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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2. ‘톡‘ 쏘는 맛이 필요할 때

윌리엄 호가스 & 오노레 도미에

https://www.youtube.com/watch?v=cXNKcIx4Gks






구스타브 두다멜( Gustavo Dudamel)과 시몬 볼리바르 국립 청소년 오케스트라(Simon Bolivar National Youth Orchestra)와 함께 한 <맘보> 연주입니다. 서울 공연으로 클래식 음악 팬들에게 오케스트라의 틀을 깨 주었던 특별한 공연이었지요.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성장형 지휘자이자 관객들이 사랑하는 음악가 구스타브 두다멜(Gustavo Dudamel). 그의 열정적인 지휘스타일과 오케스트라 공연은 충격 그 이상의 감동을 주었습니다. 기분 좋게 뿅망치로 한 대 가격 당한 기분이랄까요.





너풀거리는 곱슬머리, 허공에 춤을 추는 양손, 그리고 무아지경에 이른듯한 신들린 그의 지휘봉은 마술봉이 되어 관객들을 들썩이게 하고 환호하게 하였습니다. 그의 열정과 더불어 젊은 세대의 클래식 음악 활성화에 기여함은 물론이고요.





이미 20대에 많은 것을 경험했고, 이룬 베테랑답게 무대경험 많은 그는 비록 어린 지휘자였지만 가는 곳마다 청중을 이끌고 다니며 열광시켰습니다. 기립박수는 기본이고 클래식 음악계의 할리우드 스타만큼이나 흥행을 최고로 끌어올린 지휘자이기도 합니다.





1981년 베네수엘라 태생으로 트롬본 연주자인 아버지로부터 음악을 배웠습니다. 피아노와 바이올린 연주를 했던 그는 연주자로 길을 바꿉니다. "엘 시스테마( El Sistema)"라는 국가 지원을 받는 베네수엘라의 음악 교육 제단의 수혜자이자 상징처럼 여겨지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베네수엘라만의 독특한 시스템으로 정식 명칭은 베네수엘라 국립 청년 및 유소년 오케스트라 시스템 육성재단입니다.






18세에 베네수엘라 시몬 볼리바르 청소년 관현악단의 음악 감독으로 임명되며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두다멜은 2004년 밤베르크에서 열린 구스타브 말러( Gustav Mahler, 1860-1911) 국제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하며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그는 클라우디오 아바도(Claudio Abbado, 1933-2014)와 사이먼 래틀(Sir Simon Rattle, 1955- ) 등의 유명 지휘자와의 협업을 통해 빠른 속도로 명성을 쌓았습니다. 2009년부터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의 음악 감독으로 지금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두다멜은 라틴아메리카 출신으로서, 빠른 템포와 활력 있는 연주로 유명합니다. 그의 레퍼토리는 모차르트에서부터 현대 작곡가까지 다양하여 폭넓은 음악적 이해를 보여줍니다. 특히 그는 해석의 정확성과 역동성을 조화롭게 이끌어내는 데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는 지휘자입니다.





두다멜과 그의 오케스트라가 선보인 음악은 젊은 세대에게 영감을 줄 뿐 아니라, 초스피드로 숨이 턱턱 막히는 AI 시대에도 유효하다고 봅니다. 시간이 켜켜이 쌓아 올려야만 가능한 사이다 같은 한 방이 숨어있기 때문이죠.





오늘은 명확하게 부정적인 상황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해학적으로 돌려 말하는 풍자의 기법을 사용한 영국 화가 윌리엄 호가스( William Hogarth, 1697-1764)와 프랑스 화가 오노레 도미에 (Honore Daumier, 1808-1879) 두 화가의 작품을 살펴봅니다.











풍자(Satire)는 사회, 정치, 문화적 주제를 가지고 청중으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들거나 문제를 인식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독자나 청중이 더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기 위한 다양한 기법들이 있지요.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부터 존재해 온 문학적 장르로, 예를 들면 아리스토파네스의 희곡이나 호라티우스의 풍자가 있습니다. 현대에도 영화, 드라마, 소설 등 다양한 매체에서 사회적 이슈에 대한 비판적인 목소리를 높이지요.




먼저, 영국으로 가 보겠습니다. 영국은 회화사에서 오랫동안 불모지였습니다. 르네상스 시대, 바로크 시대를 통해서 독일 출신의 한스 홀바인( Hans Holbein, 1497-1543), 플랑드르 출신 안토니 반 다이크( Anthony van Dyck, 1599-1641) 등의 외국 출신의 화가를 제외하고, 눈여겨볼 화가는 없었습니다. 영국은 필요에 따라 유럽에 있는 유능한 화가들을 수입해서 활용을 했다는 얘기지요.





영국 화가에 의한, 영국 독자적인 양식을 가진 회화가 태어난 것은 18세기, 유럽 대륙에서 로코코 미술이 전성기일 때였습니다. 윌리엄 호가스( Wiliam Hogarth, 1697-1764)는 그러한 18세기의 영국 화단을 대표하는 국민적 화가입니다.






그림1. Beer Street and Gin Lane, 1759 versions/HMAP 그림2. The Crinoline in snow, 1858/ Brookllyn Museum







그림1.

윌리엄 호가스( William Hogarth, 1697-1764)의 < Beer Street and Gin Lane>(1751) 작품입니다. 두 개의 판화 연작으로 왼쪽 진( Gin) 소비의 악영향과 오른쪽 맥주의 장점을 대조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당시 런던에서의 사회적 문제를 다루며, 진( Gin)에 대한 비판을 통해 더 나은 음료인 맥주를 강조하고자 했습니다.





호가스는 사회 비판적 요소를 작품에 담아 대중의 계몽을 목표로 했습니다. 작품은 당시 영국에서 진(Gin)의 소비가 극단적으로 증가하던 시기에 그려졌습니다. 그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경고하고자 했고요.





