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담 보바리 ,
그건 바로 나야.
Madame Bovary, c'est moi.
-귀스타브 플로베르-
'마담 보바리 Madame Bovary'(1857), 흘려들어도 한 번쯤은 들었을 이름입니다. 두꺼운 책을 직접 읽어 보신 분들도 계실 테고요.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요, 작품이 모두 "라는 신조로 글을 한 자 한 자 다듬은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 1821-1880)의 장편소설입니다. ' 말의 연금술사'로 불리던 그는 디테일이 강하고, 심리묘사가 뛰어난 작가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을 통해 대중에게 이름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실제로 있었던 사건인 의사 외젠 들라마르의 아내 델핀 들라마르의 자살 사건에 영감을 받아 5년간의 연구와 집필을 통해 완성되었습니다.
주인공 엠마 보바리는 북프랑스의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나, 아름답고 정열적인 여성으로 성장합니다. 그녀는 의사 샤를 보바리와 결혼하지만, 곧 결혼 생활에 대한 환멸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던 중, 바람둥이 대지주 로돌프가 그녀에게 접근하여 간단히 그녀를 정복합니다. 나쁜 남자 로돌프는 그녀가 열중하게 되자 그녀와의 관계를 끊어버립니다. 또 한 명의 연인으로, 소심하지만 낭만적이고 도덕적인 성격을 지닌 젊은 서기 '레옹'의 변화도 볼 수 있습니다. 결국 허영심으로 끌어댄 빚 때문에 궁지에 몰려 보바리 부인 엠마는 비소를 먹고 자살한다는 내용입니다.
개인적으로, 젊은 시절 접한 이 작품은 그저 그런 뻔한 결말의 통속 소설 정도로 여겨졌습니다. 별 감흥이 없었다는 얘기죠. 왜 이런 책이 고전에 속하는지 이해를 못 했으니까요. 희끗한 머리가 자연스러워질 무렵 다시 만나게 된 이 책은 그동안 무디어져 있던 섬세한 감정들을 넓은 마당에 던져 놓고 가는 듯했습니다.
만약 옆에 있었다면 , 아프게 꼬집어 주고 싶을 정도로 답답함이 들었던 남편 '샤를'. 아는 얼굴 하나가 무심히 스쳐 가더군요. '이제 그만. 선 넘었어!' 하며 커다란 'STOP'사인 들이밀고 싶었던 엠마의 질주하는 욕망의 시간. 현실과 되고 싶은 '나' 사이에 골이 깊어 갈등하 던 젊은 시절의 제 모습도 보았습니다. 엠마의 물질적 허영심뿐만 아니라 지적 허영심으로 속물근성 가득찼 던 어리석은 시절의 제 모습도 보았고요. 따지고 보면 '허영심'이란 단어에 자유로울 여자가 몇이나 될까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죠.
종교가 일상을 좌우하고, 탈출구처럼 도덕이 경계를 오르락내리락하며, 특히 당시 여성이 처한 사회적 제약이 숨 막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엠마가 살았던 시대에 태어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싶었고요. '자유롭고 싶은 저 영혼을 감히 손가락질할 수 없었습니다. ' '그럴 수도 있지.' 어떤 부분은 '엠마' 손을 들어주다가도 , '이건 아니지.'라며 남편 샤를의 편을 들어주고도 싶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생겨도 본질을 보기 위해 끝까지 파고들어 가는 치열함이 없으니 남편 '샤를'의 매력이 뚝 떨어집니다. 한창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고 있는 두 아들의 성향이 혹시 '샤를' 같은 답답함 때문에 미래의 올 짝꿍에게 걸림돌이 되면 어쩌나 싶은 쓸데없는 생각도 해보았고요.
