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오르는 두 사람의 예술가가 있다. 반항의 아이콘 '제임스 딘(James Dean:1931,2,8-1955,9,30/24세)'과 독일의 표현주의 작가 '에곤 실레( Egon Schiele: 1890-1918/28세)'가 그들이다.
<꽈리열매가 있는 자화상>,1912, 에곤 실레, Wikipedia
고흐의 꿈틀거리는 내면을 표현한 자화상, 고갱의 새로운 그림스타일의 최초가 되고 싶었던 거만스러운 자화상, 그리고 나쁜 남자 콘셉트 같기도 한 에곤 실레의 자화상을 마주하게 된다. 마치 '내가 제일 잘 나가.' 하는 표정 같기도 하다. 세련된 느낌의 매력남인데 어딘지 모를 불안감, 깨질 것 같은 연약함도 동시에 느껴지는 자화상이다. 실제로 자신이 제일 좋아하던 포즈였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그의 드로잉 작품 속 자화상을 본 첫 느낌은 유쾌하지 않았다. 깡마르고 뒤틀린 육체와 억지로 견뎌내는 듯한 모습이 거친 드로잉 선과 함께 시선을 사로잡았다. 유난히 예민한 작가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렬한 붓터치는 보는 이의 내면도 깊은 곳까지 훑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당시 비엔나의 사회 분위기는 어수선했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붕괴되고 , 진보 대 보수로, 왕정 대 시민사회로 불안이 일상화되고 향락문화가 발달하여 퇴폐적이었다. 그런 사회분위기 속에 에곤 실레가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소묘로 아버지는 에곤 실레에게 그림을 가르쳐 줄 정도로 자상한 사람이었다고 전한다. 아버지가 매독에 걸리기 전까지 말이다. 한때 유복했던 에곤 실레의 가정은 아버지가 매독에 걸려 그 부작용으로 정신 질환에 걸리고 폭력적 성향이 심해지면서 가세가 급격히 기울기시작한다. 일상이 되어버린 부모님들의 다툼은 불안한 유년시절로 이어지고 매독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아버지의 육체를 보며 인간의 몸이 아름다운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누드에 집착하기 시작한다. 당시 매춘문화에 관대했던 신사들의 이중성을 적나라한 누드화를 통해 고발하고자 그리기 시작했다는 설도 있다.
그의 누드화는 예술과 외설의 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것 같다. 얼마나 적나라하고 자극적이고 직설적인지 혼자 보아도 누군가 옆에 없나 확인작업을 거치고 나서 봐야 할 듯하다. 당대 최고의 클림트의 그림이 품위 있고 우아한 느낌이라면 에곤 실레의 누드화는 생각과 본능이 이끄는 대로 그린 그림이다. 이 차이점 때문에 젊은 화가 에곤 실레는 20연이 훌쩍 차이나는 당대 클림트 유명세에 기죽지 않고 자신만의 스타일로 소화해 낸다.
발리의 초상, 1912
그에게도 여러 명의 뮤즈가 있었다. 어린 동생, 발리, 아내 등 말이다. 그들 중 가장 안타까운 여인이 발리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화실에서 당시 모델로 활동 중이던 17살의 그녀를 만났다. 이후로 4년간의 시간을 함께 지낸다. 미성년자인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시작한 모델 경험으로 젊은 에곤 실레의 천재성을 미리 알아봤는지 모르겠다. 치기 어린 젊은 예술가로서 다양한 실험을 그녀와 함께했다. 경제적인 책임, 온전히 몰입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 주려 부모 이상의 노력으로 책임져 준 여인이다. 주민들의 신고로 에곤 실레가 풍기문란의 혐의로 감옥살이를 했을 때 끝까지 그의 무죄를 변호해 준 여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에곤 실레의 선택은 그녀가 아닌 중산층의 다른 여인이었다. 사회 관계망 안으로 번듯하게 돌아가고 싶었던 걸까? 이별을 통보받자 소모품처럼 버려지고 상처 입은 발리는 이후 군대에 입대해 간호사로 근무하다 열병으로 사망한다. 살면서 잊히지 않는 장면 하나가 있다. 키우던 엄마개가 아직 눈도 못 뜬 새끼들이 덥다고 아우성치자 목덜미를 물어 하나씩 하나씩 시원한 장소로 옮기는 장면이다. 신기해 조용히 그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본 적이 있다. 에곤 실래와 발리가 다시 이루어질 수 없을 안다. 그래도 이별을 통보받고 떠나가 버린 발리를 어미개가 목덜미를 물어 제자리로 옮겨 놓았던 것처럼 에곤 실레의 곁으로 옮겨 놓고 싶은 안타까운 마음이 잠깐 들기도 했다. 몸은 어른이지만 마음은 아이 같 던 에곤 실레의 행동에 꿀밤이라도 한 대 날리고 싶어졌다. 초상화 속 발리의 푸른 눈이 유난히 아름답게 시리다.