오른쪽 <Beer Street>는 왼쪽 진 스트리<Gin Street>에 비해 밝고 행복한 분위기를 강조합니다. 맥주가 사람들을 즐겁게 하고 건강하게 만든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요. 그림 속 인물들은 웃고 있는 표정을 짓고, 활력 넘치는 모습으로 묘사됩니다. 맥주를 통한 즐거움과 산업의 번영이 함께 나타나며, 맥주가 사람들 사이의 결속을 통해 긍정적인 사회를 만든다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주고 있습니다.






반면 왼쪽에 그려진 <Gin Street>은 어둡고 암울한 장면으로, 진에 중독된 사람들의 비극적인 삶을 드러냅니다. 이 그림에는 진을 사기 위해 물건을 내놓는 사람들, 진에 취해 싸움을 벌이는 장면 등 사회적 타락과 파괴를 나타내는 요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니다. 특히, 아이를 떨어뜨리는 여인의 모습은 진( Gin)의 폐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부분입니다.





이 두 작품은 1751년에 발효된 진법( Gin Act)을 지지하기 위해 발표되었습니다. 이러한 법안은 진( Gin)의 과도한 소비와 관련된 범죄 및 사회적 혼란을 줄이기 위해 시행되었습니다. 호가스는 <Gin Lane>을 먼저 보여준 후 < Beer Street>를 통해 독자에게 더 충격을 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작품은 단순한 대조를 넘어, 시대의 사회적 문제를 반영하는 중요한 사회 풍자적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진 법( Gin Act)은 영국에서 18세기 중반, 특히 1751년에 제정된 법률로, 진(Gin)의 생산과 유통을 규제하기 위해 생겨났습니다. 이러한 법안은 당시 London's gin craze, 즉 진(Gin)의 과도한 소비로 인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필요했습니다.



진의 소비는 18세기 초반부터 증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1689년에 프랑스 와인과 브랜디의 수입이 금지됨에 따라 촉발되었습니다. 정부는 진의 생산을 장려하기 위해 세금 감면을 제공했지만, 이에 따라 대량으로 저가 진(Gin)이 생산되고 소비되었습니다.



진의 급증하는 소비는 여러 사회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진 중독에 빠지게 되었고, 범죄율도 상승했습니다. 사회적으로 진(Gin) 소비와 관련하여 빈곤, 범죄, 부모의 방임과 같은 다양한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1751년에 제정된 진(Gin) 법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진의 소비에 대한 강력한 규제를 도입했습니다. 법안의 주요 목표는 저가의 진 (Gin) 생산을 제한하고 판매를 관리하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 진(Gin)의 유통서에 더 높은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소비를 억제하려 했습니다.








오늘날 언론이나 예술의 정치적인 역할은 한계가 있습니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지만, 여전히 권력과 부에 의해 눈치를 봐야 하는 게 현실입니다. 그런데 왕정 시대였던 19세기의 한 프랑스 화가는 온갖 핍박에도 불구하고 과감한 풍자로 서민의 애환을 담아냈습니다. 독특한 화법과 메시지로 '풍자화의 대가'로 불리는 '오노레 도미에 (Honore Daumier, 1808-1879)의 작품을 소개합니다.




오노레 도미에(Honore Daumier, 1808-1879)는 귀스타브 쿠르베( Gustave Courbet, 1819-1877)와 동시대를 함께 했던 화가이자 판화가입니다. 두 화가는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시작된 '사실주의'화가로도 불립니다. 사실주의는 역사적 사건이나 신화를 토대로 한 이상화된 이미지 대신 사회의 일반적인 생활상과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을 목표로 하였습니다.




오노레 도미에 (Honore Daumier, 1808-1879)는 스무 살 무렵, 풍자 잡지 '실루엣'에 데생들을 발표하며 초창기 시사 만화가의 대열에 끼게 됩니다. 그 후, '카리카튀르', '샤리바리'등의 시사만화를 담당하면서 독자들만이 아니라 당국의 주목을 받기 시작합니다. 그가 살았던 19세기 프랑스는 왕정복고, 7월 혁명, 2월 혁명, 파리코뮌 등 역사적 사변들이 점점이 박힌 격동의 시공간이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P2aufZQqCw





그림2.

도미에가 사회적 풍자로 전향한 이후 주 소재로 택했던 도시의 거리 중 하나입니다. 페티코트를 넣은 , 넓은 크리놀린 치마의 윗부분에 눈을 쌓은 채, 눈 내리는 거리를 걸어가는 파리의 부르주아(bourgeois) 부인을 묘사한 것입니다. 그녀의 뒤에는 이와 대조적으로 낡고 남루한 옷차림의 여자 청소부가 긴 빗자루로 어이없다는 듯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부르주아(bourgeois)라는 용어는 원래는 "성안 사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중세 시대, 부르주아 계급은 성대한 성벽 안에서 살며 상공업자나 농민, 소상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이들은 성 밖의 농민 계층인 무산자와 대비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현대에 들어 부르주아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middle class를 지칭하며, 자본가나 부유한 시민 계급을 의미합니다.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아래에서 이들이 사회적 불평등과 자본주의 체제를 형성하는 주체로서 비판받기도 하였습니다. 정치적 및 사회적 권력을 가진 계급이라서요.




19th Dress Stock Photo/Getty Images











그림1. Taste in High Life, 1742/wikimedia Commons 그림2. The Laundress, 1863/Metropolitan Museum of Ar





그림1.

호가스의 유화 작품 <Taste in High Life>(1742)입니다. 당시 상류층의 패션과 그들의 표면적인 취향을 풍자하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이 작품은 호가스가 질 낮은 사회적 요인을 고발하는 방법으로 사용한 여러 작품 중 하나입니다. 그림 속에는 당시 유행하던 과장된 의상으로 차려입은 인물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를 통해 18세기 고급사회의 가벼운 생활 방식과 허영심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최고의 취향 Taste in High Life>(1742)이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패션 트렌드의 변화를 풍자하며 당시의 고급스러운 의복을 착용한 여러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작품의 중앙에는 큰 후프 스커트를 입은 노파와 화려한 복장을 한 남성이 서로의 사소한 것에 감탄하며 어린 페이지 보이와 함께 서 있습니다. 그들은 주인들에게 조롱당하는 자유롭지 못한 존재로 그려져 있고요.



