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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 남성적 힘과 여성적 우아함

자크 루이 다비드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History of the Art of Antiquity,Jonann Joachim Winckelmann, 1764/Getty Museum Store





고상한 단순성과 조용한 위대함
- 요한 요하임 빙켈만 <그리스 작품의 모방에 대한 생각>,(1755)-






< 고대 미술사 History of the Art of Antiquity>(1764)는 독일의 미술사학자 요한 요하힘 빙켈만( Johann Joachim Winckelmann,1717-1768)에 의해 출간된, 서양 미술사와 고고학 분야를 혁신적으로 변화시킨 기념비적인 저작입니다. 이 책은 고대 이집트, 페르시아, 에트루리아, 로마, 그리고 특히 그리스를 중심으로, 고대 미술의 발전과 변천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체계적으로 서술한 책입니다. 그는 예술의 본질과 이상을 고대 그리스의 고전미에서 발견하고, 이를 창의적 모방의 원리로 체계화하여 신고전주의 미술, 철학, 문학 전반에 혁명적 영향을 끼쳤습니다. 또한 자신의 시대에 파편적으로 존재하던 고대 예술품과 문헌, 그리고 유적지 발굴 성과들을 집대성하여, 미술사의 독립적인 학문적 체계와 방법론을 확립했습니다.





가난한 구두 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요. 학문에 대한 열의와 지적 호기심만큼은 남달랐습니다. 그는 베를린과 여러 대학에서 신학, 의학, 그리스 로마 고전문학을 두루 공부했습니다. 도서관 사서, 교사 등으로 생활하며 고대 예술과 철학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꾸준히 발전시켰습니다.



Medal Joachim Winckelmann,1819/wikipedia






벵켈만은 그리스 조각의 인체 표현과 조화, 균형, 그리고 정신적 도덕적 고양감을 극찬하며, 미술이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인류 정신의 이상적 구현임을 강조합니다. 그는 이전 세대의 한정된 미술품 '수집 및 나열'방식에서 탈피해, 예술을 인류 역사 발전의 일부로 바라보는 혁신적인 접근법을 취했습니다. 예술작품을 시대 양식별로 분류하고, 각 시기의 사회, 정치, 기후적 조건과도 연결시키는 방법으로 말입니다. 이는 미술품을 단순히 감상하거나 수집하는 것을 넘어, 고대인의 삶, 철학, 정체성, 환경 등의 맥락에서 해석한 방법입니다. 또한 실제 유물들을 관찰하고 고전 문헌 (호메로스, 플리니우스 등) 해석을 결합하여 체계적으로 자료를 분석하였습니다. 이는 미술사와 고고학이 독립적이고 과학적인 학문으로 자리매김하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Winckelmann Statue, Winckelmannplatz,Stendal,Germany/wikipedia




https://www.youtube.com/watch?v=kzPCzZa5hWQ





동시에 그리스 예술을 이상적으로 과도하게 미화하고 로마 및 비 그리스 문화 예술을 상대적으로 저평가하는 등의 시대적 한계도 내포하고 있는 책입니다. 하지만 꼭 기억해야 할 점은 이 책이 단순한 미술사 논문을 넘어 고전주의, 신고전주의 미학, 계몽사상, 이후 미술사의 지적 기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입니다.




그는 바로크와 로코코의 화려함과 달리, 고대 그리스의 도덕적 엄숙성과 이상적 미덕, 정치적 자유와 공공성을 예술의 본질로 끌어냈습니다. 그의 사상은 독일의 극작가 및 비평가였던 고트홀트 에프라임 레싱( Gotthold Ephraim Lessing, 1729-1781), 괴테( 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 헤르더(Johannn Gottfried Herder, 1744-1803), 프리드리히 실러( Johann Christoph Friedich von Schiller,1759-1805), 나아가 프랑스의 자크-루이 다비드( Jacque Louis David, 1748-1825), 영국의 로버트 애덤( Robert Adam,1728-1792) 등 당대와 후대의 시인, 철학자, 화가, 건축가 등등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습니다. 또한 '독일 고전주의 '철학적 토대를 마련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요.



예술의 유일한 길은 고대를 창의적으로 모방하는 것
-요한 요하임 벵켈만-





그의 미학은 고대 그리스의 예술을 절대적으로 이상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으로 삼은 것이 특징입니다. 그는 예술의 '미'를 균형, 절제, 조화라는 기준에 두었습니다. 바로크나 로코코처럼 감각적이고 과장된 양식보다 인간의 이성과 내면적 도덕성이 예술의 본질임을 강조했고요. 고대 그리스 조각에 담긴 신체적 조화와, 인간 정신의 긍정적 측면, 그리고 드레이퍼리(천과 인체의 조화) 표현을 높이 평가하여 , 후대 신고전주의 미술가들에게 깊이 있는 미학적 이상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고고학 분야에서도 새로운 연구 기준을 정립했습니다. 이탈리아 로마와 나폴리 등지 고대 유적을 직접 관찰 기록하였고요. 자료 수준과 분류, 문헌 고증과 미술작품의 미학적 분석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고고학의 '과학화'를 이끌기도 했습니다. 예를 들면 폼페이 헤르쿨라네움 발굴과 파에스툼의 그리스 시넌 관찰 등 현장 연구를 통해 엄밀한 기술과 해석 방법을 제시하였습니다. "기록에 기반한 분석과 해석"이라는 원칙은 현대 고고학 연구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1768년 이른 나이인 50세에 트리에스테에서 여행 도중 피살되어 생을 마감했습니다.





오늘은 신고전주의 (Neo-classicism) 회화의 두 거장 자크 루이 다비드( Jacaues Louis David, 1748-1825)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Jean Anguste Dominique Ingres, 1780-1867) 작품을 살펴봅니다.






