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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선택과 태도 사이

인상주의 화가 마리 브라크몽 VS 우향 박래현



커리어를 지닌 여성들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갈등이 심해집니다. 떨어지지 않으려는 아이를 억지로 떼어 놓고 돌아서는 모성은 피눈물이 납니다. '이렇게까지 해가며 직장을 다녀야 할까? 묻고 또 물으며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에 마음까지 천근만근 무겁습니다. 그렇다고 솥뚜껑만 돌리고 있는 여성들은 행복할까요? 아이교육에 자신의 인생을 걸며 질주하다 보면 나라는 존재는 온 데 간 데 없어집니다. 각종 육아정보에 내 소신은 별 볼일 없는 순진한 주장으로 묻히기 일쑤입니다. 애지중지 키우던 아이들이 떠나면  빈껍데만 쥔 채 '나는 누구지?' 하는 뒤늦은 물음이 때늦은 방황으로 이어져 존재에 대한 가슴앓이로 숨이 턱 하고 막힐 때도 있습니다. 독하게 커리어를 쌓으며 한 손에 젖병을 물린 채 몸은 어느새 망가져 있고 마음은 갈팡질팡하며 내면의 나와 외부의 시선 사이에서 한 없이 부서지고 작아집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여인들의 삶은 어떠했을까요? 미술사에 한 획을 그은 '인상주의'화풍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마네, 모네, 드가, 르누아르... 등 열거되는 남성들 사이에 3명의 여성 인상주의 화가가 있습니다. 프랑스 출신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 미국 출신 메리 카사트(Mary Cassatt), 그리고 마리 브라크몽(Marie Bracquemond)이 그들입니다. 모리조의 가족은  부르주아적이었고 마네 동생에게 시집가 후원해 주는 가족들과 지인들 사이에서 비교적 안정적으로 그림을 그렸던 화가입니다. 미국출신 카사트 역시 부유하고 교양 있는 집안 출신으로 지인들의 아낌없는 도움으로 자신의  재능을 맘껏 펼친 화가입니다. 자기 커리어에 방해가 될까 봐 결혼도 하지 않은 채 말이지요. 오늘의 주인공 마리 브라크몽은 어린 시절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가 재혼하며 스위스와 프랑스 사이의 수많은 도시를 전전하며 성장합니다. 타고난 재능은 뛰어났지만 언급한 두 명의 여성 화가들처럼 집으로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주로 독학을 통해 많은 것을 해결합니다.







 앵그르의  스튜디오에서 가장 똑똑한 학생 중 한 명





신고전주의 양식의 거장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Auguste- Dominique Ingres,1780-1867,87)를 통해 드로잉과 페인팅을 배웁니다. 그럼, 신고전주의 양식이 뭔가요? 고전의 형식미와 위엄을 강조하는 그리스- 로마 시대로의 부활이 목표인 사조이지요. 그러다 보니 앵그르는 엄격하고 까다로운 교사로 전통적인 학문적 스타일을 유지하고 싶어 하고 세심한 초안 작성과 고전 원칙 준수를 강조합니다. 앵그르의 이런 태도는  젊고 의욕 넘치는 마리 브라크몽의 의욕을 자주 꺾습니다. 종종 갈등으로 이어지기도 하고요. 당시 여성화가들에게 꽃, 과일, 정물화, 초상화 및 장르 장면의 그림만을 할당할 정도로  여성에 대한 편견도 심했습니다. 그 시대의 많은 여성 예술가들처럼 그녀 역시 예외는 아니었으니까요. 남성중심의 당시 미술계는 여성 예술가들의 기회를 제한했고, 재정적 어려움, 그리고 건강문제와 같은 개인적 상황이 그녀의 예술 경력에 많은 영향을 미칩니다.











결정적으로 그녀의 화가 경력은 남편으로부터 제지를 받기 시작합니다. 남편 펠릭스 브라크몽(Felix Bracquemond,1833-1914,81세)은 프랑스의 판화가이자 조각가입니다. 그는 파리 만국 박람회에서 그랑비아 그랑프리를 수상했을 정도로 유명한 판화가 입니다. 1850개가 넘는 판화를 제작하기도 했고요. 그럼 둘은 어떻게 만나게 된 걸까요? 마리가 루브르 박물관에서 대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다 만나게 됩니다. 마리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2년간의 약혼시기를 거쳐  결혼하게 됩니다. 둘 사이에 외동아들 피에르가 있습니다. 결혼 초기 펠릭스와 마리는 그녀의 남편이 예술감독이 된 오퇴유(Auteuil)의 하빌랑(Haviland) 스튜디오에서 함께 일한 적도 있습니다. 그녀는 저녁 식사 서비스를 위한 접시를 디자인하기도 하고 유니버설 전시회에 전시된 뮤즈를 묘사한 대형 차일 패널을 제작하기도 합니다. 그즈음 살롱에서 그림을 주문받기도 하고요.