말주머니처럼 풍선을 단 생각들이 가지를 쭉쭉 뻗어 나가고 있었습니다. 실수투성이의 감추고 싶은 비밀까지 잔가지 같은 지난날 경험과 샅샅이 조우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이제야 작가의 의도를 조금은 알 것 같았고요. 또한 현대에 뚝 떨어져도 질기게 살아남겠다 싶은 장사꾼 '르뢰'와 약사 '오메'의 모습은 선한 얼굴을 한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댄디 플로베르의 소설 <마담 보바리>가 여러 차례(1933, 1949, 1992, 2014) 영화화되는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오늘은 인상주의 여류화가 프랑스 출신 마리 브라크몽(Marie Bracquemond, 1840-1916)과 덴마크 스카겐 출신 화가 안나 앙케(Anna Ancher, 1859-1935)의 작품을 보러 갑니다.
요즘은 같은 분야에서 함께 일하는 부부들도 많지요. 그들은 서로에게 어떤 느낌일까요? 서로 돕고 의지하는 동료 같은 느낌일까요, 아니면 속속들이 알고 있어 불편할까요. 때로 경쟁 상대로 생각하고 상대를 깎아내리는 것으로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싶을 때도 있을 테니까요. 잘 나가는 짝꿍 모습은 질투를 일으켜 본질을 못 보게 할 때도 있고요.
프랑스 출신 마리 브라크몽(Marie Bracquemond, 1840-1916)은 메리 카세트(Mary Stevenson Cassatt, 1844-1926)와 베르트 모리조 (Berthe Morisot, 1841-1895)와 함께 여성 인상주의 3인 방으로 꼽힙니다. 여성들이 결혼과 함께 경력이 단절되는 경우가 많지요. 육아도 큰 문제지만 남편의 협조가 가장 큰 부분이란 생각을 합니다.
19세기 그녀들 역시 갈등합니다. 미국 출신이고 프랑스에서 활동했던 메리 카세트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독신을 택합니다. 베르트 모리조 역시 남편의 외조로 붓을 놓지 않았고요. 오늘 얘기할 마리 브라크몽은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남편의 그늘에 가려 제대로 활동을 하지 못했습니다.
인상주의의 몇 안 되는 여성 화가이자 모네와 동갑내기 화가인 마리 브라크몽은 실력에 비해 알려진 것이 많이 없습니다. 알려진 많은 것들은 대부분 그녀의 아들이 쓴 , 출판되지 않은 짧은 전기인 <La vie de Felis et Marie Bracquemond>에서 발췌한 내용들이고요.
루브르 박물관의 복제화가 시절 남편을 만났습니다. 처음에는 사랑했으므로 남편도 그녀를 돕고자 했겠지요. 그러나 29살 그녀와 36살 그는 급속도로 가까워진 시간만큼 또 관심사의 차이로 대립하기 시작합니다. 마리는 프랑스 브르타뉴지방의 해안가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부모가 자주 거처를 옮겨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살았습니다. 브르타뉴에서 쥐라 (Jura)로, 스위스로, 리무쟁(Limousin)으로 이사를 다니며 불안정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대로 된 교육을 받거나 안정적인 생활환경에서 사는 것과는 거리가 좀 멀었습니다. 그녀가 10대가 되었을 때 가족들이 파리 근교에 정착하게 됩니다.
얼마 후 그림 복원을 하며 마을의 젊은 여성들을 가르치는 나이 든 화가 오귀스트 바소르(M. Auguste Vassor)라는 화가의 지도를 받게 됩니다. 이후 마리는 17세가 되던 해, 화실에서 포즈를 취한 어머니와 동생, 스승을 묘사한 작품을 살롱전에 출품했고 당선됩니다
앵그르의 스튜디오에서 가장 똑똑한 학생들 중 한 명
-비평가 필립 뷔르티(Philoppe Burty)-
그 후 그녀는 화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를 소개받게 됩니다. 당시 남성위주의 사회에서 같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도 여성 화가들의 위치를 동등하게 취급해 주진 않았습니다. 남성 화가들의 추천이 큰 바람막이가 되어 주었지요. 스승이 되어 준 그들 역시 꽃 그림, 과일 그림과 같은 정물화 위주로 정해 진 장르만 여성 화가들에게 강요했습니다.
그녀는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 둘은 2년 동안 약혼기간을 거쳐 1869년 결혼합니다. 이듬해 그들은 외동아들 피에르를 낳습니다. 그녀는 개인적으로 도미니크 앵그르의 화풍에 심취해 있었을 뿐만 아니라. 17세기의 네덜란드 화가들의 화풍에도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인상주의가 ...
