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rtrait of Derain by Maurice de Vlaminck, 1905/The Metroplitan Museum of Art
거침없는 붓질과 강렬한 원색이 시각을 때립니다. 사람 얼굴 안에 이렇게 강렬한 색이 숨어있다니, 감히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물감 튜브에서 짜낸 원색을 대담하게 사용하여 단순화된 형태로 그린 작품입니다. 야수파(Fauvism)라 불리는 모리스 드 블라맹크 ( Maurice de Vlaminck, 1876-1958)의 <드랭의 초상 Portrait of Derain>(1905) 작품입니다. 야수파 동료화가 앙드레 드랭(Andre Derain, 1880-1954)을 그린 작품이지요. 그는 눈에 보이는 색채가 아닌 마음에 느껴지는 색채를 표현했습니다. 일상에서 사물의 색으로 받아들여지는 것과는 다른, 화가가 생각하는 색이 캔버스에 강렬하게 표현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현대미술의 출발점은 야수주의의 등장으로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색이라는 존재를 대상을 묘사하는 부차적인 존재에서 주연으로 업그레이드시킵니다. 르네상스부터 19세기까지 이어져 온 미술의 기법을 훌쩍 뛰어넘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대상의 색채를 그대로 그리기보다는 색채 자체가 가진 본연의 속성과 사물의 본질을 연계시켜 표현했습니다. 이러한 야수파의 시도는 등장 초에는 많은 사람들의 비난과 야유를 받았습니다. 그래도 1905년부터 시작해 짧은 시간 활동이었지만, 현대미술사에 미친 영향은 큽니다.
흔히들 야수주의를 논할 때,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를 대표적인 작가로 꼽습니다. 그 이유는 짧은 기간 동안 야수주의적 화풍을 선보이고 이내 화풍을 바꾼 다른 화가들과는 달리, 마티스는 생애 전반에 걸쳐 야수주의 화풍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티스( Henri Matisse, 1869-1954)가 야수주의적 화풍을 가질 수 있었던 계기에 앙드레 드랭(Andre Derain, 1880-1954)과 모리스 드 블라맹크(Maurice de Vlaminck, 1876-1958)의 도움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들은 마티스가 색에 대해 새로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도왔을 뿐만 아니라, 한 때는 야수주의의 화풍을 이끌어나가는 화가들이었습니다.
오늘은 마티스와 함께 야수주의 회화를 창시한 프랑스 화가 모리스 드 블라맹크(Maurice de Vlaminck, 1876-1958)와 앙드레 드랭(Andre Derain, 1880-1954)의 작품을 살펴볼까 합니다.
그림 1. selfportrait with Pipe by Maurice de Vlaminck, 1905/WikiArt.org 그림2. Self-Portrait with a pipe by Andre Derain, 1953/WikiArt 그림 3. Matisse Self Portrait with Pipe by Andre Derain/Pinterest
작가님들은 지금 야수파(Fauvism)의 3대 거장들 모습을 보고 계십니다. 중년의 모습을 하고 파이프를 문 그들의 성격들이 읽히실까요? 부리부리한 눈매, 거친 터치, 강렬한 색상의 자화상 주인공은 모리스 드 블라맹크(Maurice de Vlaminck, 1876-1958)입니다(그림 1). 그는 캔버스 위에 물감을 직접 짜서 칠한 듯한 두툼한 질감과 생생한 색채, 자유분방한 필치가 특징입니다. 마티스나 드랭보다 훨씬 거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래서인지 야수주의 작가 중에서도 가장 야수적인 정열을 소유한 작가로 평가받습니다.
