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셨죠. 베를린 필에서 장난을 치는 것도 아닐 테고, 방송사고인가? 음악소리가 아닌 대침묵의 시간이 찾아듭니다. 지휘자의 손동작과 표정을 통해 뭔가 전해지고 있다는 느낌은 받지만 이것 참 당황스럽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음악'은 이 모습이 아니라서 말입니다.
존 케이지( John Milton Cage Jr. 1912-1992)의 < 4분 33초(1952)>라는 작품입니다. 악보에 음표가 적혀 이를 연주하는 기존 음악과 달리,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악보에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는 연주자도 음악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작품입니다. 우연성 음악의 개척자답게 그는 피아노 현 사이에 나사를 꼽고 피아노 소리가 아닌 독특한 타악기 음색을 전달한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음악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끝까지 참을성 있게 들어주고 손뼉 쳐준 관객들이 더 매너 있어 보이기까지 합니다.
존 케이지는 이런 공연을 통해 기존 음악의 위계질서나, 제도, 전통을 모두 무너뜨렸단 평을 받습니다. 이 공연을 본 한 젊은 청년은 자신의 머릿속에 번개가 치는 경험을 합니다. '비디오의 아버지', '기술 철학자'로 불리는 백남준입니다.
백남준에게 있어 존 게이지는 예술적 동료이자 서로에게 큰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로 발전합니다. 존 케이지가 보여준 문제의식, 새로운 접근 방법 모색, 새로운 경험 제공 등은 백남준이 자신만의 표현 방법을 만들도록 북돋워 주었습니다. 케이지의 영향을 받아 전위 예술가로서의 길을 걷게 되었고요. 케이지 또한 백남준의 작품과 그의 지성에 감탄하며 아시아 종교와 철학에서 영감을 받았습니다.
존 케이지가 사망했을 때, 가장 그리운 것으로 백남준과의 대화를 꼽았을 정도로 그를 귀하게 생각했습니다. 백남준 또한 한국의 미술계를 국제적으로 개방하는 데 기여했으며, 케이지를 한국 미술계에 소개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백남준이 존 케이지를 기리기 위해 만든 작품들도 많이 남아 있고요.
"백남준과 일한 건 영광이었다." 작년 타계한 비디오 작가 빌 비올라(Bill Viola, 1951-2024)의 한 문장입니다. 스승이었고 그의 조수로 일한 경험은 비올라가 자신이 몸담고 있는 분야를 한층 더 업그레이드할 수 있도록 성장시킵니다. 그는 동료 미술가들에 비해 형식적인 실험에는 관심이 적었지만, 관람자와 매체 사이의 장벽을 허무는 데 도움이 되는 새로운 기술을 채택하는 데는 신속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인간 자체와 인간의 거리낌 없는 감정 표출, 의식의 현상 연구, 고양된 감정 상태, 그리고 영적인 초월에 대한 갈망 등을 주제로 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시야를 넓혀서 서구미술의 패러다임을 바꾼 마네, 피카소, 뒤샹을 뛰어넘었던 백남준( Nam June Paik, 1932-2006)과 제자이자 동료인 비디오 작가 빌 비올라(Bill Viola, 1951-2024)의 작품을 따라가 봅니다.
백남준은 작업 초기, 화가보다는 음악가로 여겨졌습니다. 음악학은 석사까지 취득하고, 6곡의 교향곡을 작곡하기도 했죠. 하지만 백남준은 전통적인 음악을 하고 싶진 않았습니다. 음악은 미술 작품과 달리, 시간에 따라 흘러가며 사라져 버린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죠.
백남준은 음악을 존재론적으로 바라보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행위음악'개념을 내놓습니다. 음악이 연주되는 과정을 다양한 행위예술을 통해 시각적으로 존재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행위 음악 개념은, 당시 음악, 미술 전반에 흐르던 '반 미술', '반 음악'주의 흐름과 맞닿아 있습니다. 기존에 음악을 이루던 틀, 미술을 이루던 틀에 저항한 것이죠.
Nam June Paik(1932-2006) & John Cage(1912-1992)
백남준은 행위예술, 퍼포먼스 작업을 진행했고, 그 진행 과정 중 비디오 아트가 탄생했습니다. 이후 백남준은 첨단 기술에 관심을 갖고 공부하며, 더 새로운 기술을 예술에 적용해 나갔습니다. 인간의 욕망과 욕구를 충족시키는 융합 천재로서의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했습니다. 기술과 인문학의 교차점에서 자신의 역할을 잘 알고 있던 작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 출발점은 음악이었지만, 행위예술, 종합예술, 인공위성 예술까지 그의 예술세계는 방대해져 갔습니다.