Antonio Canova, Psyche Revived by Cupid's Kiss, Louvre vision, 1793/wikipedia





이탈리아 출신 신고전주의 조각가 안토니오 카나바( Antonio Canova, 1757-1822)의 <큐피드의 키스로 환생한 프시케 Psyche Revived by Cupid's Kiss>(1793) 작품을 보고 계십니다. 고전적이고 우아한 형태의 조각이지요. 이렇듯 신고전주의( Neo-classicism)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유럽, 특히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개된 미술사조입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예술을 본보기로 삼아 그 미의 기준과 이념을 재해석하고 계승하려 한 예술적 움직임입니다. 이 사조는 바로크( Baroque)와 로코코(Rococo)의 장식적이고 화려하며 감각에 호소하는 태도에 대한 반발로 나타났습니다. 고대의 이상, 균형과 질서를 회복함으로써 이성과 규범성, 엄격함 , 도덕성, 합리주의의 미학을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18세기 계몽주의 사상의 영향 아래 탄생하였습니다. 미국 독립전쟁(1776)과 프랑스혁명(1789) 등 당시 유럽과 신대륙에서 일어난 거대한 사회 정치적 변화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왕권과 귀족 중심의 바로크, 로코코 양식에 대한 시민 사회의 비판, 인간의 존엄 자유 평등을 강조하는 근대적 이념의 확산, 그리고 폼페이와 헤르쿨라네움 등 고대 유적의 고고학적 발굴을 통한 고대에 대한 관심의 폭발이 이 사조의 탄생에 큰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예술가들은 고대 예술의 금욕적 이상, 엄숙한 도덕성, 공공성과 애국심을 새롭게 되살리고자 했습니다.







신고전주의 미술은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 영웅담, 역사적 사건과 함께 , 프랑스혁명이나 나폴레옹 시대처럼 당대의 큰 정치적 변곡점을 직접적으로 다루기도 했습니다. 전시된 인물들은 도덕적 결단, 자기희생, 애국심, 영웅적 행위를 보여 주는데 집중하며, 개인의 삶보다 사회적 이상을 드높이는 것이 두드러집니다.





또한 소묘와 형태의 정확성을 최우선 가치로 삼습니다. 사실적이면서도 이상화된 인체 묘사, 균형 잡힌 구도, 직선과 대칭, 평면적이고 단순한 공간 구성, 강한 윤곽선의 활용 등이 특징이고요. 붓자국이 거의 남지 않는 매끈한 질감이 기본입니다. 색채는 절제되어 있되 대체로 명확합니다. 인물의 수가 적고, 연극무대처럼 한정된 공간, 엄격한 인상과 비극적인 감정의 절제, 그리고 현실보다 이상적 진실을 담으려는 태도가 돋보입니다.








오늘 살펴볼 두 화가 다비드와 앵그르는 프랑스 신고전주의(Neo-classicism) 회화의 대표적 거장들입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예술과 르네상스 대가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지요. 특히 앵그르는 라파엘로를 모범으로 여겼습니다. 이들은 선명하고 명료한 데생, 엄격한 구조, 인체의 이상화된 묘사 등 아카데믹 고전주의의 원칙을 중시하면서 작품의 완성도를 추구했습니다. 역사적, 신화적 주제를 도덕적 또는 애국적 메시지와 결합하여 작품 속에 구현하는 점도 일치하는 점입니다. 신화, 고전 영웅 서사 등 무거운 주제를 통해 사회와 정치 현실을 반영하고자 했습니다. 두 화가 모두 수많은 후학을 양성하면서 19세기 프랑스 미술의 방향성과 후대 미술가들에게 지속적인 영감을 제공했다는 점 또한 공통점입니다.





두 명의 거장은 스타일과 주제 면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입니다. 첫째, David는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시대라는 격동의 정치적 현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혁명적 영웅주의와 시민의 미덕, 강한 결단력을 지닌 인물을 중심적으로 그렸습니다. 반면, 앵그르는 도덕적 갈등, 내면의 약함, 관능 이국적 소재 등 개인적 심리적 요소와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 경향이 교차하는 주제에 주목했다는 점입니다.





둘째, 다비드의 작품은 극적인 명암대비, 카리스마적 구도와 웅장함으로 큰 감정적 효과를 노렸습니다. 반대로 앵그르는 섬세하고 부드러운 선, 표면의 매끄러움, 절제된 색채로 조용한 우아미를 추구했습니다. 셋째 다비드는 주로 대형 역사화나 정치적 프로파간다에 집중했으나, 앵그르는 초상화와 인물화에서 탁월함을 드러냈습니다. 넷째, 다비드는 고전 로마적 전통에 더 엄격하게 충실했다면, 앵그르는 동양적 (오리엔탈리즘) 소재를 적극 도입해 낭만주의의 영향 역시 일부 받아들였습니다.



스승과 제자 사이인 두 거장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잘 기억하시고 작품 감상을 하시면 더 많은 것들이 보이실 겁니다.






Paris France/Pinterest






화가이자 혁명가, 권력의 기록자, 교육자
-자크 루이 다비드-





자크 루이 다비드 (Jacques Louis David, 1748-1825)는 1748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는 그가 9살 때 결투로 사망하였고, 이후 그는 두 건축가 외삼촌의 손에서 자랐습니다. 일찍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지만, 뺨에 난 상처로 인해 얼굴이 틀어지고 말더듬이가 있어 사회적으로는 다소 고립된 유년 시기를 보냈습니다. 그의 예술적 소질은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발휘되었으며, 유명한 로코코 화가 프랑수아 부셰(Francois Boucher,1703-1770)의 추천으로 조셉 마리 비앙( Joseph-Marie Vien1716-1809)에게 사사하으며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작품은 명확한 윤곽선, 조각 같은 인체 묘사, 절제된 색채 그리고 질서 정연한 구도로 높은 도덕성과 시민적 미덕을 강조합니다. 그는 역사적. 신화적 주제를 주로 다뤄 인간의 이성과 합리, 영웅주의, 자기희생 같은 고전적 가치를 화폭에 담았고, 이러한 도덕적 메시지를 통해 예술이 시민 교육 및 사회적 교훈에 기여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다비드는 단순히 화가의 역할을 넘어 정치적으로도 격동의 시대 한가운데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했습니다. 프랑스 혁명기에는 자코뱅당에 가입하여 혁명가 로베스피에르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으며. 예술계의 사실상 독재자로 군림했습니다. 혁명 정부의 예술 정책에 깊숙이 관여하여 계몽과 혁신, 시민적 애국심을 고취하는 여러 선전 회화, 국가의식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주도하였습니다. 단, 로베스피에르가 실각한 뒤에는 투옥되었다가, 나폴레옹의 대두로 인해 석방되어 그의 공식 화가로 활동하는 등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입장을 바꾸는 정치적 유연성도 보였습니다.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다비드는 왕정복고로 인해 브뤼셀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다 1825년 12월 29일 사망하였습니다. 그의 시신을 정치적 이유로 프랑스에 묻히지 못했으나, 예술적 성취와 영향력만큼은 19세기 프랑스 미술은 물론 서양미술사 전반에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Montauban France/wikimedia commons





