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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류진 Feb 12. 2019

09. 삼십 년 인생 첫 주먹밥



아이를 낳고 손에 꼽는 공포스러운 순간이 있으니 그건 소풍, 체험을 가니 점심 도시락을 준비해주세요 라는 문자를 받을 때


눈앞이 캄캄해지고 머릿속이 털린 것 마냥 스트레스가 엄습해온다 어째서 이런 건 원이나 유치원에서 챙기지 않는 걸까 이해하면서도 어쩐지 속에서 열불이 난다 그냥 그날은 결석할까


겁이 났다 인터넷에 검색하는 순간부터 엄마라면 이 정도는 해야죠! 하는 오색찬란 휘황찬란한 캐릭터 도시락부터 온갖 데코가 가득한 도시락들에 압도되었는지도 모른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까 도시락 안을  장식하는 것부터 사야 하는 걸까


아직 김밥은 무리에다 퍽퍽하게 먹으면 힘든 네 살인데 뭘 해야 줘야 하지 괜스레 밖에서 잘 못 먹으면 어떻게 하지 투덜대는 내 마음과 걱정과 내 손맛을 아는 남편이 나서서 '간단하게 하면 되지' 하며

햄을 잘게 썰고 양파, 당근 있는 대로 다져 계란을 지지고 밥을 넣어 볶음밥을 만들고 소시지를 굽고 귤을 잘라 몇 알 넣어 파란 보자기에 싼 것이 아이의 첫 도시락.

직접 고른 캐릭터 음료수를 넣고 일찍 일어난 남편이 아기자기한 도시락을 보자기에 척척 싸면 난 안심한 마음으로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잘 다녀와'


요리 공포증이 있는 나로서는 도시락에도 얄팍한 수법을 썼는데 전 남자 친구의 면회 도시락과 현 남자 친구(지금의 남편)와의 수목원 데이트도 엄마의 손을 빌려 김밥과 유추 초밥, 과일을 곱게 싸 짜란 하고 보여주기를 했던 것이다.


물론 내가 할 일은 즐겁게 먹고 마시고 사진으로 남겨 '우리의 추억'을 싸이월드에 개시하는 일!


아이의 몇 번의 도시락은 아직도 남편이 책임지고 있다, 먹기 좋게 볶음밥이 담긴 옅은 초록색이 들어간 도시락, 아이는 이제 김밥도 잘 먹는 어린이가 되어 메뉴에 욕심을 내기도 한다.
아이는 여섯 살, 나는 서른 초반 삼십 년 인생의 첫 주먹밥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인터넷을 검색해 아주 간단해요 쉬워요 하는 것을 골라 아이와 함께 만들 준비를 한다.

이제야 나는 그 간단하고 초간단 레시피에 소개되는 주먹밥을 만들어보기로 한 것이다

마음은 영화 카모메 식당, 산의 톰 씨에 나오는 고슬밥에 김이 쌓인 오니기리를 그리며 열심히 도망가는 밥알들을 모은다


조물거리는 아이를 보며 이젠 예쁜 도시락에 대한 죄책감은 버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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