ㄴ
행복
나태주
저녁 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 있다는 것
-행복,<풀꽃>, 도서출판 지혜,2021-
나태주 시인은 <행복>을 통해 우리 자신이 이미 소중한 것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는 일상생활에서 소소한 것들을 발견하고, 주변을 살피며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행복한 인생을 위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시인은 행복을 거창하거나 멀리 있는 것이 아닌, 아주 사소하고 우리 가까이 있는 '그 무엇'이라고 말하며, 우리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라고 설명합니다. 이제는 압니다. '행복'은 '강도'가 아닌 '빈도'가 잦을 때 그 힘으로 거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힘을 얻는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 작은 차이가 때로 남의 들러리로 사는 삶이 아닌 진짜 나의 시간을 살아낸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 줍니다.
오늘은 노르웨이 출신으로 덴마크에서 활동했던 페데르 세베린 크뢰이어(Peder Severin Kroyer, 1851-1909)와 지중해 발렌시아의 강렬한 햇빛을 그림에 담아낸 스페인 화가 호아킨 소로야(Jiaquin Sorollay Bastida, 1863-1923) 작품을 살펴봅니다.
두 화가 모두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두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아내를 향한 태도는 온도 차이가 있습니다. 그들의 인생 후반부가 극명한 차이를 보이니까요. 두 화가 모두 부모님이 아닌 친척(이모)에 의해 양육됩니다. 10대 후반에 이미 재능을 인정받았다는 점 그리고 여러 도시를 방문할 기회를 얻었고 외국의 사조들을 빠르게 익히고 받아들였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사실주의 스타일의 그림을 그리다, 프랑스 파리를 통해 당시 유행하던 인상주의를 접했고, 각각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그들이 본 햇빛과 눈에 보이는 대상 그리고 대기 사이의 무수한 변화를 그림 속에 담아내려 애를 썼다는 점입니다.
엇비슷한 시기에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남겨진 작품들을 통해 짐작해 봅니다. 개인적으로 지중해의 강렬한 빛을 닮은 호아킨의 작품에서 사랑스러운 미풍의 느낌을 받습니다. 북해와 발트해가 만나는 지점으로 염도가 다른 두 바다가 만나는 차갑고 청명한 크뢰이어의 작품에서 시리도록 아프고 깨어진 아내와 그사이에 불었던 된바람도 느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TNQ6GLsv6o
스페인 마드리드/shutterstock
1932년 개관한 소로야 미술관입니다. 소로야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 후, 아내와 아들의 노력으로 스페인 국립 소로야 미술관이 새롭게 문을 열게 됩니다. 소로야가 마지막까지 가족들과 함께 살았던 저택을 그대로 미술관으로 만들었습니다. 그와 가족들이 쓰던 가구부터 마지막으로 작업하던 그림까지 그대로 남아있어 더욱 의미가 있는 곳입니다.
정문에 들어서면 그가 꾸며놓은 사랑스러운 안달루시아식 정원을 지나 미술관 내부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구석구석 소로야의 숨결이 그대로 묻어나는 이 미술관을 돌아다니다 보면, 과거 스페인의 중산층의 가정에 방문한 듯한 기분이 듭니다. 소로야 가족의 행복했던 추억이 묻어나는 곳 호아킨 소로야 미술관, 스페인 마드리드 쪽으로 여행 계획 있으신 분들 꼭 방문해 보시길요.