나는 1961년 11월부터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새 삶이란 텔레비전 기술에 대한 것만 빼고는
내 모든 책들을 창고에 쌓아두고 잠가버렸다는 말이다.
나는 오직 전자 공학에 대한 것만 읽고 실습했다.
- 백남준 인터뷰(1986)-
TV 부처, Museum of Contemporary Art Chicago 오른쪽 The Greeting,1995
백남준은 이처럼 기술을 활용해 비디오 아트 작품을 선보이면서, 작품이 송출되는 TV를 활용한 작품도 내놓습니다. 지금은 세일을 해도 크게 관심을 끌지 못하지만 당시만 해도 TV는 지금처럼 흔한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한국의 TV 보급률도 낮았고요. 일반 가정 한 달 수입 2배 가격인 초고가 제품이었습니다. 이런 시기에 TV를 분해하고 조작해 작품을 선보인 겁니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1970년대 작, < TV부처>입니다. 이 작품은 부처상이 TV를 바라보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TV에 송출되는 건 부처 자신의 모습이고요. 당시 뉴욕 미술계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 준 작품입니다. 그간 오랜 미술의 역사에서 꾸준히 연구되던 '거울 '의 이미지를 기술을 활용해 새롭게 제시했기 때문이죠.
불교신문
또 TV와 부처상이 각각 담고 있는 의미도 중요했습니다. 부처상은 종교적인 구도자이자, 동양 지혜의 상징이라 여겨졌습니다. 이런 존재가 현대 문명의 상징이자 대중매체인 TV를 보는 모습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해석을 안겼습니다. 또 TV가 서구에서 만든 발명품이라는 점에서, 동양과 서양의 조화를 상징하기도 했죠. 이후 여러 시리즈로 만들어지기도 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PNkTBwVaAw
Portail pe'dagogique:arts plastiques-Insitu-
역사적 거장들을 흠모했던 빌 비올라(Bill Viola, 1951-2024)는 과거의 표현 양식과 현대 기술을 융합한 작업들을 선보였습니다. 1995년 베네치아 비엔날레에 미국 대표작가로서 전시한 'The Greeting'가 그중 하나입니다. 16세기 이탈리아 매너리즘 화가 자코포 다 폰토르모(Jacopo da Pontormo, 1494-1556)의 그림을 모티브로 한 영상입니다.
매너리즘의 대표화가 자코포 다 폰토르모(Jacopo da Pontormo, 1494-1556) 'Visitation of Carmighano /Kirsche Daily
자코포 다 폰토르모( Jacopo da Pontormo, 1494-1556)는 엠폴리 근처 폰토르모 출신으로 일찍 고아가 되어 피렌체로 나와 안드레아 델 사르토에게 그림을 배웠습니다. 그는 메디치가의 후원을 받으며 피렌체에서 활동했으며 주로 프레스코화, 초상화, 제단화를 작업했습니다. 그의 작품에서는 공간처리의 불명확성, 인물의 중첩, 그리고 청색과 핑크색의 밝은 배합 등으로 인물상을 더욱 우아하게 만드는 특징이 있습니다.
<Visitation of Carmignano>은 성모 마리아와 사촌 엘리자베스가 만나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폰토르모가 같은 주제를 성숙기에 다시 그린 작품으로, 초기 작품과 비교했을 때 작가의 예술적 발전이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초기 작품에서 신중하게 구축되었던 건축물들은 무채색의 불분명한 도시로 대체되었고요. 폰토르모의 화풍 변화를 볼 수 있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고전적인 구성과 자연주의적 표현에서 벗어난 길게 늘어난 인물 묘사가 특징입니다. 16세기 유럽에서 , 특히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고전적 이상에 대한 반발로 나타난 예술 사조입니다. 균형, 비례, 조화와 같은 르네상스 미술의 특징을 의도적으로 과장하거나 왜곡하는 경향을 보입니다. 매너리즘 미술로 불리는 이 사조는 긴 인체 비율, 기괴하고 때로는 강렬한 색상, 공간의 압축, 부자연스러운 자세 등을 특징으로 하며 전체적으로 불안감을 조성하기도 합니다. 기억하기 쉽게 , 르네상스와 바로크 양식 사이에 나타났 던 사조입니다.
