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중 가장 소중한 업무 전 20분에 대하여
가사 없는 음악은 초보 운전러의 긴장을 없애주는 마취제다. '출발 FM과 함께'에서 흘러나오는 클래식 선율을 들으며 핸들을 만진다. 꼬불꼬불한 출근길의 끝에 어떻게 하면 왼쪽과 오른쪽의 공간이 똑같이 남도록 예쁘게 주차할 수 있을지 바퀴를 요리조리 굴리다 오늘도 힘겹게 사무실로 들어선다.
엘리베이터가 4층에 멈추면 컴퓨터의 전원 버튼을 누르고 잠겨있던 서랍에서 책 한 권을 꺼낸다. 금서는 아니지만 내가 어떤 책을 읽는지 굳이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싶지 않아 꽁꽁 숨겨두었다. 그리고는 활자 뭉치와 함께 나만의 섬으로 떠난다.
회의실 상태는 이제
'공실'이 아닌 '회의 중'이다.
시간을 계획한 대로 쓸 수 있다는 것, 타인에게 침범당하지 않고 마음껏 통제할 수 있다는 것, 그건 내게 자유의 증표이자 행복의 표상이다. 비록 이 몸은 회사의 묶인 부자유한(unfree) 몸이지만, 아침 20분은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항거이자, 스스로를 위한 선물인 것이다. 불과 몇 분 뒤 읽기를 강요당하는 메일과 건조한 업무 자료에 내 시간을 저당 잡힐 것을 생각하면, 더욱 즐거이 책에 몰입할 수 있다.
활자의 바다에서 오늘 하루를 살아갈 말들을 건져내기 위해 애쓴다. ‘아하!’하며 짧게 감탄하다가, 한 단어에 깊이 감동하다가, 때로는 지겹다며 책장을 후루룩 넘긴다. 그렇게 아침 8시 35분부터 8시 55분까지 20분 간 짧은 하루를 미리 산다.
회의실 앞 커피머신이 ‘위잉-’ 돌아간다.
OOO팀에 ***가 출근했나 보다.
시계를 한번 올려다본다.
아직 3분 남았구나.
3분 동안엔 꽤 많은 페이지를 읽어낼 수 있다. 12시가 되면 마법이 풀릴까 노심초사하며 달리는 신데렐라의 심정으로 문자를 폭식한다. 그렇게 내 나이보다 많은 수의 페이지를 절실히 읽어낸다.
하지만 누군가 '덜컥'하고 문고리를 당기면 꼼짝없이 자리를 비켜줘야 한다. 당최 누가 내 신성한 영토를 침범하려 하는지! 왼쪽 끝으로 눈동자를 굴려 흘겨보고 싶지만,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야 한다. 내 땅은 시한부니까.
8시 55분, 책장을 덮어야 한다는 아쉬움과 이제는 벽돌만큼 무거워진 책을 안고 터벅터벅 회의실을 빠져나온다. 느릿느릿 책을 서랍에 다시 넣는다. 그리고는 비서가 보내온 '상사의 오늘 일정'과 같은 중요하지 않은 메일부터 골라 읽는다. 이제야 일을 시작하기 위한 의식(ritual)이 모두 끝났다. 지금부터 나의 하루는 내 것이 아니다.
‘일하는 나’에게만 갇히지 않겠다는 투쟁, ‘읽는 나’의 실재, ‘감탄하는 나’의 현시가 있었다가 사라진다. 그럼에도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오롯한 나만의 시간, 오늘도 그 세계를 탐험하러 간다.
그러니까 지금 저는 회의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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