1886년 남편 펠릭스가  인상주의 화가 시슬리( Sisley)를 통해 고갱을 만나게 되고 가난한 예술가를 집으로 데려오게 됩니다. 고갱은 마리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줍니다. 마리 브라크몽은 스케치와 드로잉을 통해 전통적인 방법으로 작품을 꼼꼼하게 준비하던 스타일이었거든요. 그런 그녀에게 고갱은 마리 브라크몽이  원하는 강렬한 톤을 얻기 위해 캔버스를 준비하는 방법을 가르칩니다. 인상파의 영향으로 그녀의 그림스타일이 점점 바뀌기 시작합니다. 1890년 미술품 거상인 뒤랑 뤼엘(Durand-Ruel)의 갤러리에서 열린 <화가-에칭 협회(Society of Painter-Etchers)>의 두 번째 전시회에서 9개의 에칭을 전시하기도 하고요.








<제4회 인상파전 포스터, 1879, 파리>에 보면 마리 브라크몽의 이름이 제일 위에 선명하게 기재되어 있어요. 그녀의 작품이 인상파 화가들의 관심을 끌었던 거지요.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와 에드가 드가 (Edgar Degas), 그리고 폴 고갱(Paul Gauguin)과 같은 시대의 가장 유명한 예술가들과 함께 작업을 합니다. 그녀는 자신만의 독특하고 다채로운 방식으로 인상파 스타일을 구현해 나갑니다. 그런 그녀의 일련의 활동들이 그녀를 같은 길을 가는 동료로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녀의 작품이 전시될 수 있도록 정식 초대장을 보내는 식으로 말이죠. (1879,1880, 1886) 그녀의 그림 중 일부는 현대 잡지 (la Vie Moderne)에 출판되기도 합니다. 런던의 더들리 갤러리(Dudley Gallery)에서 5점의 작품을 전시하기도 하고요. 마리 브라크몽에게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인 시기로 그림 그리기에 가속도가 붙습니다.








아버지 펠릭스 브라크몽은 종종 어머니에 대해 분개했고,
 아버지의 작품에 대한 어머니의 비판을
퉁명스럽게 거부했다.
방문객들에게
 어머니의 그림을 보여주기를 거부했다

-아들 피에르-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그것도 아주 가까운 곳에서 말이죠. 그녀가 인상파와 함께 발전하는 모습이 남편 펠릭스에게 불만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펠릭스와 마리의 성격과 예술적 스타일이 양립하기 힘들었나 봅니다. 당시 바리 비종 파와 인상파 사이에 끼어있던 인물 중 한 명이 남편 펠릭스였습니다. 바리 비종파란 뭘까요? 프랑스 파리 교외에 위치한 작은 도시인 바르비종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사실적 풍경화를 자주 그렸던 화가들의 그룹을 지칭합니다. <만종>의 작가 장프랑스아 밀레가 대표적이지요. 남편 펠릭스는 전통을 고수하고 싶었고 아내 마리는 새로운 사조를 적극적으로 그림에 수용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아내 마리는 인상주의를 접하면서 스튜디오대신 야외로 나가는  시간이 많아지고 길어졌습니다. 흰색 가운에 빛의 투명한 효과를 포착하기 위해 노력했고요. 그녀가 한때 앵그르를 존경했던 곳에 이제 드가, 고갱, 모네로 그 존경심의 대상이 바뀌게 됩니다. 이런 아내의 변화에 남편 펠릭스는 불안감을 느꼈나 봅니다.








