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끼(3)

by 고캣

시계를 가지고 있지 않아 정확한 시간을 알 수 없었지만 한참을 걸었다. 나무와 풀만이 있는 비슷한 풍경이 반복되었다. 슬슬 뒤를 돌아서 숙소로 돌아갈까 싶었다. 그러다 시야의 끝에서 숲이 끝나는 지점이 보였다. 그 작은 부분이 점점 커지더니 넓은 들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들판 가운데에는 엄청나게 거대한 나무가 보였다. 홀린 듯이 나무로 걸어간 나는 가까이 갈수록 나무의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잠시 고민하다가 예전에 비슷한 느낌을 받은 장소가 떠올랐다. 그건 아빠와 함께 서울에 있는 전망대에 갔을 때였다. 그 전망대는 이 나무처럼 거대하고 높은 빌딩의 옥상에 있었는데 그곳에 올라가니 모든 것이 작아 보여서 내가 거인이 된 기분이었다. 이렇게 큰 나무가 있었다면 멀리서도 보였을 텐데 아무도 보지 못했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분명 아저씨들이 알았더라면 나에게도 자랑하듯이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


나무는 어둠 속에서 달빛을 맞으며 우뚝 서 있었다. 나무에 손을 올려봤다. 손끝으로 나무의 거친 껍데기가 느껴졌다. 나는 여전히 손을 올린 채로 나무의 둘레를 따라 걸었다. 걷다 보니 나무 한쪽에 구멍이 있었다. 나무에 비하 면 너무나도 작았지만 사람 한 명이 들어가기에는 충분한 크기의 구멍이었다. 원래 사람이 다니는 것처럼 구멍의 테두리 부분만 매끈하게 다듬어져 있었다. 그 안에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졌다. 왠지 엄청난 게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그 해답은 안에 들어가면 알게 될 것이다. 어쩌면 여태 궁금했던 것들을 모두 알게 될 수도 있었다. 나는 몸을 구멍에 넣으며 나무의 안쪽으로 향했다.


좁았던 구멍은 조금씩 커져서 들어가는 것이 점점 편해졌다. 그렇게 넓어진 통로를 걷다 보니 커다란 방이 보였다. 너무나 익숙한 광경이었다. 푹신해 보이는 소파와 깔끔한 탁자가 보였고, 텔레비전과 게임기가 나란히 그 앞에 있었다. 한쪽 구석에는 퀸사이즈 정도 되는 침대에 베개와 여러 인형들이 있었고, 다른 구석에는 내 키보다 조금 작은 냉장고가 있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각종 하얀색 포장용기가 가득 차 있기도 했고 다른 곳에는 각종 음료수나 술로 가득했다. 나는 정갈하게 채워진 포장용기를 하나 꺼내어 봤다. 뚜껑을 열어보니 안에는 김치찌개가 있었다. 삼겹살이 듬뿍 들어있고 진한 빨간색 고추기름도 위에 떠있는 아주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김치찌개였다. 이상한 점은 방금 냉장고에서 꺼냈는데도 먹기 좋을 정도로 따듯했다. 다른 포장용기도 열었을 때는 김이 폴폴 나는 공깃밥이 들어있었다. 나는 입안에 침이 고이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입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때 갑자기 텔레비전이 켜졌다. 내가 평소에 챙겨보던 예능이 하고 있었다. 나는 순간 멈칫했지만 이미 방 전체에 퍼져버린 김치찌개의 냄새에 이성을 잃어버리기 직전이었다. 소파 앞 식탁에는 나에게 손짓하듯 수저가 정갈하게 놓여있었다. 내 몸은 이미 입력이 되어 움직이는 로봇처럼 김치찌개와 공깃밥을 들고 식탁에 앉았다. 텔레비전에서는 이미 예능 속 연예인들이 깔깔대며 떠들고 있었다. 나는 젓가락으로 김치와 삼겹살을 들어 공깃밥에 얹었다. 천천히, 가능한 천천히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 첫 입이 이 식사 중에 유일하게 기억하는 순간이었다.


맛있게 먹고 나니 졸음이 찾아왔다. 새벽 중에 나왔으니 어쩌면 당연할지도 몰랐다. 한편으로는 이곳의 주인이 나에게 화를 내면 어쩌지 싶었지만 그것보다 무거운 눈꺼풀이 걱정을 눌러버렸다. 나는 원래 그랬던 것처럼 구석에 있는 침대로 향해 누웠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푹신함과 포근함이었다. 그대로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온몸이 개운했다. 오랜만에 든든하게 먹고 잠도 푹 잤다. 아직 이곳의 주인도 돌아오지 않은 듯했다. 나는 이제 이곳의 주인이 된 듯 자연스럽게 냉장고에서 콜라를 하나 꺼내 마셨다.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다가 텔레비전 옆에 있는 최신형 게임기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예전에 사서 아직 하지 못한 게임팩이 옆에 같이 있었다. 나는 침을 삼켰다. 아주 잠시, 아주 잠시만,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만 해보자고. 만약에 나에게 불같이 화를 내도 돈을 주면 해결되겠지 싶었다. 그만큼 열심히 나무를 팼으니 화를 풀게 해 줄 돈은 충분히 벌었을 것이다. 나는 소파에 앉아 게임기를 켰다. 자동으로 텔레비전에 게임 화면이 떴다. 나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게임을 했다. 중간에 입이 심심해서 냉장고에서 감자튀김과 사이다를 꺼내먹었다. 그리고 다음으로는 닭꼬치와 맥주를 먹었다. 그렇게 먹고 마시면서 게임을 클리어했다. 빠르게 스토리만 본 것임에도 너무 만족스러웠다. 이제 먹었던 것을 치우려고 식탁을 바라봤을 때,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먹었던 감자튀김과 닭꼬치가 담겨있던 포장용기도, 들고 마셨던 캔과 플라스틱 병도 없었다. 생각해 보니 어제 김치찌개를 먹고 정리를 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식탁 위는 아무것도 없이 깨끗한 상태였다.


갑자기 온몸에 불안이 느껴졌다. 이미 주인이 갔다 온 것일까. 하지만 자기 집에서 자신의 밥을 먹고 자신의 침대에 누워있는 사람을 그러려니 하며 넘어갈 집주인이 존재할리가 없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내가 들어왔던 통로로 향했다. 진작에 돌아갔어야 했다. 나중에 신고를 당하더라도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들어올 때와 같은 통로를 걸었다. 점점 좁아지는 통로도 같았다. 그러나 하나 다른 점이 있었다. 그 끝에 내가 들어온 구멍은 없었다. 막혀있는 나무 벽을 두드렸다. 턱턱. 가벽을 설치한 것 같지는 않았다. 콘크리트 벽처럼 단단하고 꽉 차있는 듯한 벽이었다. 내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냥 뒤를 돌아 다시 돌아가야만 했다.


다시 통로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방은 여전히 아늑하고 편안한 공간이었다. 치즈로 유인당해 쥐덫에 잡힌 쥐의 기분은 이런 걸까. 나는 주위를 둘러봤다. 쥐덫치고는 꽤 쾌적한 공간이었다. 내가 사라진 걸 알 면 아저씨들이 찾으러 올 것이고, 그동안 여기서 지내면서 버티면 된다고 생각했다. 이곳에는 물도 음식도 충분했고, 따뜻한 침대와 이불도 있었다. 그러니 사람들이 나를 찾으러 올 때까지 쉬면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마음이 편했다. 분명 나를 찾고 있을 거라고. 그렇게 믿고 싶었다.


+4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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