https://www.youtube.com/watch?v=mRvkrp22A0I


옛 질서의 보존자
근대미술의 실험과 이상적 미의 양립 가능성을 시사한 인물
-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1780-1867)는 1780년 프랑스 남부의 몽토방에서 태어났습니다. 예술가였던 아버지로부터 그림과 음악에 대한 초기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습니다. 1791년부터 툴루즈의 아카데미 로얄에서 본격적인 미술 훈련을 시작했고요. 1797년에는 파리로 이주해 자크 루이 다비드( Jacques Louis David, 1748-1825)의 문하생이 되면서, 고전적 미학과 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신고전주의 이념을 체득하였습니다. 1801년에는 권위 있는 프리 드 로마 ( prix de Rome:장학금)를 수상하며, 로마 유학을 통해 고대 및 르네상스 예술을 심층적으로 연구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앵그르의 예술 세계는 고전적 이상, 완벽한 인체 비례, 그리고 선 (Line)의 우아함을 중시하는 미학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그는 르네상스와 고대 그리스 로마 미술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는 동시에, 독특한 이상미와 정교한 선묘로 자신의 개성을 각인시켰습니다. 그의 작품은 감정의 극단이나 즉흥적 표현을 배제하고 , 절제된 아름다움과 균형 잡힌 구도, 명확한 윤곽선이 두드러지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특히 여성 인체를 이상화하고 비현실적으로 늘이는 대담한 해부학적 왜곡은 그의 누드화에서 대표적으로 나타납니다.







앵그르는 에콜 데 보자르 교수, 프랑스 아카데미 로마 분원의 원장 등으로 재직하며 수많은 후학을 배출하였고, 19세기 프랑스 아카데미와 신고전주의 전통을 공고히 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그의 영향은 인상주의 및 20세기 현대미술가들에게도 이어졌으며, 인상파의 르누아르, 드가, 그리고 20세기 피카소, 마티스 등이 앵그르의 선묘 및 비정형적 인체 변형, 조화로운 구도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습니다.









Oath of the Horatii, 1784/Smarthistory. The Apotheosis of Homer,1827/wikiar


/Khan Academy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 Louis David , 1748-1825)의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Oath of the Horatii>(1784)는 신고전주의 역사화의 대표작입니다. 현재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요. 작품은 프랑스혁명을 불과 몇 년 앞둔 시기에 탄생했습니다. 고대 로마의 전설을 모티프로 하여 국가에 대한 충성과 희생, 공공의 선을 위한 개인의 헌신이라는 주제를 강렬하게 시각화하고 있습니다.







작품의 배경은 기원전 7세기 경, 로마와 인접 도시 알바 롱가 간의 영토 분쟁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양측은 전면전을 피하고 각 도시를 대표하는 세 명의 전사를 선발해 결투로 승패를 가리기로 결정합니다. 로마에서는 호라티우스 삼 형제가, 알바 롱가에서는 쿠리아티우스 삼 형제가 선택되었지요. 그림은 바로 결투 전 호라티우스 삼 형제가 아버지에게 조국을 위해 목숨을 걸겠다고 맹세하는 장면을 묘사합니다.





중앙에는 세 아들에게 칼을 건네며 맹세를 이끌어내는 호라티우스 가문의 부친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결투로 인해 가족이나 연인을 잃게 될 운명에 슬퍼하는 여인들과 아이들이 앉아 있고요. 여성 인물 중 카밀라는 호라티우스 형제의 자매이자, 적인 쿠리아티우스 형제와 약혼한 인물이고, 또 다른 여성은 쿠리아티우스 가문 출신으로 호라티우스 형제 중 한 명과 결혼한 상태입니다.







이 작품은 국가에 대한 무조건적 충성, 애국심, 자기희생 등 영웅적 미덕을 핵심적으로 담고 있습니다. 세 형제의 맹세하는 자세는 철저하게 직선적이고 강인함과 결의를 상징합니다. 국가라는 공공의 대의를 위해 가족이나 사랑의 감정을 초월해야 한다는 계몽주의적, 공화주의적 사상을 드러냅니다. 반면, 오른쪽의 여인들은 곡선적이고 침잠하는 자세로, 가족과의 이별, 사랑, 개인적 고통 등 '사적 영역'의 감정을 상징합니다. 이처럼 남성과 여성,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명확히 대비되면서 당시 사회가 요구한 '이상적 시민상'이 강조됩니다.




schematic showing the Convergence of many elements in the composition at the dentral point/wikipedia





작품 구도에서 '세 명'이라는 숫자가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점도 주목할 만합니다. 삼 형제, 세 자루의 칼, 세 개의 아치, 세 명의 여성 등 삼이라는 숫자는 질서와 결의의 상징으로 구조적 안정감과 상징성을 더하고 있습니다. 배경은 단순한 로마식 건축 공간으로 미니멀하게 처리하여 오롯이 인물과 행동에 집중하게 만듭니다.






