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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모네의 작품<까치>와 나의 할머니

유년의 기억을 찾아서

나태주 시인의 <이제는 잊어도 좋겠다  >라는 글을 접하고 시인의 외할머니에 대한  생각에 끄덕끄덕 해지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특히 ‘모성이 둘 일 수 없다.’하는 말에 급공감했고요. 제게도 시인의 외할머니 못지않은 친할머니가 계셨거든요. 10점 만점의 7점 정도가 제 삶의 미친 할머니의 영향력 이니까요. 이 정도면 요즘 잘 나가는 인플런서 아니신가요?






까치<The Magpie>, Claude Monet, 1869, 위키아트



<까치>, 1869




모네의 <까치>라는 작품입니다. 밤 사이 눈이 많이 내렸 던 모양입니다. 울타리 같은 담장에 소복이 쌓인 눈이 솜사탕 같습니다. 나뭇가지에 슬쩍 내려앉은 눈은 흔들어 내려앉으라고 장난치고 싶어 집니다. 가난한 살림살이로 대충 입구만 막아놓은 듯한 사립문에 귀한 생명체 하나가 앉아있네요. 귀한 저 녀석이 없었다면 그저 그런 풍경화에 머물렀을지 모르겠습니다. 작은 새 한 마리 그려 놓았을 뿐인데 까마득히 잊고 있던 기억하나를 끄집어내더군요. 겨울이지만 따뜻하게 느껴지던 꼬맹이 시절 기억을 말입니다.








눈은 좋아하지만 추운 건 딱 질색입니다. 적당히 기관지 계통이 성능 이하로 태어났어요. 찬바람 불어 대면 감기를 옆구리에 끼고 살았거든요. 할머니댁에 간 날도 <까치> 그림 속 배경처럼 밤새 착한 눈이 삥 둘러 울타리를 만들어 놓고 있었어요. 싸리 빗자루 소리가 “쓱쓱 싹싹”나길래 창문을 살짝 열어젖혔습니다. 오고 가는 사람 불편하지 말라고 껑충 큰 키에 할머니가 수구리고 마당을 쓸고 계셨어요. 아침 햇살 한 줄기가 할머니 쪽진 머리 위를 지나 수그린 등 위를 거쳐 쌓인 눈밭에 길게 그림자를 드리웁니다. <키다리 아저씨>의 주인공 주디가 자동차 빛에 반사된 기다란 키다리 아저씨의 그림자를 보고 Daddy-Long-legs 라고 별명을 붙인 것처럼요. 따뜻한 기운이 감도는 아침 태양빛은  길게 늘어진 젊은 할머니 그림자를 거인 할머니로 늘려 놓았거든요. 아이들과 뛰 노는 것보다 방 안에서 창밖을 관찰하는 즐거움이 차선책이었던 저에게 그날의 기억은 눈밭에 그려진 스케치 같은 한 장면으로 맑게 남아 있습니다.  코끝에 알싸한 겨울 공기와 함께 말이죠.







이태주 시인의 외할머니처럼 남매만 남겨두고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부재를 혼자 감당하셔야 했어요. 그 빈자리를 손녀딸로 채우시며 사신 거죠. 할머니에게 저라는 존재는 남편, 손녀딸, 그리고 자신의 못다 푼 아바타 같은 다양한 역할로 주어졌습니다. 자라면서 할머니와 엄마 사이에 눈치 없이 할머니편만 들다 ‘저거, 내 새끼 맞아?’하는 눈총 많이 받았습니다. 두 여자들 사이에서 등 터지는 새우로 가슴앓이 하시는 내성적이 아빠의 모습도 보았고요. 삼대독자 남동생을 제치고 혼자 듬뿍 받은 사랑은 살다 보니 결국 공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분명 한국말인데 ‘아’ 다르고 ‘어’ 달라 감정이 널뛰기하는 두 여인의 모습을 보고 일찍 철이 들었습니다. 쪽진 머리 할머니와 짧게 자른 외할머니의 머리 스타일만큼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지고 계셨지만 공통점 하나는 가끔씩 두 여인네가 만나면 긴 담뱃대에 꾹꾹 눌러 담배 테우시는 모습이었습니다. 노년의 두 분에게 주어진 잠깐의 호사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죠. 분홍 철쭉 아래 동네 어르신들과 찍으신 사진 속 할머니는 아이처럼 환하게 웃고 계셨습니다. 그렇게 틀니를 드러 내시며 웃고 계신 모습은 처음 보았거든요.








