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핸디캡
그가 육손이란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졸업식장에서였다. 놀라움보다는 은연중 배신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하긴 그는 항상 왼손을 바지 주머니 근처에 붙이고 다녔다. 아마 왼손 엄지손가락 옆에 하나 더 달린 손가락을 바지 주머니에 끼고 다녔을 것이다.
그가 3년 내내 공부에만 매달렸던 이유, 유달리 체육을 싫어했고 남들 앞에 나서는 걸 극도로 두려워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으리라. 휴식 시간이나 중식 시간에도 그는 책상 앞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거나 뭔가를 부지런히 끄적거리곤 했었다. 공부 벌레, 책벌레였던 그는 졸업식장에서 교육감상을 받았다. 가장 영예로운 상이었다. 단상에 올라가 상장을 받는 그의 왼손가락은 틀림없이 여섯 개였다.
그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곧바로 국가 공무원이 되었다. 통계청 산하 지역 통계사무소에서 30년 넘게 근무했다. 시청 문화정책과에 있던 나는 가끔 그와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는 여전히 혼자 있길 좋아했고 남들 앞에 나서길 두려워했다. 친구도 없었다. 가끔 억지로 끌려 나와 술 한잔할 때도 있었지만 고작 열적은 대화나 몇 마디 나눌 정도였다. 고루하고 고지식해서 거짓말도 참말로 알아듣기 일쑤였다. 그런 그를 놀려먹는 재미도 쏠쏠했다.
“야. 너 그런 통계는 안 잡니? 서울시민이 천만 명이면 그중에 변비 걸린 사람 100만 명이라 치자. 나머지 9백만 명이 아침마다 똥을 눌 텐데 그렇다면 9백만 덩이? 한 사람 똥의 평균 무게가 400g에서 500g이라는데 그냥 400g씩 잡고 거기에 900만을 곱하면, 3,600톤. 와. 그게 다 어디로 가냐?”
웃자고 한 소리에도 그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렇게 1년에 한두 번, 3년에 한두 번씩 만나다가 퇴직 후에는 아예 소식이 끊겨버렸다.
그의 소식을 듣게 된 것은 동창회 모임에서였다. 놀랍게도 동창들 대부분이 그가 육손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그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친구들도 많았다. 그가 정년 후에 고향으로 내려갔다는 소식만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서울살이를 청산하고 고향으로 내려오자마자 나는 그의 거처를 수소문했다. 군지(郡誌) 발간위원으로 위촉된 나는 현장 답사를 나가는 길에 그의 거처를 찾았다. 해발 400미터쯤 되는 산 중턱에서 그는 혼자 살고 있었다. 촌(村)도 아닌 강촌, 강촌에서도 두메나 산골, 억새 숲에 둘러싸인 오두막이 그의 거처였다.
암벽 아래에 붙여 지은 너와 지붕 단칸방이었다. 텃밭에서 자라고 있는 가을배추가 건강해 보였다. 울타리 삼아 심어 놓은 작은 바위들 주변으론 억새들이 무리 지어 흔들렸다.
그는 나를 반갑게 맞이했다. 깊게 패인 주름살 밖으로 하얀 이가 드러났다.
“여길 다 찾아오다니 뜻밖일세.”
두툼한 손바닥이 오래된 농사꾼같이 느껴졌다. 잡은 손을 풀고 나서 나는 무심코 그의 왼손을 내려다봤다. 삽자루를 잡고 있던 그의 손가락은 틀림없이 여섯 개였다.
“너, 손가락 수술…… 안 했었나?”
전혀 뜻하지 않은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무안해진 내가 시선을 얼버무리고 있을 때 그가 껄껄 웃었다.
“그렇지 않아도 고민 많이 했었지. 처음엔 당장 도려내고 싶었어. 그런데 나이가 들면서 마음을 바꿔 먹었지. 상처나 질환이 아니라면 그냥 놔두자…. 내 인생에 깊이 관여한 그 손가락에 대한 연민이랄까? 뭐 그런 게 좀 있었다네.”
내가 그의 이름을 인터넷 뉴스에서 보게 된 건 그다음 해 1월 1일이었다. 중앙지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 소감에서 그가 했던 말 때문에 나는 가끔 부끄러워질 때가 있다.
“나는 내 손가락에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