아래 두 남성은 앙드레 드랭(Andre Derain, 1880-1954)의 자화상(왼쪽)이고, 오른쪽은 그가 그린 동료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의 자화상 모습입니다. 왼쪽 그림은 앙드레 드랭이 사망하기 1년 전에 그려진 자화상으로 '야수주의'를 벗어나 고전스타일로 자신의 화풍을 바꾼 후 그려진 자화상입니다. 오른쪽그림은 드랭의 초기 작품으로 '야수주의 '색채가 강하게 그려진 마티스의 자화상입니다. 빨강, 노랑, 파랑의 삼원색이 마티스의 얼굴에서 춤추는 듯합니다. 기존의 모든 초상화를 뒤집어엎는 시도로 초상화의 신세계를 이루어낸 드랭의 천재적인 색채감각이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모리스 드 블라맹크( Maurice de Vlaminck, 1876-1958)는 1876년 파리 삐에르 지역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플랑드르 출신의 아버지 밑에서 가난하지만 예술적인 분위기에서 자유스럽게 성장했습니다. 모두 음악가였고, 블라맹크 역시 바이올린 연주자였습니다. 그림은 취미였고 독학으로 하다가 한동네 살던 드랭과 가까워지면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합니다.
초상화에서 보듯 성격도 거침없었고 감정적이었고 솔직했고 과격했습니다. 보헤미아적 기질도 다분했고요. 그는 자전거 선수로 뛸 만큼 운동에도 소질이 있었습니다. 음악연주가는 물론 글도 잘 써 소설가로서도 이름이 알려져 있고요. 다방면에서 재능을 꽃피웠던 N잡러(N-Jobber)입니다.
그의 작품을 원작으로 감상하시면 유화 작품 특유의 질감을 즐기실 수 있습니다. 작품 표면이 쏟아져 내릴 것 같은 질감과 소용돌이 같은 속도감 있는 필치와 중후한 색채의 조화를 통해 말입니다.
Chatou France/FranceGeo
https://www.youtube.com/watch?v=thqYU8E9QME
'현대미술의 콜럼버스'라고 불리는 앙드레 드랭( Andre Derain, 1880-1954)은 1880년 프랑스 파리 근교 사투 출신입니다. 아버지가 파스트리 셰프이자 시의원인 평범한 중산층 집안에서 성장했습니다. 엔지니어가 되기 위해 에콜데미네에서 공학공부를 하던 그는 전공보다는 그림 그리기에 더 몰두했습니다. 1895년에는 전시회에서 상도 받는 등 독학으로 꾸준히 그림을 그렸습니다.
학교 생활은 그가 군대에 갔을 때보다 더 비참했다고 나중에 회고한 대로, 선생이나 학생들과도 맞지 않고 적성에도 맞지 않아 포기하고, 1898년 상징주의 화가 외젠 카리에르의 스튜디오에서 미술수업을 받았습니다.
드랭은 이곳에서 마티스와 만나게 됩니다. 마티스가 드랭보다 11살 위이고 작품 시작도 먼저 했기에 그들의 만남은 선생과 제자 사이로도 보였지만 이후 그들은 작품에 있어 동반자적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또한 1900년 드랭은 같은 고향출신 블라맹크와 만나게 되는데, 이들은 빠르게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림을 하게 된 후 앙드레 드랭과 1901년부터 블라맹크가 살던 파리근교 샤투(CHATOU)에 아뜰리에를 마련하여 함께 그림을 그렸습니다. 인상파의 (세잔, 고흐 등) 그림에 영향을 받은 블라맹크는 훗날 인상파 화가들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했던 빛의 묘사에서 벗어나 색채의 표현적인 것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 뜻이 맞아 뭉쳤던 이들이 바로 마티스, 드랭, 블라맹크입니다. 상식에서 벗어난 표현방식으로 색을 통해 나타냈고 색감의 힘을 더 강력하게 드러낸 야수파의 등장입니다.
현대미술사조연표/나무위키
https://www.youtube.com/watch?v=tcjJEOapNKY
Restaurant de la Machine a Bougival/Alamy
화려한 색상을 보고 누군가 떠오르시죠? 블라맹크는 처음에는 고흐의 영향을 받아 원색의 밝은 색조로 점과 곡선을 사용하여 유동적인 그림을 그렸습니다. 1901년 파리에서 열린 반 고흐 회고전을 보고 그의 정열적인 작품에 깊이 감탄하여 강렬한 원색과 분방한 필치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빨강과 녹색의 대비를 통해 강렬한 느낌을 주는 풍경화를 많이 그렸습니다.
