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약 신이었다면 나는 청춘을 인생의 끝에 두었을까?
스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이야기는 복잡하지 않다. 주인공 벤자민 버튼(브래드 피트)은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 말 80세의 외모를 가진채 태어난다. 사랑하는 아내가 벤자민을 낳다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한 분노와 아이의 너무나 평범하지 않은 외모에 경악한 벤자민의 아버지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를 ‘놀란 하우스’ 양로원 현관 앞에 버린다. 놀란 하우스에서 일하는 퀴니에게 발견된 벤자민. 퀴니를 엄마로, 그곳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친구로 살아가는 벤자민은 해가 갈수록 젊어지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제 12살이 되어 60대 외형을 가지게 된 벤자민은 어느 날, 할머니를 찾아온 6살 나이 그대로의 어린 데이지를 만난다. 그리고 데이지의 푸른 눈동자를 영원히 잊을 수 없게 된다.
이제 제법 중년의 모습이 된 벤자민은 바다를 항해하며 세상을 알아가고 데이지는 뉴욕 무용단에 합류해 인생의 절정을 보내며 열정을 폭발시킨다. 수 차례의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 끝에 벤자민과 데이지는 마침내 함께 시간을 보낸다. 서로의 나이가 엇비슷해진 짧은 그 순간을 놓칠 수 없었던 벤자민과 데이지는 열렬히 사랑한다. 그러나 그는 날마다 젊어지고 그녀는 점점 늙어만 가면서, 벤자민은 어린 딸의 미래를 생각해서 가족 곁을 떠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고 흘러 다시 데이지 곁으로 돌아온 그는 그녀의 품에서 영원히 잠든다.
F. 스콧 피츠제럴드
소설 좀 읽어봤다 하는 사람들 중에서 피츠제럴드의 이름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 <위대한 게츠비>를 통해 세계적인 작가가 된 그가 문학사에 남긴 영향은 어마어마하다. 그의 글은 늘 감탄을 자아낸다. 예상 가능한 표현은 없으며 그의 문체는 기괴하면서도 달콤한 기분이 들게 한다. 또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글 안에 살아있어서 마치 영화를 보는 듯 글을 읽을 수 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소설을 무척이나 아낀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피츠제럴드가 1920년대에 쓴 단편소설 <벤자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들>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벤자민 버튼의 기이한 사건들>은 마크 트웨인의 명언 “인간이 80세로 태어나 18세를 향해 늙어간다면 인생은 무한히 행복하리라”에서 영감을 얻은 피츠제럴드가 충동적으로 쓴 소설이었다. 그의 글이 스크린으로 옮겨지기까지 근 60년의 세월이 걸렸다. 40여 년의 세월을 떠돈 끝에 지금의 제작자를 만나게 되었고 10년에 가까운 각본 작업 후, 또다시 10여 년이 지나서야 마침내 온전한 모습의 영화로 탄생했다.
사실 소설의 내용과 영화의 내용은 많이 다르다. 그렇지만 벤자민 버튼이 80세로 태어나 18세를 향해 늙어간다는 점은 똑같다. 책 속의 벤자민 버튼도 영화 속 벤자민 버튼도 마크 트웨인의 말처럼 인생을 거꾸로 살아가지만, 18세를 향해 늙어가지만 마냥 행복하게 살지는 못했다. 원작과 영화가 다른 면은 있지만 두 작품 모두 매력 있고 그 자체로서 가치로운 작품들이다.
거꾸로 살아간다는 것
80세로 태어나 18세를 향해 늙어가는 벤자민 버튼의 인생 여정은 다채롭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음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삶을 시작했고,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점차 죽음과 멀리 있는 사람들과 인생을 공유했다. 그는 여러 사람들을 만났고 많은 곳을 항해하고 또 여행했다. 사랑을 잃었고 또 찾았으며,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내기도 떠나가기도 했다. 삶의 기쁨과 죽음의 슬픔을 느꼈고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못한 삶을 살았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다고 생각하면 신기하다. 모두가 늙어가는데 나는 젊어진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기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막상 거꾸로 살아간 벤자민의 삶을 보면 다른 사람들과 반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절대 축복이 아니다. 거꾸로 살아가면서 그는 너무나 많은 이별을 겪어야 했다. 죽음을 몰라도 될 나이에 그는 함께 지내던 노인들의 죽음을 수도 없이 지켜봤다. 사랑하는 여자 데이지가 빛나던 20대를 살아갈 때 50대 중년의 외모를 가진 그는 그녀를 떠나야 했다.
