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과 사람이 가득한 일
여행 가이드
나만의 비밀 공간을 소개하고, 외국인과 대화 나누길 좋아하는 내가, 여행 가이드 직업에 끌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외국인 친구가 푸드 투어 플랫폼 대표 — 조를 소개해준 것이다.
그는 마침 투어 사업을 확장하려던 참이었다.
"재스민, 내가 짠 루트대로 손님 데리고 가면 돼.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는 예약이 들어올 거야. 논현역 푸드 투어는 너한테 다 넘길게.”
조가 기획한 루트는 간단했다. 삼겹살을 먹고, 전통 시장에서 육전에 막걸리까지 마시면 끝. 용돈을 번다는 것보다 이 업무를 직접 해볼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설렜다.
설렘이 권태로
처음에는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소규모 투어는 서로 데면데면한 분위기를 풀어주는 게 핵심이었다. 내가 먼저 묻고, 다 같이 대화를 이어갈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 신나게 놀았을 뿐인데, 돈이 생긴다는 사실이 마냥 신기했다.
기억에 남는 손님도 여럿 있다. 한 번은 할머니 팔순잔치 겸 필리핀 대가족이 왔었다. 남몰래 케익을 준비했더니, 모두가 감동했다. 어떤 사람은 나에게 “당신은 전업 가이드를 해야 할 것 같아요” 라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하지만 점점 피로가 쌓이기 시작했다. 특히 혼자 온 손님은 더 부담스러웠다. 두셋이 투어를 신청한 날에는 각자 한 마디만 해도 대화가 끊어지지 않지만, 일대일 상황에서는 내가 뭐라도 해야만 했다. 쌈 싸 먹는 법만 알려 주어도 신났던 시절이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대화하는 것보다 스크립트 확인에 집중하고 있었다. 결국, 조에게 잠시 쉬고 싶다고 말했다.
제주도에서 만난 답
그렇게 일 년 즈음이 지났을까.
친구가 특별한 제주도 숙소를 추천해 주었다.
“며칠만 있어도 여기 매력에 푹 빠질 걸?
사람들이 다 자진해서 다음 게스트까지 챙기더라고.
나도 친구 사귀고 왔어.”
용달리 —
제주도를 꽤 많이 가봤다고 생각했는데,
이 동네는 처음이었다.
얼굴이 까무잡잡한 사나이가 마중을 나왔다. 십자가 있는 건물이 숙소란다. 마당에는 산양이 돌아다녔고, 안에는 천장이 탁 트여 있었다.
“원래 요트 선수였는데, 그걸로 먹고살기 힘들었어요.
대회 성적이 들쑥날쑥하니까.
그래서 새로 시작해 보려고 제주도에 왔어요.“
초기에는 친구가 없어서 심심한 나머지, 길에서 만난 여행자를 이 집에 초대했단다. 누군가는 음악을 틀고, 누군가는 요리를 했다. 다 같이 거실에서 잠이 든 날도 많았다.
이 행복이 너무 좋아서 —
내친김에 에어비앤비 호스팅까지 시작했다고.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손님들이 다 비슷한 질문하지 않나요?
제주도에는 왜 왔는지, 원래 뭐 했는지.
혹시 지겹지 않으세요?"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말했다.
"대화 상대가 다 다른데, 어떻게 지겨울 수 있겠어요.“
나는 그의 생각에 놀라, 말문이 막혔다.
“근처에 치매 걸린 할머니 한 분이 사시는데요.
매일 ‘저는 이 집에 사는 민수예요‘ 이렇게 인사드려요.
그래도 당연히 기억 못 하세요.
오늘 아침에도 저를 경계하긴 했지만,
어떤 날에는 반갑다는 듯이 악수도 해주세요.
반응이 다 다르던데요?“
민수도 나처럼 같은 대화를 반복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날그날의 분위기에 더 집중했다. 아무리 똑같은 내용도 누구와 어떻게 나누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고 믿었다.
나도 생각했다.
나도 그날의 분위기에 따라 리듬을 바꿀 수 있다면
호스팅이 조금 더 생생해지지 않을까.
새로운 도전
"커스텀 투어 요청이 들어오면
내가 한 번 해봐도 될까?"
제주도에서 돌아오자마자 조에게 부탁했다.
그는 별말 없이 최근에 받은 이메일을 공유해 주었다. 등산 마니아 커플인데, 한국의 매운 음식에 도전하고 싶단다. 옳거니 — 광화문에서 김치찜 먹고, 인왕산에서 뷰 보면 되겠다.
드디어 호스팅 당일이 되었다. 점심을 먹자마자 등산을 시작하려고 했는데, 두 사람 다 서촌을 구경하고 싶어 했었다. 그래서 원래 계획은 미련 없이 접었다. 그 대신 이 가게 저 가게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제니는 빈티지 가게에서 멋진 원피스를 샀다. 수성동 계곡 앞에서 스냅숏도 찍었다. 시간을 꽤 많이 써버린 탓에 인왕산 정상에 갈 수는 없었지만, 전망대에서 서울의 야경을 구경했다.
“오늘 너무 재미있었어.
솔직히 큰 기대 안 했었는데, 투어 신청하길 잘했어.
나중에 미국 놀러 오면 내가 가이드 꼭 해줄게.”
라고 말했을 때, 얼마나 뿌듯했었는지.
나에게 맞는 옷
이제야 알았다. 여행 가이드가 맞지 않은 것이 아니라, 똑같은 내용을 반복하는 방식이 맞지 않았다. 게다가 내가 기획한 루트를 소개할 때, 더 큰 에너지가 생겼다.
여행 상품을 기획하고,
거기에 스토리텔링을 더하며,
함께 어울려 즐기는 것 —
나는 그렇게 나만의 가이드 방식을 찾아냈다.
요즘은 회사 일로 바빠 프라이빗 투어 기획을 잠시 쉬어가고 있지만, 여행이라는 세계 안에서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은 여전히 변함없다. 다만 나에게 가장 잘 맞는 방식을 찾기 위해서, 조금 더 나아가고 싶다. 프라이빗 투어 너머의 세계까지도 기꺼이 모험할 생각이다. 이 길을 꾸준히 두들기다 보면, 언젠가는 정답에 가까워지지 않을까. 제주도 여행에서 뜻밖의 힌트를 얻었던 것처럼, 이 과정에서 또 다른 힌트를 얻을 수 있겠다는 믿음. 오늘도 그 믿음 하나로, 나만의 여행을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