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이 무너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으며 잠을 잤다. 하고 싶은 일을 못하는 것이 이렇게 가슴 아픈 일일 줄이야. 속상함과 좌절감이 범벅된 마음으로 잠에 들었다. 다음날 눈을 떠도 마음이 아픈 건 여전했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과 헤어진 것 같았다. 운동으로 잊어보려 했지만, 쉼 없이 밀려들어가는 스텝밀 발판 앞에서도 이 슬픔은 자꾸자꾸 삐져나온다.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픈 걸까?
사실 요즘 나는 좀 무기력했다. 일요일 밤만 되면 ‘아 지루해, 출근하기 싫어’라는 말이 절로 나왔다. 일의 권태기가 왔나 싶었다. 내 성장에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이 단순 취합 업무를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걸까.
우리 팀은 사실 인기부서다. 인사이동 때마다 우리 부서로 오고 싶어 하는 직원들이 줄을 선다. 행정업무로 점철된 공공기관에서도 상대적으로 그나마 전문성을 쌓기 좋고, 업무를 통해 배울 것이 많은 부서기 때문이다. 업무 독립성과 중요도를 고려해 기관장 직속부서로 지정되었지만, 단점은 우리 부서일에 신경을 쓰는 경영진이 없다는 것이었다. 기관장은 우리 실의 업무보다는 예산이 더 크고 외부의 이목이 집중된 주요 사업에 있었고, 우리 부서가 본인 직속인지도 인지하지 못할 만큼 별로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이전에 있던 상사가 ‘혁신이란 이름으로’ 우리 부서의 업무 범위를 대폭 확장한 탓에 업무량은 상당하지만 다른 부서에서는 이걸 알 길이 없었다. 조직 내 인정이 부족한 것은 업무 동력이 잘 생기지 않는 이유 중 하나였다.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 헛헛함, 이건 아닌데. 이 감정을 표현할 적확한 언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느낌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일하고, 살아가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1년 전 이맘때쯤 쓴 일기를 보게 됐다. ‘더 성장할 구석이 없는 느낌이야’. 1년 전에도 정확히 같게 느끼고 있었다. 작년보다 조금도 나아가지 못했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뭔가 해야 했다.
고심 끝에 내 업무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방향성을 정리해 전문지에 싣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새로 하는 업무고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배울 것도 충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부서 성과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다. 업계 트렌드를 선도하는 우리 부서의 동향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정보를 적극적으로 제공하는 창구가 될 수 있었다. 개인의 성장과 부서 업무 성과도 만들어 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일을 만들어서 한다는데 말릴 사람이 있을까?
보고서를 전문지에 게재할 수 있을지, 목차와 내용은 타당한지, 발간 효과는 충분할지에 대해 담당부서와 회의를 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고 유용하며, 파급효과도 클 것이라는 답변을 받았다. 이후 상사에게 내가 이 업무를 추진하고자 하는 목적, 기대효과, 취지 등에 대해 설명드렸다.
하지만 상사의 답변은 차가웠다. 그런 거 하지 말고 그냥 본인이 지시한 일을 하라고 했다. 부서 업무에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겠지만, 개인의 업적으로 볼 수 있는 부분이 있어 아무래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것이었다. 상사의 입장이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건 분명 업무 범위에 있는 일이었고, 직원들의 전문 역량 강화를 위해 회사에서도 적극 지원하는 일이었다. 축적된 사례도 많았다.
어찌 됐건 이 일은 할 수 없게 됐다. 아무리 좋은 취지라 한들 직속상사가 반대하는 업무는 추진할 수 없으니까. 이 긴 무기력을 끝낼 돌파구를 간신히 찾았는데, 다시 막다른 골목에 온 느낌이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할까?
이 일이 좌초된 것이 왜 이렇게 슬픈지를 생각해 봤다. ‘자극이 필요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같은 일을 해도 셀프로 난도를 높여가며 일해왔다. 그런데 요즘은 같은 일을 다른 방식으로 해도 내 성장욕구를 자극할 만큼의 충분한 난도가 주어지지 않았다. 업무 결정권도 떨어져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게다가 지금 맡은 업무에서는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일할 수 없었다. 지적으로 채워지고, 나의 언어로 소화하며 산출물을 내는 방식은 나에게 가장 큰 성취감과 만족감을 주는 업무 방식이다. 그런데 이런 형태로 할 수 있는 일이 도무지 보이지 않았던 거다.
‘회사 가기 싫어, 일이 너무 재미없어, 지루해’라는 말은 나에겐 곧 ‘자극이 필요해!’였다. 새로운 자극을 받을 수 있는 방식으로 일하면서 업무의욕도 되찾고 싶었던 거다. 난 그런 일을 간절히 원했던 거였다.
Brick walls are there for a reason.
The brick walls aren't there to keep us out.
The brick walls are there to show us how badly we want things.
장벽에는 다 이유가 있다. 장벽이 거기 서 있는 것은 우리를 가로막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가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지 보여주기 위해 거기 서 있는 것이다.
-랜디 포시, 「마지막 강의
일에 희망을 품었다 이내 실망하는 나를 지켜본 동료들은 말했다. 일에서 그렇게 큰 의미와 가치를 찾지 말라고, 월급을 받을 수 있다면 일의 역할은 그것으로 된 거라고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자꾸 일에 몰입하고 애정을 쏟게 된다. 일에서 의미를 부여하고 가치를 발견하는 일을 그만둘 수가 없다. 일은 빠르게, 효율적으로 할지라도 일을 향한 나의 마음은 한없이 비효율적으로 남겨두고 싶어진다.
뭔가를 시도했다는 건 결국 더 잘 살아보려는 노력이자 섬세하게 나를 돌보는 일이다. 이제 내가 어떤 일을 간절히 원하는 지를 알게 되었으니 끝까지 놓지 말자고 다짐해 본다. 지루하게 반복되는 이 일이 내 업의 본질이 아니라고, 이 일의 끝은 고작 여기가 아니라고, 단순한 일에서도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고 믿고, 내 일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상상하는 것을. 아무래도 난 일을 사랑하는 일을 영영 멈출 수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