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여름이 오기 전에
간밤에 비가 많이 내렸다. 비는 조용히 내리더니 점차 제 존재를 알리려는 듯 거세졌다. 비는 그렇게 온다. 창문을 두드리듯이 오는 게 아닌 지금 비가 찾아왔다고 초인종을 누르듯이 내린다.
비를 맞이한다. 환했던 방의 불을 끄고, 퍼렇고 어두운 창의 불빛만이 조명의 역할을 한다. 디지털시계의 숫자는 8시 30분을 가리킨다. 지금 눈을 붙이기엔 이른 시각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르게 잠자리에 든다. 침대는 벽에 붙어있고, 나는 침대의 가장자리 중에서도 벽에 꼭 붙어있다. 벽에 붙어서 빗소리를 듣는다. 침대 바로 앞에는 책상이 놓여있다. ‘이렇게 방이 넓었던가?’ 퍼런 어둠이 방에 다가오고 나는 비로소 세상과 멀어진. 오직 방에 사람 하나 있는 모양새가 된다.
그날 오후엔 비가 내리지 않았다. 마치 비가 올 것처럼 빗방울이 몇 번 떨어지고, 후텁지근한 바람이 불었다. 나는 여름이라며 지난주에 구매한 플랫슈즈를 신고 밖을 나섰다. 납작하고 굽이 없는 플랫슈즈를 신으니, 마치 양말만 신고 밖을 활보하는 것처럼 땅의 느낌이 그대로 전해졌다. 내가 입은 옷은 면 소재의 투피스 스커트였다. 가벼워진 옷차림을 입으니 기분이 들떴다. 사람들의 옷차림도 가벼웠다. 티셔츠와 무릎까지 오는 반바지와 치마, 양산을 들어 빗방울과 볕을 가리는 사람도 보였다. 무더운 여름이 오기 전 준비라도 하는 걸까. 하늘하늘한 수국이 곳곳에 보이고, 개성 강한 색의 자그마한 꽃들이 아스팔트 도로 옆 화단에 피어있다. 아직 본격적인 여름이 오기 전인 여름의 향기만 풍기는 이 계절이 좋다.
소음을 차단한 에어팟에는 보사노바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커피를 마시려고 카페에 들어갔는데 음악을 들으니, 커피가 탄산수로 바뀌는 것만 같다. 보사노바 음악은 해변의 모래알같이 잘게 부서지며 흐른다.
그러한 음악도 점점 사그라들고, 지금은 빗소리만이 이 방을 한가득 채운다. ‘허전하다’ 그러한 단어가 떠올랐다. '무엇을 잃거나 의지할 곳이 없어진 것 같이 서운한 상태'. 마치 빈 물컵처럼 차오르지 않은, 근래의 나를 설명하는 단어였다. 그러나 하늘은 허전하지 않을 만큼 비를 퍼부어주니 충만할 터였다. 내 마음의 허전함은 뒤로한 채 빗소리를 듣는다. 학창 시절의 교복을 입은 나는, 학교에서 귀가하는 버스를 타면서 계절의 옷차림을 입고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이 부러웠다. 그러다 마음에 드는 카페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시간을 보내고 오는 그것이 나의 꿈이었다. 어쩌면, 시시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때의 꿈은 자연스레 이루어진 터일 테다. 그런데 요새는 사소한 행복을 하나씩 까보아도, 허기가 진 느낌이 들었다. 어쩌면 포화상태의 욕망이 아닐까, 지금 내리는 비처럼. 한가득 차올라도 만족하지 못한다면 언제나 비가 오는 상태일 터다.
비가 세차게 내린다. 누군가는 편의점에서 마실 것을 사려고 슬리퍼를 끌고 밖을 나설 것이다. 비를 맞지 않기 위해 우산을 펼치지만, 슬리퍼를 신었기에 비는 온전히 발등을 적신다. 집에 돌아서는 길에 반바지를 입은 그 사람은 종아리와 발등에 온전히 비를 맞은 채로 집에 들어선다. 우산을 써도 흥건히 물에 젖는 발, 손 쓸 수 없지만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을 생각한다. 어제의 비는 그런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