블라맹크는 호기심이 많고 예술적인 기질이 많아 인상파에 처음 감명받아 작업을 하는데 빛에 너무 몰두하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나 봅니다. 그는 색을 가지고 깊이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그 목적이 같았던 마티스, 앙드레 드랭과 뜻이 맞아 야수파를 창시하게 됩니다. 그는 야수파활동을 강렬하게 반짝하고는 또 얼마 안 가 그림스타일을 완전히 바꿉니다. 야수파 중에 가장 먼저 돌아선 화가입니다.
그림은 단순하게 색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며
그 색의 창조는
바로 영혼의 발산임을 깨달았다.
-앙드레 드랭-
앙드레 드랭(Andre Derain, 1880-1954)은 빛의 흐름을 색채로 표현해 자연을 묘사한 인상주의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강렬한 삭면들의 대비와 조화로 화면을 구성해 색 그 자체를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군대에서 제대한 드랭과 마티스는 1905년 여름 프랑스의 작은 어촌 콜리우르(Collioure )에서 강렬한 색채와 단순화된 형태의 새로운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1905년 그려진 드랭의 작품들은 야수파 특유의 원색과 형태의 대담한 생략으로 반추상에 가까운 작품들이 많습니다.
https://www.tiktok.com/@sarahinfrance/video/7347490887405964586
Beaches in Collioure France/Plages.tv
콜리우르(Collioure)는 역사와 자연이 어우러진 매력적인 장소입니다. 12세기 스페인 아라곤 왕국의 일부가 되었다가 17세기에는 프랑스와 스페인 간 전쟁의 중심지였으며, 이후 루이 13세의 군대에 의해 프랑스에 합병되었습니다. 스페인 카탈루냐 경계와 가까워 프랑스땅이지만 카탈루냐 문화가 남아있고요. 야수파(Favism) 운동의 중심지로 강렬한 색채와 빛을 활용한 작품들이 탄생한 곳입니다.
The Port of Collioure,1905
빨간색을 즐겨 다룬 드랭의 작품들 중 '콜리우르 항구 The Port of Collioure'(1905)는 쭉쭉 뻗어있는 배의 돛대들, 멀리 보이는 집들의 지붕들이 모두 빨간색으로 그려져 있어 황토색의 공터와 연하늘색의 강 위에서 존재감을 뽐냅니다. 항구의 풍경이 아름다운 삭면 하나하나에 아로새겨져 있고요.
le Port de Collioure,1905/Arthive
드랭의 빨간색의 매력이 그 어느 작품보다 잘 드러난 작품입니다. 점묘법이라기엔 굵고 커다란 점들로 하늘과 강을 처리했는데, 녹색과 노랑의 점들이 흰색 바탕에 칠해져 있고 짙은 블루가 포인트를 주고 있습니다. 그 위로 드문드문 떠있거나 정박해 있는 배들과 모래사장은 온통 빨강입니다. 마치 빨강이 이 작품의 주인공 같습니다. 이러한 작가의 색채에 대한 선구적인 시도는 이 작품을 가장 현대적인 작품으로 만들었습니다.
a Fauvist Portrait by Andre Deraim of Henri Matisse and their fellow artist Etienne Terrus/Christie'
마티스와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였던 에티엔 테루스가 함께 있는 작품입니다. 1905년 여름, 앙리 마티스의 초대로 드랭은 9주 동안 함께 그림을 그리며 색상, 형태, 구도, 원근법 등을 실험했습니다.
Salon d'Automne exhibition/ Snippet of History
야수들 사이에 놓여있는 도나텔로
-평론가 루이 보셸( Louis Vauxcelle,1870-1943) -
Salon d'Automne, Room 7, Paris,1905/Wikimedia Commons
살롱 도톤누(Salon d'Automne)는 1903년부터 현재까지 이어져오는 파리의 가을 전시회입니다. 1905년 가을, 파리에서는 보수적인 <살롱> 전과는 성격을 달리하는 진보적 화가들의 전시인 , <살롱 도톤느 (Salon d'Automne)>가 3회째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진보적인 성향의 전시회로는 이미 앙데팡당 전(Salon des Independants)이 있었지만, 보다 더 진보적인 성격을 가진 살롱 도톤누에는 1905년에 397명의 작가가, 1,600여 점에 달하는 작품을 출품하며, 프랑스 최대의 전시회로 자리매김하고 있었습니다.