새로운 시각뿐만 아니라 사물을 바라보는
매우 유용한 방법과 함께 만들어 냈다.
그것은 마치 창문이 한 번에 열리고 햇살과 공기가 집안으로 밀려드는 것 같다.
-마리 브라크몽-
1879부터 1890년까지 인상파의 영향으로, 브라크몽의 스타일은 바뀌기 시작합니다. 캔버스는 점점 커지고 색은 짙어지기 시작합니다. '산업 혁명'의 영향권 아래에 있던 프랑스는 증기 기관의 발명으로 가고 싶은 곳을 쉽게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튜브형 물감이 발명되어 휴대가 간편해지면서 야외로 나가 그림을 그리는 일이 쉬워지게 됩니다.
그즈음 그녀는 외광파로 알려지게 된 마네, 모네와 함께 야외로 나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두 사람은 그런 그녀의 멘토가 되어 줍니다. 파리 만국 박람회로 인해 식민지 시대 얻게 된 넘쳐나는 신기한 물건들과 동양 특히 일본의 우끼요에 판화의 등장으로 새로운 경험을 갖게 됩니다.
브라크몽은 점차 그녀만의 독특하고 다채로운 스타일을 확립했고, 1879년, 1880년 , 그리고 1886년의 인상파 전시회에 그녀의 작품을 전시할 초대장을 받기도 합니다. 그녀의 그림들 중 일부는 <모던 라이프 La Vie Moderne>에 출판되었고요.
남편 펠릭스 브라크몽은 알프레드 시슬레 (Alfred Sisley)를 통해 폴 고갱( Paul Gauguin)을 만나 가난한 예술가를 집으로 데려오기도 했습니다. 마리는 자연스럽게 폴 고갱의 영향도 받았고요.
그들의 아들 피에르에 따르면, 펠릭스 브라크몽은 종종 그의 아내가 자신의 작품에 대해 비평하는 것을 퉁명스럽게 거절했다고 합니다. 자존심이 많이 상했던 걸 테죠. 같은 길을 걷는 동료 화가로서 아내의 비평은 때로 날카로운 무기가 되어 꽂힐 수도 있을 겁니다. 아무튼 그녀의 남편은 마리를 동료로 생각하지 않았던 듯합니다.
또한, 남편 브라크몽은 그녀의 그림을 방문객들에게 보여주는 것을 거부하면서 화를 냈다고 합니다. 이렇게 사사건건 찾아오는 남편과의 가정 내의 마찰로 마리는 점점 지쳐갑니다. 그림에 대한 집중도도 당연히 떨어졌겠지요. 점점 관객의 시선에서 그녀의 작품이 멀어져 가며 관심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이에 낙담했던 마리 브라크몽은 몇 점의 개인적인 작품을 제외하고 50세 이후로는 작품 활동을 포기하고 맙니다. 다만, 그녀는 활동적으로 그림을 그리고 있지 않을 때에도 그녀의 일생 동안 인상주의의 확고한 옹호자로 남아있게 됩니다.
왼쪽.Pierre Painting a Bouquet ,1887/wikimedia Commons, 오른쪽. Interior with the Painter's Daughter Helga Sewing, 1890/Arthur.io
이 작품은 인상주의적 특성을 드러내며, 섬세하고 풍부한 색상 사용이 특징입니다(왼쪽). 아들이 등장하는 이 그림에서 브라크몽은 꽃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캔버스에 효과적으로 담아냈습니다. 인상주의 화가로서, 색상과 빛의 변화를 탐구하는 데 중점을 두었고요.