르네상스 거장들의 작품이 이미 완벽한 수준에 도달했다는 인식 하에, 젊은 예술가들은 새로운 목표와 접근 방식을 모색하게 되면서 등장한 사조입니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마젤란과 콜럼버스의 지리적 발견 등 당시 사람들에게 불안감과 불확실성을 야기했던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한 사조이기도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9HvypNnEq1g
왼쪽.Good morning,Mr.Orwell,1984/Showsinfo.TV 오른쪽 The Crossing,1996/ArtNexus
1984년 1월 1일 , 백남준은 나이 52세가 되던 해에 전 세계 규모의 행사를 열었습니다. 뉴욕, 파리, 서울, 도쿄에서 생중계된 우주쇼, <굿모닝 미스터 오웰>입니다. 이 작품은 영국의 작가 조지 오웰(George Orwell, 1903-1950)의 소설 <1984>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입니다. 소설에서 오웰은 인류가 TV와 같은 기계, 매스 미디어에 의해 통제되는 삶을 살 것이라 이야기합니다. '빅 브라더'라는 절대 권력이 인간의 삶을 낱낱이 감시함으로써 인류는 결국 기계의 노예가 될 거라는 종말론적 예언을 소설에 담았지요. 그리고 그 시기는 1984년이 될 거라 예상했습니다.
1984년을 앞두고 백남준은 세상이 그만큼 암울해지진 않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오히려 세상이 더 재밌고 풍요로워졌다고 느꼈지요. 그리고 이를 오웰에게 보여주고 싶어 했습니다. 오웰이 빅 브라더의 감시체제가 될 거라 예상했던 TV와 미디어를 통해서요. 그리고 1984년 1월 1일에 이 메시지를 전할 쇼를 기획했습니다.
Nam June Paik's Good Morning Mr. Orwell, Magazine/MoMA
https://www.youtube.com/watch?v=2c1ucm7pTis
Nam June Paik & the 'Sloppy Machine'That Helped Createa New Art Form/ Asia Society
존 케이지는 독경 등 의 반주에 맞춰 작품을 선보이고, 요셉 보이스는 두 명의 터키인 피아니스트를 데려와 3대의 그랜드 피아노 밑에 웅크리고 앉아 네덜란드 미술가가 자신의 수염을 밀게 했습니다. 고급 예술과 대중 예술이 동시에 나열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오프라인에서만 존재하던 행위예술이 백남준을 통해 전 세계에서, 온라인으로 동시에 진행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작업은 기술, 규모, 기획 면에서 모두 파격적이었습니다. 인공위성을 활용하고 , 전 세계 방송국과 함께 진행했으며, 동시대 예술가들이 하나의 프로젝트를 위해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기술이 이토록 발전했지만, 오웰이 예견한 만큼 암울하지 않은, 축제의 장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시간이었습니다. 한 명의 예술가가 기술을 통해 전 세계인에게 메시지를 전한 것으로 미술사에서 전례 없던 파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이제껏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새로운 의미의 쇼가 펼쳐진 겁니다. 유명인사들을 1월 1일 새벽부터 깨워 만들어 낸 진정한 협업 작품이었죠.
백남준은 이 작업을 통해 미디어 아티스트로서의 입지를 탄탄히 다질 수 있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백남준은 1984년 6월 22일, 34년 만에 조국인 한국에 돌아오게 됩니다. 그전까지 백남준은 세계 예술계에서 두각을 드러냈지만, 그의 이름을 아는 이가 많지 않았습니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이 위성 중계를 통해 한국에 방영되며 '백남준'이란 이름 석 자가 각인 되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CQU71NGx1I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브라, 1969/ skynoise.net
최고의 미인이어야 하고,
최고의 지성인어야 하고,
고전음악연주자이어야 하고,
게다가
옷도 벗을 수 있는 과감성도 있어야 한다.
-백남준이 작품을 수행할 파트너에게 원하는 조건 세 가지-
백남준과 첼리스트 샬럿 무어먼(Charlotte Moorman, )과의 인연은 꽤 유명합니다. 백남준은 1967년 합동 공연을 통해 행위 음악을 이어나갑니다. 가장 잘 알려진 작품은 <오페라 섹스트로니크 Opera Sextronique(1967)>퍼포먼스입니다.