할머니의 시간과 저의 시간의 차이가 점점 더 커지기 시작했어요. 아이들 뒤치닥 거리에 지쳐가고 있을 때 할머니가 저를 몹시 보고 싶어 한다는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이미 제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어 있으니 바로 찾아뵙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래도 할머니가 잘 버텨주셔서 이기적인 손녀딸은 할머니와 마지막 밤을 오롯이 함께 할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 체취가 묻어나는 작은 공간에서 저는 울기도 하고, 잦아드는 할머니의 숨소리를 듣기도 하고, 앙상해진 투박한 손을 쓰다듬어 보기도 하며 , 주저리주저리 못다 한 얘기도 하고, 온통 할머니에게 제 오감을 집중한 체 마지막 밤을 그렇게 보내드렸습니다.  싸늘한 병원이 아닌 집에서 보내 드릴 수 있어 감사했습니다. 가족들에게 마음의 준비할 시간을 벌어 주어 또한 감사했고요. 뒤통수 맞으며 배신 때릴 걸 알면서도 넘치게 주신 당신 사랑 덕분에 먼 나라에 이렇게 뚝 떨어져 살아도 그 힘으로 또 하루를 버팁니다. 가랑비에 옷 젖듯이 저를 통해 아이들에게 남편에게 그리고 이웃에게 눈곱만큼씩 당신의 사랑이 소리 없이 스며듭니다.


“잘 계시죠, 할머니."








#인상, 해돋이,(1872)   #파라솔을 든 여인(모네부인과 그녀의 아들)
#수련, 1919



이 그림은 그림이 아니라
미완성 작품이며
이것은 마치 인상과 같다.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작품 <해돋이>에 한 비평가가 던진 말이 '인상파'의 유래가 되었습니다. 인상파가 등장하게 된 배경을 살펴볼까요. 당시 증기기관이 발명되어 당일 여행이 가능해졌습니다. 튜브 물감이 발명이 되어 더 이상 돼지 오줌보에 물감을 담지 않아도 되었고요. 작아진 캔버스와 이젤을 들고 밖으로 나가 그림 그리는 일이 쉬워졌다는 말이죠. 이 시기 화상이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예술가를 다독이기도 하고, 재정적으로 정신적으로 후원도 해주며 화가들의 그림을 판매하기 시작합니다. 그림이 꼭 귀족들만 향유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또한 귀족들에게 판매하는 것에 한계를 느끼기도 했고요. 많은 작품을 팔고 싶어 했던 화상들은 빠른 회화작업과 독창성 있는 새로운 미술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고 '인상파'라 불리는 젊은 화가들이 그 기대에 딱 맞아떨어지는 상황이었지요.  마치  Web 3 세상이  클라우드가 밑에 깔리고 그 위에 AI, IOT,  VR, AR, Robot, Blockchain 기술이 깔리면서 더 앞당겨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클라우드 모네는 한 우물만 판 빛의 화가입니다. 죽을 때까지 빛을 연구한 화가라 '인상파의 아버지'로 불리기도 하고요. 당시 밖에서 그림을 그려 스튜디오에서 남은 부분을 완성하 던 다른 화가들과 달리 모네는 모든 그림을 야외에서 그리고 완성합니다. 평생 이 원칙을 몸으로 살아낸 화가가 모네였고요. 당연히 오랫동안 빛에 노출된 눈이 멀쩡할 리 없겠지요. 말년에 시력을 거의 잃어 집에 있는 정원의 <수련> 연작이 그려지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건초더미(해질녘),1891  #포플러 나무(가을), 1891
루앙대성당, 1894




클라우드 모네는 대중들로부터 오랫동안 외면을 받은 가난한 화가였습니다. 긴 무명시기를 거쳐 그림이 잘 팔리고 형편이 피기 시작할 즈음 아내 카미유가 아프기 시작합니다. 둘 사이에 큰 아들 장과 갓난쟁이 둘째 미셀을 낳은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상황이었고요. 한편 자신의 그림을 사주었던 부유한 미술품 수집가 에르네스트 오슈데가 경기 불황으로 파산 후 아내 엘리스와 6자녀를 두고 벨기에로 도망가 버립니다. 그런 그들을 외면할 수 없어 모네가 받아주게 됩니다. 앨리스는 아픈 카미유를 간호도 하고 갓난아이와 자신의 자녀 여섯을 돌보게 됩니다. 카미유 사망 이후 모네는 앨리스와 재혼합니다.