어머니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모델이기도 했던 외아들 Pierre Bracqemond은 비록 그의 어머니만큼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부모와 시대의 예술적 경향에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가 만났던 다양한 예술가들에게서도 영향을 받았고요. 아들 피에르는 어머니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며 그녀의 사후 회고전을 열어줍니다.(1919년)
Bracquemonf, Marie-Impressionism
'휘게 (hygge)'라고 불리는 가정적인 아늑함에 전념하는 덴마크 생활양식이 있습니다. 19세기 덴마크 문서에 처음 등장했고 노르웨이에서 유래되어 감정과 마음의 상태를 나타내는데, 특히 '위안"과 "기쁨"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친구나 가족과 함께 보내는 비공식적이거나 시간을 강조하지요. 보통 편안한 환경에서 맛있는 음식을 나누거나 대화를 나누며 즐거운 순간을 만드는 것이 hygge의 핵심입니다. 특별한 계획 없이 소소한 기쁨을 축하하거나 깊은 주제를 논의할 기회를 제공하지요. 이 개념은 덴마크를 넘어 국제적으로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여러 문화에 적용되고 있습니다. 사람들 간의 따뜻한 관계와 삶의 소소한 기쁨을 중시하는 문화적 개념으로 말입니다.
추워지는 날씨 촛불을 켜고, 두꺼운 양말을 신고, 테이블 램프의 따뜻한 빛이 흘러나오는 아늑한 공간이 그리워지는 계절입니다. 오늘 찾아갈 덴마크 화가 Anna Ancher(1859-1935)의 작품입니다.
Sunlight in the blue room(할머니 방에 있는 딸 헬가 앙케르), 1891, Skagens Museum/wikipedia
볕이 드는 푸른색 할머니 방. 뜨개질하던 어린 딸아이가 오른쪽 그림의 뒤태가 아름다운 숙녀가 되어 빛이 가득한 공간을 존재 자체로 채우고 있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그녀의 딸인 헬가 엥카(Helga Ancher)를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따뜻한 실내에서 소박하게 바느질을 하는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색채의 사용과 부드러운 빛의 표현이 따스하게 느껴집니다. 앵커의 특유의 세심한 디테일이 돋보이고요. 이 그림은 딸인 헬가 앵커가 그려진 수많은 작품 중 하나로, 그녀의 가족과 일상적인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Christmas Day by Michael Ancher ,1900/wikipedia
남편이 그린 장모님(가운데)과 이모들, 아내, 그리고 딸 3대가 함께 모인 크리스마스 아침 모습입니다. 남편 Michael Ancher 역시 인상파 화가입니다. 그가 사용하는 빛의 효과는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장면을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법은 관람객에게 마치 그 순간을 함께 하는 듯한 느낌을 줍니다. 크리스마스날 아침, 밖은 여전히 춥지만 실내의 따뜻한 색감이 가족 간의 관계를 더 부각해 줍니다.
Efter Dagens Moje by Anna Ancher,1917/Artnet
이 작품은 안나 앵커가 어머니 사후에 그린 그림으로, 푸른 방에서 어머니와 이모가 무거운 눈꺼풀을 내리고 잠시 쉬고 있는 작품입니다. 평생 호텔을 운영하셨고, 너무 지칠 때 눈을 감은 채로 혹은 엎어진 채 잠깐의 피로를 풀기도 했습니다. 개인적으로 고단한 두 자매의 모습이 왠지 낯설지 않았습니다. 오버랩되어 둥근 얼굴 형상을 한 몇몇의 얼굴이 스쳐 지나갑니다. 거친 붓질이 눈길을 끕니다. 총 413 점의 유화 중에 두 명을 모티브로 한 유화작품은 딱 두 점뿐입니다.
The Artist's Mother reading by the window in the Blue room. 1912/ Reprodiction Gallery
손녀가 뜨개질을 하던 푸른 방의 주인공입니다. 86세의 어머니가 책을 읽고 계십니다. 화가 아나 앙케(Anna Ancher)가 유난히 자주 그렸던 모델이 어머니 아네 헤드 브뢰넘(Ane Hedvig Brodum)입니다. 딸이 그린 그림 속 어머니는 젊고 싱싱한 모습은 찾을 길 없습니다. 나이대 별로 그려 낸 엄마의 초상화는 딸아이의 붓끝에서 화사하게 피어납니다. 때로는 따스한 빛을 통해 방안 온기를 데우는 방식으로, 창가에 오렌지 식물을 놓아두어 포인트를 주고 생기를 더하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화가인 딸의 특별한 후원자였던 어머니는 호텔이 있던 자신의 '푸른 방'에서 자주 포즈를 잡아 모델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 푸른 방에서 그녀는 어머니가 책과 편지를 읽는 모습을 많이 그렸고요. 딸의 붓끝에서 나이 들어가신 어머니는 90세인 1916년에 돌아가십니다. 푸른 방의 색상이 빛으로 조금씩 변해가듯이, 그녀의 화폭 속에는 어머니의 시간과 삶의 모습이 화사하게 나이 들어갑니다.
