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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정 Jul 12. 2021

신라 문화의 특성

| 신라 문화의 특성 |

신라 역시 백제나 고구려처럼 적극적으로 유교를 받아들인 나라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고대 국가가 창업 군주의 세습과 통치를 받았던 것과 달리, 신라는 토론과 합의를 통해 왕을 뽑고 큰일을 결정하는 나라였다. 일단 나라의 시작부터가 그러했다. 신라는 육부의 촌장들이 박혁거세와 알영을 왕과 여왕으로 추대하면서 시작된 나라이다. 즉, 정복과 복종이 아닌 인망과 능력이 있는 자를 협의로 추대하는 방식으로 나라의 문을 열었다. 

이러한 공동체의식은 화백제도라는 신라의 고유한 정치제도로 자리 잡았다. 『당서』 「신라전」에 그러한 내용이 보인다. 

“어떤 큰일이 있을 때면 모든 백관이 모여 서로 깊이 토론하여 결정했다. 17관등 중 상위계급이 참석하는데, 일이 있을 때면 반드시 여러 사람과 합의해서 결정한다. 만약 그중 한 사람이라도 이의가 있으면 통과하지 못한다.” 

민주주의와 비슷하지만 신라의 화백제도는 만장일치의 원칙을 사용하고 있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다수결이 항상 옳다고만 할 수는 없다. 때문에 현대에도 다수결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보르다 투표법, 콩도르세 투표법, 결선제, 순차적 결성제 등의 방법들이 사용되기도 하는 것이다. 


신라 후대에도 왕의 자질인 덕과 능력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더불어 신라에는 ‘신교’(神敎)라는 고유 사상에서 기인한 ‘풍류도’(風流道)가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었다. 삼교(三敎: 유교·불교·도교)를 두루 통달한 당대의 천재 학자 최치원에 의하면 풍류도는 삼교의 본질을 이미 갖추고 있던 사상이었다. 때문에 신라인들은 유교를 수입하고서도 고유한 전통문화를 지켜갈 수 있었다. 그것은 신라인들이 신라는 고조선을 계승한 신국(神國)이자 천자국이며 삼교와 같은 (당시로서는) 고급 문화를 이미 가지고 있었다는 문화적 자존감이 매우 높았기 때문이다. 덕분에 신라에서는 전통이 ‘미신-야만’이 되고 유교는 ‘정통’이 되는 주객전도 현상이 조금은 늦어질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신라에서 한문은 신라 언어를 더 잘 표현하는 이두로 응용됐다. 신라에 들어온 유교는 신라 고유의 공동체 의식과 화랑도를 정교한 체제로 보완하는 데 사용됐다. 불교는 신라의 고유 신앙과 결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삼한(마한·변한·진한) 통일의 꿈을 그리는 밑바탕으로 활용됐다. 도교는 신라 화랑들의 심신을 연마하는 이론적 뒷받침이 되어 주었다. 그 과정에서 언제나 주(主)는 신라의 전통 사상이었고 유교 등의 전래 문화는 보조가 되었다. 그래서 신라의 정치체제와 가족제도, 그리고 문화는 다른 유교 수입국들과 달리 진한(辰韓: 고조선의 한 갈래이자 신라가 유래한 나라)의 고유한 정신을 지켜 갈 수 있었다.     

      


| 신라 가족문화의 원리 |

그렇다면 신라의 가족문화와 남녀를 보는 시각은 어떠했을까? 

그 시대 국가들이 모두 그러했듯, 신라 역시 지배층의 가문과 혈통을 중시한 봉건국가였다. 더 나아가 신라는 골품과 혈통을 유난히 중시하던 나라였다. 골품 계급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옷 색깔, 집 크기, 신발, 장신구의 종류까지 정해져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신라에는 의외의 오픈마인드가 있었다. 

보통 유교 국가의 계승 원칙은 부계 중심, 장남 중심이다. 장남이 없으면 양자를 들여서라도 장남이란 명분을 지키려는 게 유교다. 하지만 신라는 부계와 모계를 모두 중시하였다. 때문에 아들과 딸, 친손과 외손, 친형제와 처남·매부, 사위와 며느리끼리는 비슷한 무게감을 갖고 있었다. 유교에서라면 딸보단 아들, 외손보단 친손, 처남·매부보단 친형제, 며느리보다는 사위가 더 높은 무게감을 가졌을 터이지만 말이다. 게다가 신라는 혈연보다는 덕과 능력에 더 가중치를 두었다. 따라서 그들 중 누가 왕위를 잇고 가문을 이끌 것인가는 현재 왕과의 실질적인 관계와 본인의 덕과 능력에 달려 있었다. 즉, 왕과 같은 성씨의 조카보다는 차라리 덕 있는 사위를 가깝게 여겼고, 친손보다 외손의 능력이 출중하다면 외손을 선택했다. 왜냐하면 유교식 종법처럼 아버지 쪽 혈연 촌수만으로 자손의 친소(親疏)를 정하고 차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라는 성씨를 사용하는 방식도 고유한 독특함이 있었다. 부계 혈통을 구별하는 성씨는 필요에 따라 어머니의 성을 쓰거나 새로 만들어 쓸 수 있었다. 또한 성씨처럼 모계 혈통을 구분하는 독특한 전통이 있었는데, 모계로만 전해지는 혈통 구분은 부계 성씨와 달리 한번 정해지면 바꿀 수 없었다. 그래서 같은 형제라도 어머니가 다르면 모계 혈통도 달라졌다. 고대에 어머니의 계통을 성(姓)으로 구분하고, 아버지의 계통을 씨(氏)로 구분하던 것과 유사했다. 즉, 어머니의 혈통 역시 매우 중시됐기에 왕실의 혼사, 화랑의 계파와 관직 등에서 모계 혈통은 파를 나누는 중요한 기준점이 되었다. 

이처럼 모계 혈통도 부계 성씨처럼 신분과 소속을 가르는 중요한 요소였기에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되지 않았다. 아버지만큼 어머니도 중요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라의 왕위 계승은 장남, 남성 등의 조건보다 더 넓은 범위에서 덕과 능력이 있는 인재를 찾아볼 수 있었다. 왕의 장남이 너무 어리면 능력 있는 숙부·사촌·조카가 왕이 됐고, 장녀가 능력이 있으면 스스로 여왕이 되거나 남편(왕의 사위)에게 왕위를 넘기기도 했다. 실제로 신라에는 어머니와 처의 혈통을 매개로 왕이 된 사위왕이 많다. 

심지어 남해왕은 자신의 장남과 외국인 사위 석탈해 가운데 아들과 사위를 구분하지 말고 나이와 현명함을 따져서 왕위에 올리라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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