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을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에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황지우 시인이 기다리는 것은 민주화였을지 모르지만 이 시를 읽는 대중들은 그, 그녀로 대표되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먼저 떠올렸을 겁니다. 저도 그랬으니까요. 크리스마스 연휴기간이라 타 주에 있던 가족들이 다양한 교통수단을 통해 그리운 가족들을 찾아오는 시간입니다. 그들이 좋아하는 음식재료를 찾아 장보기를 하고 먼지 쌓인 방을 환기시키고 잠자리를 매만지며 조용하던 집 안팎이 생기가 돕니다. 마음이 바빠지기 시작하고요.
며칠 남지 않은 날 수를 헤아리며 한기 어린 추위를 녹여줄 만한 뜨끈한 아랫목 같은 장소나 사람을 찾게 됩니다. 이도저도 아니라면 마음의 온도를 올려줄 만한 그림 한 장 어떠실까요? 노먼 퍼시벌 록웰(Norman Perceval Rockwell, 1894년 2월 3일 - 1978년 11월 8일)의 작품들을 보면 따뜻한 작가의 시선이 보는 이의 마음도 데우고 웃음 짓게 합니다. 팍팍한 현실을 자신의 작품 속에서만큼은 따뜻하고 경쾌한 시선으로 이야기를 전달하지요. 마치 인상파 화가 르누아르와 결이 같아 보입니다.
뉴욕태생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사업가였고 록웰에게 어릴 적 책을 많이 읽어주어 그의 그림 속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합니다. 14살 때부터 뉴욕에 있는 여러 미술 대학에서 공부했습니다. 16살 그는 생애 초초로 4장의 크리스마스카드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을 받습니다. 18살에 본격적으로 'Boys Life"라는 책의 삽화를 그리며 전업 화가가 됩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대부분의 작가들은 전쟁의 비탄과 비극을 작품에 담았지만 록웰은 아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주로 그립니다. 젊은 시절 파리로 가서 20세기 현대미술운동에 참여하려다 포기하고 미국으로 돌아옵니다. 이후로 미국 중산층의 생활 모습을 친근하고 인상적으로 묘사한 작품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당시 미국 시민의 대부분이 구독했던 <새터테이 이브닝 포스트(The Saturday Evening Post>지의 표지 그림을 50년 넘게 그립니다. 한평생 잡지 일러스트를 그리며 살았지요.
피카소도 훌륭하지만
나도 훌륭하다는 말을
누가 한 번이라도 해주면 좋겠다.
이 시기에 광고성 그림과 책의 삽화를 담당하는 소위 "일러스트레이터"는 예술가로 간주되지 않았습니다. 돈을 내고 구입할 만한 작품이라는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을 수도 없었고요. 그래서 대부분의 그림들이 쓰레기가 되어 소각된 작품들이 많습니다. 지금은 엄청난 값어치를 자랑하지만요.
그는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사진이라는 신매체를 적극활용합니다. 지금 AI를 이용해 창작을 하거나 비즈니스 모델을 만드는 것처럼 말입니다. 모델들에게 직접 연기지도를 하기도 하고요. 당시 편법이라는 시선도 존재했습니다. 그래도 그는 당대에 가장 많은 팬을 가진 화가로 서민들의 응원을 받으며 두터운 팬층을 확보합니다. 대표적으로 코카콜라, 콘프레이크 등 수많은 광고 속에서 그의 작품이 보이기 시작하며 전 세계 사람들의 감성을 사로잡습니다.
그가 오랫동안 활동했던 <Saturday Evening Post>라는 미국 잡지가 궁금해집니다. 18세기 벤저민 프랭클린이 창간한 Pennsylvania Gazetle를 출판했던 동일한 인쇄소에서 1821년 첫 출판을 하게 됩니다. Ladies Home Journal의 발행인 Silas H.K.Curtis가 1897년 Post를 $1000 구입합니다. Curtis Publishing Company의 소유하에 <The Saturday Evening Post>는 미국에서 가장 널리 출판되는 주간지로 성장합니다. 시사기사, 사설, 인간미 넘치는 기사, 유머 삽화, 논평칼럼, 시 등을 게재했고요. 단편 개그만화, 당대 주요 작가들의 이야기 등도 있습니다.