이 퍼포먼스는 다른 예술과 달리, 음악에는 섹스가 없다는 점을 꼬집었습니다. 당시 샬롯은 곡이 진행됨에 따라 옷을 하나씩 벗으며 연주를 선보였고, 공연 맨 마지막 순간에는 알몸으로 연주하는 것이 계획이었습니다. 그런데 속옷을 벗기 전, 사복 경찰이 들이닥쳤죠. 샬롯과 백남준은 음란죄로 경찰에 체포당했고 , 백남준은 풀려났지만 샬롯은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백남준이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미국법원은 이 해프닝이 외설이 아닌 예술이라는 백남준의 말을 받아들입니다. 그 이후 그녀는 이 분야의 아이콘으로 행위예술의 '잔 다르크'아닌' 자유의 여신'이 되었습니다.
난 검은 옷을 차려입고 음악을 연주하는
성이 제거된 남녀의 고인돌 같은 분위기를 휘저어놓고 싶었다.
-백남준-
"기술은 나에게 영적인 힘"
-Bill Biola-
영사의 구도자
비디오 시대의 렘브란트
The Crossing by Bill Biola/Public Delivery
거대한 양면 스크린에 한 쌍의 비디오 시퀀스가 동시에 투사되는 방 크기의 비디오 설치 작품입니다. 물과 불을 사용하여 삶, 죽음, 변화라는 심오한 주제를 탐구하는 비디오 설치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관람객에게 강렬한 시각적 경험을 제공하며, 시간, 영성, 그리고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한쪽 스크린에서 남성의 발밑에서 불길이 시작되어 그의 몸 전체를 태우는 장면이 연출되고, 다른 쪽 스크린에서는 남성에게 쏟아지는 빗줄기가 점차 거세어져 결국 그의 몸을 완전히 덮어버리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이러한 불과 물의 이미지는 파괴와 정화, 변화와 재생이라는 상반된 힘을 상징하며, 작품 전체에 깊이를 더합니다. 특히 , 비올라는 고속 촬영 기법을 사용하여 1초당 300 프레임을 기록하고, 이를 느린 화면으로 재생하여 극적인 효과를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슬로 모션 기법은 관람객이 작품의 디테일을 더욱 세밀하게 관찰하고, 변화의 과정을 명상적으로 경험하도록 유도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bg6wW3EOY94
123RF
https://www.youtube.com/watch?v=I94PqRIgPAU
1951년 미국 뉴욕 퀸즈(Queens) 태생으로 웨스트베리에서 자랐습니다. 시라큐스대학교 (Syracuse University)에서 뉴미디어와 인지 심리학, 음악 등을 공부한 그는 1973년 졸업 후 에버슨 미술관에서 비디오 테크니션으로 일했습니다. 당시 에버슨 미술관은 비디오 아트와 각종 뉴미디어 전시를 개최하던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비디오 미술의 선구자인 백남준과 같은 유명한 비디오 작가들의 전시 설치를 도왔고, 작곡가인 데이비드 투도어(David Tudor)와 함께 일하며 음악과 음향에 대한 자신의 관심과 이해를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1970년대 초반 흑백 비디오로 작품을 시작해 지금까지 수많은 영상작품과 멀티미디어 설치 작업을 해오고 있는 그의 예술 근원은 인간과 자연, 우주에 대한 경의와 깊은 성찰입니다. 그는 불교와 기독교, 수피와 선 (Zen) 신비주의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전통 공연예술을 기록하기 위해 솔로몬 아일랜드, 자바, 티베트 등을 여행하기도 했고요.
특히 1980년 일본에서 18개월간 체류하는 동안 선불교승이자 화가였던 다이엔 타나카(Daien Tanaka)와 교류하며 자신의 작업이론의 토대를 마련하였습니다. 또한 이 시기 소니사의 이츄가 연구소의 거주 작가로 지내면서 그의 영상작업의 특징인 '느림의 미학'을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정지된 듯 느린 속도로 흐르는 시간을 시각화한 그의 작품들은 관객이 내면세계에 빠져 들게끔 유도합니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비, 타오르는 불과 느리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동작은 보는 이들로 하여금 숭고함이란 감정과 조우하게 합니다.
The More, The Better,1988/국립현대미술관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통해 백남준이 보여준 것은 위성 기술, 비디오 아트 같은 첨단 기술과 예술의 조화도 있었지만 백남준의 기획력과 협업 정신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돌아온 한국에서 백남준은 그의 모든 내공이 결합된 작품을 선보이기로 합니다. 바로 , 1988년 작 <다다익선>이죠.
