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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월 Feb 26. 2016

동주

#빛나던 미완의 청춘,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 윤동주

스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름도, 언어도, 꿈도, 모든 것이 허락되지 않았던 일제강점기. 동갑내기 사촌지간 윤동주와 송몽규는 한 집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시인을 꿈꾸는 청년 동주에게 신념을 위해 거침없이 행동하는 청년 몽규는 가장 가까운 벗이면서도, 넘기 힘든 산처럼 느껴진다. 두 사람은 창씨개명을 강요하는 혼란스러운 나라를 떠나 일본 유학 길에 오른다. 일본으로 건너간 뒤 몽규는 더욱  독립운동에 매진하게 되고, 절망적인 순간에도 시를 쓰며 시대의 비극을 아파하던 동주와의 갈등은 점점 깊어진다. 어둠의 시대, 평생을 함께 한 친구이자 영원한 라이벌이었던 윤동주와 송몽규의 끝나지 않은 이야기가 지금 시작된다.


내겐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 먹먹한 시인, 윤동주. 어릴 적 그의 시를 외우며 시인을 꿈꿨던 시간들이 있었다. 그를 소재로 한 영화 <동주>는 개봉 전부터 내가 가장 기다리던 영화였다. 역사적 인물을 바탕으로 한 영화가 대게 그렇듯 결말이 정해져 있다. 이미 예견된 비극적 결말을 향해 달리는 러닝타임 내내 다가올 끝을 붙잡아두고 싶었다. 끝이 다가오지 않기를.. 영화가 끝나지 않기를.. 그의 마지막을 보고 싶지 않아 조금은 불안해하며 전전긍긍하며 영화를 봤다.


아파하고 고뇌하는 청춘이자 지식인 윤동주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영화, <동주>. 강하늘이란 배우가 윤동주가 아니란 사실이 이상하리만치 그는 일제시대를 살아가는 시인 그 자체였다.

편안히 공부하고 시나 쓰려 한 나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럽습니다.

일제시대를 살아가는 지식인이자 시인이었던 윤동주의 부끄러움과 고뇌가 느껴져 안타깝기도 하고 마음이 아프기도 했으며 나 역시 현재를 살아가는 젊은이로서 부끄러움을 느꼈다. 윤동주를 연기한 강하늘의 '서시'가 나레이션으로 흘러나올 때는 가슴을 치고 싶을 만큼의 답답함 역시도 느꼈다. 지금 우리는 주권을 가졌고 독립된 국가에 살고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모습이 선조들이 물려주고 싶었던 독립된 조국 대한민국의 모습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눈앞에 놓인 쾌락이나 안의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의 미래를 걱정하고 아직까지 해결되지 못한 역사적 문제에 대해 고민하는 젊은 이가 되어야 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란 없다고 했다. 눈앞에 놓인 문제들을 잊고 외면한다면 우리의 미래가 과연 밝을 수 있겠는가.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친 많은 분들의 희생이 독립과 주권국가 대한민국을 우리에게 물려주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후손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 역시도 더 나은 세상을 물려주기 위해 고민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것은 의무는 아니지만 그것이 도리다. 눈 앞에 놓인 내 삶만을 걱정하고 편의만을 쫓고 있는 내 모습에서 나 역시 부끄러움을 느껴야 한다. 부끄러움마저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진정 부끄러운 일이다.  


"세상을 바꾸지 못할 거면 문학이 무슨 소용이니?"

"시도 자기 생각 펼치기에 부족하지 않아..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살아있는 진실을 드러낼 때 문학은 온전하게 힘을 얻는 거고 그 힘이 하나하나 모여서 세상을 바꾸는 거라고!"


