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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어디로 굴릴까?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





희망의 바깥은 없다/도종환 




희망의 바깥은 없다 

새로운 것은 언제나 낡은 것들 속에서 싹튼다 

 얼고 시들어서 흙빛이 된 겨울 이파리 속에서

 씀바귀 새 잎은 자란다 

희망도 그렇게 쓰디쓴 향으로 

제 속에서 자라는 것이다. 

지금  인간의 얼굴을 한 희망은 온다 

가장 많이 고뇌하고 가장 많이 싸운 

곪은 상처 그 밑에서 새살이 돋는 것처럼

 희망은 스스로 균열하는 절망의 

그 안에서 고통스럽게 자라난다 

안에서 절망을 끌어안고 뒹굴어라

 희망의 바깥은 없다 








 1988년 9월 17일 1시 10분 !!!

잠실 주 경기장에서는 서울 88 올림픽 개막식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전 세계의 시선이 쏠린 그 순간 화려한 공연이 끝난 후 갑자기 긴 정적이 찾아옵니다.  실수인가? 했더니 , "삐이~"하는 쇳소리와 함께 흰 모자를 쓴 소년 하나가 굴렁쇠를 굴리며 중 심원 쪽으로 다가가고 있었습니다. '실수하면 어쩌나.', '무사히 갔으면...'이런 쓸데없는 조바심도 아이의 굴렁쇠와 함께 굴려지고 있었지요. 특별한 음악이나 안무, 사람들의 도움 없이 혼자서 굴렁쇠를 굴리며 운동장을 가로질러갑니다. 그리고는 한가운데에 서서 해맑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다시 왔던 길을 또 그렇게  지나갑니다. 




1분 동안 펼쳐진 꼬맹이의 퍼포먼스는 화려한 개막식과 함께 큰 여운을 남겼습니다. 88 올림픽의 상징이자 대표 이미지가 되었고요. 당시 88 올림픽 개폐막식 총괄기획을  맡았던 고 이어령 선생님이 강하게 밀어붙여 성공적으로 선 보일 수 있었던 퍼포먼스라고 합니다.  한국이 전쟁고아  이미지를 세계인들의 뇌 속에서 지우고 미래의 한국을 돌린다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던 퍼포먼스라고 합니다. 당시 미국과 소련이 냉전 시대를 끝내고 모두 참가한 평화의 올림픽이기도 했습니다. 굴렁쇠 자체가 원 모양이니 동양적인 이미지와 함께 '평화'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하고요. 아무런 장치적 효과 없이 '정적'을 고수했던 이유도 전쟁 및 냉전으로 시끄러운 어른의 세상과 대조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당시 시골에서 망가진 자전거 바큇살을 돌리는 것이 굴렁쇠 놀이라 생각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88 올림픽에 퍼포먼스 하는 도구로 사용했던 저 물건이 진짜 굴렁쇠라고 부른다는 사실을 TV를 통해 많은 아이들이 알게 되었죠. 프랑스 유명 평론가는 행위예술로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개회식에서 한 소년이 홀로 대형 종이배를 타고 물을 가로지르는 모습으로 패러디되기도 했습니다. 제게도 굴렁쇠 소년이 지나간 자리가 '평화'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깊은 울림과 여운으로 저장되어 있습니다.






윤태웅(1981,9,30 /서울 올림픽 개최가 확정된 날 태어남)/www. insight.co.kr  # <Mystery and Melancholy of a Street>,1914


<children’s Games>1560, Pieter Bruegel, /NYCultureBeat





제목 부분에 그리스 조각과 고무장갑 혹은 수술용 장갑처럼 보이는 물체가 나란히 한 공간에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The Song of Love>라는 키리코의 대표 작품으로 '사랑의 노래'라는 아폴리네르의 시에서 영감을 얻어 그렸다고 합니다. 제목이 '사랑의 노래'인데 어디에'사랑'이란 느낌을 표현한 걸까요? 기존에 알고 있던 '사랑'의 표현과 달라도 너무 다릅니다. 마치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턱시도에 검정 고무신 신은 것만큼 이질적이고 낯설어 당황스럽기까지 합니다. 있어야 할 곳이 아닌 있어서는 안 될 곳에 물건이 있어 사실적이면서도 낯설게 하는 것이 그의 그림의 특징입니다. 그리스 조각과 고무장갑이 쉽게 '사랑'의 이미지로 연결이 되지 않아 갸웃 뚱한 것처럼 말이죠. 배경이나 제목 등이 더 수수께끼 같습니다. 전혀 연관성 없어 보이는 투박한 오브제들을 모아 놓고 형이상학적인 제목을 붙여 보는 이를 불편하게 하는 면도 있습니다.