<다다익선>은 '규모의 거대함'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백남준이 한국에 들어온 1984년, 당시 과천에서는 다가올 88 올림픽을 위해 국립 현대미술관 과천관을 짓고 있었습니다. 2년여의 공사 후 지어진 미술관에는 동그랗고 높은 중앙 홀 (로톤다)이 있습니다. 이를 본 백남준은 여기에 <제3인터내셔널 기념탑> 같은 작품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 1천여 개의 TV로 쌓아 올린 탑, <다다익선>을 구상하게 됩니다.
이 작품을 설계하기 위해선 아이디어를 현실화해 줄 기술자, 그리고 TV를 지원해 줄 재정적 후원자가 필요했습니다. 백남준은 건축 연구소 광장의 대표인 건축가 김원에게 노력 기부를 설득하기도 하고, 삼성전자에 직접 찾아가 TV 1천 대 지원 요청을 승인받기도 합니다. 이후 백남준은 미국으로 돌아가서도 국제전화로 계속 소통하며 작품 제작을 이어갑니다. 수백만 원의 통화비를 직접 감당하며 백남준은 2년간 이 프로젝트를 지휘했습니다.
백남준은 작품의 설계와 디테일을 꼼꼼하게 챙겼지만, 협업하는 이들에게 많은 선택권을 위임하기도 했습니다. TV에서 상영할 영상은 총 8편이었고, 이중 4개의 영상을 선택해 송출하는데, 이 영상 선택권을 국립현대미술관에 넘겼습니다. 또 TV가 고장 날 경우 교체해도 좋으며, 이 전권을 테크니션에게 일임한다는 각서도 써주었습니다. 덕분에 <다다익선>은 백남준 사후에도 상설전시 작품으로 지금까지 운영되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5iwHfwvJ7c
백남준은 뉴욕과 LA를 연결하는 다층적으로 구성된 브로드밴드인 '전자 초고속도로'를 구상했습니다. 그는 이미 1974년에 인터넷을 예상하고 이 용어를 사용했으며, 이는 오늘날의 웹 문화와 대중매체를 예견한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1993년, 백남준의 '전자 초고속도로' 구상은 엘 고어 부통령에게 영감을 주어, 영화 TV쇼, 쇼핑, 이메일, 데이터 컬렉션 등이 연결되는 정보 초고속도로를 추진하게 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9M8MEJIaFI&t=2s
빌 비올라( Bill Viola, 1951-2024)는 특히 시간성이라는 주제에 천착, 이를 미술로 승화시킴으로써 비디오 아트 전반에 대한 인식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고속 촬영을 통한 슬로 모션 기법으로 유명하지요. 시간의 속도를 인위적으로 느리게 조절하고 그 흐름을 시각화함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세계를 사유하도록 이끌며 지각과 인지를 변화시켰습니다.
The Reflectiong Pool,1977-1979/The Art Institute of Chicago
다른 차원의 포텔에 들어갔다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거기서 본 것은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었습니다.....
계속 그곳에 머물고 싶어서 삼촌의 손길을 뿌리치기도 했죠."
1977년부터 1979년까지 제작된 중요한 초기작 <The Reflection Pool>입니다. 물웅덩이를 향해 도약한 남자의 정지된 포즈가 인상적인 이 작업은 시간을 거꾸로 돌리거나 멈추게 하거나 다양한 시간의 층위를 하나의 이미지로 합치는 등 시간이라는 재료를 물리적으로, 자유자재로 탐구하는 작가의 면모를 고스란히 드러낸 작품입니다. 물이 외부 세계와 내적 세계의 경계를 의미하는 동시에 영적인 재탄생을 은유한다는 것도 중요한 지점입니다.
이 작업 이후 작가의 다양한 작업에서 물이 정화의 가장 강력한 상징이자 탄생, 부활을 의미하는 요소로 자주 등장합니다. 작가는 연못에 빠져 익사할 뻔한 어린 시절 경험을 자주 언급하며, 그때 목격한 물속 세상의 신비로움과 아름다움에 크나큰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특히 물에 뛰어드는 이 남자의 행위를 두고, 작가는 "한 사람이 자연의 세계로 (승화되어 ) 다시 나타나는 것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런 점에서 일종의 세계'를 의미한다고 작업 노트에 기록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GHdX7sApIMc
TV정원, Archival activations-Metropolis Meseum 오른쪽 Nantes Triptych,1992/Tate images
"미술과 테크놀로지에 함축된 진짜 문제는
또 다른 과학적 장난감을 만들자는 것이 아니라,
급격하게 진보하는
테크놀로지와 전자매체를 어떻게 인간화하는가이다.