행동하는 지식인 송몽규. 그리고 그와는 다른 모습으로 독립을 노래한 윤동주. 세상을 바꾸지 못하는 문학은 소용이 없다고 말하는 송몽규에게 윤동주는 문학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그 마음이 모여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했다. 진취적인 독립운동가의 모습을 보여준 송몽규의 모습 역시 너무나 인상적이었지만 문학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은 윤동주의 시는 가슴을 울렸다. 시간이 흐른 지금, 많은 이들은 윤동주와 그의 시를 기억한다. 그의 시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바꿀 힘을 갖도록 한다. 나는 꼭 눈에 보이는 행동이 아니더라도 문학 역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다. 온 마음으로 나라를 걱정하고 부끄러움을 느끼며 고뇌한 미완의 청춘, 내가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시인 윤동주의 짧지만 뜨거웠던 삶과 그의 시를 이야기하고자 한다.


윤동주
일제강점기에 짧게 살다 간 젊은 시인으로, 어둡고 가난한 생활 속에서 인간의 삶과 고뇌를 사색하고, 일제의 강압에 고통받는 조국의 현실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고민하는 철인이었다. 그의 이러한 사상은 그의 얼마 되지 않는 시 속에 반영되어 있다.  

윤동주는 1917년 만주 북간도의 명동촌(明東村)에서 태어났으며, 기독교인인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1941년에는 서울의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문과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영문학을 전공했다. 학업 도중 귀향하려던 시점에 항일운동을 했다는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1943. 7), 2년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그러나 복역 중 건강이 악화되어 1945년 2월에 29세의 짧은 생을 마치고 말았다. 그의 죽음에 관해서는 옥중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정기적으로 맞은 결과이며, 이는 일제의 생체실험의 일환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29세의 젊은 나이에 타계하고 말았으나, 그의 생은 인생과 조국의 아픔에 고뇌하는 심오한 시인이었다. 그의 시집은 본인이 직접 발간하지 못하고, 그의 사후 동료나 후배들에 의해 간행되었다. 그의 절정기에 쓰인 작품들이 1941년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발간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의 자필 유작 3부와 다른 작품들을 모아 친구 정병욱과 동생 윤일주에 의해 사후에 그의 뜻대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정음사(正音社)에서 출간되었다.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서시인 이 작품은 시집의 전체적인 내용과 윤동주의 생애를 암시하고 상징한다. 존재론적 고뇌를 투명한 서정성으로 이끌어 올림으로써 광복 후 혼란한 시대에 방황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에게 따뜻한 위안과 아름다운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작품의 주제는 현실에서 도피하지 않고 운명과 맞서서 절망을 극복하려는 자기 구원과 사랑이라고 볼 수 있다. 절망의 환경일수록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일 수밖에 없다. 윤동주가 선택한 구원의 방법은 운명에 대한 긍정과 따뜻한 사랑이었다. 진실한 자아 성찰과 통렬한 참회의 과정을 겪으면서 변증법적 자기 극복과 초월의 노력으로 마침내 참된 생명력을 획득하게 된다.


쉽게 씌어진 시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6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우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들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쓰여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6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시를 쓰는 게 문학 속에 숨는 거라고 그랬지. 근데 넌 왜 자꾸 나를 숨게 만들어?" 독립운동에 참여하려는 윤동주(강하늘)를 말리는 송몽규(박정민)에게 그가 한 말이다. 윤동주는 숨지 않았다. 그는 누구보다 용기 있게 세상과 마주했다. 나는 그를 잊지 않을 것이고 영원히 기억될 그의 시는 가슴속 깊이 새겨져 있다. 영화가 끝나면 윤동주와 송몽규의 생에가 엔딩 크레딧에 함께 등장한다.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윤동주가 송몽규를 만나지 않아더라면, 두 사람이 가족이 아니었고 서로 모르는 사이었다면 우리는 완성된 그의 시적 세계를 만날 수 있었을까 하고 말이다. 몹쓸 생각이다. 빛나던 미완의 청춘 윤동주는 아마 그가 그토록 사랑하던 별이 되어 빛나고 있으리라..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다시 보고 싶은, 평생을 자주 찾아볼 영화 "동주"를 적극 추천한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윤동주 [尹東柱]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서시 [序詩]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쉽게 씌어진 시 [─詩]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 자화상 [自畵像]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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