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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꿈꾸었던 건 국제 활동가가 아니라 연결이었다

슬럼가에서 다시 바라본 내 꿈

by 은손


그래, 가보자고

Unsplash

이직을 2주 앞둔 어느 날, 나는 책상 앞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새로운 회사, 새로운 업무, 새로운 동료. 설렘보다는 막연한 불안감이 더 컸다. 이렇게 또 다른 평범한 직장인의 삶이 시작되는 걸까? 문득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나라가 떠올랐다. 미얀마. 언젠가 가보고 싶다고 생각만 해왔던 곳이다. 불교 국가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면 어떤 기분일까 상상해 본 적도 있었지만, 12월까지 기다릴 여유는 없었다.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기 전에, 낯선 도시에서 나를 새롭게 감각하고 싶었다. 지금 할 수 있는 건 하나, 일단 비행기 표부터 예매했다. 그래, 가보자고.


"정은아, 미얀마 간다며? 거기서 주거권 캠페인 기획하는 분이 있는데, 한번 만나볼래? 현지 사정을 잘 보여주실 거야."


그 메시지를 보는 순간, 잊고 지냈던 옛 꿈이 떠올랐다. 20대 초반, 나는 국제무대에서 빈민층의 자립을 돕는 활동가가 되고 싶었다. 해외 자원봉사 활동이 너무 즐거워서, 이 일이 내 직업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던 때였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고, 나는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다. 그런데 대학생 때부터 친하게 지냈던 선배가 손을 내밀었다, 마치 그 시절의 나를 꺼내 보라는 듯이.


"좋아." — 나는 주저 없이 답장을 보냈다.



현장에서 뛰어다니는 사람들


ChatGPT

언니가 소개해준 사람은 주거권 시민단체 베다의 디렉터, 케져(Keh Zer). 여행 중반 즈음, 나는 사무실로 직접 찾아갔다. 그는 전통 의상을 단정히 갖춰 입고, 쪼리를 신은 채 나를 맞이했다.


공공기관부터 국제기구,
슬럼가 주민들까지 고루 만나거든요.
그래서 저는 늘 반반 따라 해요.


농담처럼 툭 던진 말이었지만, 그 안에는 그의 철학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정장 차림으로 정부 관료를 만난 날에도 쪼리를 신고 슬럼가 골목을 누비는 사나이. 그 누구에게도 녹아들 수 있는 유연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놀라우리만치 생생했다.


ChatGPT

그의 사무실에는 20대 청년이 한 명 더 있었다. 이름은 비앙이었다. 일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다. 대학에서 도시개발학을 전공했는데, 누구를 위해서 도시를 개발하는지 의문이 들었단다. 슬럼가에 사람이 사는 한, 도시개발은 빈부 격차만 더 키울 테니까. 그래서 이 길로 뛰어 들었는데, 부모님 반대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장에서 그가 열심히 일하는 모습에 지금은 믿어 주신다고.


케져와 비앙은 사진과 서류로 그간의 활동을 보여주던 차에, 현장에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아무리 슬럼가 현장이 궁금하다 해도 나 혼자 가는 건 엄두도 못 냈을 텐데, 함께 할 사람이 있으니 오히려 설렜다. 심지어 오늘 오후에 동네잔치 겸 세계 주거의 날 행사 리허설이 열린단다.



5평 공간에 닮긴 삶


비앙의 부모님마저 마음을 돌리게 만들었던 현장은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 베트남, 몽골, 말레이시아 빈민촌에 가보긴 했지만, 어쩐지 미얀마는 더 심각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예감은 적중했다. 대나무 집이 빽빽이 이어진 대규모 단지가 등장했다. 지붕은 나뭇잎으로 만들었다. 바람에 날아가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슬럼가 이장 아저씨는 본인의 집에 초대했다. 5평 남짓한 공간이었다. 이곳에서 10여 명이 살고 있다니. 집 안에 화장실은 따로 없었다. 빗물을 모아서 샤워할 수 있으면 다행이란다. 전기가 없어서 해가 떨어지면 꼼짝없이 잠이 들어야 하는 삶.


그들이 준 간식을 먹으면서도, 나는 그들의 일상을 제대로 상상할 수 없었다.


“케져와 비앙, 오늘도 여기에서 잘 거야?"

마을 사람들은 자고 가라고 붙잡았다. 아이가 있는 케져는 고개를 저었지만, 비앙은 ‘다음 주에 자고 갈게요’라고 대답했다.


여기에서 자고 간 적이 많아요?

비앙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일주일에 한 번은 자고 가는 것 같아요.
대단하시네요.
처음에는 저도 글로만 일을 했는데요.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다 보니, 이 마을에 점점 애착이 생기더라고요. 일도 더 열심히 하게 되었어요.
정말요?
불편한 게 이만저만이 아니었죠. 그래도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어떻게 해서든 여기를 지키고 싶어요. 어쩌면 제가 얻어가는 게 더 많을지도 몰라요.



마음이 출렁거린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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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면 이 마을에서 자고 갈 수 있을까?

변기도, 샤워실도, 전기도 없는 이 마을에서?

‘아니’ — 내 솔직한 대답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무엇보다 전구 하나 없는 깜깜한 밤에 적응할 자신이 없었다. 늘 현장의 삶을 존중해야 한다고 믿어왔지만, 막상 그 한가운데 서니 마음이 출렁거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에서는 ‘활동가는 자고 갈 수 있어야지’ 라고 말했지만, 마음속에서는 ‘그렇게는 못해' 라고 외치는 중이었다. 어쩌면 오랫동안 품었던 국제 활동가의 꿈이 겉멋이었던 건 아닐까. 정말 그 일을 원했을까. 아니면 멋져 보이는 내 미래를 상상했던 걸까.


잠시 생각에 빠진 사이, 어떤 아줌마가 부채를 가져다주었다. 손 부채질로 더위를 달래는 내 모습이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나만의 비밀 정원을 보여준 어린이도 있었다. 어디에선가 꽃씨를 가져와서 직접 꾸며둔 것 같았다.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순 없지만, 따뜻한 눈빛에 마음이 녹았다.



진짜 내가 원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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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내가 꿈꾸었던 건 이런 순간이구나. 내가 이곳에서 잠들 수 없다고, 그들과 마음을 나눌 수 없는 건 아니었다. 발리에서 명상 수업을 들으며, 전 세계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었을 때, 브루나이에서 현지 친구들과 한국 음식을 요리해 먹었을 때, 대만 살사바에서 다 함께 춤추었을 때, 그때와 비슷한 충만함이었다. 다른 환경에서 살아도,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는 순간은 분명히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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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사랑했던 건 바로 이 순간인가 보다

— 낯선 사람들과 서로의 삶을 나누고,

그 과정에서 내 세계가 조금씩 넓어지는 경험.


@ 스리랑카

이제야 알았다. 20대 초반에 꿈꾸었던 국제 활동가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었다. 마치 케져가 공공기관과 슬럼가 양쪽을 반반씩 따라 하듯이, 여행할 때마다 그 지역의 리듬에 맞춰서 지내보는 것 이것이 진짜 내 욕망이었다. 이미 이렇게 여행을 다니고 있었으니, 조금씩 내 꿈을 살고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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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다행이었다, 미얀마에 가게 되어서.

그리고 늦게라도 내 꿈의 본질을 알게 되어서.


* 이 여행기는 2019년에 다녀온 이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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