그의 작품 <거리의 신비와 우울(Mystery and Melancholy of a Street,1914)>입니다. 낮시간처럼 보이는 환한 거리를 굴렁쇠를 굴리며 한 소녀가 달려가고 있습니다. 음영이 짙은 기하학적으로 렌더링 된  건물들 사이로 멀리 긴  그림자 하나가 길게 늘어서 있습니다. 그림자의 윤곽을 보아하니 꽤 커 보입니다. 소녀는 이 사실을 눈치챘을까요? 보고 있는 우리가 혹시 하는 마음에 엄습해 오는 그 그림자를 소녀와 번갈아 가며 쳐다보게 됩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어디 우회해서 갈 수 있는 길은 없나 그림을 다시 쳐다보게 되고요. 우리 내면의 불안감 때문이지요. 이렇게 환상에 기반을 둔 것 같은 모호하고 중의적인 접근법 때문에 그의 그림이 더 강렬한 놀라움으로 다가서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 이런 낯선 그림들이 왜 등장했을까요? 

하늘에서 뚝 떨어진 걸까요?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스페인 독감(1918-1919) 

세계경제 대공항(1929)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맞아요.

가장 격렬한 전쟁과 재앙이 민족주의와 독일의 제국주의와 합쳐지며 유럽을 집어삼켰습니다. 천재이기전에 한 인간인 예술가들 역시 고통과 절망으로 힘들어했고요. 인명살상이 엄청났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만 해도 크리스마스 안에 돌아올 거라 생각하고 가볍게 떠났던 전쟁 길었습니다. 전쟁에 자원했던 젊은 예술가들 역시  4년 여를  끌며 이렇게 엄청난 인명이 소모품처럼 취급될 것이라 아무도 몰랐으니까요. 사진술이 요즘처럼 정교화되어있지 않아 화가들이 직접 최일선에서 기록을 남겨야 했습니다. 그 말은 가장 잔인한 장면을 하루에 밥 먹듯이 볼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고요. 죽거나 살아 돌아와도 예전의 맑은 정신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전쟁 전과 후가 타임머신이 있다면 돌리고 싶은 정도로 말입니다. 





전쟁에 직접 참가하지 않았던 예술가들은 기존의 예술작품이 인간의 인간성, 지성, 감성에 도움을 제대로 주지 못했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예술이 대중의 삶에 역할을 했다면  전쟁이라는 무의미한 자기 파괴, 자기 학살을 저질렀을 리 없다는 생각에 이른 거지요. 제1차 세계대전 이후로 예술가들은 기존 예술에 반기를 들기 시작합니다. 뒤샹이란 화가는 기존 변기통을 <샘, 1917>이라 이름 부쳐 작품이라 우기기도 했으니까요. 반이성, 반 도덕, 반 예술을 표방하며 '창조'가 아닌 '파괴'에 방점을 둔 다다이즘(1915-1924) 나타난 시기도 이즈음입니다. 





  "어떠한 양식에서 이 사람들이 그림을 그렸어요?" 하고 물을 텐데 다다(DADA)는 "의미 없음'을 뜻합니다. 전쟁에 반대하는 예술가들이 모이게 되었고 어떻게 하면 기존의 예술계를 부숴버릴 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집단이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기존 예술계를 만든 것이 부르주아 계층인데 더 이상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한 예술을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뭔가 새로운 것, 기존 예술을 벗어날 수 있는 무언가를 그들은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고 조형예술뿐만 아니라 문학, 음악의 영역까지 다양하게 포함합니다. 장르 특성상 내세울  만한 작품은 없습니다. 끝없는 부정과 파괴의 연속 속에서 창조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거든요. 이 사조는 초현실주의(surrealisme)로 넘어가게 됩니다. 







다다이즘을 극복하고 현실의 모순과 대립을 종합하여 새로운 통합의 세계를 제시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초현실주의 화가들은 기독교에 물들지 않은 원시미술을 재조명하고, 무의식의 세계를 현실의 공간 안에 위치시키려는 시도를 하게 됩니다. 당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이론도 한몫했습니다.  키로코 역시   꿈의 세계를 탐구하고, 알 수 없는 공포, 불안등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특히 고전적인 대리석상, 음영이 짙은 투시적 건물, 기계적인 형식이 얽히고설킨 근대 도시의 경치등이 그의 단골 메뉴였지요. 이와 같은 이질적인 대상물을 주관적인 자신의 기억과 끼워 맞춰 낯섦과 어딘가 몽환적이고 독특한 느낌을 만들어 냅니다. 






땅 위에(지상에)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종교보다
태양 아래를 걷는 사람의 그림자에는
 더 많은 수수께끼가 있습니다.

-조르조 데 키리코(1911)





                                         <The Disquieting Muses>,1916/Christie's








봉제선만 있으니 언뜻 보아 목각인형 같습니다. 지금 봐도 알쏭달쏭인데 당시 대중들은 그의 고전적인 것과 사물을 섞어 낸 이 작품들이 얼마나 난해했을까요. 뮤즈들은 키리코의 그림들에서 반복되는 또 다른 모티브입니다. 그가 이탈리아 페라라(Ferrara)에 사는 동안 그린 작품입니다. 배경에서 볼 수 있듯이 중세시대의 헤스텐스 성(Castello Estense)과 산업적인 벽돌 굴뚝으로 둘러싸인 광장을 특징으로 합니다. 