색채는 붉은색, 남색, 연한 황색 등 주로 억제된 중간색과 음영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가장 선명한 색인 '붉은 망토'는 아버지에게 사용되어 상징성과 중심성을 부여합니다. 조명은 좌측 상단에서 균일하게 쏟아져, 남성 인물의 근육과 실루엣, 여성 인물의 유약함이 입체감 있게 드러나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드로잉과 형태 역시 특징적입니다. 남성은 직선, 삼각형 등 극도로 기하학적인 형태로 표현되어 '이념', '결의 '를 , 여성은 곡선과 수평적 움직임으로 '감정'과 '연약함'을 강조합니다. 전체적으로 군더더기 없는 절제, 조각적 형태감, 명확한 윤곽선 등'고전적 미'이상을 구현합니다. 이후 혁명기 프랑스에서 '공화국의 도상'이자 '혁명의 아이콘'으로 기능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qfAga9DAuU4









The Lictors Bring to Brutus the Bodies of His Sons, 1789/The Collector
/Flickr






자크 루이 다비드의 < 브루투스에게 그의 아들의 시체를 가져오는 호위병들 The Lictors Bring to Brutus the Bodies of His Sons>(1789) 작품입니다. 고대 로마의 역사 속 한 비극적 순간을 다루고 있습니다. 당시 프랑스 혁명기의 격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요. 주인공인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Lucius Junius Brutus)는 로마 공화정의 창립자로, 자신의 두 아들이 타르퀸 왕정복고 음모에 가담한 것을 밝혀내고,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직접 사형을 선고하는 결단을 내립니다. 이 장면은 국가와 공공의 선을 위해 가족을 희생하는 극한의 도덕적, 시민적 딜레마를 보여줍니다.



detail/The Conversation




이 작품의 중심에는 독특한 장면 구성이 돋보입니다. 화면 왼편에는 차가운 그림자 속에 홀로 앉아 있는 브루투스가 있습니다. 그는 고통스러운 내적 갈등을 딛고 국가에 대한 의무를 택하는 냉철함을 보여줍니다. 그의 발은 긴장감 있게 교차되어 있으며, 반역 방지령( anti-treason decree)을 꼭 쥐고 있습니다. 반면, 우측에는 밝게 조명받은 아내와 두 딸들이 격렬한 슬픔과 충격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가장 오른쪽에는 얼굴을 가린 하녀가 눈에 띕니다. 호위병( Lictors)들은 브루투스의 아들들의 시신을 들고 조용히 입장하며, 이로써 가족의 붕괴와 비극적 결단의 결과를 한눈에 보여줍니다.




detail/출처:Ocean's Bridge Oil Paintings




신고전주의 ( Neoclassicism)의 대표작답게 엄격한 구조, 명확한 윤곽선, 사색적이고 도덕적인 분위기를 고수합니다. 고대 로마와 그리스 조각에서 영감을 받은 인체와 드레이프 표현, 그리고 단순한 도리아식 기둥 등은 고전의 권위와 질서를 암시합니다. 또한 면밀하게 조사된 가구, 재봉 바구니와 가위 등 소품들은 일상과 역사적 비극을 연결하며, 중앙의 빈 의자는 가족 해체와 상실의 상징으로 작용합니다. 색채는 절제된 흙색과 단색 위주로 표현되었습니다. 빛은 극적으로 인물의 내면 감정에 따라 기구하게 나뉘면서 작품 전체의 비극성과 긴장감을 배가시킵니다.






이 작품은 단순히 한 영웅의 결단을 넘어, 프랑스 혁명기 시민의식과 희생, 공화정의 가치 등 근대 정치 이념을 미술로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실제로 작품은 바스티유 감옥 습격 이후 살롱(Salon)에 공개되어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고, 혁명적 열기에 불을 붙이며 공공의 미덕과 덕성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다비드는 이 작품을 통해 사회적 의제를 개인적 비극과 결합시켜 인간성과 도덕성의 문제, 그리고 국가와 가족의 충돌이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관객에게 던집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UQiNvDOJi0c








The Apotheosis of Homer, 1827/wikipeida





wikipedia



15. Orpheus

17.Homer

19. Victory or the Universe

22. Plato

23. Socrates

24. Peficles

26. Michelangelo

29. Alexander the Great

30. Dante

38. Nicolas Poussin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1780-1867)의 < 호메로스의 신격화 The Apotheosis of Homer>(1827)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단순한 역사화나 영웅 전기적 그림이 아닙니다. 앵그르가 평생 추구한 질서, 조화, 균형의 예술적 이상, 그리고 서양 예술사 전통에 대한 깊은 통찰이 압축되어 있는 작품입니다. 오늘날까지 루브르 박물관에서 신고전주의를 대표하는 대작으로 전시되어 있으며, 미술사를 넘어 서양 인문학, 문화사에서 예술과 문명의 근원을 끊임없이 되묻게 하는 상징적 작품으로 남아 있습니다.






화면의 중심에 고대 그리스의 최고의 서사시인 호메로스를 왕좌에 앉힌 채 신격화된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호메로스 위에서는 승리의 여신 니케( NIke, 혹은 우주를 상징)를 상징하는 날개 달린 인물이 그에게 월계관을 씌우고 있습니다. 이는 호메로스가 예술과 지식의 영원한 영광을 부여받은 장면을 뜻합니다. 그의 발아래에는 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의 인격화가 각각 검(전쟁의 위용)과 노(여정과 모험)를 들고 앉아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었습니다.





호메로스를 둘러싼 인물들은 시, 철학, 미술, 음악 등 서양 고전문화의 주요 위인들로, 고대와 근세, 그리고 초기 근대 인물이 한데 모여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예를 들면 오른쪽에는 조각가 피디아스가 망치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등장하고, 그의 옆에는 황금 투구를 쓴 페리클레스, 그리고 황금 갑옷을 입은 알렉산더 대왕이 자리합니다. 왼쪽에는 단테.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푸생, 볼테르 등 후대의 문학가, 화가, 음악가까지 배열됨으로써 , 이 그림 자체가 서양 문화 계보도의 시각적 표현이 됩니다.






색채 또한 신고전주의 전통을 따라 차분함과 명료함을 추구하였으며, 앵그르는 동시대에 합성 울트라마린 (신소재의 푸른 색소)등 최신 재료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화면 전체의 광원은 자연스러운 확산광으로 연출되어, 과도한 명암이나 극적 조명 대신 엄숙하면서도 고전적 분위기를 살리는데 중점을 두었습니다.







