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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만 그려도 행복하지만, 팔리면 더 행복해

어딘가 숨어 있는 또 다른 행복

by 은손


여행의 질문


여행지에서 이상하게,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질문과 마주치곤 한다. 여행이 끝난 뒤에도 그 질문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내 삶 어딘가를 슬며시 흔든다. 고약하면서도 친절한 질문들. 그래서 나는 또 다시 가방을 메는지도 모른다. 조금 더 멀리서, 조금 더 낯설게 나를 바라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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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니, 내 친구 한 명 소개해 줄까?”

나에게 빠이를 추천했던 친구의 메시지였다. 올 때마다 만나는 현지 친구가 있다며, 나에게 소개해 주겠다고 했다. 마침 현지인을 만나는 여행을 하고 싶었는데, 잘됐다.


그의 이름은 첵이었다. 처음 보는 사이였지만, 오래 알았던 사이처럼 편했다. 공통된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우리 사이를 부드럽게 이어준 덕분일 것이다. 나는 자연스레 그의 오토바이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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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원래는 수도에 살았는데, 우리 사장님이 갑자기 지방에 가겠다는 거야. 그래서 다행히 빠이에서 살게 되었어. 별장이랑 카페 관리를 맡겨 주셨거든.”


그의 말이 끝나갈 무렵, 오토바이는 시골길을 따라서 조용히 달리고 있었다. 웅덩이를 넘고, 오르막을 올라, 나무 사이를 구불구불 지나니, 마침내 집이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더 안에 들어가자, 그가 운영하는 카페가 나왔다. 비수기에는 문을 닫아두지만, 오늘은 내가 온다는 이야기에 일부러 열어 두었단다.


사방이 트여 있는 언덕 위 공간. 주변 논밭이 한눈에 들어왔다. 카페 한 켠에는 하늘을 향해 곧게 뻗은 나무 한 그루가 있었고, 나는 그늘 아래에 앉아 멍하니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있었다. 자연에 천천히 스며드는 듯한 이 순간 — 좋은 하루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테이블 위에는 제철 과일이 준비되어 있었다.

“너 온다길래 근처에서 따왔어.

태국 시골엔 과일이 길에 널려 있거든.

여기선 절대 굶어 죽을 일 없어.”

무심한 말투였지만, 그 안에는 다정함이 묻어 있었다.

친구의 친구에게도 이렇게 정성을 쏟는 사람이라니.


그런데 자꾸만 시원한 음료 한 잔이 생각났다.

그때, 메뉴판이 보였다.

가장 먼저 시선을 끈 건 생강주스였다.


“생강주스 한 잔 마실 수 있을까?”

“그럼. 그런데 생강 없어서 캐와야돼.

같이 나가보자.”


직접 캐온다고? 상상도 못한 전개였다. 일단 따라갔다. 내 눈에는 그저 푸르른 잎사귀들만 가득해 보였지만, 그는 그 틈에서 기가 막히게 생강을 찾아냈다. 마트에서 비닐에 싸인 생강만 보다가 땅에서 꺼내는 모습을 보니 새로웠다.


우리는 파인애플 잎에 생강을 다듬고, 아궁이에 불을 붙였다. 불의 세기는 부채로 조금씩 조절했다. 모든 게 천천히 진행되었지만, 여유가 있었고, 기품이 흘렀다. 맛은 두말할 것도 없다.


그는 한 입에 들이킨 뒤, 기타 연주를 시작했다. 가사 내용이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음색이 꽤 감미로웠다. 푸른 하늘이 가까이 보이는 높이에서, 산들산들한 바람을 맞으면서, 라이브 공연을 감상할 수 있다니 — 이보다 좋을 순 없다.


“이 노래는 누구 곡이야?”

“내가 썼어.”

“인터넷에서도 들을 수 있는거야?”

“나는 그 때 그 때 생각나는 대로 연주해.

앨범은 따로 없어.“

나 혼자만 알고 있기에는 재능이 넘치는 뮤지션이다.

그런데 이 친구, 기타는 어떻게 배우게 된 걸까.


“독학했지.”

“너 혼자 연습했는데 이렇게 잘한다고?”

“좋아하면 방법을 찾게 돼 있어.”


혼자 공부해서 작사 작곡까지 하다니, 무언가 그렇게 깊이 좋아하는 능력이 그저 부러웠다. 심지어 그는 그림까지 그렸다. 카페 곳곳에서 그의 작품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는 재료와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아티스트였다. 어떤 날에는 나무 위에, 어떤 날에는 캔버스에, 어떤 날에는 종이에 그리는 식이었다.


“원래 모든 사람은 아티스트야. 아무거나 그리고 싶은 거 그리면 되지. 재료는 내 꺼 다 써도 돼.” 그는 나에게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다. 때로는 사진보다 직접 그린 그림이 더 오래 남는다는 말이 와닿았다.


소질이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지만, 그래도 쓱싹 한 장을 완성했다. 첵의 공간에서는 무엇이든지 시도해도 괜찮을 것만 같았다. 내 그림 실력은 여전했지만, 결과물은 마음에 들었다. 그의 다정함이 만들어낸 작품이었다.


음악에서부터 그림까지, 그는 감정을 자유롭게 꺼내고 있었다. 매일 좋아하는 것으로 가득찬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 자신의 공간에서 친구들과 어울리고,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며 — 그 순간순간을 온전히 즐기고 있었다. 문득 생각했다. 그의 그림을 한 장 살 수 있다면, 그 영혼을 조금이라도 닮을 수 있을까. 이 곳에서 보낸 시간을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나도 네 그림 살 수 있어?”

“내 그림은 시내 카페에서 팔고 있는데,

거기까지 데려다 줄게.”


카페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찬장에 보관해 둔 그림을 조심스럽게 꺼내기 시작했다. 한 장 한 장 천천히 살펴 보았다. 그림마다 각양각색의 매력이 있지만, 내 선택은 아름드리 나무 아래서 달빛을 보는 뒷모습. 조용한 자연이, 그 속에 놓인 한 사람이 — 내 마음과 겹쳐 보였다. 나는 약간의 팁까지 얹어서 돈 뭉치를 건넸다. 그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고마워. 진짜 큰 선물을 받은 기분이야. 이런 날이 또 올까 싶어.”


척은 분명히 그림 그리는 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해 보였는데, 그림이 팔렸을 때 훨씬 행복해 보였다. 아무리 좋아하는 일로 하루를 채워도, 또 다른 행복이 존재할 수 있구나. 돌아보니 나도 마찬가지였다. 혼자 읽는 것도 좋아하지만, 독서모임에서 감상을 나누는 순간도 좋아한다. 친구나 가족과 떠나는 여행도 좋지만, 혼자 여행하는 것도 좋아한다. 가장 싫어하는 운동이 등산이었는데, 이제야 슬슬 빠져드는 중이다. 그럼 나는 지금 충분히 행복하게 살고 있는가? 내가 찾지 못한 또 다른 행복이 어딘가에 숨어 있는 건 아닐까?


그 때 산 그림은 우리집에서 가장 높은 선반에 두었다. 이 그림을 볼 때마다 수많은 감정이 뒤섞인다. 이토록 아름다운 자연을 보러 어디론가 떠나고 싶다는 마음, 척의 공간에서 느꼈던 평온함, 어딘가에 지금보다 더 큰 행복이 있을 것 같다는 믿음.


그 답을 찾기 위한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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