페이지 보이는 18세기 영국에서 주로 사용된 용어로, 주인이 있는 가정의 하인이나 시종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종종 귀족이나 부유한 집안에서 일을 하며, 주인의 요청에 따라 다양한 서비스와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페이지 보이는 일반적으로 젊은 소년이 맡는 역할이며, 복장이 화려합니다. 그들은 귀족 가족의 일원으로 여겨지기도 하며, 주로 서빙, 서신 및 전달, 개인 시종 등의 역할을 합니다. 그들의 복장과 태도는 당시의 복식과 예절을 반영합니다.





호가스는 이 작품을 메리 에드워즈의 주문에 의해 제작하였습니다. 그녀는 상류층의 우습고 과도한 패션을 조롱하고 싶어 했습니다. 그는 풍자적인 메시지를 통해 고급 사회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드러냈습니다. 에드워즈는 이 그림을 통해 자신이 겪었던 조롱에 대한 복수를 하고자 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작품은 다양한 캐리커쳐와 함께 형상화된 상징적 요소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특히, 작품 속의 원숭이는 비천한 모방의 상징으로, 당시 사람들의 허영심과 패션의 유혹에 대한 비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또 하나, 배경 그림 속(왼편) 화재 장면은 유행의 덧없음을 상징하며, 의상과 액세서리의 과도함을 비유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림2.


오르세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이 작품은 방금 강가에서 빨래를 끝내고 오르는 여인과 아이를 그린 것입니다. 한쪽 팔로 빨래 더미를 가득 안은 어머니는 혹시나 아이가 계단을 헛디딜까 아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계단을 오르고 있는 중입니다. 도미에의 세심한 관찰력은 아직 키가 작아 계단을 오르기 힘든 아이가 다리를 한껏 올려 계단을 오르는 순간을 정확하게 그려냈습니다.





환하게 빛나는 건물들을 뒤로한 채, 역광을 받아 어둡게 처리된 인물들은 얼굴의 윤곽이 생략되어 그려졌습니다. 특정한 인물을 나타내지 않는 이러한 익명성은 오히려 당시 도시의 노동자 계층의 여성, 그 고단한 삶을 대표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도미에는 당시 산업화의 그늘에 가려진 도시 노동자들, 소외된 여성들의 모습에 따뜻한 시선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의 그림들은 결코 서민들의 모습을 미화시키거나 왜곡시켜 그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리얼리티가 지닌 힘이 바로, 도미에의 매력 아닐까 싶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p8p_2CLOhY








영국은 빅토리아시대 전에는 회화 쪽은 황무지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 시대에 화가 윌리엄 호가스( Wiliam Hogarth, 1697-1764)는 풍자화라는 독창적인 예술 세계로 유럽 전역에 인기 있는 작가였습니다. 호가스가 활동하던 당시 영국에서는 기품 있고 우아한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돈이 없는 귀족들은 신분상승을 꿈꾸었던 신흥 부르주아들과 결혼을 하는 것이 유행이었습니다. 당시의 풍습은 리얼하게 묘사한 아래 그림은 한 편의 재미있는 이야기 책과도 같이 풍자와 해학으로 당시의 영국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정략결혼 Marriage A-la- Mode1. The Marriage settlement/wikipedia






여섯 점의 회화로 구성된 '정략결혼 Maggiage A-la- Mode' 시리즈는 18세기말, 영국 사회의 현실을 신랄하게 풍자했던 화가 윌리엄 호가스( William Hogarth, 1697-1764)의 대표작입니다. 그는 당시에 흔했던 정략결혼의 폐해를 연극의 한 장면처럼 펼쳐 보였습니다. '혼인 계약'이 그 첫 장면입니다.





양가의 가장들이 앉은 테이블에서 거래가 한창입니다. 풍채 좋은 백작이 정복왕 윌리엄으로부터 시작된 뿌리 깊은 가문의 족보를 호기롭게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통풍으로 못 쓰게 된 그의 오른발은 이미 가세가 기울 대로 기울었음을 증명합니다. 맞은편에 앉아 혼인계약서를 손에 쥔 상인은 딸을 백작의 아들에게 시집보내는 대가로 테이블 가득 금화를 쏟아놓았습니다. 부유한 상인과 몰락한 귀족은 자식들을 매개로 서로가 간절히 원하던 것 , 즉 돈과 권력을 맞바꿨습니다.






그런데 어쩝니까, 정작 결혼 당사자들은 서로에게 관심이 없습니다. 화려하게 치장한 예비신랑은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을 살피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불안한 듯 약혼반지를 만지작거리는 신붓감은 오히려 친절하게 말을 건네는 변호사에게 귀를 기울입니다. 그들 사이에 걸려 있는 그림 속의 섬뜩한 '메두사'가 다가올 불행을 예고하는 듯합니다. 이어지는 다섯 점의 회화는 탐욕으로 시작된 이 결혼이 결국은 불륜을 거쳐 치정살인과 패가망신으로 치닫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재미와 교훈을 동시에 제공하는 이 시리즈는 판화로도 제작돼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Marruage A-la-Mode 2. The Tete a Tete, 1743/wikipedia






두 번째 그림입니다. 신혼이 시작된 멋진 실내 장식으로 꾸며진 집안의 <아침> 풍경입니다. 잘 차려입은 신랑은 밤새 축제를 즐기다가 이제 들어왔는지 파김치가 되어 있습니다. 귀여운 개가 킁킁거리며 간밤 신랑의 행선지를 알려주는 듯합니다. 신랑 주머니에서 물건 하나를 발견했거든요. 신부는 모닝티를 마셨지만 아직 졸린 듯 기지개를 켜고 있습니다. 아미 신부도 밤새 논 듯합니다. 바닥에 쓰러진 의자, 악기와 악보, 집사는 지불해야 할 돈과 장부를 끼고 혀를 끌끌 차며 밖으로 나가고 있습니다. 철부지 한 쌍의 앞일이 벌써부터 걱정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FJ9tHJA2Sw






Marriage A-la-Mode 3. The Inspection, 1743/wikipedia 4. 부인의 침실 The Tiolette, 1743/wikipedia





세 번째 그림은 검진(The Visit to the Quack Doctor)입니다.