왼쪽.Walk on the beach ,1909/wikipedia오른쪽 Summer Evening on Skagen Sonderstrand,1893
호아킨 소로야(Joaquin Sorolla y Bastida, 1863-1923)의 < Walk on the beach>(1909)입니다. 그의 대표작 중 한 작품으로 바다는 물론이고 여인의 옷에 와닿는 햇빛의 표현이 바닷바람의 소리까지 느낄 수 있을 만큼 생생한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그의 부인과 큰딸을 그린 작품으로, 해변을 산책하는 두 여인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소로야는 모네와 르누아르처럼 야외에서 직접 보고 그리는 풍경화 방식인 '외광회화'를 통해 바다의 풍경을 생생하게 담아내려 했습니다. 그는 빛과 물, 움직이는 사람들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마치 스냅사진과 같은 인상을 주는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s691fH255jc
P.S. Kroyer/wikipedia
페데르 세베린 크뢰이어(Peder Severin Kroyer, 1851-1909)의 <Summer Evening on Skagen Sonderstrand>(1893)입니다. 1895년에 처음 전시되었을 때 걸작으로 찬사를 받았습니다. 90년 동안 개인 소장품으로 보관되다가 1985년에 덴마크 스카겐의 스카겐 박물관에 기증되었습니다.
그림의 요소인 여성, 해안선, 수평선은 수학적 계산에 따라 배열되어 있습니다. 여성들은 왼쪽에서 1/3 지점에 위치하며, 머리는 위쪽에서 1/3 지점에 있습니다. 해안선은 대각선으로 뻗어 있으며, 수평선은 위에서 1/4 지점에 있어 그림의 중심에서 벗어난 레이아웃을 강조하고 더 넓은 모래밭이 두드러지게 합니다.
이 그림은 안나 앙케르와 마리 크뢰이어가 수평선이 저녁 안갯속으로 거의 사라지고 분산된 푸른빛이 바다에 반사되는 푸른 시간(blue hour) 동안 스카겐 남쪽 해변을 거닐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크뢰이어는 두 가지 자연광을 동시에 포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저녁 시간대를 선호했습니다. 구도는 흰색과 파란색 음영이 주를 이룹니다. 크림색 면 드레스는 옅은 해변 모래와 섞이고, 반짝이는 푸른 바다는 흐린 어두운 하늘과 합쳐집니다.
이 그림은 1892년 여름, 크뢰이어의 집에서 저녁 식사 파티 후 안나 앙케르와 마리 크뢰이어가 해변을 산책하는 모습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손님들은 즐거운 저녁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해변으로 나갔습니다. 크뢰이어는 두 여성의 사진을 그림의 기초로 사용했으며, 이는 1990년 전시회에서 밝혀졌습니다. 네 점의 습작을 제작한 후, 크뢰이어는 1893년 9월에 전체 크기의 그림을 완성했습니다.
마리 크뢰위에르( Marie Kroyer, 1867-1940)의 절친이었던 아나 앵커(Anna Ancher, 1859-1931)와 마리를 그린 페데르 세베린 크뢰위에르의 그림<스카겐 해변의 여름 저녁> 작품에서 왼쪽 작은 여인이 '안나 앵커', 오른쪽 모자 쓴 여인이 '마리 크뢰위에르'인데 두 여인의 삶은 극과 극으로 갈렸습니다. 둘 다 유명한 화가의 아내였고 자신들도 그림을 그리던 화가 지망생들이었는데 마리는 붓을 놓고 남편의 뮤즈에 그친데 반해, 아나는 남편과 함께 부부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렸고, 평생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서 살아 19세기부터 20세기 덴마크를 대표하는 유일한 여성화가로 추앙을 받게 되었습니다.
스페인의 낭만주의 프란시스코 고야(Frabcusci Jose de Goya y Lucientes, 1746-1828)와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1973) 사이의 공백기에 활동했던 호아킨 소로야는 당시 스페인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였습니다. 인상주의 화풍으로 그린 지중해의 햇살은 시대를 넘어 독보적이었지요. 부드러운 붓터치와 색채, 생동감 넘치는 표현이 특징입니다. 게다가 빛의 효과를 잘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 소로야는 인상주의의 불모지인 스페인에서 인상주의 화가라 불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화가라 볼 수 있습니다.