Helga Ancher-Kunstnerdatteren fra Skagen/KLE-art
부모님인 안나 앙케와 미카엘 앙케의 딸인 헬가 앙케 역시 화가로 성장합니다. 그녀의 작품은 주로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스카겐의 풍경을 주제로 하고 있지요. 내면의 모습과 자연 풍경을 색채로 표현한 것이 특징입니다.
왼쪽. Under the Lamp,1877/wikipeida 오른쪽. Hipp,Hipp, Hurra!, Peder Severin Kroyer/ wikipedia
"Under the Lamp"는 테이블 위에서 조명이 비추는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왼쪽). 가스램프 아래 두 남녀가 앉아 있는 모습이 보입니다. 남자는 인상파 화가 알프레드 시슬리이고 여인은 나중에 시슬리의 아내가 되는 마리 루이즈입니다. 마리가 자신의 집에 두 사람을 초대한 장면을 묘사 한 작품입니다. 녹색 램프를 이용한 빛의 효과에 주목한 것이 특이합니다. 부드러운 색조의 배경과 함께 따뜻한 빛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브라크몽의 이 작품은 인상주의 화풍의 중요한 요소를 잘 보여줍니다. 그녀는 빛과 그림자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대상의 질감과 온기를 뚜렷하게 표현했습니다. 이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즐겨 사용하였던 기법으로, 자연의 빛과 그것이 사물에 미치는 영향을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둡니다.
Alfred Sisley(1839-1899), Winter in Louveciennes,1876/Pinterest
알프레드 시슬리(Alfred sisley)는 19세기 영국 인상파 풍경 화가로, 주로 프랑스에서 활동하였습니다. 그는 인상파 화가들 가운데 가장 일관되게 풍경화에 전념한 화가로, 인물화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파리에서 부유한 영국 부모에게 태어나 18세에 런던에서 상업 경력을 위한 교육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길을 포기하고 파리로 돌아와 클라우드 모네, 루느아르,바지유와 같은 동료 화가들과 함께 야외에서 자연을 직접 관찰하며 그림 그리기를 시작했습니다. 1874년을 시작으로 인상파 전시에 참가하며 자신의 작품을 널리 알리기 시작했고요. 생전에는 인정을 받지 못해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주로 센 강 근처의 풍경을 주제로 한 작품이나 테임즈 강과 그 주변 지역의 풍경으로, 부드럽고 잔잔한 색조가 특징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691pGu-PGk
Skagen, Denmark/Vulkaner.no
1870년경 점점 더 많은 스칸디나비아(덴마크. 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의 화가들이 다각적인 예술 현장이 있는 현대 대도시인 파리를 방문했습니다. 그들은 레옹 보나드 (Leon Bonnat), 줄리앙 아카데미 (Academie Julian)또는 콜라로시 아카데미 (Academie Colarossi)의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장 레옹 제롬(Jean-Leon Gerome)의 지도를 받았고요.
여름이 오고 파리의 사립학교 수업이 중단되자 예술가들은 도시를 떠났습니다. 브르타뉴 해안은 특히 그림 그리기로 유명했지요. 1880년대에 퐁텐블로 숲 옆의 그레쉬르 루앙(Grezsur loing)에는 스웨덴 예술가들의 화가 마을이 있었습니다. '이케아'에 영감을 준 스웨덴의 화가 '칼 라르손(Carl Larsson)'이 머물렀던 마을로도 유명하지요.