제목 그대로 성병 검사와 치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프랑스 의사 앞의 신랑은 목의 반점이 보이는 걸로 보아 이미 심각한 성병에 걸린 듯합니다. 울고 있는 듯한 어린 여자의 입술 근처에도 포진이 생겼네요. 당시에 이런 풍속도 유행이라서, 결혼한 귀족들이 하층민 출신의 여자를 몇 명씩 거느렸다고 합니다. 벽과 의사의 책상 위에 놓인 해골이 이들의 운명을 예견하는 듯합니다.





네 번째 그림입니다. 남편이 저러는데 어린 신부가 질 수 있나요? 신부 역시 좀 더 고급지게 놀고 있습니다. 백작부인의 지위로 올라 간 그녀. 화가들의 걸작이 걸려 있는 부인의 침실에서 성악가가 노래를 부르고, 악사는 연주하고 있습니다. 분홍 드레스를 입은 여주인은 머리 손질을 받으며 신사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있습니다. 당시 귀족의 사치스러운 삶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편에서 본 상냥한 그 변호사는 손에 오페라인지 연극표를 한 장 들고 부인을 꼬시고 있네요. 이들의 관계를 단적으로 설명하는 코레지오의 <제우스와 이오>, <헤롯과 딸들>의 그림이 벽에 걸려 있습니다.






800px-Antonio_Allegri%2C_called_Correggio_-_Jupiter_and_Io_-_Google_Art_Project.jpg Jupiter and IO by Correggio, Kunsthistorisches Museum, Vienna/wikipedia





안토니오 코레지오( Antonio Correggio, 1490-1534)의 <제우스와 이오 Jupiter and Io >는 르네상스 시대의 에로틱한 미술작품으로 , 제우스의 욕망과 변신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그리스 로마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인 제우스와 이오의 이야기를 독창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 제우스와 이오>는 제우스의 불륜을 주제로 한 연작 중 하나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상류층, 특히 만토바 공장 페데리코 곤치가의 의뢰로 제작된 이 작품은 작가의 상상력이 돋보이는 대표작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작품의 배경은 그리스 로마 신화로, 제우스는 강의 신 이나코스의 딸인 이오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그녀를 사랑하게 됩니다. 이오는 제우스의 접근을 피하며 도망치고 , 이를 관찰한 제우스는 어둠의 장막을 내리며 이오를 잡으려 합니다. 궁극적으로 제우스는 자신의 모습을 구름으로 변신시켜 자신의 욕망을 이루지만, 이오의 처지는 한층 더 복잡해집니다.




코레지오는 <제우스와 이오>에서 제우스를 구름 형태로 표현했습니다. 구름으로 변한 제우스는 이오를 껴안고 있으며, 그림 속 남자의 얼굴은 구름 속에서 희미하게 드러나 있습니다. 이오의 수줍은 모습과 황홀감은 이 작품의 주제를 강조하며, 화가의 독창적인 기법이 돋보입니다. 구름과 사람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을 표현해 그 당시 다른 화가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지요. 감히 시도해 볼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으니까요. 개인적으로도 인상적인 부분이어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작품입니다. 이오의 입술과 제우스의 얼굴, 그리고 구름을 형상화한 손들이 충실히 묘사되어 있어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Marriage A-la-Mode 5. The Baguio, 1743/wikipedia








다섯 번째 그림입니다. 아내는 아내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흥청망청 살아가던 이들의 생활에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의 날이 다가옵니다. 가면극을 보러 간 부인과 애인이 연극 진행 중에 은밀하게 방에서 즐기는 순간, 남편이 들이닥칩니다. 두 남자의 격투 끝에 남편은 결국 칼에 맞고 죽습니다. 애인은 왼쪽 창문을 통해 도망가고 있네요.








Marriage A-la-Mode6. The Lady's Death, 1743








여섯 번째 그림입니다. 남편의 사후, 여자는 친정으로 돌아옵니다. 옛날의 화려한 집안은 다소 몰락한 듯합니다. 여자의 남편을 죽인 애인이 결국 잡혀 교수형이 처해지자 여자는 독약을 먹고 자살을 기도합니다. (바닥에 약병이 보인다).





어린 딸이 유모에게서 엄마를 찾으며 볼을 비비고 있으나. 벌어진 입, 그리고 창백한 얼굴을 보니 살아날 가능성이 없어 보입니다. 이런 시점에서도 아버지는 딸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내고 있습니다. 검은 옷의 의사가 제 몸치장에 바빠 부인을 돌보지 못한 하인의 멱살을 잡고 있고요. 이 와중에 몰골이 앙상한 개 한 마리가 어떻게 들어왔는지 주인이 먹다만 돼지 머리를 게걸스럽게 먹고 있습니다. 바닥에 쓰러진 의자는 부인의 마지막 모습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부모들의 욕심 때문에 희생된 젊은 부부는 원치 않던 결혼 생활을 이렇게 마무리합니다.





작가는 이 연작을 통해서 당시 유행처럼 번져나가던 정략결혼의 폐해를 그림으로 보여줌으로써 귀족들의 악습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오노레 도미에( Honore Daumier, 1808-1879)는 세부 묘사를 대담하게 생략하는 기법을 즐겼던 탓에 오래도록 별 볼 일 없는 화가로 치부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당대 권력자들의 초상과 부르주아적 풍속을 비판적 화폭에 담음으로써 예술과 정치 사이에 다리를 놓았습니다. 그의 화폭에 담긴 정치권력자, 은행가, 법관 따위의 지배계급은 한 눈에도 탐욕과 술수로 배불러 있는 모습입니다.