특히 , 각 인물의 고증을 위해 앵그르는 100장이 넘는 스케치와 철저한 역사적 연구를 거쳤으며, 니콜라 푸생처럼 실존 초상화가를 그려 넣기도 하고, 남은 인물은 그대로 모사했습니다. 특히 라파엘로의 경우엔 자화상에서 모티브를 얻어 그렸습니다. 반면, 세상에 남은 초상이 없는 인물은 예술적 상상력을 통해 구현하였으며, 이를 통해 시대를 초월한 교감과 예술적 이상을 구현하려 했습니다.










Portrait of Antoine and Marie-Anne Lavoisier,1788

Raphael and La Fornarina by 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1814(우)




물질은 생성도 소멸도 되지 않고 단지 형태만 변화한다.
- 앙투안 로랑 드 라부아지에(Antoine Lavoisier,1743-1794)-


현대 화학의 아버지
프랑스 정부의 재정 세제 개혁
농업 생산성 향상
도시 위생 개선
혁신적 행정가




다재다능했던 라부아지에와 영어와 과학에 능통해 남편의 연구실 동료이자 지식 파트너로서 모범 사례로 평가받는 아내 마리 앙느의 모습입니다. 18세기말 프랑스 혁명기의 격동은 라부아지에의 삶에 극적인 전환점을 가져왔습니다. 그는 귀족 부유층이자 세금 징수원( Ferme generale)으로 활동한 이력 때문에 혁명기의 정치적 소용돌이에서 부패의 상징으로 몰립니다. 1794년 단 하루만의 재판 끝에 단두대에서 처형당하게 되지요. 그러나 그가 후대에 미친 엄청난 과학적 기여와 인류 진보에 대한 신념은 2년도 채 되지 않아 프랑스 정부에 의해 복권되었습니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Raphael and La Fornarina>(1814) 작품입니다. 캔버스와 유채로 현재 이 작품은 미국 하버드 대학의 포그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앵그르가 르네상스 대가 라파엘로와 그의 연인 라 포르나리나 ( Margherita Luti)의 관계에 착안하여 그린 신고전주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이 작품은 19세기 초 유럽 미술계에 르네상스 대가의 삶과 사랑을 미화 재현하는 트루바두르( Troubadour) 양식의 경향이 유행하던 시점에 등장했습니다. 앵그르는 18년간 로마에서 라파엘로를 포함한 고전 대가들의 예술을 탐구하면서 강한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는 특히 조르조 바사리( Giorgio Vasari)와 안젤로 코롬리 ( Angelo Comolli)의 라파엘로 전기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라파엘로의 삶에서 예술과 사랑의 모티브를 작품화하려는 야심을 가졌습니다. 이 그림은 1814년 파리 살롱에 출품되어 공개되었으며, 이후 앵그르는 평생 동안 이 주제로 여러 변주 작품과 드로잉을 제작하였습니다.






작품의 화면은 르네상스 스타일의 작업실을 배경으로, 라파엘로가 그의 연인 라 포르나리나를 무릎에 앉힌 채 포옹하는 모습이 중심을 이룹니다. 라 포르나리나는 에메랄드빛의 풍성한 벨벳 드레스와 터번을 쓰고 황금 장신구를 착용했습니다. 그녀의 어깨와 가슴이 드러나 신체의 곡선미와 관능미가 강조되어 있고요. 그녀의 시선은 관람자를 응시하는데, 이는 그녀의 존재감을 강조하고, 작품 바깥의 시공간과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효과를 줍니다. 라파엘로는 연인을 꼭 안고 있지만, 그의 시선을 왼쪽에 놓인 자신이 그린 라 포르나리나의 초상을 향하고 있어, 현실의 연인과 예술적 이상 사이의 갈등을 암시합니다.





.이 작품은 단순히 사랑의 결실이나 미인도를 넘어서, '예술가가 사랑하는 대상 (연인)과 예술 자체 사이에서 겪는 내적 충돌과 긴장'을 심도 있게 시각화합니다. 라파엘로가 실존하는 연인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그림(예술적 재현)에 더 깊이 몰입한 모습은, 예술가가 현실보다 예술적 이상에 더 큰 열정을 품는 묘사로 읽힙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CXsstWSXh68





The Death of Marat,1793/ Britannica





Charlotte Corday after the Assassination of Marat by Paul jacaues Aime Baudry ,1861/wikipedia






자크 루이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 The Death of Marat>(1793) 작품입니다. 혁명가 장 폴 마라( Jean-Paul Marat, 1743-1793)가 암살당한 현장을 실감 나게 표현한 작품입니다. 마라는 혁명 정부의 급진 세력인 자코뱅파의 지도자였으며, 자신의 신문 '인민의 친구 ( L'Ami du Peuple)'를 통해 과격한 혁명 정책을 지지 선동한 인물입니다. 1793년 7월 13일, 온건파인 지롱드 당 지지자 샤를로토 코르데이( Charlotte Corday, 1768-1793)가 반혁명 정보를 제공하겠다고 속여 그를 찾아와 욕조에서 칼로 찔러 암살한 사건은 혁명 내 갈등과 극한적 희생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화면 구성은 매우 절제되고 단순합니다. 중앙에는 욕조에 누워 죽음을 맞이한 마라의 몸이 비스듬히 배치되어 있습니다. 암울한 갈색 배경과 최소한의 소품 배치는 주인공 마라의 죽음에 시선이 집중되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그의 신체는 고전 조각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이상화되어 있고요. 화면 하단에는 잉크와 펜. 그리고 그의 왼손에 쥐어진 피 묻은 편지, 떨어진 칼 등 사건의 비극성을 드러내는 소품들이 등장합니다.






색채는 전체적으로 절제되고 억제된 파레트가 사용되었으며, 피부의 따뜻한 살색과 욕조 및 배경의 차가움을 함께 전달합니다. 마라의 얼굴과 신체에는 부드럽고 은은한 조명이 집중되어 있는데, 이는 그를 현실의 고통과 분리된 순교자적 이미지를 띠도록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작품 속 여러 소품은 직접적이면서도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마라가 들고 있는 편지는 코르데이가 보낸" 나는 당신의 자비를 구할 만큼 비참합니다. "라는 구절이 확인되며, 이는 마라가 민중의 탄원에 귀 기울이던 이타적인 인물임을 암시합니다. 펜과 잉크는 그가 혁명을 위해 글을 쓰다 생을 마감했다는 사실, 즉 사상가이자 저널리스트로서의 정체성을 강조합니다. 바닥의 칼은 코르데이의 배신과 폭력성을 암시하며, 마치 마라가 세상 밖으로부터 일방적이고 무력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점을 부각합니다.





