졌을 때였습니다. 영국발 통신들은 " 한때 음악계의 신성이었던 첼리스트 재클린 뒤 프레 여사가 다발성 경화증에 의한 호흡근육의 마비로 쓸쓸히 사망했다."라고 전 세계에 타전했습니다. 그녀 나이 42살이었습니다.
프리다 칼로와 재클린 뒤 프레!!!
그녀들은 지금 가고 없습니다. 둘 다 한창 싱그러운 나이 22살 나이에 결혼을 하고 병으로 고통받다 40대 한 창 무르익을 나이에 사망한 점 등 둘 사이의 공통점이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첼로를 대하고 그림을 그릴 때 지녔던 두 사람의 마음가짐은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귀한 마음이란 생각을 합니다. 그녀들의 예술을 향한 순수한 열정이 '마젠타 핑크'닮아 기분 좋은 설렘으로 보는 이들 듣는 이들을 향해 다가갔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들의 시간은 끝이 있지만 그녀들이 남겨 놓은 작품들은 시간과 공간은 넘나들며 사람들의 깊고 깊은 심연을 건드려 줄 겁니다. 말 그대로 인생보다 예술이 더 길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