도미에는 무엇보다 '상식의 인간'이자, 민주주의자, 공화주의자, 사회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왕과 정치인, 법조인 등 기득권층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도, 그들의 인격만큼은 철저히 존중했습니다. 또 민중의 어려움을 적극 대변하면서도 결코 그들을 미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만화를 미술의 차원으로 끌어올렸다는 평가도 받고 있습니다. 그의 사회적 악습에 대한 일반적인 풍자와 정치적 상황에 대한 공격으로 인해 넓은 견지에서 보면 정치 만화에 대한 체제와 힘은, 도미에에 의해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Gargantua, 1831/wikipedia





종종 미술 작업으로 알바를 하며 용돈 벌이를 하던 그는 잡지 <카리카튀르 La Caricature>에 초빙되어 정치적 풍자화를 그리게 되었습니다. 당시는 왕정 시대로 정치 비판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인 도미에는 생계비를 위해 풍자화의 세계로 뛰어들었습니다. 1831년 작품 '가르강튀아 ( Gargantua)는 사람들과 왕에 대한 상당한 충격을 준 그림이었습니다.






La_Caricature_cover_1833.jpg Cover of an 1833 edition, political Satire, weekly/wikipedia









<카리카튀르>는 19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발간된 풍자적인 잡지로, 정치와 사회를 비판하는 내용으로 유명합니다. 이 잡지는 당시 프랑스 사회의 주요 이슈에 대한 풍자적이고 신랄한 의견을 통해 독자와 소통하였습니다.


카리카튀르는 1830년대 창간되어, 프랑스의 정치적 변화화 사회적 갈등을 반영하는 중요한 예술 매체로 자리 잡았습니다. 이 잡지는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활발히 발행되었으며, 당시의 주요 정치적 사건과 사회적 이슈들을 신랄한 그림과 유머를 통해 다루었습니다.



카리카튀르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의 정치적 풍자와 사회적 비판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많은 예술가와 작가들이 이 잡지에서 영감을 받아 정치적 사건에 대한 의견을 표현하였고, 민주적 가치와 시민의 목소리를 존중하는 사회를 지향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15세기 프랑스 풍자 작가 프랑수아 라블레( Francois Rabelais)의 소설 <가르강튀아와 팡타 그뤼엘>이라는 작품에 등장하는 거인 왕을 소환해 당시 루이 필리프 왕의 세금정책을 비판합니다. 그의 작품은 국민이 낸 세금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국왕과 지배계급, 국왕이 먹고 남은 쓰레기를 서로 먹으려는 정치인들, 불평등한 경제와 이권을 위한 야합 등을 적나라하게 담았습니다.




프랑수아 라블레 ( Francois Rabelais)는 15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프랑스 작가이자 인문주의자입니다. 그의 작품을 통해 중세 사회와 가톨릭 교회를 비판하며 풍자적인 문체로 유명합니다. 그는 법률가이자 부유한 지주인 앙투안 라블레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비교적 상류층에서 자랐으며, 몽펠리에 대학교와 푸아티에 대학교에서 공부하였습니다. 그의 다양한 학문적 배경은 후에 그의 문학적 작업에 영향을 미쳤고, 신학, 의학, 고전학 등을 포함한 폭넓은 지식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의 필명은 알코프리바 나지에 ( Alcofribas Nasier)이고 과장되고 익살맞은 요소를 사용해 언어유희와 풍자를 자주 활용했습니다.



<가르강튀아와 팡타 그뤼엘>은 거인 가르강튀아와 그의 아들 팡타 그뤼엘의 모험을 그린 풍자적 시사 소설입니다. 중세 사회의 가치관과 종교적 신념을 신랄하게 비판하지요. 특히 이 작품들은 외관상, 과장된 묘사가 특징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자유와 해방을 주제로 다뤘습니다.




도미에는 바로, 이 가르강튀아<대식가 Gargantua>(1831)라는 작품으로 23세에 갑자기 유명해집니다. 또한 이 작품 때문에 6개월간의 감옥살이를 하게 되고요. 그가 < 르 카리카티르Le Caricature>에서 일하던 1830년, 프랑스에서는 짧지만 폭력적이었던 '7월 혁명'으로 샤를르 5세 (Charles X)의 통치가 막을 내리고, 새로운 황제 루이 필립의 군주정치 ( July Monarchy)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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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amous cartoon of Louis Philippe as a pear, drawn by Honore Daumier after the sketch by Charles Philipon and published in La Caricature in 1831/wikipedia






그러나 시민왕 루이 필립이 전횡을 일삼자 도미에는 필립을 배 모양의 머리 (배는 프랑스에서 바보를 의미한다)를 하고 변기에 앉아서 국가 재산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동시에 이를 배설하여 아첨꾼들에게 나누어주는 거인으로 묘사하는 석판화를 제작했습니다. 이 신랄한 정치 풍자화는 7월 군주정치가 빚은 파렴치한 대학살의 잔인성을 도미에 특유의 재치와 해학으로 그려낸 걸작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문제는 사람들의 반응은 좋았지만, 엄청난 정치 탄압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1832년 풍자화를 그렸다는 이유로 벌금과 6개월간의 징역형을 받기도 하면서 온갖 수난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계속된 탄압으로 2년 뒤 <카라카튀르>도 폐간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지켜본 오노레는 그저 돈을 위해 시작한 풍자화였지만, 본격적으로 정치와 서민들의 애환에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UhwWgy4L5c










그림1. Hogarth's Servants, 1750-55/wikipeida그림2.Chrispin&Scapin, 1863-65/wikimedia commons





그림1.

당시의 이런 식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것 자체가 파격적일 정도로 인상적인 작품입니다. <Hogarth's Servants>는 윌리엄 호거스(Wiliam Hogarth, 1697-1764)가 1750년에서 1755년 사이에 제작한 유화로, 호거스의 여섯 명의 하인들의 얼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세 명의 남성과 세 명의 여성 얼굴이 각기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각 인물의 나이는 다양하며, 여성 인물들은 젊은 모습이고 남성들은 소년에서 노인까지의 폭넓은 연령대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호거스의 관점에서 이러한 다양함은 인물들의 고유한 특성을 드러내며, 그는 자신의 하인들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고자 했습니다. 이 그림은 하인들의 평범한 옷차림과 자연스러운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호거스가 하인들에 대한 애정을 담아 그린 것으로, 특정 주문 없이 개인적 즐거움을 위해 제작되었습니다. 그는 이 그림을 자신의 초상화를 보여주기 위해 작업실에 걸어두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이 작업은 그가 한때 진행한 "인물 및 캐리커쳐"시리즈와도 연관이 있습니다. 작품의 특징적인 구성은 서로 다른 방향을 바라보는 여섯 인물들의 생동감을 강조한 부분입니다.