야수파들의 작품은 7번 방에 모여 있었습니다. 이 방에 들어온 유명한 평론가 루이 보셀(Louis Vauxcelle, 1870-1943)은 그림들을 둘러보다가 이제는 잊힌 지 오래된 어느 조각가의 아카데미 풍 대리석 작품을 보자마자 "야수 사이에 도나텔로!"라고 외쳤습니다. 20세기 미술 양식의 명칭과 관련된 가장 유명한 이 일화에서 '야수'라는 단어가 곧바로 '야수주의'라는 양식으로 불리게 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3OigIR-esn8
20세기 초 프랑스 현대 미술계에서 가장 중요한 화상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앙부르아즈 볼라르( Ambroise Vollard,1866-1939 )의 배려로 앙드레 드랭(Andre Derain, 1880-1954)은 런던에 머물게 됩니다. 런던에서 그는 화려한 '템스강변'연작을 30여 점 완성한 뒤 돌아옵니다. 이 작품들은 후에, 야수주의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손꼽히게 됩니다.
Big Ben, 1906/wikipedia 'Waterloo Brideg '/ Museo Nacional Thyssen
BTS RM/연합뉴스
앙드레 드랭(Andre Derain ,1880-1954)의 <빅벤>(1906)입니다. 블루와 그린이 점멸되는 색점의 파노라마는 노랗게 빛나는 태양에서 뻗어 나와 런던의 축축한 공기와 템즈 강을 적시는 듯합니다. 우뚝 서 있는 고색창연한 건물들의 위용이 푸르게 빛나고요. 거칠고도 담대한 붓 터치가 화면 전체에 골고루 퍼져 있어 영국 특유의 분위기를 살리고 있습니다.
모네 이후로
런던을 그렇게 신선하게 묘사하면서도
영국적인 본질을 유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드랭은
템즈 강을 묘사할 때 여러 개의 점을 찍는 점묘법을 사용하였는데,
분할 점묘라고 불리는 색상의 분리 그 이상이며,
햇빛을 받으며 흐르는 강물 안에서
분할된 색상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미술평론가 로젠탈-
앙드레 드랭은 런던의 풍경화를 그렸던 선배화가 모네의 발자취를 따라 그가 갔던 장소에서 그림을 그려 그를 오마쥬한 작품들도 남겼습니다. 그러나 그의 화풍은 모네의 그것과는 확연히 달라, 인상주의와 야수주의의 시각의 차이점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Charing Cross Bridge, Claude Monet,1899-1901/Saint Louis Art Museum/wikipedia
A Picture of the Charing Cross Bridge(also known as the Hungerford Bridge) in London, England
Charing Cross Bridge by Andre Derain/Pinterest
특히 그는 이 연작들에서 모네나 다른 후기 인상파주의 화가들이 그러했듯이 변화하는 빛의 성질이나 강 위에 피어오르는 안개의 농담에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이전 세대가 그러하듯이 자신의 주관적인 방법으로 이것들을 다르게 재해석했습니다. 그는 현실적인 모습 그대로를 반영하기보다는 색채를 통해 현실을 뛰어넘으려는 시도를 한 거죠. 드랭은 대상과 색채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대상을 관찰하거나 그 위치를 바꾸기 위해
우리가 대상으로부터 아무리 떨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을 결코 충분한 것이 못된다....
색채는 다이너마이트 뇌관 같은 것이 되었다.
색채는 빛을 방사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모든 것이 현실을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참신함으로 훌륭한 생각이었다.