피터팬 같던 에곤 실레도 한 여인을 만나 정착하는 듯싶었다. 바로 에디트 하름스이다. 예술적 영감은 결별한 발리를 통해 더 깊은 영향을 받았지만 개인적 안정은 중산층에 속한 에디트를 만나 결혼을 한 이후부터이다. 점차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고 아내의 임신 소식도 전해져 겹경사가 생겼다. 하지만 당시 유럽을 공포에 몰아넣은 스페인 독감으로 임신 6개월의 아내가 사망을 하고 간호하던 에곤 실레 역시 삼일 뒤 사망한다. 그의 유작이 되어 버린 <가족>이라는 그림 속 주인공 에디트, 실레 그리고 아기는 며칠 사이로 현실의 가족이 되어 보지 못한 채 가족이란 이름으로 관람자의 안타까움만 남긴 채 네모난 액자 속에 갇혀있다. 영원히 말이다.
영원히 살 것처럼 꿈꿔라. 그리고 오늘 죽을 것처럼 살아라.
제임스 딘, 나무위키
매년 2월 말 3월 초 오스카 수상식이 개최되는 Hollywood 부근에 인파들이 몰립니다. 교통통제가 이루어지고 레드카펫 위로 수많은 별들이 사진을 찍기 위해 제스처를 잠시 취해주기도 하고 모니터를 보고 팬들을 향해 환하게 웃어주며 손을 흔들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오스카 (아카데미상) 수상식은 영화음악의 거장으로 알려진 엔니오 모리코네( Ennio Morricone)의 아카데미상 수상식 장면입니다. 턱시도 차림의 오스카 트로피를 안고 있는 노 신사의 감개무량한 모습이 보는 관객들마저 뭉클하게 만들었으니까요. 매년 예비 수상자로 지명은 되었지만 번번이 낙방을 해 수준 높은 음악과는 별개로 오스카상과는 인연이 없는 가 보다 싶었거든요. 기립박수를 받으며 남다른 감회에 젖어 있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요. 자기가 좋아하고 잘하는 일을 하고 있었기에 오랫동안 몸담을 수 있었을 테지요. 멈추지 않고 해냈기에 이런 상도 덤으로 받을 수 있었던 걸 테지요. 기쁨이 배가 되게 하는 간접 경험을 그의 수상식 장면을 보며 저 역시 많은 생각들이 지나갔습니다. 마치 영화 속 찐 인생사를 보는 것 같아 묵직한 느낌도 들고요. 그의 영화음악에 대한 공헌도는 쥐고 있는 트로피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그의 감정을 파고드는 선율로 위로를 받고 자랐던 사람이 저만은 아닐 테니까요.
1955. 영화 <에덴의 동쪽>, 주연
1955. 영화 <이유 없는 반항>, 주연
1956. 영화 <자이언트>, 주연
겨우 세 편의 영화 주연이었을 뿐인데 사후 아카데미상 후보에 두 번이나 오른 유일한 배우가 있습니다. 바로 제임스 딘(James Dean)이죠.
당시 여성들 뿐만 아니라 남성들도 굉장히 좋아한 배우로 알고 있습니다.
흰 옷에 청바지를 입고 오토바이를 타고 질주하는 모습은 타 본 사람만 알겠지요. 저 역시 어린 시절 아버지의 오토바이에 타고 시골 장을 구경해 본 경험이 있습니다. 다른 기억들 속에서 유독 젊은 아버지의 그 모습이 지금도 가장 보고 싶은 걸 보면 스피드가 주는 중독도 무시할 수 없나 봅니다.
제임스 딘은 인디애나주 출신입니다. 9살에 유방암으로 엄마를 잃고 고모부부의 농장에서 성장했다고 해요. 유년기에는 친구가 한 명도 없을 정도로 내성적이고 우울한 아이였고요. 고교를 졸업할 때까지 공부는 그다지 흥미 없어했고 카레이싱, 야구, 농구를 좋아했고 특히 연극에 관심을 보였다고 해요. 재혼한 아버지를 따라 캘리포니아로 이주하고 법학자가 되길 희망했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산타모니카 대학에 입학합니다. 하지만 연극으로 전공을 바꾸고 UCLA 다시 입학하며 오랫동안 아버지와 불화를 겪기도 합니다.
대학 졸업 후, 할리우드 배우가 되고자 수년간 대사 없는 단역과 엑스트라만 전전하지요. 무명배우를 전전하다 영화감독 '앨리어 카잔'과 우연히 마주치게 됩니다. 반항심과 모험심으로 가득 찬 그의 얼굴을 보자 자신의 무릎을 치며,
"그래, 바로 저 친구야."