1916년 <Saturday Evening Post> 편집장 George Horace Lorimer는 당시 22살의 무명 뉴욕 예술가였던 Norman Rockwell을 발견합니다. 그의 일러스트레이션을 구입하여 표지로 사용했으며 세 장의 그림을 더 의뢰합니다. 이후로 Rockwell의 미국 가족과 옛 시골 생활에 대한 삽화는 아이콘이 됩니다. 그가 50년 동안 근무하며 300개 이상의 표지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되고요. Agatha Christie, F. Scott Fitzgerald, Edgar Allan Poe, John Steinbeck 등 이 주간지를 통해 경력을 시작하고 유명한 예술가와 작가들로 생존할 수 있도록 도운 잡지이지요. 경영문제로 폐쇄되었다가 비영리 단체인 Saturday Evening Post Society로 넘어가며 2013년 1월 /2월호를 발행합니다. 2018, 10월부터 온라인으로 바뀌었고요.
그가 살아낸 시대는 역동적이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세계 경제 대공황, 미국대중문화와 발달, 인종차별주의 운동 등 미국의 현대사를 관통합니다. 그의 삽화에는 미국의 대통령 루스벨트, 케네디, 레이건의 인물 초상화와 당대 유명정치인의 초상화가 함께 있습니다. 딱 그 나이대의 그 시대를 살아 낸 미국인의 모습을 인물표정이 생생하고 입 딱 벌어질 정도로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의 힘으로 이렇게 많은 작품을 지치지 않고 펴낸 것에 놀랍기도 합니다.
<Home for Thanksgiving >,1945/Pinterest#<The American Way>,1944/WikiART
앞치마를 두르고 익숙한 자세로 감자껍질을 반쯤 깎은 늙은 어머니는 추수감사절 맞아 집을 찾아온 아들 안색부터 살핍니다. 기쁘기도 하지만 그새 별일 없었는지 아들의 신상이 궁금해집니다. 자세히 보니 오뚝한 콧날이 엄마를 닮았네요. 가족들의 안부를 전해주며 늙은 어머니는 찾아와 준 아들이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애인은 생겼는지 주변 지인들과 잘 지내는지 근황을 묻고 시시 껄껄한 대화로 그간의 거리를 좁힙니다. 아들이 던져주는 단어 하나하나에 듣고 있던 나이 든 어머니는 실로 문장을 꿰듯 젊은 아들의 맥락을 빠르게 이해하려 경험이라는 오감을 총 동원합니다. 그저 들어주는 것 같지만 문제점과 해결점도 떠올리며 한 마디 해 주고 싶은 충고는 할까 말까 망설이기도 하면서 말이죠.
몸집이 커져 맞지 않는 의자에 걸터앉은 아들은 나이 든 엄마 앞에 소년이 됩니다. 감자 깎는 일을 거들며 철들어 가는 아들은 주섬주섬 객지에서 겪었던 일들을 풀어내기 시작합니다. 둘 사이에 화기애한 분위기로 보아 모자간의 사이가 좋았던 모양입니다. 사심 없이 들어주는 어머니 덕에 찬바람 씽씽 불던 구멍 뚫는 아들 마음으로 훈풍이 불어옵니다. 가을걷이로 주변을 가득 메운 오렌지 색 호박과 바구니 가득 담긴 신선한 과일들로 세간살이 많지 않은 부엌이 풍요로워 보입니다. 선물같이 와 준 아들이 한몫했고요.
완전군장을 하고 전쟁터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젊은 아빠는 어린 딸이 마음에 걸립니다. 잠시 총을 내려놓고 딸아이와 눈높이를 맞춘 채 한 술 떠 먹이고 싶습니다. 함께 있어주지 못하는 마음 한 숟갈, 다시 못 볼 지도 모른다는 마음 두 숟갈, 살아 돌아오면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결심 한 숟갈... 맨 발의 어린 딸은 그런 젊은 아비의 간절한 마음을 알았는지 입을 크게 벌려 먹으려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이 진행 중이던 시점이라 안팎으로 어수선한 분위기였을텐데 낡은 사진 같은 이 그림 한 장이 마음 한편을 덥히고 갑니다.
