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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몬드리안을 입다.

추상회와의 아버지, 피트 몬드리안(Piet Mondrian)




옷 장을 열어도 매번 입을 옷이 없다는 핑계로 한숨지은 적이 있습니다. 정리하던 옷 가지의 청바지 가짓수를 보고 깜짝 놀란 적도 있고요. 분명히 다른 매장에서 구입했지만 결국 같은 스타일의 청바지가 20벌이 넘아가는 걸 보고 ‘아차’ 싶었습니다. 무식함이 도를 지나쳐 낭비벽으로 넘어가고 있는 제 자신이 한심하더군요. 옷 잘 입는 것도 공부해야 잘 입을 수 있다는  것을 그땐 몰랐습니다. 가장 급한 것이 ‘정체성’ 문제라는 걸 그때야 깨달았습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고 나니 꼭 사야 할 옷과 그렇지 않은 옷의 구별이 쉬워져 충동구매를 덜 하게 되었지요. 옷 고르는 시간도 옷 장 앞에서 많은 옷에 한숨짓는 시간도 줄어 바쁜 아침시간을 뛰어다니지 않아도 되었고요. 이렇게 조금씩 내 취향에 맞는 옷들로 채우고 나니 마음에 평화도 찾아들고 뿌듯함에 괜스레 제 어깨 한번 토닥토닥해주게 되기도 하고요. 쓸데없이 머뭇거릴 시간에 제가 좋아하는 일 하나를 더 끼워 넣을 수 있으니 만족감에 입꼬리가 올라갑니다.








저는 심플한 룩을 선호합니다. 내성적이어서 사회성 버튼을 누르고 사람들을 만나지만 존재감은 콩알 크기나 앵두알 사이즈를 왔다 갔다 하지요.  좀처럼 눈에  띄는 걸 좋아하지 않지만 그런 저도 가끔씩 힘을 주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나, 여기 있어. 나 좀 봐줘.’하는 식으로 말이죠. 찬바람이 슬슬 파고들기 시작하면 검정 짧은 가죽 재킷에 A라인  샤스커트를 입고 부츠를 신고 기분 좀 냅니다. 제 자신에게 주는 보너스 같은 하루라 그날만큼은 눈치 보지 않습니다. 뜨악한 표정의 동료도 그날은 상관없어요. 자기들 맘대로 생각하라지요. 그들이 나일 수 없으니까요. 이런 날을 나에게 선물하면 내가 좀 괜찮은 사람 같거든요. 꾸역꾸역 어쩔 수 없이 넘기는 하루가 아니라 휘파람 불며 동료들에게 미소 서비스 맘껏 해 줄 수 있어 좋습니다.








이브 생 로랑의 ‘몬드리안 룩(Mondrian look)’입니다. 어떠신가요? 위에서 아래로 쭉 뻗은 직선은 키가 커 보입니다. 분할된 면은 날씬해 보이기도 하고요. 빨강의 원색에 흰색 면이  많아 눈의 피로감이 덜한 것 같습니다. 눈치 빠른 누군가는 요즘 유행하는 메타버스라는 가상공간 안에 재 해석된 몬드리안의 작품으로 패션쇼 매장을 론칭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제페토 안에 이미 구찌 매장이 들어서고 구찌 로고를 자신의 아바타에게 사 입히고 만족감을 느끼는 지금의 MZ세대들처럼 말입니다.






빳빳한  흰 저지 소재로 뚜렷하게 특징지어져 있고,
체형을 멋지게 나타내도록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드레스
- 하퍼스 바자(Harper's Bazaar),1965년 9월호






1965년  이브 생 로랑(Yves Henri Donat Mathieu-Saint- Laurent)은 가을, 겨울 컬렉션에서 몬드리안 드레스를 선보입니다. ‘빨강, 노랑, 파랑, 검정의 굵은 선 그리고 흰색의 면’으로 이루어진 조형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드레스입니다.  패션 잡지 역사상 가장 많이 촬영된 옷으로 기록됩니다.  덕분에 이브 생 로랑이 자신의 이름을 확실히 세계인들에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됩니다. 2011년 <코스튬 내셔널> 가을, 겨울 컬렉션으로 다시 한번 주목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그는 파블로 피카소, 기욤 아포리네트와 장콕도, 앙리 마티스와 페르낭 레제, 데이비드 호크니, 조르즈 브라크, 그리고 빈센트 반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을 넣은 재킷까지 예술가들의 작품을 컬렉션에 도입하기로 유명하지요.