발렌시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소로야는 미술 공부를 마드리드에서 하면서 프라도 미술관에서 벨라스케스를 비롯한 많은 거장들의 그림을 모작하면서 실력을 쌓았습니다. 로마로 떠나 르네상스 작품들을 공부하면서 자신만의 화법을 구사해 가고, 스페인에 돌아오고 얼마 안 되어 고향 발렌시아의 바다를 담은 작품을 통해 점차 명성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초기 작품들에선 사실주의적인 경향을 띠고 있었는데,. 프랑스 여행을 다녀온 이후,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에 영향을 많이 받아 스페인의 지중해의 빛을 담은 그림들을 창작해 나갔습니다.
빛에 대한 강렬한 집중만큼이나 빛이 닿아 퍼지고 반사되는 듯한 눈부심이 소로야의 상징처럼 되었습니다. 밝고 아름다운 지중해의 풍경과 그 속에서 평화로운 사람들의 생동감을 잘 묘사했습니다. 호아킨 소로야의 인상주의 그림의 성공 이후에 그를 추종하며 스페인 인상파 미술이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소로야는 스페인의 인상파라고 불리기도 하고, '빛의 화가'라는 별명이 있기도 한 이유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OHKLabXOKo
특히, 1885년 파리에서 자신의 첫 개인전을 열어 호평을 받았고,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그의 작품 <슬픈 유전 Sad Inheritance>(1899)이 대상을 수상하기도 하면서 그의 화가로서의 명성은 점점 놓아져 갔습니다.
소로야 초기 작품들은 사실적이면서도 슬프고 어두운 분위기의 그림이 주로 그려졌습니다. 특히, 이 작품은 소아마비에 걸린 아이들을 그린 작품으로 소로야의 연민 어린 시선을 느낄 수 있습니다.
왼쪽. Mother,1895/wikipedia 오른쪽. The Artist's wife and Dog by the Shore,1892 /wikipedia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당신께 전에 말했지요.
매번 같은 말만 하게 되네요.
그림을 그리고 당신을 사랑하는 일,
그게 전부랍니다.
소로야가 그린 막내딸과 아내의 모습입니다. 사랑스러운 작품이죠. 그의 아내 클로틸데가 막네 딸 엘레나를 낳고 요양하는 모습을 담은 작품입니다. 소로야는 가족을 예술적 영감의 원천으로 삼아 부인과 세 아이들에게 깊은 애정을 작품에 표현했습니다. 2세 때, 부모를 잃고 이모와 함께 자랐던 소로야는 부모와 함께 하지 못했던 슬픔을 자녀들에게는 절대로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1888년 클로틸데 가르시아와 결혼하여 행복한 가정을 꾸민 이 부부는 세 명의 자녀를 뒀습니다 첫 딸 마리아, 둘째이자 아들 호아킨, 그리고 셋째이자 막내 엘레나입니다. 당시 호아킨에게는 스페인 국내는 물론 파리, 런던, 미국에서도 전시와 작업 요청이 끊이지 않아서 집을 자주 떠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아내에게 거의 매일 편지를 써서 800여 통의 편지가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나의 모든 사랑은 당신을 향해 있어요.
나는 아이들을 몹시도 사랑하지만
여러 면에서 당신을 훨씬 더 사랑하오.
당신은 나의 몸이요, 나의 인생,
나의 정신, 내 평생의 이상이오.
-호아킨 소로야-
My wife and Children,1897/Google Arts& Culture
빠르게 그리지 않으면
다시 만나지 못할 풍경들이
사라질 테니까.