Portrait de Picasso by Andre Derain, 1908, 붓/Alamy
1907년 영국에서 돌아온 드랭은 몽마르트르의 피카소 등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있던 르 바토-라부아( Le Bateau-Lavoir)에서 시간을 보냈고, 그 해 끝자락쯤 피카소와 함께 아비뇽으로 떠났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입체주의에 빠져 있었는데, 그의 스타일이 변한 것을 두고 피카소의 영향이라고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는 피카소와 만나기 이전인 그 해 여름 런던에서 이미 입체주의의 기하학적 형태에 대한 흥미를 가지고 탐구하고 있었습니다. 영국 니그로 뮤지엄에서 본 아프리카 가면이 가지고 있는 이국적이면서도 기하학적인 표현은 그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의 미술 인생에 있어 입체주의는 짧은 기간에 불과했지만, 1910년까지 브라크 , 피카소와 더불어 입체주의적 작품들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곧 자신의 예술관과 입체주의가 상충함을 깨닫고, "질서회복운동 The return to order"(1918)을 통해 다시 고전적 주제로 화풍을 바꿉니다. 1차 세계 대전 이후의 유럽 미술 운동으로, 기성의 예술 형식과 관념, 유파를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이룩하려는 아방가르드 운동(Avantgarde movenents)이 극단적으로 치닫자 이 에 반대하고, 다시 전통 예술로의 회귀를 통해 예술의 질서를 회복하고자 하던 예술 사조입니다.
Arlequinet Pierrot,1924/Flickr
https://www.youtube.com/watch?v=h_0TAXWt8hY
앙드레 드랭의 <어릿광대와 피에로>(1924)입니다. 이 작품은 이태리 희극 '코메디아 델라르테 Commedia dell'arte'에 나오는 복장을 한 인물화입니다. 드랭의 후원자인 폴 기욤( Paul Guillaume, 1891-1934)의 주문에 의해 그려진 작품입니다. 그는 곡예사나 유랑 서커스 광대의 주제를 좋아했다고 해요.
이 작품은 오른쪽 모델이 '기욤'이고 왼쪽은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Salvado Dali, 1904-1989)'입니다. 그는 드랭과 피카소를 위해 모델을 자주 서 주었습니다. 작품 속 광대는 남을 위해 웃겨야 하는 직업인데 역설적으로 무표정하고 쓸쓸해 보입니다. 더구나 지평선이 아래로 내려와서 매우 비현실적이고요.
하단의 식물은 인물 쪽으로 넝쿨을 내밀고, 반대편에 낯설게도 정물이 배치되었습니다. 두 인물의 상체는 화면 바깥으로 튀어나올 것 같고, 기타 줄이 없는 연주는 공허하게만 보입니다.
미풍양속에 혁신을 불러일으키고 싶다.
진부한 이론과
고전주의에서 해방된
자연의 활달함을 보여주고 싶다
-모리스 드 블라맹크(Maurice de Vlaminck)-
The Bar Counter, 1900, Museum Barberini
이 작품은 모리스 드 블라맹크( Maurice de Vlaminck, 1876-1958)의 초기 작품 세계로 툴로주 로트텍의 영향을 받은 물랭루주의 매춘부와 외로운 술꾼을 연상시키는 화풍을 보여줍니다. 1901년 반 고흐 회고전에서 강렬한 인상을 받은 후, 그의 작품에 강렬한 색채와 거친 붓놀림을 적용하기 시작했습니다. 표면에서 쏟아질 것 같은 질감이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왼쪽. Woman with a Hat, Maurice de Vlaminck,1905, National Gallery/Alamy 오른쪽. La Femme au chapeau by Henri Matisse ,1905, San Fraancisco Museum of Modern Art/Artlecture
블라맹크는 초상화 속 모델을 가까운 주변환경, 드나들던 카페 혹은 가족, 친구, 이웃에서 찾았습니다. 그리고 대상들을 인물이 아닌, 살아있는 풍경과 같이 여기며 생동감 넘치게 묘사했습니다. 인물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인물을 보고 느꼈던 순간의 감정 또는 관심을 끌었던 인상을 생생하게 표현하려 했습니다. 그 대상이 화려한 모자, 아름다운 의상, 빛나는 목걸이 등이 될 수 있지요. 대상을 '실제처럼'그리는 '사실적 재현'으로부터 벗어난 그림을 아주 감각적으로 그렸습니다.
