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KBS 전국노래자랑이 열린다는 장평교 아래 둔치로 내려갔다. 거의 2킬로미터를 걷는 동안 아내는 아프단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제는 경희대 병원에서 치료받았고 어제는 집 앞 한의원에서 침을 맞았다. 수술했던 목 언저리에는 아직도 칼자국이 선명했다. 머리, 귀, 눈, 목, 허리, 엉덩이, 무릎, 손가락 마디까지 어디 성한 곳이 없었다. 잠자다가 다리에 쥐가 나서 법석을 떨기도 했고 발바닥에 염증이 생겨 절룩거릴 때도 있었다.
그러나 전국노래자랑 녹화 현장이 풍기는 매력은 외면하기 어려웠다. 토요일 오후, 중랑천 체육공원은 인파로 넘쳐났다. 누가 우리나라를 인구 감소국이라고 했던가. 무대 앞 객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은 줄잡아 이천 명은 넘어 보였다. 체육공원 옆을 지나는 자전거 도로는 막힌 지 오래였고 도로 옆 장미밭에까지 사람들이 오르내렸다.
구청에서 임시로 고용한 공원 지킴이들이 악다구니를 쳤다.
“내려와요. 장미 다 망가지잖아요. 저기 저 아줌마! 왜 말을 안 들어요!”
“왜 나만 갖고 그래. 내가 장미 밟는 거 봤어? 아줌마? 그래. 아줌마다! 어쩔래.”
스피커에서 터져 나오는 노랫소리가 갖은 잡소리에 섞여 묘한 화음을 만들어 냈다. 우리는 자전거 도로 가장자리 쪽으로 바싹 붙어 섰다. 겹겹이 늘어선 사람들의 뒤통수 사이로 남희석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앞에 선 남자의 머릿결에서 찌든 땀 냄새가 우러났다.
“작네. 남희석 얼굴 조막만 하네.”
아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멀어서 그래. 멀면 다 괜찮아 보여.”
“초청가수로 김양도 나온다지?”
“아니, 미스김이 나온대.”
“김양이 미스김 아냐?”
“아냐. 김양은 나이가 좀 들었어. 장윤정이하고 같은 또래라지? 마흔 서넛은 됐을걸. 미스김은 어려. 스물둘인가 셋인가 그래.”
“김 양을 미스 김! 하고 부를 때도 있잖아? 그래서 나는 같은 사람인 줄 알았어.”
요즘 트로트가 대세라는데 아내는 물정 모르는 소리만 연발했다.
한 여자 출연자가 바이올린을 켜면서 노래를 불렀다. 그 후로 대여섯 명의 출연자들이 무대를 오르내렸다. 모두 숫기 좋고 진솔한 서민들이었다. 그래서 낯설지 않았고 마음 편히 웃을 수 있었다.
“무릎 아파......”
앞사람 뒤통수에 대고 아내가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그만 가자.”
“왼발을 움직일 수가 없어. 이상해. 마비가 온 것 같아.”
덜컥 겁이 났다. 행사장 옆에 대기하고 있는 구급차가 눈에 띄었다. 당장 업고 뛸만한 거리였다. 나는 허리를 숙이고 아내의 왼쪽 다리를 슬그머니 들어 올렸다. 내가 허리를 숙이는 바람에 뒷사람 두셋이 연거푸 밀려났다. 조심스럽게 다리가 올려졌다. 아내가 겁먹은 얼굴로 나를 내려다 봤다. 아내의 신발 바닥이 언뜻 눈에 띄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아내의 신발 바닥엔 갓 뱉은 손바닥 반만한 껌딱지가 힘껏 들러붙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