외벌이 젊은 화가 모네는 졸지에 8명의 자녀를 먹여 살려야 하는 입장이 되었네요.  모네가 찾은 방법은 한 가지 대상을 놓고 여러 개의 그림을 그리는 연작 시리즈물에 도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집 근처 '건초더미'를 새벽, 아침, 점심, 저녁, 그리고 봄, 여름, 가을, 겨울 빛의 변화에 따라  매 순간을 빠르게 포착해 그려내는 식으로 말이죠. 당시 모네로서는 획기적인 도전이었던 셈이지요. 다행히  각각 다른 매력을 지닌 연작 시리즈물이 성공합니다. 문제는 그리던 대상이 갑자기 사라져 버리며 생깁니다. 농부가 쌓인 건초더미를 모네의 속사정을 알 리 없기에 실어가 버린 거지요. 이번에 강변의 '포플러 나무'를 연작하기 시작합니다. 어쩝니까! 이번에 강변 목제업자가 베어가 버렸네요. 충격에 빠진 모네는 움직이지 않는 소재를 찾다가 '루앙 대성당'을 찾게 되고 빛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루앙 대성당을 연작하기 시작합니다. 현재 30여 점을 오르세미술관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그녀에게 해준 것이라곤
오직 그녀를 그림 속에 담아준 것뿐이었는데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그려주고 싶네





<임종을 맞은 까미유>, 1879







모네가 가장 사랑하던 여인,  아내 까미유(32)가 죽어갑니다. 아무것도 해 줄 수 없는 젊은 화가 모네는 그녀의 죽어가는 모습을 그림으로 남깁니다. 울고 불고 하기에도 모자란 시간인데 이렇게 비극적인 상황에도 자동으로 붓을 듭니다. 붓질을 하며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모네는 얼마나 싫었을까요. 흰색, 회색, 보라색 물감이 뒤엉켜 상실이라는 고통에 울부짖는 모네의 마음이 보입니다. 모네의 거친 붓질이 카미유의 얼굴을 영원히 지울 것처럼 말이죠. 이 그림은 오랫동안 그림 시장에 나오지 않습니다. 모네의 침실에 있었다는 것으로 전해지는 이 그림에는 서명도 없었고요.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가족들이 표시를 위해 남긴 이름이 지금까지 남아 있을 뿐이죠. 1960년대 프랑스의 한 갤러리스트가 유족에게 사들여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기증하면서 비로소 존재감이 알려집니다.








내가 갖는 그림에 대한 집착, 기쁨, 고통을 당신은 이해하지 못할 거야.
 나는 아주 오래전 아주 사랑했던,
 지금도 사랑하는 여인의 죽음을 지켜본 적이 있네. (…)
그런데 그 비참한 얼굴을 들여다보면서
 내가 무의식 중에
빛과 그림자 속에 드러난 색을 구별하고 있더군.
 나에게 그렇게 많은 의미를 가졌던 얼굴인데
 평소의 습관이 그런 반사작용을 일으켰던 거야.




어떠신가요? 위의 대화 내용은 까미유가 세상을 떠나고 40년 이 지난 어느 날, 절친이자 후원자였던 조르주 클레망스에게 한 말입니다. 평생 '빛은 곧 색채'라는 인생주의 원칙을 사랑하는 여인을 떠나보내는 순간까지 실천한 사람이 클라우드 모네입니다. 모네가  파리근교 지베르니 집에 땅을 파고 새로 만든 연못에 수련과 수생식물, 아이리스 등을 심어 실명에 가까운 시력으로 <수련> 연작 250여 점을 그릴 수 있었던 뚝심도 빛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덕택 아닐까 싶습니다.  '빛의 화가'라는 세간의 평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말입니다. 




그림출처: 위키 피디아, 구글아트엔 컬처, 위키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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