욕조라는 공간 역시 마라가 만성 피부병으로 고통받으며 장시간 집필하던 장소로서, 혁명에 대한 집착적 헌신과 같은 그의 생활상을 상징합니다. 배경과 소품의 단순함은 마라의 검소함, 민중성, 그리고 신화적 영웅이 아닌 현실의 인간임을 떠올리게 하면서도 동시에 과장된 숭고함을 덧입힙니다. 마라의 평온하고 숭고한 표정, 죽음에 가까운 표정 연출은 그를 혁명의 '순교자'로 신성화하는 효과를 냅니다.






작품은 신고전주의의 특징이 극대화되어 있습니다. 명확한 선과, 차분한 색채, 고전적인 인체 이상화, 그리고 감정의 극대화 대신 절제된 표현이 돋보입니다. 고전 조각상을 연상시키는 숄더라인과 조각적 신체, 깨끗한 피부 묘사는 실제 사건의 고통과 비극은 최소화하는 대신 이성적이고 도덕적인 이상을 강조합니다. 드라마틱한 한 줄기의 광선이 마라를 비추는 방식은 종교화 (특히 카라바조,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연상케 하며, 기독교적 순교자 이미지와 혁명적 '순교자'이미지를 교묘하게 중첩시킵니다.





Pieta by Michelangelo/Britannica




Deposition by Caravaggio/Smarthistory





https://www.youtube.com/watch?v=Hw2_hv439Fg









Portrait of Madame Motessier,1856 /wikipedia



Madame Moitessier/ National Gallery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마담 무아테시에의 초상 Portrait of Madame Motessier>(1856) 작품입니다. 1847년부터 약 10년이 넘게 걸린 초상화 작품입니다. (위)



초상의 주인공인 마담 무아테시에는 부유한 은행가이자 레이스상인이었던 시지스베르 무아테시에의 부인으로, 귀족이 아닌 부르주아 계급에 속합니다. 그림에 묘사된 고급스러운 드레스와 보석, 공단 소파, 그리고 배경에 놓인 중국산 도자기 등은 그녀가 당시 상류 부르주아 계층임을 보여줍니다. 19세기 중반 프랑스 사회에서 시민계급(부르주아지)이 정치와 경제, 문화의 중심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었던 시대적 배경을 반영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마담 무아테시에를 3/4 크기로 묘사했습니다. 그녀는 허리가 잘록하고 어깨가 드러나는 로맨틱 스타일의 검은색 벨벳 드레스를 입고 있습니다. 드레스에는 꽃무늬와 레이스, 리본, 술 장식이 화려하게 표현되어 있고요. 금, 보석, 장식 팔찌가 양팔에 각각 채워져 있어 촉감과 광택이 실제처럼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앵그르는 특히 직물과 보석, 피부의 질감 표현에 탁월한 사실성을 보여줍니다. 마담 무아테시에의 얼굴과 팔은 매끈하고 환한 상아빛으로 그려져 고대 그리스 로마 조각상 같은 이상화된 미를 드러내며, 그녀의 둥근 큰 눈과 특유의 포즈는 고전적 아름다움을 강조합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vg-YRAlPm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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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trait of Madame Recamier,1800/Arthive. La Grande Odalisque/Historia Arte






<Portrait of Madame Re'camier>는 1800년에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w-Louis David, 1748-1825)에 의해 제작된 유화 초상화입니다. 이 작품은 파리 사교계의 대표적 인물이자 리더였던 줄리에트 레카미에( Juliette REcamier, 1777-1849)를 모델로 삼아 그려진 작품입니다.





이 초상화의 주인공인 줄리에트 레카미에는 부유한 은행가의 아내이자 당대 파리 사교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미인 지성인으로, 그녀의 살롱은 문인, 정치가, 예술가 등 당대 각계의 인물이 모여 문화적 담론을 펼치던 공간이었습니다. 작품이 제작된 1800년은 레카미에의 사회적 위상과 명예가 정점에 달했을 시기였습니다. 그녀는 간결한 고대 그리스식 옷차림과 앞서가는 헤어스타일 등으로 당시 유럽 패션의 흐름과 대중적 미의 기준에 직간접적 영향을 주었습니다.



Madame Re'camier by Jacques-Louis David,1800/Rivage de Bohe'me






작품은 가로로 긴 캔버스 (약 174cm*224cm)에 그려져 있는데, 이는 초상화로는 이례적으로 주로 역사화에서 사용되던 도구입니다. 레카미에는 낮고 긴 디렉터리 또는 메리디엔('레카미에'스타일로 불리게 된) 소파에 비스듬히 몸을 기댄 포즈로 등장합니다. 의자에 다리를 쭉 펴고 앉아 쿠션에 팔을 얹고 있으며, 얼굴은 정면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포즈는 우아함과 자연스러움 , 그리고 고전적 조각의 이상미와 조화를 의도합니다.





작품의 주변은 극히 간결하게 처리되어 있습니다. 배경은 텅 비어 있고, 장식 역시 최소화되어 현대적인 패션 화보 같은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그림 좌측에는 키가 큰 브론즈 촛대(카덴드럼)와 꺼진 램프가 놓여 있는데, 램프에서 피어오르는 연기가 어둠에 스며드는 모습은 정적인 무드와 함께 작품의 고요함을 상징합니다.