머지않아 예술가들은 화가 마을에 대한 아이디어를 스칸디나비아로 가져갔습니다. 가장 유명한 북부의 화가마을은 덴마크의 스카겐에 있습니다. 많은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화가들이 매년 여름 그곳으로 돌아와 오래된 친구들과 혹은 새로운 친구들과 함께 그림을 그렸습니다.
Anchers Hus in Skagen/wikipedia
Anchers Hus interior
https://www.youtube.com/watch?v=4QwvMNpO07A
Hipp hipp Hurra!, Peder Severin Kroyer/wikimedia Commons
<Hip,Hip, Hurrah!> 작품입니다. '달빛의 화가 '로 불리는 '페더 세버린 크뢰이어 (Peder Severin Kroyoe)가 그린 작품으로, 그림 속 5살짜리 꼬맹이와 안나를 금방 찾을 수 있을 겁니다. 매년 여름이면 화가들이 스카겐(Skagen)에 모여 결의를 다지던 파티 모습입니다(오른쪽).
그녀가 속했던 스카겐 화가 그룹은 1870년대 후반부터 덴마크 유틀란드 (Jutland) 반도 최북단 어촌 마을 스카겐에서 매년 여름이면 모여 현지 어부들과 함께 그리던 화가 그룹이었습니다. 그 들은 현지 브뢴둠 여관에서 매년 여름이면 모였는데, 그 호텔 주인 딸이 바로 오늘 글의 주인공, 아나 앙케르 입니다.
운명적으로 그림붓을 들게 된 그녀는 스카겐 미술 그룹에 유일한 여성 참가자였습니다. 그녀의 딸 헬가 역시 화가의 길을 걷습니다. 사촌인 마르타 묄러(Martha Moller)의 뒷모습도 보입니다. 화가 비고 요한센(Viggo Johansen)과 결혼했습니다.
Joyful Christmas, Viggo Johansen, 1891/wikipedia
비고 요한슨(Viggo Johansen)은 스카겐 화가 그룹의 활동적인 구성원 중 한 명입니다. 1885년 파리에서 전시가 있었고, 클로드 모네의 영향을 받으면서 색 사용에 새로운 영감을 얻습니다. 특히 그는 장면의 부드러운 조명을 잘 표현한 작품들로 기억되며, 가족생활을 담은 실내 장면, 풍경, 정물화 및 초상화를 그렸습니다. 크리스마스 즈음 자주 등장하는 이 작품은 모두 요한슨 가족입니다.
왼쪽.Harvest Time, 1901/ wikipedia 오른쪽, Harvest Time,1905/wikimedia Commons
아나 앙케(Anna Ancher,1859-1935)의 작품 <Harvest Time>(1901)입니다. 마치 금발이 나부끼듯 호밀밭 사이로 빛이 부서지며 출렁입니다. 빛이 부서지고 서로 간섭하는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요. 이 그림을 보면 안나 앙케르가 왜 스카겐의 선배들을 능가하는 북유럽 인상파 최고의 화가로 찬사를 받는지 알 것 같습니다.
그녀만의 독보적인 색감과 컬러링을 창조하여 자신만의 스타일을 개발한 화가였습니다. 실내에서나 실외에서 오로지 자연광에서 찾는 다양한 색상과 미술의 상호 작용을 관찰하는 선구자였다고 할까요? 그녀의 그림들은 한결같이 덴마크 북부 스카겐의 빛과 캐릭터, 그리고 성격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On the Terrace at Sevrese , 1880/wikipedir
마리 브라크몽의 작품 < On the Terrace at Sèvres>(1880)입니다. 이 작품은 두 가지 버전이 존재합니다. 더 큰 버전의 크기는 88cm*115cm로 현재 스위스 제네바의 뮤제 뒤 프리 모던 아트(Musee du Petit Palais)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더 작은 버전은 56.8cm*64.5cm로 일본 도쿄의 아르티존 뮤지엄에 위치하고 있고요. 두 버전은 브라크몽의 집의 테라스에 있는 세 명의 인물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빛의 사용, 부드러운 붓 터치, 풍경보다 인물에 더 집중하는 등 인상주의로의 스타일 전환을 보여줍니다. 작품의 배경은 인물들을 압도하지 않고 보완하는 조화롭게 구성된 테라스를 특징으로 합니다.