블라맹크의 왼쪽 작품과 마티스의 오른쪽 작품을 비교해 보세요. 오른쪽 작품은 1905년 가을 살롱 도톤에 출품되었던 마티스의 작품입니다. 그의 아내 아멜리 마티스를 묘사한 작품이고요. "물감통을 대중의 얼굴에 쏟아부었다."라는 비난을 받으며 당시 파리 사회에 큰 충격을 준 작품입니다.
그림1.Portrait of Madame Paul Guillaume with a large hat, 1928/Artchive 그림 2.The Cup of Tea,1935/WikiArt
파리의 대화상 폴 기욤(Paul Guillaume, 1891-1934)과 드랭의 인연은 1916년부터 시작되었는데, 1924년부터 폴 기욤이 죽을 때까지(1934) 10년간 계약관계에 있었습니다. 그는 드랭의 가장 큰 후원자이자 친구와도 같은 존재로 드랭의 작품을 좋아해 많은 작품들을 소장했는데, 그의 부인을 그린 초상화로 <커다란 모자를 쓴 폴 기욤 부인>(1929)입니다(그림 1).
야수주의와 입체주의를 거쳐 신고전주의로 회귀한 드랭의 화법의 변화를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우아한 모자를 쓰고 어깨에 긴 숄을 두른 사교적인 모습으로 상류사회의 우아함을 보여줍니다. 입술에 보일락 말락 한 미소를 머금고 도도하게 상대방을 응시하는 여인의 모습을 섬세하게 사실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여기에 그의 젊은 날을 상징하는 밝고 찬란한 색채와 대담한 붓터치는 존재하지 않지만 차분하고 정적인 여인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어 화가의 또 다른 진면목을 알 수 있습니다.
<차 한잔 The Cup of Tea>(1935)은 검은색과 붉은색의 콘트라스트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커다란 모자를 쓴 폴 기욤 부인>(1929)과는 대조되는 분위기로 전자가 중간색 계열의 정적인 색들이 주를 이뤘다면 <차 한잔 The Cup of Tea>(1929)은 검정과 빨강이라는 각각의 강렬한 색들이 서로의 존재를 이해하고 포용하는 듯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그림 2).
La Niece du peintre,1931/Pinterest
드랭의 조카 즈느비에브(Genevieve)를 그린 작품입니다. 드랭은 즈느비에브의 초상화를 9개월 때부터 그리기 시작했고, 어린 그녀가 외삼촌 작업의 가장 오랜 모델이기도 했습니다. 12살쯤의 나이로 다시 한번 이 작품에서 묘사되고 있습니다. 한 손으로 반대 편 손목을 잡고 앉아있는 자세를 하고 있는 이 어린 소녀는 바라보는 사람들을 향해 눈길을 돌린 채, 무언가 공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 보입니다. 어깨 부분에 와닿는 밝은 빛의 터치로 인해 전체 작품에 생명력을 불러일으키고요.
1942, 앙드레 드랭(왼)& 모리스 드 블라맹크/위키백과
1930년대에 이르러 앙드레 드랭의 예술은 다시 돌고 돌아 신고전주의로 귀착되었습니다. 젊은 아방가르드 세대는 그를 비난했고 그의 화풍에 대해 찬반양론으로 갈려 논쟁을 하기도 했습니다.
1928년 카네기 상
1935년 베른, 회고전
1937년 앙데팡당전 초대
예술은 정치적인 것과 아무 연관이 없다.
실제로 예술은 그 (정치 ) 위에 있다.
-앙드레 드랭(Andre Derain)-
인생은 알 수 없나 봅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그에게 작은 실수 하나가 비극으로 연결됩니다. 독일의 프랑스 점령 때 어느 독일인의 전시 초대에 응했다가 공공의 적이 되어 왕따를 당합니다. 그는 '나치 조력자'란 꼬리표를 달며 은둔 생활을 하다가 트럭에 치여 사망합니다 (1954년). 절친 마티스와 같은 해에 죽었지만, 두 거장의 죽음은 명암이 엇갈렸습니다.