호거스의 작품은 조명, 색채 및 인물의 표정에 있어 뛰어난 세련미를 발휘합니다. 인물들은 각각 독특한 표정을 지니고 있고요. 이는 관람객이 이들의 개인성에 쉽게 공감하도록 만듭니다. 상단 왼편의 조명이 비춰지며, 그림은 스케치처럼 자연스러운 느낌을 줍니다. 이는 더 넓은 맥락에서 인물의 특성을 분석하는 시도로 볼 수 있습니다.




<Hogarth's Servants> 작품은 호거스의 사망 후 그의 아내에 의해 상속되었고, 1789년 마리 루이스에게 넘어갔습니다. 이후 여러 차례 전시되었고, 과거에 크리스티 경매에서 판매되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1960년에 테이트 갤러리로 옮겨졌고요.







그림2.

<크리스팽과 스카팽 Chrispin & Scapin>은 몰리에르의 희곡 " 스카팽의 간계"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두 인물의 모의하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으며, 이를 통해 도미에는 극적인 상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자 했습니다.





작품 속 인물들은 서로의 표정과 몸짓을 통해 관객에게 강한 인상을 줍니다. 두 캐릭터가 서로 대화를 나누며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는 듯한 모습입니다. 도미에는 특히 인물의 특성을 즉각적으로 알아볼 수 있도록 표현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방식은 관객이 마치 실제 연극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게 만들어 몰입할 수 있게 합니다.





도미에의 독특한 화풍과 기법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는 인물 간의 도형을 구분하고 조명 효과를 통해 입체감을 부여하여 사실적인 느낌을 강조했습니다. 또한 각 인물의 표정과 자세는 내용의 전개에 기여하며 관객에게 감정을 전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Scapin은 프랑스의 유명한 극작가인 Molirere에 의해 창조된 캐릭터로, 특히 이탈리아의 코미디아 델라르떼( tragicomedy) 전통의 일환으로 발전된 인물입니다. Scapin 은 코믹한 하인 역할을 하며, 보통의 인물들이 겪는 갈등을 해결하는데 중점을 둡니다.



몰리에르(Moliere)의 연극 " Scapin의 속임수 Les Fouberies de Scapin (1671)"에서 이 캐릭터는 주요 인물로 등장하며, 젊은 연인들이 부모의 반대를 극복하도록 돕고자 여러 가지 계략을 사용합니다. Scapin은 지혜롭고 기민한 캐릭터로 묘사되며, 그가 마주하는 상황들을 자신의 재치와 속임수로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세 개의 막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주로 나폴리를 배경으로 하고요. 이야기의 중심은 두 젊은 연인이 결혼하기로 결정하지만, 그들의 아버지들이 다른 결혼 제안을 가져오면서 갈등이 발생합니다. Scapin은 여러 속임수를 사용하여 두 연인이 결혼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인류에게 가장 큰 희열과 쾌감을 주는 소재가 '막장드라마' 아닌가 싶습니다. 윌리엄 호가스( William Hogarth, 1697-1764)는 당시 사회와 사람들을 비판하는 풍자를 그려낸 작가로 유명합니다. 특히 돈 많은 귀족들의 어리석은 모습을 많이 그렸지요. 부패한 귀족들의 세계와 상류사회에 진입하고자 하는 꼴사나운 부르주아 출세주의자, 탐욕스러운 성직자, 게으른 군인, 가난한 하류계층을 포함한 모든 사회계급의 관습을 날카롭게 비판합니다. 그의 그림들은 한 그림에서 끝나지 않고, 연작물로 그려진 다는 것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지금의 드라마처럼 어떤 스토리가 이어진 다는 점이 매력적입니다.






그의 연작 중 하나인 <난봉꾼의 행각 The Rake's progress>을 살펴봅니다. 이 연작에서 그는 돈 많은 귀족들의 삶을 풍자하고 나섭니다. 지금의 막장 드라마와 다를 바 없는 그 당시 귀족들의 삶을 작품을 통해 알아봅니다.





<The Rake's Progress>, 1732 /Pinterest







<난봉꾼의 행각 The Rake's Progress> (1732)은 총 8가지 그림으로 이루어집니다. 이 연작의 첫 번째가 바로 위 그림 < 상속자 The Heir>입니다. 그림 중앙에서 거만하게 서 있는 주인공의 이름은 '톰 레이크'입니다. 그는 부자였던 아버지의 죽음으로 재산을 상속받아 갑자기 돈방석에 앉은 졸부입니다. 덕분에 레이크는 부유한 삶을 살기 시작하지만 매춘과 도박에 많은 재산을 탕진하며 난봉꾼으로서의 이름값을 톡특히 합니다.






이 작품은 점차 레이크가 변해가는 모습들이 담겨 있습니다. 맨 왼쪽에 난봉꾼 레이크의 약혼녀, '사라 영'이 보입니다. 그런데 그녀가 울고 있네요. 레이크가 돈 몇 푼을 손에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 사라에게 돈을 줄 테니 약혼을 깨자고 하는 상황인가 봅니다. 어머니인듯한 여인이 그녀의 부풀어 오른 배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딸이 임신을 한 모양입니다. 이렇게 염치없는 약혼자임에도 불구하고, 사라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 곁을 지키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같은 주제의 판화 본도 있습니다. 유화 작품과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을 듯싶습니다.



The Rake's Progress, 1. The Heir,1735, engraving/wikipedia





연작 두 번째 < Surrounded by artists and professors> 제목 그대로 예술가들이 레이크를 둘러싸고 있습니다. 그의 주위엔 자세를 취하고 있는 펜싱 선수, 위협적인 모습으로 보디가드를 청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음악의 어머니'로 불리는 음악가 헨델 비슷한 뒤태를 가진 인물도 등장합니다. 비록 피아노 치는 뒷모습으로 나왔지만, 또 그마저도 후대 사람들의 추측으로 불과하지만 말입니다. 쌓여있던 재산을 사용하기 시작한 레이크에게 상류층이 즐기는 스포츠나 예술을 가르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모습입니다. 이 그림에서도 시종일관 거만하게 서있는 레이크의 모습이 생동감 있습니다.




