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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남이월 Nov 07. 2024

채식주의자가 폭력적이라는 폭력

고등학생이 본 채식주의자 유해 도서 논란


 “코리아” “한강”

 2024년 10월 10일 오후 8시, 스웨덴 한림원 공식 유튜브로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를 지켜보던 이들은 모두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채식주의자], [소년이 온다] 등의 작품을 집필한 대한민국의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수상했기 때문이다.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깜짝 수상이었기에, 그리고 그 수상자가 지금껏 작품을 통해 우리 사회의 다양한 폭력에 대해 저항해온 한강 작가였기에 그 의미는 더 남달랐다고 할 수 있다.

 수상 발표와 동시에 전국의 서점과 인쇄소는 단군 이래 유례가 없는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단 1주일만에 100만부가 팔리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나 이런 국가적 경사가 무색하게도, 일각에서는 이러한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었다. 어느 작가의 “역사왜곡” 발언을 시작으로 몇몇 보수 단체는 5.18 광주민주화 운동을 다룬 한강의 작품 [소년이 온다]가 심각한 역사 왜곡을 하고 있다며 이러한 작품을 쓴 작가에게 노벨문학상을 준 한림원을 규탄하고 나섰다.

 이런 논란과 논쟁의 화룡점정은 한강 작가의 대표작인 [채식주의자]의 전국 학교 도서관 비치에 대한 일부 학부모 단체의 반발이었다.

 [채식주의자]는 노벨문학상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언급되는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받은 작품으로 한강이라는 이름을 해외에 알린 작품이기도 하다.

 [채식주의자]는 3개의 연작으로 구성된 연작 소설집으로 어떤 꿈을 꾼 뒤 채식주의자가 된 여성 “영혜”를 그녀의 남편, 형부, 언니의 시점에서 보여주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이 3개의 연작 중 학부모 단체가 가장 큰 문제를 제기한 연작은 형부의 시점인 두번째 연작, [몽고반점]이다.

 학부모 단체의 주된 주장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책이 너무 자극적이라는 것이다. 형부와 처제가 나체의 모습으로 서로의 몸에 그림을 그리고 성관계를 하는 모습을 적나라하게 묘사한 것은 물론 자해, 자살 묘사등 소설에 나온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묘사를 문제삼으며 “이렇게 유해한 책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의 책이라는 이유만으로 전국 학교의 도서관에 비치하려는 시도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다”고 밝혔다.


 우선 필자는 해당 주장을 펼친 학부모 단체에 대해 매우 비판적임을 밝힌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가장 먼저, 현재 이런 주장을 펼친 학부모 단체는 [채식주의자]를 읽고 과연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해봤는지 묻고 싶다. 한림원이 밝힌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선정 이유에서도 알 수 있듯, 한강의 작품은 “역사적 트라우마”, 크게 보자면 “폭력”에 저항하는 메시지를 담고있다.

 “폭력”의 형태는 매우 다양하다. 전쟁, 쿠데타, 분쟁 등 눈에 보이는 폭력부터 차별, 편견, 사회구조의 불합리함 등 눈에 보이지 않는 폭력까지 폭력은 세계 곳곳에서 모두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소설 [채식주의자]는 그중에서도 우리 사회의 보이지 않는 폭력에 대해 다루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주인공 “영혜”가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소설 속 인물들이 보이는 반응에서 구조적인 폭력을 볼 수 있다. 그 외에도 가부장적인 장인의 모습 등도 소설에서 보여주고 비판하는 폭력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폭력은 인류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문제이다. 보이든 보이지 않든 폭력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사회적 구조에 의해, 정치 지도자에 의해, 개인과 개인의 문제에 의해 반복되어왔다. 그리고 소설 [채식주의자]는 이러한 문제 중에서도 사회 구조에 의해 발생하는 보이지 않는 폭력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러나 논란의 학부모 단체는 이러한 사실들은 무시한채 단지 책의 묘사가 외설적이고 자극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채식주의자]를 유해 매체로 지정해야한다는 주장을 내세운다. 다시 말해, 글을 쓰기 위해 외설적인 묘사를 쓴 것이 아닌 외설적인 묘사를 위해 글을 썼다는 식의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소설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주장이다.

 그와 동시에 사회적 우위에 있는 학부모들이 자신들의 잣대를 통해 자신들이 설립한 기준을 이유로 들어 청소년들의 권리를 제한하려는 시도야 말로 한강 작가가 [채식주의자]를 통해 가장 비판하고 싶었던 폭력의 한 양상일 것이다.


 국가는 국가의 미래인 청소년들이 올바르게 성장하고 건전한 가치관을 가지도록 교육해야할 의무가 있다. [채식주의자]가 외설적이라는 “어른들의 판단”으로 청소년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그들이 원하는 것만, 그들이 허락하는 것만을 보여준다면 그것은 과연 올바른 교육일까? 아니면 또다른 편견과 고정관념을 생산해내고 지난 세대의 폭력을 반복하는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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