둘은 나이가 비슷해지고 나서야 다시 만나 사랑하며 꿈같은 시간을 보낸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딸이 태어나고 자라면서 점점 어려지는 아빠를 두게 될 딸의 장래를 걱정한 벤자민은 사랑하는 가족 곁을 스스로 떠난다. 딸에게 평범한 가정과 아버지를 주기 위해 사랑하는 가족을 떠난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정작 벤자민은 아이가 자라는 것을 보지도 못하고 사랑하는 아내 데이지와 함께 늙어가지도 못했다. 그는 딸에게 매년 엽서를 보냈다. 딸이 읽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매년 보냈는데, 13번째 엽서에는 그의 안타까움이 잘 드러난다. "남자애들 좇아 다니지 말라고 잔소리를 했으면 좋았을 텐데, 네가 상처받았을 때 위로를 해주고 싶었는데, 내가 너의 아빠가 되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 자리로 돌아갈 길이 없구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나이를 먹고 늙어가며 죽음과 가가까워가는데, 나는 죽음과 멀어지면서도 가까워지는 것은 비극이다.
또한 자신은 점차 늙어가는 반면, 사랑하는 남자는 시간이 갈수록 거꾸로 젊어진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데이지의 마음은 상상조차 가질 않는다. 내가 50살 중년이 됐을 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20대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범죄 같기도 하고.. 솔직하게는 내가 그를 계속 사랑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그러나 데이지는 그 모든 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이 기로 한다. 분명 쉽지 않은 결정이었겠지만 그녀가 얼마나 벤자민을 사랑했나 느껴지는 대목이기도 하다. 만나고 헤어지고를 반복했던 데이지와 벤자민. 결국 아기가 되어버린 벤자민은 데이지의 무릎 위에서 영원히 잠든다. 사랑했던 남자가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내 품안에서 잠든다는 것은 데이지로서도 너무 가슴 아픈 경험이다. 어느 누구의 입장에서 봐도 거꾸로 살아간다는 것은 슬픈 일임에 틀림없다.
비록 벤자민이 인생을 거꾸로 살아가지만 그는 우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면서 아파하고 때론 기뻐했다. 인생을 원래대로 살든 거꾸로 살든 우리는 아마도 같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고 사람 사는 게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벤자민의 인생 여정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느끼고 또 느껴야 하는 수많은 감정과 삶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벤자민과 내 나이가 같아졌을 때 그가 경험하고 생각했던 것들을 지켜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며, 나를 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세상으로 향한 눈
벤자민에게는 그의 인생에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마이크 선장은 그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선착장에 앉아 시간을 보내다 우연히 타게 된 배의 선장이었던 마이크는 인생을 개척하고 자신의 선택대로 살고자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벤자민에게 넓은 세상을 알려줬다.
"넌 지나간 세월 앞에서 미친개처럼 미쳐버릴 수도 있어. 운명을 탓하며 욕을 퍼부을 수도 있지. 하지만 결국 끝이 다가오면 그냥 가게 놔두어야만 해(받아들여야만 해)."
그는 이 말을 남기고 죽음을 맞이한다. 벤자민은 훗날 아버지의 죽음이 다가오던 순간에도 이 말을 떠올린다. 아마 그는 이별이 다가올 때마다 마이크 선장이 했던 말을 떠올렸을 것 같다. 죽음을 통한 이별이든 사람과 사람 간의 만남이 끝나는 이별이든 어떤 끝이 다가온다면, 우리가 그 끝에 섰다면 그냥 가도록 두어야 한다. 우린 끝을 받아 들어야 한다. 우린 그 끝을 막으래야 막을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벤자민은 데이지가 불의의 사고를 당하고 더 이상 춤을 추지 못하게 됐을 때, 우연과 운명의 미묘한 관계를 깨닫는다.