이 그림은 전통적인 예술적 영감에서 인상주의자들, 즉 르누아르와 모네로의 영향을 받으면서 브라크몽의 예술적 영감을 바꾸는 것을 잘 보여줍니다. 등장하는 인물들의 정체성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현재는 남성 모델은 바론 게즈(Baron Ghez) 일 가능성이 높고 , 두 여성은 마리의 여동생인 루이즈 퀴베롱(Louise Quiveron)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은 1880년 제5회 인상주의 전시회에 전시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왼쪽. Portrait of Fe'lix Bracquemond, 1886/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오른쪽. Self Pritrait with Anna and Helga, 1990/wikimedia Commons
Felix Bracquemond self portrait/Harvard Art Museums
이 작품은 그녀의 남편이자 유명한 판화가인 펠릭스 브라크몽(Felix Bracquemond, 1833-1914)을 묘사하고 있습니다(왼쪽). 마리의 인상주의적 스타일과 기법이 잘 드러나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초상화는 마리 브라크몽의 개인적이고 친밀한 시각을 통해 남편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마리는 정물이나 풍경뿐만 아니라 인물화를 통해서도 감정을 전달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보였습니다.
초상화의 배경은 단순하고 우아한 색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는 인물인 펠릭스의 존재감을 더 강조하고요. 브라크몽은 이 작품에서 부드러운 브러시 터치와 독특한 색상 조화를 통해 인물의 피부톤과 표정을 사실감 있게 표현합니다. 자연광이 인물에 미치는 영향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Z0SfaD-Jvk
오른쪽 그림을 보면, 구레나룻에 정면을 응시한 모습의 마카엘 앙케의 모습이 보입니다. 스카겐 브뢰눔스 호텔의 고객이었던 미카엘 앙케는 Anna의 남편이 되고, 딸인 Helga의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장인어른이 돌아가시기 전인 스물한 살이던 1880년에 그녀는 스카겐 그룹에서 가장 활동적인 멤버 중 한 명이던 미카엘 앙케와 결혼합니다.
여성이 화가가 된다는 것을 생각조차 할 수 없던 시절에 태어났습니다. 운이 좋다고 얘기해도 될 만큼 , 스카겐에서 호텔을 운영하던 부모님이나, 남편으로 만난 동료화가 미카엘은 그녀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격려했습니다. 모든 스카겐 그룹 동인들이 스카겐의 어촌의 영웅적인 어부들 모습이나 풍속에 관심이 쏠려있을 때 아나는 주로 친구와 가족의 초상화나 실내 풍경을 그려냈습니다.
아나와 미카엘 엥케르(1997-1999, 3차), 세계 화폐박물관/ www.worldmoney.co.kr
나란히 덴마크 지폐에 등장한 아나와 남편 마이클 앙케모습 입니다. 이 한 장의 지폐로 그들 부부가 어떻게 서로를 지지하고 격려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아내의 그림을 봐주고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며 같은 길을 가는 진정한 동료로 서로를 대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iM0XUN_WPI
왼쪽. Afternoon Tea, 1880/wikipedia 오른쪽. Sewing Fisherman's wife, 1890/ Wikimedia Commons
<Afternoon Tea>(1880)는 인상주의의 전형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왼쪽). 브라크몽의 여동생 루이스 퀴베롱(Louise Quivron)을 모델로 하여 화가의 자택인 파리교외 세브르(Sèvres)의 정원에서 독서하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빛과 색채의 사용에서 인상주의의 독창성을 드러냅니다. 브라크몽은 유려한 붓 터치와 자연광의 효과를 사용하여 여유로운 오후의 정취를 생생하게 재현하였습니다. 특히, 여동생이 앉아 있는 의자와 책, 그리고 주변의 식물들이 조화를 이루며, 관객은 그림 속 장면에 몰입하게 됩니다.
<Afternoon Tea>는 주제적인 모습의 여성의 지적 활동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작품은 당시 여성들이 어떻게 지식과 여유를 즐기며 생활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는 메리 카셋 (Mary Cassatt)의 < The Reader>(1877)와 하리엣 백커(Harriet Backer)의 <Evening>(1890)과 같은 동시대 작품들과 비교 볼 수 있습니다.