-호아킨 소로야-
소로야의 작품 중 가족을 향한 사랑이 듬뿍 담긴 작품으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붓을 들고 그림을 그리는 아빠를 향해 아이들과 아내가 다가옵니다, 급하게 붓을 놀리다 보니 막내 녀석 아랫도리도 생략되고, 아내와 막내 엘레나의 얼굴도 뭉개져 있습니다. 아빠를 보고 달려오는 아이들의 마음만큼 그 순간을 잡아 표현하고 싶었던 소로야의 마음도 깊게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아름다운 여인과 개 한 마리가 해 질 녘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서 있는 작품입니다. 보기만 해도 매력적이 그림입니다. 여신 같은 분위기의 그녀는 페데르 세베린 크뢰이어(Peder Severin Kroyer, 1851-1909)의 아름다운 아내 마리 크뢰이어(Marie Kroyer, 1867-1940)입니다.
Beauty is truth,
Truth on Beauty
남편 크뢰이어는 그림 속 아내 마리의 아름다움을 릴케의 시를 빌어 극찬했습니다. 비참한 환경에서 태어났지만, 그는 타고난 재능과 노력으로 기회를 잡아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부와 성공을 거머쥔 덴마크의 대표 화가입니다. 스카겐의 아름다운 바다와 하늘을 뒤로하고 서 있는 마리의 모습은 그의 행복을 증명하는 상징적인 장면입니다.
남편 크뢰이어가 태어난 곳은 노르웨이 바닷가 시골 마을의 한 정신병원입니다. 어머니는 이 병원에 입원 중인 심각한 정신질환자였고, 아버지는 누구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태어난 아기를 제대로 돌볼 수 없어 친척 집에 맡겨집니다.
다행히도 이모 부부가 크뢰이어를 맡아 줬습니다. 이모는 크뢰이어를 아껴 줬습니다. 문제는 지나치게 아꼈다는 겁니다. 이모는 소년이 조금이라도 다칠까 봐 학교에 가지도, 나가서 친구들과 놀지도 못하게 했습니다. 좋은 뜻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크뢰위에르는 일종의 감금 생활을 하게 됐습니다. 이모부가 한마디 해줬으면 좋았겠지만, 그는 크뢰이어에게 무관심했습니다. 친구도 없는 소년이 할 수 있는 놀이라고는 집안의 물건들을 그림으로 그려보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크뢰이어가 아홉 살 되던 해 그에게 기회가 찾아옵니다. 생물학자인 크뢰이어의 이모부는 미생물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논문에 참고자료로 붙일 그림을 그리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지금이야 현미경용 카메라를 쓰면 되겠지만, 당시에는 현미경으로 보이는 광경을 연구자가 직접 그림으로 옮겨야 했거든요. 이모부는 크뢰이어를 불러 현미경을 보여주고 한번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습니다. 완성된 결과물은 아홉 살짜리가 그렸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습니다.
이모부가 논문을 발표하자 "논문도 좋지만 그림 실력이 아주 훌륭하다"는 찬사가 쏟아졌습니다. 학회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모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홉 살짜리가 이 그림을 그렸다고요? 아이가 상당히 머리가 좋겠군요. 잘 가르치면 나중에 꼭 훌륭한 사람이 될 겁니다. " 그 말을 들은 이모부는 크뢰이어를 학교에 보내기로 했습니다. 기회를 받은 크뢰이어는 곧바로 천재성을 드러냅니다. 9살 때 미술학교에 들어간 그는 10살 때 바로 상급 학교로 진학했고, 13살 때는 덴마크 역사상 최연소로 왕립 미술 아카데미의 예비학교에 입학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를 한번 본 선생님들은 입을 모아 "누구보다도 빨리, 잘 그리는 천재"라고 평가했습니다.
그가 스무 살의 나이에 전업 화가로 데뷔하자 곧바로 유명 인사가 된 것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덴마크 왕립 미술 아카데미는 그에게 미술 공부를 하라며 보조금을 줬고, 부자들은 앞다퉈 그를 후원했습니다. 이 돈으로 크뢰이어는 네덜란드, 벨기에,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 프랑스 등 전 세계를 누비며 각지의 미술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였습니다. 프랑스에서 인상주의 영향을 받은 게 단적이 예입니다.
