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생이 본 편견의 기원
나는 고등학생이다. 정확히는 올해 고등학교 3학년이 된다. 고등학생 노릇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다. 내가 다니는 학교는 남자 고등학교, 흔히 말하는 남고이다. 그리고 내가 이곳에서 종종 느끼는 감정은 나는 보통의 내 또래 남자아이들과는 생각이 다른 부분이 여럿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고 싶은 "다름"은 누가 옳고 그르다는 것의 문제는 아니다. 다르다는 말이 내포하는 의미 그대로 학교 친구들의 생각에서 이질감을 느낄 때가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들이 하는 말, 그리고 그 말에서 드러나는 그들의 생각들. 그중 꽤 많은 말들이 나를 참을 수 없는 불쾌감에 빠지도록 만든다. 그러다 보면 무의미한 논쟁을 반복하게 되기도 하고 나도 그들에 대해, 그리고 그들도 나에 대해 어떠한 편견을 가지게 되기도 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 나 역시 편견이라는 말 자체를 굉장한 공격으로 받아들인다. 고지식한 사람 같고,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고, 이해심 없는 사람으로 보이는 것에 대한 스트레스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스스로 누군가에 대해 섣불리 편견을 가지는 것에 대해 경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누군가의 단면만을 보고 너무 쉽게 편견을 가져버리고는 한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자각할 때마다 생각을 고쳐먹으려 하지만 쉽지 않은 것 또한 사실이다.
이 글은 제목 그대로 편견과 이질감에 대한 글이다. 더 정확히는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마주한 다양한 편견, 그리고 거기서 내가 느낀 이질감을 다루는 글이다.
서론에서 약간 뜬금없는 자아성찰을 한 까닭은 이 글에서 내가 편견이라고 하며 반박하고 비판할 지점이 누군가에게는 나를 편견이 가득한 사람으로 보이도록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긴 하다만 변명이라면 변명, 합리화라면 합리화인 저 말이 이 글의 서론에는 꼭 필요해 보였다.
글을 쓰는 내내 편견이라는 보이지는 않는 힘에게 떠밀려가지 않기 위해서라도.
1. 나는 절대 소수가 되지 않을 거라는 믿음
고등학교의 성적은 상대평가이다. 내가 99.9점을 받아도 옆 친구가 100점을 받으면 나의 성적은 한 단계 떨어지는 것이다(물론 약간의 과장은 있다).
그러다 보니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과 상대적으로 성적이 떨어지는 아이들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다. 대놓고 무시하는 경우는 잘 없지만 성적이 좋은 아이들이 특권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자주 볼 수 있다.
자신들이 이룬 성취가 온전히 자신의 능력과 노력에 의해 얻어진 것이라는 믿음. 흔히 말하는 능력주의(엘리트주의)의 함정이다.
그리고 이러한 잘못된 믿음은 곧 자신들은 이 사회에서 언제나 강자이고 다수일 것이라는 허황된 생각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언제라도 약자, 그리고 소수자로 전락될 수 있다는 사실을, 그리고 현재도 그렇다는 사실을 모른 채.
그러나 이런 믿음과 생각이 문제인 이유는 따로 있다. 상대적으로 소수 거나 약자인 사람들 대한 이해와 존중이 필요한 이유조차 모르게 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자신은 절대 소수자가 되지 않을 거라는 믿음 탓에 그들에 대한 이해와 존중, 배려를 배제한다. 그리고 그들이 소수자이고 약자인 이유를 모두 그들의 탓으로 돌려버린다.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없는 불가피하고 불가항력적인 요소들까지도 그들의 노력과 능력 부족으로 치부한다.
심지어는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들을 능력도 없고 노력도 안 하는 "열등한 유전자"라 분류하고 없애버려야 한다는 식의 우생학에 근거한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가령 기초생활수급자들에 대해 얘기하며 지금 당장 생활비가 필요한 상황에서 어떤 일이라도 구하면 바로 지원이 끊기는 등의 이유로 일을 구하지 못하는 현실은 모르는 채 일도 안 하고 나랏돈을 빼먹는 도둑으로 전락시킨다.