"나는 어떠한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어떠한 것도 원한 것이 없었다.
인생은 나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
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했으며,
내가 본 것을 그렸다.
(모리스 드 블라맹크 유언)
Still Life with Knife,1910,Cubism/WikiArt
Town ,1909, Hermitage Museum, Saint Petersburg/wikipedia
1907년 열린 세잔의 회고전은 당시 야수파 화가들의 전향에 중요한 기점이 됩니다. 누구보다 야수파에 열정적이었던 모리스 드 블라맹크(Maurice de Vlaminck, 1876-1958)는 시들해지는 속도도 마티스나 드랭보다 빨랐습니다. 1908년경부터 세잔의 영향을 받아 구성적 화풍으로 바꾸기 시작합니다. 야수파를 버리고 세잔의 스타일에 자연을 벗 삼아 속도감 있는 붓놀림으로 풍경세계를 그립니다. 1920년대에 이르러 마침내 자신만의 독특하고 극적이며 강렬한 스타일을 탄생시켰습니다. 소용돌이 같은 속도감 있는 필치와 중후한 색채를 사용해서 말입니다. 자연주의적 세부 묘사를 거부하고, 대상에 대한 감각을 화폭에 담고자 했던 블라맹크의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La route sous la neige,1931/MutualArt
거친 날씨나 어두운 풍경에서 오는 날카로운 흰색과 표현주의적인 터치가 어우러져 눈 내린 풍경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이 시기 블라맹크가 풍경화를 통해 표현하고자 한 것은 '회화의 진실'을 넘어선 '인간의 진실'의 세계였다고 합니다. 인적 없이 텅 빈 도로의 끝은 인생 여정의 은유적 표현이며, 1차 세계대전 이후 인간이 느끼는 허무함과 공허함의 감정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그는 삶이 끝날 때까지 마을의 거리 풍경을 담았습니다. 사선의 원근감이 느껴지는 견고한 구성이 그의 특징입니다. 추상화나 초현실주의 같은 당대 주요 회화의 경향으로부터 벗어나 자신만의 스타일을 이어갔습니다. 이 작품에선 흰색 눈길과 음산한 하늘, 끝없이 이어진 길이 전원 풍경을 조화롭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블라맹크는 세잔에게서 얻은 교훈에 따라 형성된 '엄격한 구성'과 본능적으로 흐르는 듯한 붓터치를 통한 '감정 표현'으로 자신만의 풍경을 만들어 냈습니다. 대지를 압도하는 하늘의 표현도 블라맹크만의 특징입니다.
눈 덮인 마을 Villaage Sous la neige, 1935-36/Artnet
거칠고 자유분방한 필치와 암울한 색채, 독특한 분위기가 어우러진 화면 속 세계는 블라맹크가 이룬 성취로 평가받습니다. 흰 물감을 두껍게 발라서 어두움과 밝음을 대비시킨 풍경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블라맹크가 궁극적으로 표현하려는 내면 속 풍경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림 속 흰 눈과 어두운 하늘의 강렬한 대조를 통해 블라맹크는 본능과 이성, 불안한 삶 속에서 차오르는 감정을 표현했습니다. 합니다.
'야수파'라는 이름으로 프랑스에서 인상파 이후 모던아트를 이끌었던 그들.
화려한 색채의 향연으로 정글을 헤치며 포효하는 야수에 비유되었던 그들.
피카소와 브라크가 이끈 입체파(큐비즘, Cubism)의 활동이 시작될 때까지 유럽 미술 발전에 확실한 공헌을 한 그들.
후기 인상파와 신인상파 화가들의 다양한 스타일을 실험하고 가지치기를 했던 그들. 색채라는 원료 자체를 주제로 삼아 '야수주의'는 추상표현이 나올 수 있도록 디딤돌 하나를 놓고 갑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aRY3SyDzMA
https://www.youtube.com/watch?v=ZHWRkbikjUQ
https://www.youtube.com/watch?v=WDzX43wNZ8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