 남편 펠릭스는 인상주의 미술 운동 자체를 싫어하게 됩니다. 그의 아내가 그들과 자신을 일치시키는 것도 불편해 하기 시작하고요. 그즈음 남편 펠릭스는 아내 마리의 작품을 얕잡아 보기도 하고 비판의 강도가 더 심해져 갑니다. 물론 예술가로서의 아내의 재능을 존중은 하면서도 인상파 기법, 특히 색채 사용에 대해 거부감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같은 예술계통의 일을 하니 더 도와줄 법도 한데 말이죠.  재능 많은 화가 아내가 잘 나가는 모습이 싫었던 걸까요? 남편의 끊임없는  압력과 잦은 불화로 마리는 점점 지쳐갑니다. 일에 대한 집중력도 떨어지고요. 관객의 시선에서 그녀의 작품이 멀어져 갑니다. 낙담한 그녀는 몇 점의 개인적인 작품을 제외하고 작품활동을 포기하게 됩니다. 그림은 그리지 못했지만 인상주의가 대세가 될 거라는 확신은 가지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인상주의가... 새로운 시각일 뿐만 아니라
사물을 바라보는
 매우 유용한 방법도 함께 만들어냈다.
그것은 마치 창문이 한 번에 열리고
 햇살과 공기가 집안으로 밀려드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 마리 브라크몽이 다른 여성 인상파 화가들처럼 인 재정적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아니면 자신의 그림을 수집하는 누군가가 있었다면 그림 그리는 일을 계속할 수 있지 않았을까? 차라리 모리조처럼 예술가로 성장해서 나중에 결혼을 했다면 더 좋은 선택지가 있지 않았을까? 적어도 같이 사는 예술가 남편이 조금만 열린 마음의 자세를 취해줬다면 사후에 그녀의 작품과 함께 나란히 미술사책에 실릴 수 있는 기회를 박찬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에 이런저런 상상을 해보게 됩니다. 














#<우산을 든 세명의 여성(The Three Graces)>,1880    #<애프터눈 티(Afternoon -Tea)>,1880 



<우산>,1882, 에칭






우산을 든 세 명의 여성들이 보이시나요. 마리브라크몽의 <세 가지 은총(The Three Graces)>란 작품입니다. 현대적이고 패셔너블한 파리지앵 여성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드레스의 천을 거의 하얗게 탈색시켜 밝은 오후의 태양으로부터 우산으로 창백한 피부를 보호하고 있지요. 짧고 다양한 붓놀림이 특징적입니다. 세 명의 여성이 사진 평면의 앞쪽에 서서 드레스의 아래쪽 부분을 자른 형태입니다. 마리의 멘토였던 드가의 작품에 주요 특징이기도 합니다.




마리 브라크몽의 여동생 루이스(Louise)입니다. 하얀 옷을 입은 젊은 여성은 더 이상 관객을 똑바로 쳐다보지 않고 대신 책을 읽는 데 몰두합니다. 예술가의 집인 세브르에 위치한 빌라 블랑카스의 정원 테라스에 있는 테이블에 앉아 루이스는 차 한잔과 포도 한 접시를 들며 책을 읽습니다. 주제는 전형적이지만 초상화라기보다 깃털 같은 붓놀림과 햇빛이 얼룩덜룩한 그림의 표면은 인상파 스타일이 살짝 가미된 그림입니다.





<우산>은 마리의 가장 성공적인 에칭(etching) 중 하나입니다. 에칭(etching)이 뭘까요? 금속판에 날카로운 물체로 그림을 그린 후, 산으로 부식시켜 판을 만드는 작업입니다.  그녀의 드로잉 기술이 어떠신가요? 한 젊은 여성의 표정이 보이시나요?  비바람을 피하기 위해 그녀를 지나쳐 가는 부유한 모자를 쓴 신사도 보이시죠? 모자를 한 손으로 잡고 계신 걸 보면 비바람이 세게 드리치나 봅니다. 뒤태만 보이는 여성의 치맛단에서도 비바람의 강도가 느껴지고요. 우산으로 비를 피해보려는 다른 이들의 기울어진 우산대 각도를 보며 빗줄기의 강도를 간접적으로 느껴보게 됩니다. 어수선하게  흩어진 거친 선들을 보며 현실의 제가 비를 맞는 것 같습니다.










청각장애를 가진 유명 화가의 아내
4남매의 어머니
예술가





우향 박래현 화가에게 남편 운보 김기창 화백은 '부엉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고 합니다. 늘 깨어있었고 고단했고 무척 예민할 수밖에 없었던 아내에 대한 예리하면서도 애정 어린 별명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집안일을 마친 밤 시간에야 겨우 작업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던 박래현 화가의 고단함이 묻어나는 별명 같기도 합니다. 하루 24시간을 초단위로 나누어 쓰신 분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입이 떡 벌어집니다. 저 시대에 태어나지 않을 걸 다행으로 여깁니다. 시대는 다르지만 결혼 후 자신의 커리어를 이어가기 위해 자의 반 타의 반 새벽 짹짹이가 되거나 늦은 밤 부엉이가 되어야 하는 세상의 엄마들에게 좋은 롤모델 같은 선배이자 멘토이시고요.