Mary Cassat,The Reader1877/wikipedia/ Harriet Backer, Evening/USEUM
빛이 화사하게 들어오는 공간. '어떻게 작동하지?'싶은 재봉틀 앞에 어부의 아내가 바느질을 하는 모습입니다. (오른쪽). 재봉질을 막 끝내고 마무리를 하는 것 같습니다. 삶은 고단하겠지만 빛의 눈부심이 있어서 일까요? 여인의 일상이 종교적 경건함으로 다가옵니다.
왼쪽. Three Women with Umbrellas(삼미신), 1880/wikipedia 오른쪽. A Young Girl Plucking a Swan,1900/Flickr
<Three women with Umbrellas>(1880)입니다. 이 그림은 당시 패션의 영향을 받은 세 여성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왼쪽). 작품은 세 명의 여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중간의 여성은 일본풍의 팬을 들고 있습니다. 양 옆의 여성중 한 명은 브라크몽의 이복 자매인 루이즈를 모델로 하였습니다.
The Three Graces by Botticelli /Pinterest
이 그림은 종종 로마 신화의 세 여신을 의미하는 "삼미신"또는 "The Three Graces"라는 다른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브라크몽은 이 작품을 위해 여러 스케치를 제작하였으며, 1886년 제8회 인상파 전시회에서 작품의 일부 스케치를 선보였습니다.
여성의 의복과 포즈는 당시 유행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처음에 이 작품은 미술 비평가 구스타브 제프로이가 구매하여 뤽상부르 궁전에 전시하였습니다. 이후 1926년에 뤽상부르에서 퇴장되어 1936년에 챔릴 시청으로 옮겨졌고, 2013년에 현재의 위치인 루브르 박물관으로 옮겨져 지금까지 전시되고 있습니다.
오른쪽 아나 앙케의 그림은 좀 충격적이죠. 축 늘어진 목과 아무렇지도 않게 털을 뽑는 여인의 무심한 일상의 모습이 이방인에게 낯섦으로 다가오는 작품입니다. 주로 오일 페인팅 기법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녀의 지역적 주제와 장르화 스타일을 반영하고요. 자연광의 사용과 색채의 대담한 선택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녀는 자연광을 관찰하는 데 탁월한 화가입니다. 배경과 주제를 단순화하며 그림의 그림자와 반사된 빛의 통합에도 실험적이었습니다. 지역 주민들과의 친밀한 관계는 그녀의 작품에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일상적인 삶을 무심한 듯 섬세하게 담아낸 걸 보면 말입니다.
유화와 파스텔을 사용하여 풍부한 질감을 표현했습니다. 이는 그녀의 작품에서 피사체의 느낌을 더욱 부각시킵니다. 그녀의 회화는 개성 있는 색감과 디테일의 조화로 관람객의 눈길을 끕니다. 자연광과 그림자 효과를 잘 활용하여 입체감이 느껴지도록 제작되었고요. 이 그림을 통해 사람들은 19세기 덴마크의 농촌 생활과 가려져 있던 여성의 작업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마리 브라크몽과 아나 앙케의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재능이 있는 여성이 시대를 앞서 태어나면 사회의 굳어진 관습과 편견에 의해 제대로 열매 맺지 못하고 잊히기 쉽습니다. 설사 재능을 인정받았다 하더라도 결혼이란 통과의례를 거치고 나면 장벽 하나가 더 생기게 됩니다. 아이도 키워야 하고, 남편도 챙겨야 하고, 그리고 자신도 성장해야 하니 말입니다. 욕심 많게 어려운 숙제 이 세 가지 모두 챙기려 들다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됩니다.
선택은 각자의 몫으로 남겨둡니다. '여자라서 ~"뒤에 머무는 동사가 이왕이면 긍정으로 끝나는 단어였으면 좋겠고요. 짝꿍과 서로 의지하되 그러나 독립적인 슬기로운 생활되시길요.
특별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XK8lZO39T-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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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PfNESOzg6K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