The frieze in Brondums Hotel,1892/wikipedia
그가 동료 화가의 초대로 덴마크 최북단에 있는 스카겐을 처음 찾은 건 1882년, 당시만 해도 이곳은 그저 평범한 시골 어촌 마을이었습니다. 하지만 곧 크뢰이어는 스카겐의 신비로운 바다와 하늘에 푹 빠졌습니다.
덴마크 북부의 높은 하늘과 모래 언덕, 한적한 해변은 오래전부터 화가들의 영감을 얻는 장소가 되어왔습니다. 19세기 후반 예술 표현을 억압하는 코펜하겐 덴마크 왕립 미술 아카데미 Royal Danish Academy of Fine Arts의 관행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젊은 화가들이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이 공간에 모여들었습니다.
188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덴마크의 바닷가 스카겐은 스칸디나비아 예술가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어갔습니다. 이들은 집을 빌리거나 유일한 호텔 브뢴둠스(아나 앙케의 부모님이 운영하던 호텔)에 머물며 몇 주씩 여름을 보내곤 했습니다. 몇 달씩 머무는 이들도 있었고 일부는 마을에 집을 두고 정착해 살 기도 했습니다. 화가들은 멀지 않은 각양각색의 오래된 집에 살며 자주 만나 교류했습니다.
스카겐의 화가들은 특히 야외에서 그림을 그리며 다양한 회화 기법과 작업 방식을 시도했습니다. 인상주의 운동과 마찬가지로 현재 상황을 바꾸고자 하는 급진적인 의지를 보였고, 사실주의를 비롯한 다양한 유파의 영향을 받았지만 각자의 고유한 그림색을 찾아갔습니다. 이들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외딴 마을의 풍경과 노동하는 마을 사람들을 화폭에 담아냈습니다.
Summer Evening at Skagen Beach-The Artist and his wife,1899/wikipedia
아름다운 아내와 팔짱을 낀 채 해변을 거닐며 달콤한 여름밤을 만끽하는 남자. 하늘빛이 바다 빛과 뒤섞여 가장 아름다운 이때를 사람들은 '푸른 시간(Blue hour)'이라 불렀습니다. 하루 중 남자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이었지요.
스카겐 공동체의 소식이 알려지기 시작하고, 스카겐으로 가는 철도가 놓이자 관광객과 화가들이 이 공동체를 끊임없이 방문했습니다. 몰려드는 휴가객이 불편했던 크뢰이어 부부는 마을 외곽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당시 크뢰이어 부부는 기계식 공예에 반대하고 전통적인 수공예로 돌아가 자연 본연의 아름다움을 설파하자는 미술공예운동 (art and craft movenetnt)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그들의 신혼집의 인테리어, 가구, 정원, 이 모든 것을 뮤즈이자 사랑하는 아내 마리가 직접 손을 봅니다. 그림보다 오히려 이 분야에 더 뛰어난 재능을 보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rALHYKMQnQ
Dual Portrait of Marie and P.S. Kroyer,1890/ Self-Portrait,1889/wikipedia
왼쪽은 두 사람이 그린 더불초상화입니다. " 두 사람이 결혼 1 주년을 맞아 기념으로 서로의 모습을 그려주었던 부부 초상화입니다. 크뢰이어는 아내의 다부진 아름다운 모습을 사랑스럽게 그려낸 반면, 아내 마리는 흐릿한 눈빛을 가진 남편의 모습을 뭔가 불만스러운 마음을 담아 그린 듯 보입니다. 왠지 평행선을 달리는 두 사람의 닿을 수 없는 어긋난 사랑을 보는 것 같습니다. 달달한 신혼인데도 말입니다.