2. The Levee, engrabing/wikipedia






연작 세 번째, <Scene in a Tarven>입니다. 술집에서 여인들과 술을 마시고 있는 레이크의 모습입니다. 그의 풀린 눈빛과 널브러져 있는 다리를 좀 보세요. 그가 술을 마신 건지, 술이 그를 마신 건지 반쯤 걷어 내려진 양말이 만취상태임을 드러냅니다. 거나하게 취한 레이크의 주변에 약혼자인 사라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자세히 보니, 두 여인이 레이크의 시계를 훔치고 있네요. 물론 동공 풀린 레이크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 두 여인의 얼굴에는 검은 점들이 있습니다. 이 점들은 그 당시 유행하던 매독을 감추기 위해 찍었던 점이라고 전해집니다. 레이크는 이때부터 본격적인 패가망신의 길로 들어섭니다.



3. The Orgy, engrabing/wikipeida







네 번째 연작, < The Arrest for theft>입니다. 레이크에게 웨일스의 집행관들이 찾아와 채무불이행으로 체포하려 합니다. 흥청망청 돈을 써대던 그에게 , 처음으로 돈 때문에 위기가 닥쳤습니다. 이전까지 자신만만하고 여유롭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하는 레이크입니다. 이 와중에도 그를 지키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니 불쌍한 약혼녀, 사라입니다. 사라는 그를 체포하려는 집행관들을 막고 대신 돈을 지불하려고 합니다. 모자가 들어 있는 가방을 차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부지런히 길거리에서 모자를 팔고 있었나 봅니다. 돈을 마구 써대는 것도 모자라 체포될 위기에 처한 약혼자의 모습과 비교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4. The Arrest,engraving/wikipedia







다섯 번째 ,< Marrige>입니다. 드디어 사라와 결실을 맺는구나! 했더니 아닙니다. 레이크는 어떤 늙은 여인과 결혼하고 있습니다. 이 시점에서도 젊은 시녀에게로 눈이 돌아가는 레이크를 보아, 그가 결혼한 이유는 여인이 쌓아둔 재산 때문인가 봅니다. 반지를 끼워주면서도 신부를 쳐다보지도 않네요.






그럼 사라는 어디로 갔을까요? 시녀의 뒤를 보면 실랑이를 벌이는 사람들의 실루엣이 보입니다. 아마도 사라와 그녀의 어머니인 것 같습니다. 아이를 안고 말입니다. 레이크의 결혼을 막기 위해 찾아온 듯한 그들을 누군가 막아서고 있습니다. 난봉을 부리는 약혼자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사랑을 지켜왔던 사라, 돈 때문에 나이 든 여인과 결혼하는 약혼자를 보며 그녀의 속은 숯 검댕이가 되었겠죠.



5. The Marriage, engraving/wikipedia





여섯 번째 연작 < The gaming house>입니다. 여전히 도박을 하며 정신을 차리지 못한 레이크입니다. 그는 가발을 벗어던진 채 하늘에 대고 신의 가호를 빌고 있습니다. 이미 많은 돈을 잃은 뒤 도박에서 이겨 돈을 얻게 해 달라는 소원을 빌고 있는 모습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연작의 막바지로 갈수록 레이크의 원래 모습과는 거리가 말어지고 있습니다. 도박장의 어둡고 자욱한 모습이 왠지 그의 암울한 미래를 예견하고 있는 듯합니다.



6. The Gaming House, 1732, engraving/wikipedia






일곱 번째, < The Prison>입니다. 모든 것을 잃고 감옥에 수감된 레이크입니다. 당시 영국에는 채무를 이행하지 못한 사람들만 가는 프리트(Fleet) 감옥이 따로 있었습니다.





작품에서 그의 주위에 현재 아내인 늙은 여자와 맥주를 들고 있는 '비어 보이'가 등장합니다. 레이크의 왼편에서 불만스러운 표정을 하고 손을 내밀어 그에게 돈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레이크가 감옥 안에서조차 빚을 지고 음식을 먹은 듯합니다.





하지만 여태까지의 모습과는 달리, 그는 매우 당황한 기색입니다. 레이크의 눈은 튀어나왔고, 손과 몸은 두려움으로 떨리는 듯합니다. 불쌍한 사라, 그녀는 감옥에 수감된 전 약혼자의 모습을 보고 오히려 실신해 버립니다. 엄마 따라 영문 모르고 따라왔을 딸아이의 놀란 표정이 보입니다. 그저 순진하고 착한 여인의 모습이 지금의 눈높이에서 이해할 수 없지만, 그 당시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았던 그녀의 모습이 씁쓸할 따름입니다.






7. The Prison, engraving/wikipedia






프리트( Fleet) 감옥은 영국 런던에 위치했던 역사적인 감옥으로, 주로 채무자들을 수감하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14세기부터 19세기까지 운영된 이 감옥은 과거 금융 문제로 인한 부채로 인해 사람들을 법적으로 수감했던 장소로 유명합니다. 프리트 감옥은 원래는 군인들이 사용하던 요새에 세워진 건물로, 나중에 채무자와 범죄자를 수감하는 용도로 변모했습니다. 감옥 내의 환경은 매우 열악했고, 수감자들은 불안정한 생활환경 속에서 고통받았습니다. 감옥은 성격상 임시적이거나 영구적인 수감자 모두를 위한 장소였으며, 많은 사람들은 생계 문제로 인해 다시 감옥으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감옥의 운영은 채무자를 수감하는 것이 정당한 지에 대한 논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19세기 중반에는 매독과 같은 여러 감염병의 확산과 같은 문제로 인해 감옥의 운영 방식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게 되면서 여러 법률이 제정되었습니다.