"인생은 상호작용을 한다. 어느 여성이 쇼핑을 가려는데 옷을 놔두고 가서 다시 옷을 입고 택시를 잡고 문을잠궛는데 어느 남성이 택시를 가로챗다. 그 시간에 데이지는 발레 연습을 하고 있었다. 택시가 가고 있는데 어느 남성이 길을 지나가고 택시기사가 커피를 사 마셨다. 그 시간에 데이지는 연습을 마치고 샤워를 하고 있었다. 또 그 택시기사는 그 여성을 손님으로 맞았는데, 그 여성은 백화점에 갔는데 실연을 당한 여점원이 포장을 해놓지 않아 기다렸다. 그녀가 다시 택시를 타고 출발할 때 트럭이 그 앞을 지나갔다. 그 시간에 데이지는 신발끈이 끊어진 친구를 기다려줬다. 이 중 하나라도 없었다면 그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인생은 이런 거야. 교차되는 삶과 우발적인 사건들의 연속. 누구도 제어할 수 없는...
택시는 잘 지나가지 못했고, 택시기사는 잠깐 딴짓을 했을 뿐이고 택시는 데이지를 쳤다."
때론 3초만 망설였더라면 혹은 3초만 먼저 말했더라면 하는 후회를 할 때가 있다. 찰나의 순간 우리가 다른 행동을 했더라면 일어나버린 일의 결과가 달라졌을까? 때론 그렇다고 믿고 싶다. 그러나 인생은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일과 그 결과는 나 혼자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때론 조그만 행동의 변화가 큰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순간이 있다. 통제할 수 없는 우연이 운명처럼 우리를 찾아온다면 그저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다. 이런 우연과 운명을 받아들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벤자민처럼 인생을 거꾸로 살아간다면 나를 덮쳐올 우연과 운명에 좀 더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까? 비록 내가 18살로 늙어가지 못하고 80세로 늙어가지만 인생을 더 많이 배우고 겪으면 제어할 수 없는 운명에 조금 더 초연해질 수 있기를 바란다.
벤자민은 사랑하는 가족 곁을 떠나서 세상을 경험하면서 딸에게 가장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엽서로 남겼다. 그가 살아온 긴 인생의 교훈이 한 장의 엽서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가치 있는 것을 하는 데 있어서 늦었다는 건 없단다. 하고 싶은 것을 시작하는데 시간 제약은 없어. 넌 변할 수 있고 혹은 같은 곳에 머물 수도 있지. 규칙은 없는 거니까, 최고로 잘할 수도 있고 최고로 못할 수 도 있지. 난 네가 최고로 잘해 주길 바란다.
그리고 너를 자극시키는 무언가를 발견해 내기를 바란다. 전에는 미쳐 느끼지 못했던 것들을 느껴 보기를 바란다. 서로 다른 시작을 가진 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길 바란다. 네가 자랑스러워하는 인생을 살기 바란다. 만약 이것이 아니다 싶으면 언제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강인함을 갖기를 바란다."
그는 딸에게 그리고 영화를 보고 있을 관객에게 이야기해주는 것 같다. 늦은 것은 없다고 말이다. 그리고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지라고.. 그의 말처럼 가치 있는 것을 하는데 늦었다는 것은 없다.
청춘
만약 내가 신이었다면, 나는 청춘을 인생의 끝에 두었을 것이다.
- 아나톨 프랑스 -
영화 속 벤자민의 삶을 보면서 아나톨 프랑스의 말을 떠올려봤다. 그는 인생의 너무 이른 시기에 우릴 찾아와 쥐도 새도 모르게 순식간에 사라져버리는 청춘을 안타까워하며 청춘을 인생의 끝에 두고 싶어 했다. 만일 우리가 벤자민처럼 80세에서 18살로 거꾸로 살아간다면 우린 아나톨 프랑스의 말처럼 인생의 끝에서 청춘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을 많이 겪고 청춘을 맞이하면 훨씬 더 가치 있게 잘 보낼 수 있을까? 마음껏 도전하고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을까? 아마 그렇지 못할 것 같다. 무엇인가를 이루려고 하면 할수록 우리는 점차 아이가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살아온 순간은 점차 희미해지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더욱더 적어진다. 또한 청춘을 인생에 끝에 두자고 인생을 거꾸로 살기엔 너무나 많은 이별과 시련을 겪어야만 한다.
만약 내가 신이라면 나는 청춘을 인생의 끝에 두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만약 신이라면 청춘을 늘 인생의 어딘가에 두고 싶다.
참조: http://movie.naver.com/movie/bi/mi/scriptAndRelate.nhn?code=660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