키리코는 건축의 실제 규모를 무시합니다. 언뜻 보면 불가사의한 정물화의 상징적인 물건들을 배치해 놓은 축소 모형 같습니다. 광장에 있는 유일한 인물(?)은 얼굴 없는 마네킹들입니다. 하나는 토가를 입고 등을 돌리고 선 채 있고, 다른 하나는 얼굴조차 없이 팔을 소매단에 넣은 채 앉아있습니다.  빨간 방패와 줄이 사선으로 있는 지팡이, 그리고 눈에 띄는 색깔 상자 하나가 삼각형 구도 안에 놓여있습니다. 전문가들은 비극과 희극의 뮤즈인 멜포메네(Melpomene)와 탈리아(Thalia)에 관한 암시라고 하네요. 두 마네킹 뒤쪽으로 그림자에 드리워진 받침대 위의 뮤즈는 아폴론 신이라고 하고요.  긴 그림자는 얼어붙은 고요와 묘한 불안의 공기로 공간을 채웁니다. 이 그림은 적어도 18개의 사본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복사본을 제작하고 부분적으로 이윤을 남기려는 목적도 있고, 그의 후기 작품들을 공격한 비평가그룹을 한 방 먹이려는 복수의 수단으로 사용했다는 말도 있습니다. 






1920년대 중반 들어 키리코는 루벤스 등 옛 화가들의 그림을 모사하며 화풍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여전히 대중은 그를 1909년에서 1919년 사이에 그린 초현실적이고 형이상학적 분위기의 건축적 그림을 그려내던 키리코로 기억하고 있었고요. 그의 스타일은 르네상스와 바로크 미술의 특징을 띠기 시작합니다.  그의 회화는 원조답게 여전히 초현실주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었고요.





 키리코는 형이상학적 회화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립니다.  그의 오랜 지지자들은 그를 비난했고요. 그의 후기 작품에 대한 초현실주의자들의 반감은 몹시 비판적이었습니다. 더군다나 변화된 화풍의 그림은 대중에게도 외면당합니다.  충분한 돈벌이로 연결되지 못했고요. 할 수 없이 자신의 과거 형이상학적 그림을 복사하여 판매하는 식으로  생계를 유지하게 됩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키리코의 작품은 진품 검증이 쉽지  않습니다.   이미 그의 그림 위조품이 많은 시장에 돌아 치열한 법정 다툼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가장 사실적인 묘사기법을 사용해
부조화를 창조할 때
우리는 현실과 상상의 경계를 넘나드는
 기이하고 오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Pieter Bruegel the Elder의 작품 <Childeren's Games>입니다. 16세기 플랑드르지역(네덜란드, 벨기에) 지역 아이들의 노는 모습입니다. 118cm*161cm로 패널에 유화 작품인데요 2m도 안 되는 작품 안에 대략 250여 명의 아이들이 꽉 들어차 있습니다. 당시 북유럽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담아냈는데 90가지 놀이가 그려져 있다고 합니다.  시간과 공간은 달라도 아이들 노는 모습은  창의적입니다.  PC로 대표되는 인터넷 기기들을 몸속 장기처럼 편하게 이용하는 요즘 아이들이  가상의 세계에 더 큰 집을 짓고 놀고  있긴 하지만요.





 두 소년이 굴렁쇠를 열심히 굴리고 있는 모습이 먼저 들어옵니다. 공기놀이, 드럼통 굴리기, 철봉놀이, 인형놀이, 피리 불고 북 치고, 말 타고 , 손바닥으로 빗자루 균형잡기도 있고요. 비보이처럼 바닥에 머리를 박고 빙그르 돌리는 아이도 있네요. 우리 눈에 반가운  팽이치기, 숨바꼭질도 보이고요. 가진 것이 부족하던 시절 상상력만큼은 갑으로 엄지 척입니다. 






2023년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초보심'이 바닥을 드러낼 때이고요. 삐죽하게 튀어나왔던 마음,  툭 던진 상대의 말에 가슴 끌였던 시간들, 원하는 모습에서 너무 멀리와 다시 되돌아갈 수도 없는 정체된 상황들, 남은 시간 교통정리 잘하시고 다가오는 2024년 새해 매끈한 굴렁쇠가 되어 스르륵 잘 굴러갔으면 좋겠습니다. 이왕이면 '희망' 이란 이름으로 말입니다.


그동안 부족한 글 읽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림출처

<Mystery and Melancholy of a Street,1914), Giorgio de Chirico/wikiArt 


<The Sonf of Love>,1914, Giorgio de Chirico/ en wikipedi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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