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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내 정상에 올랐던 마음처럼, 안 되면 내일 또

by 은손


모든 건 우연처럼 시작되었다


몇 해 전, 어느 날이었다. 맹그로브 고성에서 할인 이벤트가 열린다는 소식에 당장 내려갔다. 늘 그렇듯, 거창한 계획 같은 건 없었다. 요가 원데이 하나가 전부였다. 그렇게 또 한 번, 우연이라는 파도에 올라탔다.



따뜻한 시골 인심 체험

요가 원데이는 속초에서 진행되었다. 택시를 20분이나 타고 나왔는데, 수업이 끝나자마자 고성에 돌아갈 순 없었다. 이럴 때 나만의 여행 팁 — 사찰 검색하기. 사찰은 대부분 풍경이 좋은 곳에 있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실패하지 않는다. 다행히 몇 분 거리에 보광사가 있었다.


이제 갈 곳도 정했겠다, 식당을 찾아서 요가원 근처를 걸었다. 내 눈길을 끌었던 건 식당 겸 슈퍼마켓. 난로 위에서 주전자가 끓는 모습이 들어갔다. 메뉴판은 따로 없었다. 그 대신 말만 하면 뭐든 만들어준단다.


“혹시 짜파게티 되나요?”

“그럼요.

시판 대신에 제가 만든 소스로 끓여 드릴게요.“


5,000원에 이렇게 호화로운 대접을 받다니,

이런 게 시골 인심인가.



보광사? 거긴 볼 거 없어요

한 젓가락 먹기 시작했을 즈음이었다. 갑자기 등장한 단골 손님과 합석하게 되었다. 한평생 속초에서 살았다던 그.


Pixabay

“아가씨, 속초까지 혼자 온 거야?”

“네”

“어디 구경가게?”

“보광사요”

“에이, 거긴 볼 거 없어요.”


Pixabay

그가 극구 말리는 모습을 보자, 나는 오히려 더 가고 싶어졌다. 그래서 식사를 마치자마자 택시를 호출했다. 목적지는 보광사.



그래도 보광사


바로 여기인가. 근처에 아파트 단지가 있어 그런지, 동네 사람들이 자주 방문하는 듯했다. 그날도 스님과 신도들이 함께 기도하는 소리가 절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법당 규모는 작았지만, 불심은 그 어느 사찰보다도 커 보였다. 입구에 적힌 안내문에 따르면 뒤편의 언덕 어딘가에 글씨가 새겨진 바위가 있단다. 이왕 온 거, 열심히 찾아봐야지.


첫 번째

방향 안내판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이 수없이 밟아서 평평해진 흔적에 베팅해 보기로 했다. 일단 타임캡슐 근처 돌계단을 타고 올라가 보았다.


중턱 즈음에서 나온 양갈래 길. 어차피 오십 퍼센트 확률이니, 왼쪽을 골랐다. 설악산이 가까이에서 보였다.


산길을 따라서 계속 걸었지만, 바위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어둑어둑해지고 있으니, 반대로 가볼 수도 없다. 이렇게 된 이상 내일 또 와보는 수밖에.


두 번째

오늘은 갈림길에서 오른쪽을 골랐다. 언덕 끝까지 올라가니, 특이한 모양의 바위가 있었다. 그 위에서는 영랑호와 동해가 한 번에 보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일출 명소가 있는데, 여태까지 이 명소를 소개한 크리에이터가 없다는 사실이 신기할 뿐이다. 한편으론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덕분에 평화롭게 즐길 수 있었으니까. 이 자리를 전세라도 낸 듯이 다양한 각도에서 수집장 찍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글씨는 바위는 보이지 않았다. 그만 포기하고, 서울에 올라가야 할까.


세 번째

다시 숙소에 돌아가려 했지만, 도무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 번만 더 찾아봐야지. 아무래도 아까 보았던 특이한 모양의 바위가 마음에 걸렸다. 역시 내 직감이 맞았다. 길 아래는 당연히 낭떠러지라고 생각했는데, 길이 또 있었다. 비밀이 여기에 있겠군.


저 멀리 땅과 바위를 연결하는 사다리가 하나 보였다. 삐걱거리는 소리에 손발이 후들거렸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두 발아래, 마치 숨이 멎을 것처럼 거대한 바위가 펼쳐져 있었다.


넘실대는 바람,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새소리, 티 없이 맑고 푸른 하늘. 그 순간, 잠들어 있던 오감이 깨어났다. 그리고 마침내 건너편 바위에서 눈에 들어온 두 글자.


觀音 (관음)
世卽娑婆 救難大聖 (세즉사바 구난대성)
괴로움 가득한 세상을 관음이 구원해 주리라.



배움


첫 번째도, 두 번째도 실패였다. 결국 세 번째 시도 끝에, 나는 바위를 찾았다. 문득 생각했다. 그동안 나는 인생의 갈림길 앞에서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얼마나 자주 돌아섰던가. 누군가 남긴 희미한 흔적이 있을 수도 있는데, 너무 빠르게 포기한 건 아닐까. 설령 아무 흔적이 없었다 한들, 첫 발자국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었다.


막다른 길에 다다를 때마다 보광사를 떠올리려 한다.


처음에 길이 없어 보여서 포기했지만,

끝내 정상에 오른 그날의 나를.


오늘 나, 꽤나 멋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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