비슷한 원리로, 성소수자들의 권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면 생물학적으로 남성 여성만 있다느니, 진화론적으로 잘못 됐다느니 하는 검증되지 않은 유사 과학을 근거로 내밀며 이상한 생각을 하는 정신병자들로 만든다.
특히 이 말에는 성소수자들에 대한 편견뿐만이 아니라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편견까지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처럼 고등학교에서부터 시작된 믿음으로 인해 발생한 편견과 차별은 걷어내는 것이 쉽지 않다. 자신이 이뤄낸 성취가 온전히 자신만이 잘해서 이룬 게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시킬 필요가 있다. 보호자와의 관계나 친구 관계를 비롯한 주변 환경 등의 도움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게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보다 더욱 중요한 건, 설령 정말 온전히 자신이 이루어낸 성과라 하더라도 자신은 소수자가 될 일이 없고 그렇기에 그들을 존중할 필요가 없다는 잘못된 생각이 생기기 전에 지속적이고 유의미한 교육을 통해 그 싹을 잘라내야 한다.
2. 이해와 타협의 변질
지난 제21대 대선에서 가장 주요했던 관심사 중 하나는 젊은 남성들을 중심으로 한 반페미니즘 기류였다. 많은 2030 남성들이 그랬듯 10대 남성들이 모인 우리 학교 역시 비슷한 흐름을 가지고 있다.
솔직히 말해 21대 대선 즈음에는 나도 그들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나, 이제는 아예 반대에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다. 조금 더 정확히는 양쪽 모두 서로를 이해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 상황에서 논쟁에 참여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느꼈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상당히 많은 아이들이 반페미니즘 기조에 동참하고 있고 그들의 말이 대게 편향되었으며 옳지 않다고 자주 느낀다.
하지만 그러한 생각이 다수인 곳에서 생활하다 보면 그게 정말 사실인 게 아닐까 하는 "다수의 망령"이 스멀스멀 나를 향해 온다.
다수의 힘을 다시 한번 체감하게 되는 순간이다.
그와 동시에 어느 순간부터 우리가 알던 이해의 의미가 변질되었다고 느꼈다.
이해 5 理解
• 1.
명사 사리를 분별하여 해석함.
• 2.
명사 깨달아 앎. 또는 잘 알아서 받아들임.
• 3.
명사 남의 사정을 잘 헤아려 너그러이 받아들임.
네이버 사전에 이해를 검색한 결과다. 이중 가장 변질되고 사실상 없어졌다고도 생각되는 의미는 3번이다. 이는 앞에서 말한 소수자에 대한 편견과도 이어진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타인의 고통과 상황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그게 상대와의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에도.
아까의 젠더 갈등으로 돌아와 보자. 젠더 갈등이 일어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크게 보면 하나다. 여성과 남성 모두 상대방은 피해를 보지 않고 자신이 입은 피해에만 매몰되어 있다.
물론 특정 한쪽이 더 피해를 보고 했다는 주장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서로가 이해를 해주지 않으면 이 싸움은 무의미한 파괴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이해 역시 상당히 높은 수준의 이해가 아니다.
그저 상대방이 하는 말에 대해 "그럴 수 있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하고 한 발짝 물러나주면 된다.
그러나 그 한 발짝이 어려워 우리는 여전히 갈등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3. 다름을 느끼고 다르게 바꾸는 것
세상을 바꾸는 가치는 아닌 것에 대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용기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나는 그 정도로 용기가 뛰어난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는 와중에도 내가 가진 기준에서 잘못된 것에 대한 문제의식은 제기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수단 중 하나로 이 글을 작성하게 되었다.
각자 갈 길 바쁜 사회지만 타인을 한 번이라도 돌아보는 습관을 가져보는 게 어떨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