<Christmas Homecoming>,1948/arthur.io
며칠 뒤면 이곳저곳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지요. 남편이 돌아왔나 봅니다. 앞치마 바람의 아내는 목을 껴앉고 격렬하게 포옹합니다. 뒷모습만 보인채 미처 잠그지 못한 옷 가방에 슬쩍 삐져나온 속옷이 급하게 서둔모양입니다. 가족들 줄 선물 잔뜩 옆구리에 끼고 양손이 무거운 그는 흰 이를 드러내며 반가워하는 그들이 선물처럼 다가옵니다. 아버지의 모자를 받아 든 어린 아들은 안보는 사이 제법 의젓해졌습니다. 쌍둥이처럼 보이는 양 옆에 자리한 딸들은 엄마 마음처럼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있네요. 그를 맞이하는 가족들 표정이 살아있습니다. 반가움을 감추지 못해 눈빛으로 먼저 마음을 보냅니다. 그새 식구가 한 명 더 늘었네요. 안고 있는 똘망한 아이와 첫 만남이니까요. 의심의 눈초리로 곰방대를 물고 있는 남자는 좀 거슬립니다. 삐딱선 타는 사람이 가족들 중 한 명은 있을 테니까요.
당시에 저평가되었지만, 록웰의 작품을 보고 자란 세대가 문화의 중심이 되자 상황은 반전됩니다. 세계적인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와 '조지 루카스'감독이 그들입니다. 어린 시절 보고 자란 록웰의 그림들이 이들에겐 영감의 원천인 것이지요. 두 거장은 경제적 자유가 오는 순간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일이 록웰의 작품을 구입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2002년 기사 하나가 떴습니다.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했던 일러스트레이터 '노먼 록웰의 도난당한 그림 한 점이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의 사무실에서 발견되었 다는 것인데, 소장자인 스필버그는 '장물'인 줄 알지 못하고 구입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스필버그가 구입한 록웰의 작품은 <러시아 교실>이라는 작품으로 실제 러시아(당시 소련) 학생들의 수업장면을 그린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1973년 6월 25일 미주리주의 클레이튼 미술관에서 사라졌다고 합니다. 지난 1989년 합법적인 경로로 이 작품을 구입한 스필버그 감독은 영화 제작자 중 한 명이 FBI에 수사를 의뢰해 알게 된 거라 하네요. 이것이 도난 작품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으로 확인 됐고요. 미술품 감정사들과 FBI의 조사 결과 진품으로 판명된 이 작품의 초기 감정가는 약 70만 달러(약 6억 6000만 원 )입니다. 공산주의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의 흉상이 놓인 교실에서 천진난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러시아 학생들의 모습을 그린 그림입니다.
<The Music Man>,1966/WikiART
자신이 뮤지션이라도 된 듯 혼신을 다해 부릅니다. 치켜뜬 눈, 아기 주먹 하나 들어갈 법한 벌려진 입, 제법 코드를 잡고 흉내를 낸 손가락 두 마디, 운동화 끈 마저 공중에 춤을 추는 땅에서 들려진 두 발... 고음을 질러 대는 듯 옆에 서 있던 동생은 사력을 다해 두 손으로 귀를 막습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말입니다. 꽉 다문 입술이 "닥쳐. 제발 그만해. 그만하라고!" 라며 쏘아붙이고 금방이라도 도망갈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올려다보는 강아지의 표정이 더 압권입니다. "땡땡 아~, 그만해. 많이 들었다 아이가"라는 투로 안 그러면 개무시할 표정으로 읽힙니다.
<Girl at Mirror>,1954/WikiART
머리를 곱게 땋은 앳된 소녀가 야릇한 표정을 지어 보입니다. 가지고 놀 던 인형은 처박아 놓은 채 말이죠. 엄마 서랍에서 가져왔을 머리빗, 립스틱이 나동그라져 있고요. 요 녀석 무르팍에 어른들 보는 잡지가 펼쳐져 있는 걸 보니 멋있다 생각하는 표정을 따라 해 보고 있는 중인가 봅니다. 제 눈에 꾸미지 않은 모습이 아이다워 좋은 데 말입니다. 어른들 세계가 부러운가 봐요. 쥐 잡아먹은 것처럼 빨갛게 칠하다 엄마한테 등짝 스매싱 당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요. 이 아이도 어른이 되면 알겠죠! 돌아갈 수 없는 그 시절이 가장 행복하고 아름다운 시간이었음을 말입니다.
