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 아래 폭력을 미화하는 미디어
낭만이라는 말이 흔하게 들리는 요즘이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에 대한 의식 수준이 성장함에 따라 많은 이들이 자신만의 낭만과 로망을 찾아 떠나는, 그야말로 개개인의 생각과 가치가 하나의 사상이 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러한 시대가 찾아온 데에는 미디어의 발달이 매우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자유롭고 자신이 원하는 인생을 즐기는 개인들이 주체적인 미디어가 되기를 자처하며 SNS를 통해 타인들 또한 그러한 삶을 살도록 자극하였기 때문이다.
1981년 일본의 신주쿠역에서 열린 아니메 신세기 선언 대회에 등장한 만화가 나가노 마모루는 일본의 전후 청년 세대를 취미가 사상인 신인류로 선언했다. 그 이후 대중매체의 발전과 뉴미디어의 등장은 현 시대의 인간을 낭만이 사상인 또다른 신인류로 발전시켰다.
자신 나름의 낭만을 위해 여행을 떠나고,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에 따라 SNS를 중심으로 뉴미디어부터 TV 같은 전통적인 매체까지 다양한 미디어들이 현 세대가 가진 보편적인 낭만에 대해 다루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낭만이 언제나 옳거나 좋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누군가의 아픔을 건드리고 묻어두었던 상처를 다시 헤집는 일도 있다. 폭력까지도 낭만이 되어버리는 시대가 온 것이다.
8, 90년대 야구장, 낭만으로 포장된 무질서와 혼돈
최근 국내 프로야구(KBO)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며 관련 컨텐츠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OTT와 TV 방송에서는 야구를 소재로 한 다양한 방송을 제작하고 있고 많은 연예인들이 야구팬임을 밝히며 야구장 시구, 공연 등을 통해 자신을 홍보하기도 한다.
이에 따라 최근 유튜브, 인스타와 같은 영상 매체에서는 과거 8, 90년대에서 2000년대 초반까지의 야구장 모습들을 담은 영상을 쉽게 볼 수 있다.
현재만큼 시민 의식이 성장하지 못했던 시기인 탓에 술에 취한 관중들이 오물을 경기장으로 던지고 선수와 말싸움을 하며 심한 경우에는 경기장에 난입하는 장면 또한 왕왕 있었다. 댓글의 대부분은 그 영상을 보며 웃거나 저때 야구장이 지금보다 훨씬 낭만 있다는 내용들이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그 당시 야구장 관중들이 보여준 행태들은 낭만이라기 보다는 무질서와 혼돈에 가깝다. 이에 더해 경기 결과에 분개한 팬들이 선수단 버스에 불을 지르고 관중들이 난입하여 패싸움을 벌이는 사건까지 일어나고는 했다.
아무리 시민 의식이 성장하지 못했을 때라고 하더라도 이는 명백한 폭력이자 무질서이며 이를 낭만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며 당시를 미화하고 심지어 동경하기까지 하는 글에 많은 이들이 공감한다면 이는 가벼이 여길 사항이 아니다.
폭력에 대한 다수의 적극적인 동의가 없더라도 폭력에 맞서 적극적으로 저항하거나 반대하는 사람이 없고, 소극적인 동의라도 보내는 사람이 있다면 이는 폭력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히틀러 치하의 나치 독일 국민들이 홀로코스트에 대한 소극적 동의가 있었고 적극적 저항이 부재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처럼 적극적인 저항이 없다면 폭력은 언제 어디서든지 고개를 내밀 수 있다.
계집신조, 남성성의 위기에 대한 삐뚤어진 대응
얼마 전 뉴스에서 “계집신조”라는 것이 소개되어 한동안 인터넷을 떠들썩하게 만든 적이 있다. 계집신조는 군대의 복무신조를 차용하여 만든 여성혐오 밈으로 여성에게 과거의 폐단인 가부장적 가치를 지킬 것을 강요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본래는 일간베스트, 에펨코리아를 비롯한 남초 성향 커뮤니티에서 조금씩 공유되던 것이 SNS를 타고 남학생들 사이에서도 유행을 타며 사회 문제가 되고 있다.
한국에서 젠더 이슈가 도마 위에 오른 건 하루이틀 일이 아니다. 2018년 즈음을 기점으로 소위 말하는 사이버 렉카 유튜버들을 중심으로 한국 페미니즘에 대한 공격이 시작되었고 이에 대한 대응과 공격이 점차 격해지면서 현재의 상황까지 오게 되었다.
계집신조 역시 이러한 젠더 갈등의 맥락에서 탄생한 여성혐오 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단편적인 정보들만으로는 부족하다.
약 600만년 전 아프리카 지역에서 최초의 인류가 탄생한 이후 선사시대를 거쳐 역사의 오랜 세월 동안 인류의 역사는 남성의 역사였다. 역사의 중심에 서 있는 인물들은 언제나 남성이었고 여성들은 잠깐 등장하고 마는, 엑스트라와도 같은 존재들이었다.
그런 오랜 역사는 현재까지도 유리천장, 불합리한 육아 휴직 문제, 경단녀 등 다양한 이름으로 바뀌어 불리며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그나마 최근 들어 여성 인권 신장에 대한 목소리가 사회에 하나의 공감대로서 작동하기 시작하고 있고 여성들의 사회 진출 또한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수준으로 활발해지고 있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여성들의 사회 진출이 기존에 기득권을 차지하고 있던 남성들에게 큰 위협이 될 거라고 생각한 몇몇 이들이 몇가지 사실관계들을 교묘하게 비틀어 여성 인권 신장을 위한 운동을 폄훼하고 나아가 여성 자체를 공격하며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오랫동안 지켜온 기득권 자리에 대한 위기 의식, 바꿔 말하자면 남성성에 대한 위기 의식인 것이다.
계집신조 또한 남성들의 이러한 위기 의식을 타고 만들어진 밈이다. 겉으로는 군대에서 사용하는 복무신조의 포멧을 그대로 따라가고, 유머스럽게 포장하였지만 결국 그 인식의 기원이 여성의 사회 진출을 반대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젊은 남성들이 과거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당연했던 시대를 낭만화하며 이를 그리워하는 식의 농담들을 생산해낸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된다. 이는 한 개인에게 특정한 집단에 속해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에게 결코 정당화 될 수 없는 폭력을 가해도 된다는 인식이 생기는 것과 다름없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이 다수를 지배하게 되면 그것의 결과는 볼 것도 없이 폭력이며 폭력의 결과는 언제나 인권 유린과 인간성의 상실이었다.
세상에 낭만이라는 말만큼 팔자 좋은 말은 없는 것 같다. 어떤 일이든 낭만이라는 말을 붙이면 왠지 모르게 감성적이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시절에 대한 향수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단어 만큼 사용을 조심해야 한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낭만이 아니라 끔찍한 기억이고 폭력이고 상처일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말 그대로 정말 수많은 정보가 미디어를 통해 쏟아지는 시대이다. 그중에는 우리의 인생을 긍정적인 자극으로 바꿔줄 정보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정보 역시 너무나 많다. 특히 과거에 당연하다는 듯이 행해졌던 사회적 폭력을 낭만과 동경이라는 이름 아래 미화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