프리트 감옥은 19세기말 경에 폐쇄됩니다. 이는 당시의 사회적 여건에 따라 '채무자 감옥'의 역할과 필요성이 변화함에 따라 이루어진 조치였습니다. 이후 채무자 수감에 대한 대체 수단들이 마련되면서 이 감옥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현재 프리트 감옥의 자리는 역사적 기념물로 남아 있으며, 당대의 사회적 문제를 상징하는 장소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IWG8cvs5ubQ







연작의 마지막, 여덟 번째 그림 < The Madhouse>입니다. 레이크는 결국 정신이 이상해져 정신병원에 수감되었습니다. 옷을 벗은 채로 나뒹굴고 있는 모습이고요. 첫 그림에서 자신만만하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습니다. 눈물을 닦으며 그를 위로하는 그녀, 그러나 레이크는 사라를 등지고 끝까지 바라보지도 않습니다. 사랑했던 이의 말로를 지켜보는 사라의 마음은 무너집니다.




참고로 이 그림에서는 정신병원에 찾아온 귀부인들이 등장하는데, 당시에는 흔한 광경이었습니다. 영국에서는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이들이 이상행동을 하는 것을 지켜보며 즐기는 문화가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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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IsPQAZ0wmq0









수감 생활 후 도미에는 가난한 민중에게 시선을 옮겼습니다. 귀족이나 부르주아의 횡포로 고통당하는 민중들의 삶을 한층 더 사실적으로 그려냈고요. 이후 날카로운 풍자와 따뜻한 인간애가 담긴 걸작을 많이 남겼습니다. 대놓고 왕을 비판하기보다는 서민들의 애환을 담기 시작했습니다. 무려 4000점에 달하는 석판화를 그려낸 그는 1840년부터는 유화 작품에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유화작품 중 가장 대표작은 < 3등 열차 The Third-Class Carriage>(1862) 등이 있습니다.





당시 열차칸은 계급화되어 있었습니다. 귀족들은 1등 칸, 부르주아는 2등 칸, 가난하고 옷차림이 지저분한 이들은 3등 칸에 타야만 했습니다. 오노레는 어느 날 3등 칸에 탑승해 힘겨운 노동을 마치고 귀가하는 가난한 서민들의 모습을 관찰했습니다. 그리고 유화 물감으로 화폭을 옮긴 것이 작품, < 삼등열차 The Third- Class Carriage>(1862)입니다.








The Third-Class Carriage(New York), 1862-1864,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wikipedia





그의 작품 <3등 열차 The Tird-Class Carriage>(1862-1864)는 열차라는 근대적인 이동 수단과 함께 서로에게 무관심한 얼굴로 앉아 있는 군중의 모습을 다룹니다. 이 작품은 산업화 시대의 파리에서 세 번째 등급 기차 칸에 실린 노동자들의 생활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 삼등열차>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여러 점의 유화 중 하나로,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던 19세기 중반의 사회적 배경을 반영합니다. 흔들리는 열차의 3등 객실, 아이에게 젖을 주고 있는 엄마와 할머니에게 기대 자고 있는 아이의 모습은 일상에 지친 서민들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른 승객들도 좁은 3등 객실 내에 서로 다닥다닥 붙어있어 무거운 공기만큼 우울한 침묵이 흐릅니다. 다소 무기력하고 지쳐 보이는 승객들은 서로 교감하지도 않고 그저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차창 밖 밝아 오는 여명이 기차 내부를 훤히 비추며 오히려 그들의 궁핍함과 고달픔이 더 드러납니다.





색채에 있어서 도미에는 주로 갈색 톤을 사용하여 어두운 분위기를 자아내며, 이러한 색채는 인물들의 삶에 무게를 더욱 돋보이게 만듭니다. 사용된 색상은 감정적인 울림을 주며, 관객이 느끼는 감정적 반응을 이끌어 냅니다.





< 삼등열차>는 그 자체로 단순한 기차의 내부 묘사를 넘어서,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가난과 빈곤을 강렬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당시의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고 있으며, 예술이 사회 변화를 이끌 수 있는 강력한 도구임을 상기시킵니다. 당시 산업화의 그늘에 가려진 도시 빈민 노동자들에 대한 도미에의 연민이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같은 주제의 캐나다 버전과 샌프란시스코 버전이 있습니다.








The Third-Class Carriage(Ottawa), 1863-1865, National Gallery of Canada, Ottawa/wikipedia

The Third-Class Carriage(San Francisco), 1856-1858, Fine Arts Museums of San Franciso/wikipedia






The First Class Carriage, 1864/wikipedia The Second Class Carriage, 1864/wikipedia



반면, <1등 열차 The First-Class Carriage>(1864)에서는 열차 안의 사람들은 행색부터 다릅니다. 혹여 있을지 모를 서로에 대한 접촉에 염두에 둔 사람들은 장갑을 끼고 있습니다. 이들 사이에서는 어떤 유대감이나 인간적인 관계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무심하게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진 창가의 승객과 읽을거리에 몰두한 여성 그리고 할 일 없이 앉아있는 노인은 공간을 공유하고 있을 뿐, 모두 고독한 개인의 모습이 잘 드러납니다.









'풍자'라는 코드로 두 작가의 작품을 살펴 보았습니다. 때로는 관객들의 비판적 사고를 자극하기도 하고, 개인이나 기관의 부조리함을 드러내기도 하며, 이를 통해 사회의 본질적인 모순을 여과없이 드러내기도 합니다. 다양한 문제 해결을 위한 효과적인 소통의 도구일 때도 있고요.




앞 뒤 꽉 막힌 일상 속 '사이다' 같은 친구나 동료가 있다면 그 또한 행운일겁니다. 가벼운 농담이나 유머가 관계의 긴장을 풀어주듯 위선적이고 억압적인 느낌이 들었다면 '풍자'를 떠올리는 것은 어떨까요? 작가님들에게 공감과 비판적 사고의 기회를 제공하며 껄껄웃고 툭툭 털어 버릴 수 있는 연말되었으면 합니다.



제목 그림: The Graham Children, 1742/ wikipedia






특별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89400XYJWl4







https://www.youtube.com/watch?v=fZGwqGmBcBQ








https://www.youtube.com/watch?v=tKKUR7wIlu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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