고 다이애나 왕세자비가 들고 다녀  유명세를 탄 ‘레이디 디올’ 백을 만든 크리스티안 디올의 갑작스러운 심장마비 사망으로 21살의 젊은 이브 생 로랑이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가 됩니다. 1958년 1월 30일 첫 컬렉션으로 사다리 형태를 띤 원피스와 스커트형태의 트라페즈 라인(Trapeze Line)을 선보이며 보수적인 고객들 취향에 힘입어 성공합니다. 두 번째 컬렉션에 선보인 루즈한 실루엣, 네 번째 호블 스커트(Hobble Skirt), 그리고 여섯 번째 젊은 세대의 스트리트 감성을 풀어낸 ‘Beat look’은 보수적인 고객들로부터  외면을 받고 실패합니다. 실패로 인한 스트레스와 프랑스-알제리 전쟁으로 당시 크리스천 디올 하우스의 오너이자 막강한 언론계 남작인 마르셀 부삭에 의해 프랑스 군 입대를  권유받습니다.







그렇게 떠밀려 가듯 보내진 군 생활은 그에게 더 큰 스트레스로 다가옵니다. 급기야  동료 병사들과의 트러블과 군생활의 스트레스로 인해 군 병원에 입원하기까지 됩니다. 게다가 디올사로부터  해고되었다는 통보까지 받게 되면서 그의 정신적 상태가 악화되기 시작하고요. 병원에서 다량의 진정제와 정신작용제를 투여받게 되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그는 약물중독과 알코올에 의존하며 평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새옹지마라고 했던가요!

당시 그의 연인이었던 피에르 베르제(Pierre Berge)가 디올을 상대로 소송을 해 10만 달러 보상금과 임시 사무실을 얻어내고 미국 사업가 맥 로빈슨에게 3년간 70만 불 지원을 받는 조건으로 이브 생 로랑의 이름을 딴 오트 쿠튀르(Haute couture: 맞춤 고급 의류) 하우스를 론칭합니다.  그는 아프리카 룩이나 러시안 룩  같은 이국취향을 유행시키기도 하고, 백인 모델 일색인 오트 쿠튀르 무대에 과감히 흑인 모델을 세우기도 하며, 마크 제이콥스 등의 후배 디자이너들이 예술 작품을 과감히 도입해 컬렉션을 만들도록 영감을 준 디자이너입니다. 진정으로 여성을 위로하는 옷을 만든 디자이너로 사람들은 그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는  최대한의 자각으로 일반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평평한 표면에 선과 색상 조합을 구성합니다.
나는 사물의 기초에 도달할 때까지 모든 것을 추상화하고 싶습니다.




몬드리안의 일생을 한마디로 일축한 말 같습니다. 몬드리안은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자 아마추어 화가였던 아버지와 당시 네덜란드에서 유행인 헤이그 파에 속한 풍경 화가였던 삼촌의 영향을 받습니다. 빈센트 반고흐 탄생 24년 만에 몬드리안이 태어났으니 당연히 후기 인상주의 영향도 받았지요. 그래서 그의 초기 작품은 네덜란의 자연을 소재로 한 다소 평범한 그림들이었습니다. 그런 몬드리안이 '현대예술그룹'(1911)의 전시회에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와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의 작품에 충격을 받고 파리로 갈 결심을 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다시 파리로 돌아갈 수 없게 된 그는 고향 네덜란드에서 엄격한 추상예술 실험에 들어갑니다. 오랜 시간 색과 선을 단순화 시키기 위해 매일 붓질을 해댑니다. 형태를 단순화시키고 본질적인 구성 요소를 줄이는 식으로 말이죠. 보편적인 진리를 표현할 수 있고 자연 세계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종류의 아름다움을 창조해 내고 싶었던 거지요. 그 잠재력을 몬드리안은  추상 미술에서 발견한 거지요. 자신만의 개성을 갖춘 화가가 되기가 쉽지 않았답니다.









전쟁이 끝난 이후 (1918-1938) 파리에 머물며 '데 스테일 운동(De StijL=The Style의 네덜란드어)을 동료인 테오 반 두스 부르흐(Theo Van Doesburg)와 함께 전개합니다. 이 운동은 20세기 초에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발생한 추상미술 운동입니다. 이 운동에 함께 참여한 작가들은  시각구성을 수평과 수직으로 단순화했고, 흑백과 기본 색채만을 사용합니다. 이러한  미적원리를 건축, 조각, 유화, 그래픽 아트, 디자인 등으로 확장하게 됩니다. 다양한 분야에서 모인 구성원들은 회화와 건축의 융합, 혹은 예술과 생활의 통합 등이 가능하다고 믿었지요. 몬드리안을 비롯한 모임의 구성원들은  일상 속에서 우리가 쉽게 인식할 수 없는 사물의 본질을 미술작품을 통해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예술가의 소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가장 충실히 실행한 작가가 몬드리안이었고요. 그는 '데 스테일'운동의 기본 요소는 삼원색(빨간색, 노란색, 파란색)과 무채색(검은색, 흰색, 회색) 그리고 수평선과 수직선으로 보았지요. 