<화가 난 우향>, 운보 김기창




운보 김기창이 그린 아내 우향 박래현의 초상화(?)입니다. 어떠신가요? 남편운보의 센스에 피식 웃음이 나지 않나요. 이렇게 재치 있는 남편의 노력이라면 삐짐이 눈 녹듯 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청각 장애까지 있어 들을 수 없는 남편의 손발이 되어주어야 했습니다. 같은 길을 먼저 간 남편 운보 김기창의 아내로 조용히 한 발짝 뒤로 물러서 자신의 열정을 다독여야 했습니다. 당대 능력 있는 여성들이 왜 결혼과 함께 자신을 포기하는지 결혼을 한 후 일 년 만에 깨달았습니다. 엄마 노릇하다 본업인 예술가의 정체성은 수면 밑으로 가라않히기 일쑤지요. 분주하고 티 나지 않는 가사 속에서 여성들이 예술을 하고 철학을 하고 의사가 되고 실업가가 되어 자기가 희망하고 있는 자기의 생활을 그대로 계속해 나갈 수 있으려면 무엇이 필요하지를 오랫동안 몸소 겪고 고민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선택에 책임질 줄 아는 용감하고 지혜로운 여성화가 이기도 하고요. 








운보와 우향 부부는
 신화적인 사랑을 해서
모범적인 결혼 생활을 했으며
 한국 미술을 세계에 알렸다






<석류와 다람쥐>, 1969, 종이에 채색

 




50줄 나이에 미국 유학을 떠나는 우향 박래현에게 운보 김기창 화백이 건네준 한 쌍의 다람쥐 그림입니다. 우향이 생전에 애지중지하던 작품이라고 합니다. 아내를 향한 애틋한 붓질을 담은 운보의 마음이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는 다람쥐 눈길에서, 코를 킁킁대며 이쪽저쪽을 살피는 둘의 분위기가 알콩달콩 사랑스럽습니다. 무르익어 터져 나온 붉은 석류알이 마치 운보의 마음 같습니다. 남편 운보 김기창은 1969년부터 약 7년간 박래현이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실컷 공부하고
지혜의 보물을 가지고 오면,
 나도 그걸 골라 갖기도 하지

 


이렇게 쿨할 수가 있는 겁니까! 아내 우향 박래현은 얼마나 고맙고 감동적이었을 까요! 아직은 어린 자녀를 데리고 홀로 남아야 하는 남편 김기창 화백의 불편함을 알기에 평생 고마워했을 것 같습니다.








두 화가는 어떻게 만났을까요?

운보 김기창이 30세 되던 해 자신의 어머니처럼 재능 있고 인격이 훌륭한 박래현을 보고 첫눈에 반합니다.  당시 박래현은  일본여자미술학교 재학 중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최고상을 받고, 잠시 서울에 머물 때였고요. 3년간의 필담 연애 끝에 박래현 부모님의 결사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식을 올립니다. 운보의 부모님은 이미 돌아가셨고 , 박래현 부모님은 식장에 나타나지 않으셨어요. 친구들만 참석한 조촐한 결혼식이었답니다. 당시 장애인 화가와 엘리트 여성의 만남으로 떠들썩했다네요. 








우향 박래현(1920~1976)은 추상화, 태피스트리, 판화 등 다양한 영역에서 독창적인 활약을 펼쳤던 당대 최고 예술가 중 한 명입니다. 그녀는 부유한 대지주의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일본 유학까지 한 신분으로 ,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남편 운보 김기창을 만나 결혼을 결정하기까지 그녀에게 무엇이 우선순위에 있었던 걸까요.


                                  "그저 간단하게 생각했다."