오른쪽은 마리가 그린 자신의 초상화입니다. 남편 크뢰이어가 그린 마리의 모습과 자신이 그린 초상화의 모습이 '같은 사람 맞아?'싶을 정도로 느낌이 다릅니다. 한때 야망 넘치고 재능 있었던 마리는 어둠 속에서 시들어 가는 자신의 모습을 자화상으로 남긴 거죠. 스카겐의 아름다운 햇빛과 싱그러운 정원에서 빛나고 있는 크뢰이어의 마리와는 다르게 마리의 자화상 속 얼굴은 그늘지고 우울해 보입니다.
37세 크뢰이어는 22살 마리의 빛나는 외모와 젊음에 반합니다. 마리도 존경할 만한 실력과 명성의 선배 화가 크뢰이어가 좋았습니다. 불같은 사랑에 빠졌고 1889년 둘은 결혼을 합니다. 1년간의 신혼여행을 떠났고 1891년 스카겐에 정착합니다.
마리는 결혼한 뒤에도 그전처럼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생각과 많이 달랐던 결혼생활입니다. 살림하고, 크뢰이어가 그림을 그리는 데 집중할 수 있도록 돕고, 그림의 모델을 서고..., 임신 전에도 많지 않았던 그림을 그릴 시간은 아이를 낳자 아예 사라졌습니다. ' 남편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도 훌륭한 화가가 될 수 있었을 텐데... 결혼으로 내 앞길이 막혔어.' 마리는 어느새 남편을 원망하게 됐습니다. 여기에 산후우울증까지 겹쳤습니다. 크뢰이어는 아내의 이런 감정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천재인 크뢰이어가 보기에 아내 마리의 재능은 평범한 수준이었습니다.
그냥 취미로 그리면 되지,
왜 억울해하는지 이해를 못 하겠네.
그 사이 크뢰위에르는 덴마크의 '국민 화가'반열에 오릅니다. 덴마크 미술계의 핵심 인물이 된 그에게는 항상 그림을 그려달라는 의뢰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부유하고 존경받는 화가와 아름다운 아내, 그리고 단란한 가정, 누구도 이들의 행복을 방해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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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ie Kroywer(Danusg, 1867-1940)/365 WomenArtists
위의 그림은 마리가 그린 초상화 작품들, 군더더기 없이 담백하게 그려낸 풍경화들입니다. 기본기가 아주 탄탄한 작품들입니다. 신혼시절만 해도 붓을 놓지 않고 그림을 그렸던 마리입니다. 한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다 보면 천재 화가인 남편의 그림은 눈부셨고, 크뢰이어는 마리를 응원해 주기보다는 부족한 점을 꼬집어내곤 하니 마리는 점점 위축되어 갔습니다. 화가로서 자의식은 성장해 가는 데 잘 나가는 남편 옆에선 마리는 자존감이 바닥을 칩니다.
Marie Kroyer, Rose, 1898/Alamy
고개를 떨궈버린 장미꽃들,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꽃잎이 마리의 만족스럽지 못한 결혼 생활과 화가로서의 꿈을 접고 시들어가는 삶을 표현한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게다가 남편에게 이상징후가 나타납니다. 과로인지 유전적 원인인지 알 수 없으나 어느 순간부터 남편 크뢰이어는 정신질환을 앓기 시작했습니다. 그래도 크뢰이어는 무리해서 일하는 걸 멈추지 않았고, 그 결과 상황은 계속 더 나빠졌습니다. 정신질환이 점점 악화되면서 부부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가 됐습니다. 잦은 병원 생활, 입원... 떨어져 있는 시간이 점점 많아집니다. 그들의 행복할 것만 같던 결혼생활은 11년 만에 끝이 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hB9nq_8h8Lg
인상주의 회화를 옮겨 놓은 듯한 스크린은 아름답지만,
한 여성의 삶에 대한 탐구가 불러일으키는 인상은 기대보다 강렬하지 않다.
화가는 사라지고
아내로서만 남은 주인공의 모습이 부족하다.