주인공은 하얀색의 매우 간결한 엠파이어 라인 드레스를 입고 머리는 당시 파격적이었던 짧은 '아 라 티투스 (a la Titus) 스타일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시계, 목걸이 팔찌 등은 나오지 않아 치장이 최소화되어 있으며, 드러난 팔, 발 등은 여성의 자연스러운 곡선미와 함께 고대 조각의 순수함과 도덕적 이상, 혁명 후 '새로운 미덕'으로 인식된 소박함을 강조합니다. 고전적 베일의 복고풍 의상과 머리, 헤어밴드는 로마, 그리스 여신의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작품은 미완성 상태로 남았는데, 이는 모델과 화가의 갈등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레카미에가 다비드의 작업 속도에 불만을 가져 그의 제자 프랑수아 제라르에게 다시 초상화를 의뢰하게 되었고, 이에 자존심이 상한 다비드는 작업을 중단하며 머리와 얼굴만 마무리한 상태로 남겨 두었습니다. 그럼에도 미완의 미학과 얼굴의 섬세한 묘사, 그리고 절제된 구성 등이 예술적으로 오히려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오달리스크 La Grande Odalisque>(1814)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나폴레옹의 여동생이자 나폴리 왕비인 카롤린 뮈라(Caroline Murat)의 의뢰로 제작되었습니다. 당시 프랑스 후기 신고전주의와 초창기 낭만주의의 경계에 위치하면서, 미술사적으로도 중요한 전환점에 해당하는 대표작입니다.





'오달리스크란'오스만 제국 하렘(궁중 후궁) 내 여성을 일컫는 말 입니 다. 작품은 실제 오리엔트(동방)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19세기 프랑스와 유럽이 갖고 있던 동양에 대한 상상, 환상, 그리고 문화적 타자의 시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앵그르는 '오달리스크'를 이국적이고 관능적인 미의 상징으로 재해석하고, 그 신비로움과 유혹을 화면에 구현했습니다.





인물은 화면 중앙에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등과 팔, 다리는 현실적인 인체 비례에서 크게 벗어난 과장된 형태를 띠고 있고요. 특히 척추가 비정상적으로 늘어나 해부학적으로'척추뼈가 다섯 개 이상 더 있다'는 인상을 줍니다. 이 같은 왜곡은 우아함과 관능미를 극대화하고, 실제에 대한 이상적 변형을 통해 아름다움을 추구하고자 한 예술적 의도에서 비롯됩니다. 인물의 시선은 오른쪽 어깨너머 관객을 직접 응시하면서도 다소 냉담하고 거리감 있는 표정입니다. 유혹과 단절의 이중성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지요. 몸의 하중은 왼쪽 팔꿈치와 쿠션에 실려 자연스럽게 눕혀져 있고, 오른손에는 공작 깃털로 된 부채를 쥐고 있습니다.





Painting Colonial Culture/Khan Academy






dedail/Byron's Muse-WordPress.com



색채는 차가운 파랑과 흰색, 그리고 잔잔한 금색, 노란색이 어우러져 화면에 부드럽고 고요한 분위기를 만듭니다. 피부톤은 밝고 따뜻하게 처리되어 바탕의 쨍하게 차가운 색조와 대비됩니다. 빛과 그림자의 세밀한 사용을 통해 인물의 질감과 세부 구조, 특히 비단 커튼, 쿠션, 터번, 보석, 깃털 부채의 질감이 정교하게 표현되었습니다. 붓터치는 거의 드러나지 않고 매끄럽게 마감되어 신고전주의의 전통과 앵그르 특유의 정밀함이 살아 있는 작품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Pwz3iaT71M







Josephine kneels before Napoleon during his Coronation at Notre Dame. Behind him sits Pope Pius VII


detauk/wikipedia


1. Napoleon

2. Josephine de Beauharnais(1763-1814)

3. Maria Letizia Ramolino(1750-1836,모친)

4.louis Bonaparte(1778-1846)

5. JosephBonaparte(1768-1844)

6. The Young Napoleon Charles Bonaparte

7. The sisters of Napoleon

...

13. Pope PiusVII(1742-1823)




현재 파리 루브르 박물관 Room 702에 소장 전시되어 있는 작품입니다.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 The Coronation of Napoleon>(1807)은 다비드가 1805년부터 1807년까지 그린 대형 유화입니다. 작품의 공식 명칭은" Consecration of the Empeior Napoleon I and Coronation of the Empress Josephine In the Cathedral of Notre-Dame de Paris on 2 December 1804"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황제에 즉위하던 1804년 12월 2일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거행된 대관식의 결정적 장면을 담고 있습니다. 그림의 크기는 약 6.21m* 9.79m로,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된 가장 거대한 작품 중 하나입니다.






이 대관식은 프랑스혁명 후 혼란기를 종식시키고 나폴레옹이 유럽의 새로운 질서와 권력을 상징적으로 선포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전통적으로 프랑스 왕은 랭스 대성당에서 교회에 의해 왕권을 받았으나, 나폴레옹은 그 관례를 깨고 노트르담 대성당을 배경으로 스스로 황제의 관을 쓴 뒤, 직접 아내 조세핀에게 왕관을 씌우는 파격적인 장면을 연출하였습니다. 이는 세속 권력이 종교 권력(교황)보다 우위에 있다는 강력한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림의 중심에는 나폴레옹이 붉은색과 황금빛의 제국 대례복과 월계관을 쓰고, 무릎을 꿇은 아내 조세핀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 주는 장면이 웅장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나폴레옹의 뒤편에는 교황 비오 7세( Pius VII)가 오른손을 들어 축복을 내리는 제스처로 앉아 있고요. 조세핀은 수동적이며 순종적인 아름다움과 정통성의 상징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녀의 복식은 순결과 이상적 여성성을 나타내는 흰색 드레스와 진귀한 장신구로 장식되어 있고요.






skech by David of Napoleon crowning himself







화면 중앙 상단의 귀빈석에는 실제 대관식 불참자였던 나폴레옹의 어머니 레티지아가 위엄 있게 등장하는데, 이는 나폴레옹의 정치적 의도로 삽입된 연출입니다. 그림 좌편에는 나폴레옹의 형제들(조제프, 루이)과 여동생들이 정렬해 있으며, 조세핀의 딸 오르탕스와 손을 잡은 손자(훗날 나폴레옹 3세) 등 가족이 망라됩니다. 우측 전면에는 당시 프랑스 제국의 주요 정치가, 군인과 귀빈, 외국 사절들도 포진되어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다비드 자신과 그의 가족도 이 대작 한편 (2층 갤러리)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습으로 등장해 기록자이자 창조자로서 존재감을 남겼습니다.