라고 외쳤다고 하네요. 자신이 찾던 캐릭터를 제임스 딘이 가지고 있었던 거지요. 이것이 계기가 되어 미국의 일반가정의 고지식한 아버지와 그 아버지의 사랑을 차지하려는 둘째 아들 간의 갈등을 그린 존 스타인 벡의 <에덴의 동쪽>의 주연배우로 전격 캐스팅 이 되는 행운을 얻습니다. 우울하고 내성적인 성격이 가련한 반항아의 이미지로 보여 여성 보호본능을 자극했던지 영화는 오스카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를 만큼 성공을 거둡니다. 자고 나니 유명인이 된 셈이죠. 같은 해 <이유 없는 반항>으로 캐스팅되어 젊은이들의 불안과 공황 상태를 자신의 스타일로 잘 녹여내 '청춘의 우상'으로 급부상하게 됩니다.
동료 배우인 폴 뉴먼으로부터 이탈리아 출신 배우 피어 안젤리(Anna Maris Pierangeli,1932-1971)를 소개받게 됩니다. 청초하고 어머니를 닮아 둘은 서로에게 깊이 빠져들고 결혼까지 약속하는 사이로 발전하지요. 그러나 피어의 어머니가 종교문제로 반대하고 제임스 딘의 '욱' 하는 성질머리도 한몫 거들면서 둘의 관계는 끝이 납니다. 몇 달 후 그녀는 어머니 소개로 만난 동료 배우 '빅 데이먼'과 결혼합니다. 부모님이 서둘러서 일까요? 아니면 제임스 딘을 잊기 위해 서둘러 다른 이를 선택한 것일까요? 무슨 일이든 조급해하고 서두를 때 뒤끝은 좋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그저 안타깝게 지켜봐야만 하는 제임스 딘의 인간적인 괴로움이 다른 탈출구가 필요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자이언트> 촬영 당시 그의 레이스 참여를 금지하는 계약 조항이 있을 정도로 그는 레이스 광이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열렬히 사랑했던 피어 안젤리와 결별 이후 우울증 증세도 심해졌고요. 그로 인해 그의 운전은 더욱 거칠어졌고 심지어 곡예주행을 일삼기도 했다고 하네요. 내면의 분노를 어떻게든 분출해야 했을 테니까요. 비록 배우로서는 탄탄대로를 걸었던 그였지만 인간 제임스 딘의 내면은 점차 황폐해져 가고 있었죠 그가 즐겨 탔던 독일제 포르셰 스파이더 550은 본래 레이스 출전용으로 제작되었다고 해요. 그러다 추후 일반 소비자들의 반응이 뜨거워지며 로드카로도 기획이 되기 시작했고요.
청장년과 노인역까지 긴 세월을 연기하는 영화 '자이언트"를 촬영하고 최고의 연기라는 찬사를 받았고 연기생활은 수직 상승일 것만 같았죠. 그럴수록 내면의 우울증은 치료가 필요할 정도로 심각해져 갔고 레이서 커리어가 그를 짜릿한 속도감에 중독시킬 만큼 수위가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1955, 9,30
살리나스에서 개최되는 자동차 경주가 있던 날
촬영장을 벗어난 지 20분 후...
포르셰 550 스파이
LA 1번 도로
시속 135
5시 59분
당시 사고가 난 도로가 Y자 형으로 만나는 삼거리로
맞은편에서 과속으로 달려오던 포드 자동차와 정면 충돌하게 됩니다.
제임스 딘은 그 자리에서 유명을 달리했지만 다행히 상대방 운전자는 한쪽 다리만 부러지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납니다.
지금도 사고 현장 삼거리 목장 철조망에는 팬들의 추모가 끊이질 않고 있다고 합니다.
24살의 삶이 아끼던 애마와 함께 산산조각 나버렸지만 시대를 거슬러 청춘의 우상으로 영원히 불량한 자세를 취한 채 관객들의 시선을 오늘도 자신에게로 끌어들이고 있겠지요.
"훌륭한 배우가 되는 건 쉽지 않다.
사람이 되는 건 더 어렵다.
하지만 죽기 전에 둘 다 이루고 싶다."
제임스딘 사망 후 피어 안젤리 역시 심각한 히스테리증세가 찾아왔고 습관적인 자살시도, 우울증으로 이혼을 하게 됩니다. 14살 연상의 작곡가와 재혼하지만 결국 마약과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39살에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나의 사랑은 이미 포르셰에서 죽었다.'
(피어 안젤리가 죽기 전 남긴 말)
짧고 굵게 살다 간 두 예술가의 삶을 살펴보며 불완전하고 흔들리는 존재지만
오늘도 자신의 주어진 삶 안에서 묵묵히 뛰고 있을 무명씨들에게 응원에 박수를 쳐드리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