 이 예술과와 결혼하면, 계속해서 예술을 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했다네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예술에 대해 간섭하지 않고
계속 그림을 그릴 여건을 만들 것
서로 인격과 예술을 존중할 것




우향 박래현이 내걸었던 결혼 조건이라고 합니다. 이것만 지켜진다면 신체장애쯤은 아무렇지 않게 여길 만큼 예술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던 우향 박래현입니다. 시대의 조건에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모습이 아니라 끌고 가는 당찬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단장>,1943 , 종이에 채색        #<이른아침>,1956,한지에 채색
<기억>,1973, 에칭, 애쿼틴트







<단장>은 박래현이 일본에서 유학하고 있을 당시 그린 그림입니다. 그녀는  이 그림으로 《제22회 조선미술전람회》(1943)에서 특선을 하고 총독상을 수상합니다.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은 일본 유학시절 박래현이 묵었던 하숙집 주인의 딸이라고 합니다. 화장대와 의복에 각기 붉은색과 검은색을 사용해 색채의 대비를 강조했으며 섬세한 세부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해방 이후, 박래현은 일본화의 영향에서 벗어나 한국의 여성 인물화로 발전시키게 되고 김기창을 비롯한 중진 동양화가들과 백양회를 결성해 동양화단을 이끌어 갑니다.







<이른 아침>은 군산 피난지에서의 어려웠던 삶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수탉을 품에 안은 채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장터로 향하는 여인들과 등에 업혀 잠이 덜 깬 아이, 가지 않으려고 떼쓰는 아이의 모습에서 당시 생활상을 느낄 수 있는 작품입니다. 세련된 배색과 예민한 필선, 중첩된 붓질의 질감 이 조화롭습니다. 여기에 켜켜이 색점을 쌓아 반추상의 화면을 완성해 냈어요. 이전 한국화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신선하고 감각적인 선과 색이 느껴지시나요? 그녀의 초창기 조형적 특성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비슷한 느낌의 작품 <노점>(1956)으로  그녀는  '제8회 대한미협 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합니다.






 1960년대 이후에는 해외를 여행하며 시야를 넓히고 추상화로 작품을 전향합니다. 1967년 상파울루 비엔날레 참석을 계기로 중남미를 여행한 뒤 미국에 남아 판화를 배우기도 하고요.




 


<불안>,1962





<불안>은 박래현이 완전한 추상의 세계로 진입했던 1962년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제6회 부부 전》 출품작입니다. 이들 부부는 집에 화실을 만들어 함께 작업에 열중했고, 수많은 작품을 쏟아냅니다.  1947년부터 2년에 한 번씩 '부부 전'을 열어 평생 12번의 부부 전을 개최합니다. 우향 박래현의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해 보이기라도 하듯이 말이죠. 당시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던 앵포르멜(비정형: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현대 추상회화의 한 경향) 열풍 속에서 박래현은 새로운 재료와 기법을 이용해 독특한 마티에르 기법을 실험합니다. 대상을 분석하고 화면을 구획하던 이제까지의 제작 방식에서 벗어나 적갈색 계열의 색채 덩어리를 만들고 까슬까슬한 붓의 흔적들을 그대로 노출시키는 방법으로 말입니다.









<기억>은 박래현의 관심사가 종합적으로 표현된 작품입니다. 하회탈과 신라 금귀걸이, 자궁, 곡식 등의 이미지는 역사, 생명, 대지를 상징한다고 합니다. 박래현은 동판을 여러 조각으로 자르고 동판마다 서로 다른 기법을 사용하여 이미지를 새긴 뒤 판화지 위에서 이들을 결합하는 방식을 사용합니다. 1974년 귀국해 판화 전을 개최하며 판화가로 변신하고요. 이후 다시 동양화 작업을 재개하고 미국의 판화 전에 참석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을 이어갔으나 갑작스럽게 간암이 발병해 1976년 1월 세상을 떠납니다. 그녀 사후 남편 운보 김기창은 아내를 위한 전시회를 여러 번 개최하며 끝까지 예술가로 남고 싶었던 아내와의 약속을 지킵니다.






시대를 달리 한 두 예술가 부부의 삶을 살펴보았습니다. 무엇이 옳고 그르다를 떠나 선택의 삶을 매번 살아야 하는 현실 속 우리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는 것 같습니다. 오늘도 수많은 오류 속에 비틀거리는 선택을 하고 있을 당신이 무모할지라도 삶을 대하는 태도에 좀 더 무게감이 실렸으면 합니다. 만약 당신이 결혼을 한 사람이라면 상대를 키워주며 자신도 성장하는 중인지 한 번쯤 진지하게 따져 볼일입니다.  알았다면 상대도 나도 함께 클 수 있는 윈윈 하는 방법들을 시도해 보시면 어떨까요. 생각보다 작은 팁에서 실마리를 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남편 덕분에 아내 덕분에 삶의 의미가 180도 바뀔 수도 있지 않을까요?


#사진출처: 위키 피디아, 구글아트 앤 컬처, 위키 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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