<The Runaway>,1958/Artchive
빨간 괴나리봇짐에 엉성하게 끼운 나뭇가지! 어린 소년이 집을 나온 모양입니다. 어젯밤 부모님께 혼났을까요? 형제들과 다투고 나온 걸까요? 아무도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지 않아 그런 걸까요? 어딜 간들 눈에 띄었을 어린 도망자를 경찰이 알아봅니다. 혼자 꽤 먼 길을 걸어왔을 테니 먹을 것부터 챙겨 먹이려 근처 가게로 데리고 갑니다. 담배를 머금고 깍지 낀 채 경찰로 보이는 임시 보호자와 함께 앉은 발칙한 이 녀석의 얘기가 주인은 궁금한 가봅니다. 대충 이해가 간다는 듯 웃음기 머금은 미소가 '고 녀석, 제법이네.' 하는 표정 같고요. 대롱거리는 어린 도망자의 자그마한 엉덩이와 꽉 낀 경찰의 궁둥이만큼의 차이는 다정한 눈빛들 속에 해프닝으로 끝날 거라는 암시를 주는 것 같아 입꼬리가 올라갑니다.
<Breaking Home Ties>/The Saturday Evening Post
<집을 떠나며>라는 제목의 부자지간의 시선이 서로 반대방향인 것이 눈에 뜨입니다. 다가오는 미래에 아들은 이미 넋을 빼앗긴 듯 보입니다. 홍조 띤 얼굴로 목을 길게 빼고 어서 이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고요. 큰 세상으로 나가는 아들에게 대견한 마음 저편에 앞으로 겪게 될 호의적이지 않은 앞날이 아버지는 먼저 걱정이 됩니다. 허름한 작업복 차림의 아버지는 건네고 싶은 말이 많습니다. 투박하게 굵어진 손은 애꿎게 낡은 모자만 만지작 거리며 떠나는 아들에게 막상 해줄 말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날 세워 다린 아들의 양복바지 위에 어머니가 싸준 도시락은 아직 따뜻합니다. 그나저나 이제 산책은 누가 시켜 주나요. 이별을 슬퍼하는 반려견의 시무룩한 표정이 아들의 설렘을 잠재우기 역부족으로 보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6S-3HZ2JBWk
매사추세츠주(Massachusetts) 노먼 록웰박물관 자료들이 최근 디지털화 되면서 그의 따뜻한 그림들은 더 오랜 세월을 그들의 이웃들과 그들의 후손들과 함께 더 풍성한 이야기를 품게 되었습니다. 꾸며내지 않은 리얼한 표정들 속 록웰의 모델들은 방문객들의 마음에 유년의 따뜻했던 어느 날로 타임머신을 돌릴지도 모르겠습니다.
/Pinterest
그나저나 올해 산타 할아버지는 고민이 많을 것 같습니다. 분쟁과 전쟁으로 살펴야 할 곳도 사람도 많아져서 말입니다. 준비할 선물 꾸러미도 다양할 것 같고요. 무엇보다 고집부리는 애 어른들 혼 낼 만한 뿅 방망이 기념으로 하나 받고 싶은 마음 전달합니다.
"말은 할수록 자라난다."라는 말이 있지요. 가족들이 모여도 항상 기쁠 수만은 없는 것이 현실인 것 같습니다. 관계라는 틀을 벗어나 살 수 없는 것이 또 인간이고요. 아무쪼록 주고받는 진심 어린 말 한마디로 서먹했던 가족관계 다독여 보는 시도 어떨까요? 그림 속 아이가 입 크게 벌리고 "Gramma~"하고 달려갈 부모님이 계시고 따뜻하게 맞아 줄 강아지나 반려동물까지 포함한 가족이 계신 분들이 라면 존재 자체만으로도 행복한 시간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Have a Merry Christm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