 


몬드리안의 그림 <Composition with Red, Blue, and Yellow,1930>은 신조형주의 이론을 통해 완전한 추상회화에 이른 그의 대표작입니다. 이 세상의 무질서로부터 인간을 해 방시키는 것을 미술의 목적으로 삼은 몬드리안의 회화관에서 출발하지요. 몬드리안의 고정 주제인 수평과 수직선은 여성성과 남성성이라는 이원적 요소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대립되는 두 요소로 설명한 몬드리안은 이 대립이 균형을 이루어 나가는 회화의 기본 법칙으로 삼았고요. 이를테면 수직선은 생기를 수평선은 평온 그리고 이 두 선이 일정한 각도에서 교차하면 역동적인 평온함에 도달하는 식으로 말이죠. 몬드리안은 직선의 사용이 갖는 중요성을 무척 강조합니다. 반면 모임의 구성원 중 하나인 테오 반 두스뷔르흐(Theo van Doesburg)는  몬드리안의 의견과 사뭇 달라 '사선논쟁'을 벌입니다. 그는 사선이 몬드리안의 수평선이나 수직선에 비해 더욱 생명력이 있다고 주장하며 사이가 멀어지게 됩니다. 이후 몬드리안은  '데 스테일'을 탈퇴하고 신조형주의회화를 단독으로 지속하게 됩니다.두 사람의 그림은  온전히 관람객 들의 몫으로 남겨졌네요. 




Theo van Doesburg, Counter- composition V, 1924





데 스테일(De Stijl ) 운동 및 신조형주의(Neoplasticism)는  모두 20세기 초 네덜란드에서 등장한  현대 미술 운동입니다.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지요. 특히 신조형주의는 몬드리안이 발전시킨 특정 예술 철학으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는 우주의 근본적인 조화를 표현할 수 있는 보편적인 시각적 언어를 만들기 위해 기하하적 형태, 원색 및 격자 기반 구성의 형태를 빌립니다. 그의  이러한 접근 방식이 자연계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종류의 아름다움을 창조할 수 있다고 믿었지요.  디자인이 전 보다 합리적이고 조화로운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어 사회를 변화시키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요. 하지만 추상화, 단순성 및 조화라는 원칙을 빼고 나면 구성원들이 수용한 접근 방식은 서로 많이 달랐습니다. 









세 가지 기본적인 색채는 노랑, 파랑, 빨강이다.
이것들은 유일하게 실존하는 색채이다.
 노랑은 빛의 움직임이고,
파랑은 노랑과 대하는 색채이다.
색에 있어서 파랑은 창공이고 선이며 수평을 지닌다.
빨강은 노랑, 파랑과 짝을 이룬다.  
노랑은 빛을 발하고
파랑은 뒤로 후퇴하고
빨강은 위로 떠오른다.




당시 네덜란드 지식인 사이에서 신지학이라는 철학이 유행했다고 합니다. 추상화의 또 하나의 거장인 칸딘스키 역시 경도될 정도로 푹 빠져있었던 동양적 신비가 결합된 사상입니다. 그 핵심은 이 세상에는 변하지 않는 보편적인 진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연 속에도 불변하는 단 하나의 절대적인 규칙이 내재해 있다고 보았지요. 몬드리안은 눈에 보이는 현상들 뒤에 숨겨진 진리를 찾고자 했지요. 그가  깊게 빠져든 신지학의 이론에 따라  원색(빨강, 파랑, 노랑) , 무색(흰색, 검정, 회색)만을 근원색으로 사용합니다. 기본 색상을 강조하고 보조 색상을 배제한 것이 눈에 뜨입니다. 격자 안의 색의 사각형을 세심하게 배치하여 균형감각과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구성은 균형을 이루도록 색상과 모양이 신중하게 배열된 대칭이고요. 








The Simpson <Marge Simpson> , pinterest





대중문화에 녹아들어 간 몬드리안 스타일은  다양한 방식으로 참조되고 차용되어지고 있습니다. 패션디자이너들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액세서리 및 메이크업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지요.  광고에서 그의  대담하고 단순한 디자인은 자동차, 가구  장식을 포함한 다양한 형태로  홍보되어 사용되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 다니던 은행이 다른 은행과 합병하며 새로운 디자인의 카드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몬드리안 작품에 은행 로고가 새겨져 있었어요. 기존에 쓰던 밋밋한 카드와 비교가 되더군요. 은행에 대한 친밀도도 높아지고요. 단순한 예술작품 그 이상의 의미로 소비자와 연결시키는 경험을 했지요. 모던함, 세련미, 단순함을 전달하는 데 몬드리안의 작품이 실력발휘를 제대로 한 경우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또한  음악에서 그의 그림은 앨범 표지 디자인, 뮤직 비디오 및 무대 디자인에서  사용되기도 합니다. 영화와 텔레비전에서 그의 그림은 세트 디자인에서 의상 디자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맥락에서 등장하기도 하고요. 몬드리안의 빨강, 파랑, 노란색 구성은 현대 문화의 상징적인 이미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진리를 찾고 사회에 공헌하고 자 했던 그의 꿈은 다양한 실험을 통해 이미 실현된 듯합니다.


#사진출처: 위티 피디아, 구글 아트앤 컬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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