구성 인물의 수는 약 150-200여 명에 달하며, 모두 실제 당시 의상과 얼굴로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등장인물들은 사실 일부는 대관식에 실제 참석하지 않았거나, 정치적 필요에 따라 이상화되어 그림에 포함되었습니다.





이 작품의 구도는 신고전주의의 엄격한 규칙을 따릅니다. 화면은 십자가와 황제를 중심으로 하는 수직축, 교황에서 황후로 이어지는 대각선축 등 다양한 축에 따라 균형 있게 조직되어 있으며, 인물 대부분이 정면 또는 약간 측면을 향해 극적 무대처럼 배치되어 있습니다. 화면 안의 시선과 구도는 모두 나폴레옹을 중심으로 모여 절대적 권위를 강조합니다.




Artnet




색채는 붉은색, 금색, 흰색, 녹색, 중립색 등 절제된 팔레트가 주를 이루는데, 이는 고대 로마 그리스 이상의 권위 및 당시 제국의 웅장함을 시각적으로 드러냅니다. 특히 황금빛과 붉은색의 사용은 제국의 부와 권위, 힘을 동시에 상징하며, 조세핀의 흰 드레스는 순결과 이상, 연극적 붉은 커튼과 배경은 무대 효과와 긴장감을 극적으로 강화합니다. 조명은 자연광과 유사하게 구현되어 주요 인물 (나폴레옹, 조세핀, 교황, 어머니 등)을 중심으로 밝기를 조절해 중심성을 강화했습니다. 그림 속 모든 인물은 매우 진지한 표정과 다양한 심리가 절제된 채로 표현되어, 장엄함과 극적인 분위기를 극대화합니다.





다비드는 이 작품을 단순한 역사적 기록이 아니라, 현실과 이상, 권력과 정당성의 이미지를 전시하는 정치적 상징물로 설계했습니다. 교황이 황제의 머리에 왕관을 씌워주는 장면 대신, 나폴레옹이 직접(또는 조세핀에게) 왕관을 씌우는 장면을 태함으로써 "나는 내 스스로 제국을 세운다"는 메시지를 시각화했습니다. 이는 교회(교황)보다 세속 제국과 혁명 이념, 그리고 황제 개인의 권력이 더 우위에 있음을 상징합니다. 조세핀에게 왕관을 씌움으로써 나폴레옹은 정통성과 품격, 화목한 가정, 제국의 새로운 질서 수립(가문, 가족의 결속력 강조)을 선전했으며, 모든 등장인물의 배치는 정치적 의의를 담고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a5E6aTzId7Q








Ingres, Napoleon on his imperial throne,1806/wikipedia









앵그르가 20대 시절 그린 < Napoleon on his Imperial Throne>(1806) 작품입니다. 대형 유화 작품으로, 파리의 뮈제 드 라르메(군사박물관)에 소장되어었습니다. 매우 웅장한 스케일로 나폴레옹 1세의 즉위 복장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그의 정치, 군사적 권위를 극대화한 모습이고요.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점은 중앙에 정면을 응시하는 나폴레옹의 거대한 존재감입니다. 그는 원형의 웅장한 황금 왕좌에 앉아 대관식 예복(보라색 벨벳 망토, 흰색 어민, 금실 자수, 벌 문양 등)을 입고 있습니다. 망토의 보라색은 고대 로마 황제의 특권적 색상으로, 나폴레옹이 황제임을 시각적으로 환기시킵니다. 망토와 왕좌 전체에 금빛 벌들이 수 놓여 있는데, 벌은 불멸성과 부활, 그리고 프랑스의 초대왕조인 메로방 왕조, 카롤루스 왕조와의 연속성을 상징합니다. 왕좌의 양쪽 팔걸이 위에는 상아 구슬이 있어, 지혜와 통제를 의미하고요.






나폴레옹 머리에는 금색 월계관이 씌워져 있는데, 이는 고대 로마의 승리와 통치의 상징으로 줄리어스 시저, 아우구스투스와의 연관성을 강조하는 연출입니다. 손에는 각각 샤를마뉴의 홀(오른손)과 정의의 손(왼손)을 들고 있는데, 전자는 신성로마제국의 전통적 통치권, 후자는 정의와 공정의 상징입니다. 벨벳 망토 안쪽은 어민(흰색 족제비)으로 안감 처리되어 있으며, 이는 전통적으로 왕의 권위를 드러냅니다. 발아래 깔린 카펫에는 제국의 상징인 독수리가 크게 새겨져 있습니다. 이는 지상에서의 힘과 하늘로부터 부여된 권위를 의미합니다. 카펫과 작품의 좌측에는 황도 12궁과 라파엘로의 마돈나 델라 세지올라가 장식으로 들어가 있는데, 이는 앵그르가 르네상스 거장 라파엘로를 존경했음을 보여줍니다. 배경에는 이탈리아 왕국의 문장이 일부 나타나 나폴레옹이 프랑스 황제일 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왕임을 동시에 나타냅니다.






Hubert and Jan van Eyck, God the Father- a panel from their Ghent Altarpiece/wikipedia





이 작품은 권위, 신성성, 역사적 정통성을 전달하기 위한 시각적 장치가 구석구석에 배치되어 있습니다. 앵그르는 나폴레옹을 단순한 인간 군주가 아니라, 고대 신화 속 신적 존재 혹은 전통 권위와 연결된 초월적 통치자로 그렸습니다. 중앙에서 정면을 응시하는 나폴레옹의 구성, 왕좌의 원형 곡선, 머리 뒤의 후광 효과 등은 고대 그리스 조각 (특히 올림피아 제우스상)과 초기 르네상스 회화(얀 반 에이크의 겐트 제단화)에서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고전, 중세, 르네상스의 다양한 요소를 엄격하고 대칭적인 신고전 양식 안에 결합하며, 나폴레옹의 정치적, 역사적 임무를 시각적으로 정당화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5vDkA9Jg0Y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