우리는
테크놀로지의 인간적인 사용법을 보여주고,
관람자로 하여금
그들이 테크놀로지를 사용하는
새롭고 환상적이며 인간적인 방법을 찾아내도록 그들의 상상력을 자극할 것이다.
"-백남준 인터뷰 (1969)-
백남준의 <TV 정원>(1974)입니다. 이 작품에서는 다양한 식물이 우거진 숲을 이루고 , 그 사이사이에 30대의 티브이를 배치한 것이 특징입니다. 자연과 첨단 기술이 공존하는 것이죠. 정원 속 TV는 하늘을 향해 놓여있고, TV에서 송출되는 화면엔 <global Groove>가 나오고 있습니다. 형형색색의 화려한 영상은 마치 TV꽃이 핀듯한 모습을 연출했고요. 미술관이라는 인공적인 환경에 조성된 자연, 그리고 이 자연과 상반되는 것으로 여겨지는 첨단 기술의 상징 TV가 놓인 모습, 이 작품 역시 <TV부처>처럼 상반된 두 개의 이미지와 함께 제시되며, 관객들에게 직관적인 생경함을 안겨줍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lQl83O1LVTc
" 내 작품이 존재하는 가장 결정적인 곳은
미술관도, 상영관도, 텔레비전도, 심지어 스크린도 아니다.
바로 그것을 보는 관객의 마음이다. "
-Bill Viola-
<Nantes Triptych>는 삶과 죽음에 대한 명상을 담은 비디오 설치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전통적인 제단화 형식인 삼면화 (Triptych) 구조를 사용하여, 삶의 여러 단계를 보여 줍니다. 세 개의 패널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 출생, 삶, 죽음을 상징합니다. 왼쪽 패널은 출산 과정을 담은 젊은 여성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중앙 패널은 물속에 잠긴 채 고뇌하는 남성의 모습을 묘사하며, 삶의 여정을 상징합니다. 오른쪽 패널은 임종을 맞이하는 노년 여성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이 영상은 실제로 빌 비올라(Bill Viola, 1951-2024)의 어머니가 임종하는 모습을 촬영한 것입니다.
이 작품은 탄생의 에너지와 죽음의 고요함 사이에서 삶의 다양한 감정을 표현합니다. 중앙 패널의 남성은 삶의 기복을 겪는 인간의 모습을 나타내며, 출생과 죽음 사이에 놓여 있습니다. < Nantes Triptych>는 시각적인 요소뿐만 아니라, 물의 움직임과 숨소리, 울음소리 등의 사운드트랙을 통해 감정을 고조시키고, 관람객이 작품 전체를 하나의 통일된 경험으로 받아들이도록 유도합니다. 비올라는 이러한 방식으로 삶과 죽음이 분리된 상태가 아니라, 순환하는 존재의 일부임을 강조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z312dtUP5s
제45회 베니스 비엔날레(1993,6,13)/서울경제
"백남준은 독일제다.
독일에 살고 있고,
독일에서 비디오 아트를 탄생시켰으며,
첫 비디오 아트 전시도
1963년에
독일 파르나스 갤러리에서 했다.
독일인들은 남준을 자랑스러워한다"
-독일관 커미셔너 클라우스 부스만(Klaus Bussmann)
백남준이 이처럼 유명해지기 전부터 그의 예술적 가능성을 알아본 국가는 독일이었습니다. 비디오 아트를 시작한 곳도 독일이었고요. 그리고 1993년, 백남준의 나이 61세 때 그는 독일 대표로 베니스 비엔날레에 나가게 됩니다. 당시 수많은 독일 예술가를 제치고 이방인인 백남준이 선정된 것에 많은 비난 여론이 있었습니다.