빌 어거스트 감독의 영화, <마리 크뢰이어>는 페데르 세베린 크뢰이어의 아내 마리 크뢰이어의 삶을 다룬 영화입니다. 19세기 덴마크에서 가장 주목받았던 여성화가 마리 크뢰이어(1867-1940)의 전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노르웨이 출신으로 덴마크에 정착한 인상파 화가 P.S. 크뢰이어(페더 세베린 , 1851-1909)의 아내로, 천재 화가인 남편의 그늘에 가려진 여성화가 마리 크뢰이어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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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색 안에 빛을 찾았던 빛의 화가 크뢰이어의 그림이 영화의 중요한 모티브인 만큼 자연광을 최대한 살린 영화의 화면은 마치 크뢰이어의 그림을 보는 것처럼 화면이 우아합니다. 또한 북유럽의 문화를 화면에 담기 위해 철저한 고증을 통하여 19세기 유럽 상류 사회의 고풍스럽고 우아한 세트와 소품들로 시대적 분위기를 재현해 낸 점 또한 칭찬할 만합니다. 그러나 아내로서의 삶을 부각하다 보니 여성 화가로서의 마리의 정체성을 드러내기에 부족했다는 평가입니다.
소로야만큼
바다의 차가운 파랑을
따뜻하게 표현할 수 있는 화가는 없다.
왼쪽.Boys on the Beach,1909/wikipedia 오른쪽. Beach of Skagen,1892/Alamy 발렌시아 스페인/123RF. 스카겐지도/ 나무위키
저는 언제나 발렌시아로
돌아갈 생각만 합니다.
그 해변으로 가 그림을 그릴 생각만 합니다.
발렌시아 해변이 바로 그림입니다.
-호아킨 소로야-
발렌시아는 스페인 남동부에 위치한 곳으로 바르셀로나가 있는 카탈루냐 지방의 바로 아래 지역입니다. 소로야는 1890년부터 작품 활동을 위해 마드리드에 살았으나 1년에 한 달 이상은 발렌시아에 가서 휴식을 취하며 바닷가와 아이들, 그리고 어부들 그림을 그렸습니다.
지중해 바다에서 물놀이하는 아이들의 모습도 덴마크 북쪽 끝단에서 물장구치는 아이들도 바다가 주는 자유와 풍요로움은 같나 봅니다. 바다가 선물한 자유를 만끽하는 아이들 모습이 천국이 따로 없어 보입니다. 두 화가의 그림에서 아이들은 청량감을 듬뿍 담고 있어 자연과의 조화가 엄지 척입니다. 다만 호아킨의 구도가 그림을 더 세련되게 느끼게 하는 이유는 스냅사진 찍은 듯한 구도라서 더 그렇습니다. 프랑스 인상주의와 확연히 다른 면이지요. 그리고 캔버스를 큰 사이즈를 사용해서 실제 사람 사이즈와 같거나 더 크게 보이는 그림이 많습니다.
돛의 수선, 1896/wikipeida 오른쪽.Fishermen haulinfnets,North Beach,Skagen,1883/alamy
두 작가 모두 바다를 끼고 사는 이웃들의 모습을 섬세하고 생동감 있게 담아냈습니다. 가족들이 모여 돛을 수선하는 모습을 묘사한 호아킨의 작품과 그물을 끄는 스카겐 해변의 어부들 모습을 담은 크뢰이어의 작품을 통해 사실적인 모습 안에 깃들인 빛과 삶의 모습들을 봅니다.
왼쪽. Return from Fishing, 1894오른쪽.The Horse's Bath,1909/wikipedia
개인적으로 호아킨 소로야의 작품 중 독특한 느낌이 드는 두 작품입니다. 소를 이용해 배를 끄는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쟁기 지고 밭을 일구는 소의 모습만 보았지 바다에서 어부들의 삶을 돕는 소의 모습은 상상해 보지 않아서 더 그런가 봅니다. 또한, 더위는 사람들만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봅니다. 말도 더운 지중해 햇빛에 몸 한 번 담그고 하루를 산뜻하게 시작하나 봅니다. <Return from Fishing>은 1894년 파리 살롱(Salon de Paris)에 전시되자마자 화제가 됐었습니다. 프랑스가 구입해서 룩셈부르크 미술관에서 전시했다가 지금은 오르세 미술관으로 이전한 상태입니다.