독일관 커미셔너인 클라우스 부스만의 추천으로 독일 대표 작가 두 명 중 한 명으로 베니스 비엔날레(Venezia Biennale)에 참가합니다. 미술 문화 정책 행정가이면서 전시기획자였던 그의 안목 덕분에 백남준은 기회를 얻었고, 이에 보답이라도 하듯 황금사자를 선물로 안깁니다. 베니스 비엔날레의 성공으로 백남준은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오르며 그의 인생 절정기를 맞습니다.
image of Venice Biennale1993.Bridgeman image
Modulation /Artsy오른쪽 The Quintet of the Unseen,2000,Art in Barcelona/Timeout
당시 백남준의 전시를 인상 깊게 본 예술계 인사들이 많았습니다. 구겐하임 미술관 관장인 토머스 크레인스 (Thomas Krens)는 백남준에게 2000년,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제안합니다. 7년 후의 일정이었지만 백남준은 다가올 회고전에 사활을 걸기로 합니다.
하지만 시련이 찾아옵니다 1996년 백남준이 뇌졸중을 겪게 된 것이죠. 뇌졸중은 백남준의 어머니, 아버지가 모두 겪은 질병이었습니다. 하지만 생존 작가로서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회고전을 여는 건 엄청난 영광이었기에 , 백남준은 이것 하나만을 바라보고 작품 활동에 매진합니다.
The Solomon Guggenheim Museum/ The New York Times
백남준은 구겐하임에서 선보이고 싶은 작품이 있었습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연구해 온 레이저 기술을 활용한 작품이었죠. 이전까지 레이저는 다른 영상을 쏴주는 역할을 할 뿐이었습니다. 레이저 자체보다, 레이저를 통해 보이는 이미지가 예술로 여겨졌죠. 백남준은 사람들이 레이저 광선 자체를 예술로 감상하길 바랐습니다.
구겐하임 측에서는 회고전인 만큼, 신작인 레이저 작업뿐만 아니라 백남준의 과거 작품을 다 선보이길 원했습니다. 백남준은 뇌졸중으로 구안와사가 와 왼쪽 반신이 마비되고, 말하기도 힘들었지만 과거 작품들을 손보고 재작 업하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전시장 메인 홀에는 프랑스에서 극찬받았던 작품 < TV정원>을 깔고, 미술관 곳곳에는 < TV 부처>, <굿모닝 미스터 오웰>의 영상 등 그의 대표작을 설치했죠.
"인류 최초의 화가와 조각가가 누구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비디오 아트의 창조자는 누구인지 확실하다.
백남준,
그야말로 비디오 아트의 아버지이자 조지 워싱턴이다. "
- 고 백남준 추모사에서, 2006-
https://www.youtube.com/watch?v=rO_lwjhoSiU
An Unenviable Situation
빌 비올라(Bill Viola, 1951-2024)의 대표작은 2000년 전후를 기점으로 쏟아져 나왔습니다. '놀라움의 5중주'(2000)는 남녀 5인의 표정과 몸짓 변화를 45초간 촬영해 15분으로 확장한 작품입니다. 극도의 슬로 모션이 눈을 뗄 수 없게 만듭니다. 실제 속도에선 전혀 알아채지 못했을 인간의 순간적인 눈빛 변화와 몸짓, 빛의 변화와 공기의 흐름까지 잡아낸 걸작입니다. 고속 촬영을 통한 슬로 모션은 특정한 시간을 새로운 공간으로 전이시키고, 시간의 속도를 늦춤으로써 현실을 비껴서 그 너머의 세계를 사유하게 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nSlMgPXOkmk
예술은 그 특성상 첨단 기술을 배척하고 거부하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최근 AI 기술의 발전으로 AI 예술가와 작품이 탄생하지만 거부감 또한 큰 것도 사실입니다. 개인적으로 백남준만큼 기술이 인간과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지 깊이 고민한 예술가도 드물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당대 최신 기술을 활용하고 , 공존을 고민하고, 그리고 철학적 의미를 담아내려 애쓴 그만의 독특함이 그를 '비디오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일테지요.
또한 작품의 철학적 깊이를 더하며 인간의 삶과 죽음에 집중한 비올라의 작품을 통해 전통 회화 못지않은 공감대를 형성하며 업그레이드되었습니다. 아주 천천히 음미하는 방법으로 또는 영상을 거꾸로 돌려 낯설게 하는 방법으로 인간 삶의 순환과정을 움직이는 회화처럼 영상 자체에 몰입하게 도왔습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엎치락 뒤치락하는 정보 경쟁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가 꼭 필요하다는 사실과 함께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초심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w0E2v_rbY7s
<Goodmorning Mr Orwell, 1984>
https://www.youtube.com/watch?v=2fj-GT2d0Bk
https://www.youtube.com/watch?v=0BMglCmTBD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