Midsummer Eve Bonfire on Skagen Beach,1906/wikipedia
Marie Kroyer and Hugo Alfvenby Peder Severin Kroyer,1906/Bukowskis
1906년 그려진 크뢰이어의 마지막 대형 인물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스카겐 해변에서 한 여름밤에 모닥불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그곳에 한때 그의 뮤즈였고 아내였던 마리와 연인 휴고 알프벤(스웨덴 작곡가)도 함께 있는 모습입니다. 크뢰이어가 남긴 이혼한 그녀가 모델이 된 마지막 작품입니다. 불타는 장작 앞에서 배를 등지고 알프벤과 함께 서 있는 모습입니다.
얄궂게도 알프벤이 마리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건 크뢰이어가 그린 초상화를 통해서였습니다. 알프벤은 초상화 속 마리의 아름다운 모습에 푹 빠져 '이 사람을 꼭 직접 봐야겠다.'라고 생각했고, 마리에게 계회적으로 접근했다고 합니다. 마리는 불륜 사실을 크뢰이어에게 고백하며 "이혼해 달라"라고 했고, 1905년 그녀가 알프벤의 아이를 갖게 되자 결국 이혼에 합의하게 됩니다.
아내가 떠나자 크뢰이어는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정신질환은 빠르게 악화됐고, 시력도 나빠져 한쪽 눈이 실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평생 그려온 그림도 점점 그리지 못하게 됐습니다. 마리가 떠난 지 불과 4년 뒤인 1909년, 크뢰위에르는 58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합니다.
마리의 삶 또한 평탄하지는 않았습니다. 이혼을 하면 당장이라도 결혼할 것처럼 날뛰던 어린 작곡가는 어쩐 일인지 그녀와의 결혼을 꺼립니다. 주변에 다른 여인들도 있었고, 또한 지휘자로서의 자신의 지위에 악영향을 미칠까 염려한 결과이지요. 어쨌든 새로운 딸 '마그리타'를 위해서라도 그녀는 그에게 매달립니다. 둘은 많은 시간이 지난 1912년에 결혼을 합니다. 그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고, 1936년 이혼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d1GCoH56Ak
소로야의 경우 40대에 파리, 런던, 미국에서 대형 전시를 열었습니다. 당대 최고의 명성 있는 화가였으나 1차 세계대전 이후 구상에서 추상회화로 급변한 현대미술 사조의 흐름에 휩쓸려 빠르게 잊혔지요. 재조명되기 시작하면서 눈부시고 아름다운 빛 표현만큼이나 자상하고 따뜻했던 화가의 모습이 많은 사람들을 그의 그림 앞에 멈춰 서게 합니다.
크뢰이어는 불행했던 어린 시절에도 불구하고 그림 실력 하나로 자신의 인생을 바꾼 인물입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 너머에 평생 사람들의 인정과 존경을 갈구하며 무리할 정도로 많은 일을 스스로 떠맡았던 화가이지요. 그래서 정신질환으로 폭력적이고 불행했 던 그의 삶이 안타깝습니다.
공통점 많은 두 화가의 삶이 후반전으로 갈수록 달랐던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됩니다. '만약~'이라는 단어를 삽입해 보기도 하고요. '만약, 크뢰이어가 성장하는 아내의 자의식을 빨리 눈치챘더라면, 동료로서 화가인 아내를 지적보다 북돋아주었더라면 그의 삶이 안온했을까?' 하면서 말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1jdCnRB46A
https://www.youtube.com/watch?v=0HbxPUDzqDc
https://www.youtube.com/watch?v=TxUj3r07k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