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 축 늘어진 몸으로 지하철에 올라탔다. 언제부턴가 이런 하루가 당연해졌다. 당장 그만둬도 별 미련은 없다, 사실 이 일이 좋은지도 모르겠으니까. 하지만 대출 이자를 생각하면, 또다시 지옥철에 타야만 한다. 이 고리를 어떻게 끊을 수 있을까? 온라인에는 퇴사하고 '원하는 시간에, 좋아하는 곳에서, 사랑하는 일을 하면서 여행하는’ 사람들 천지던데, 나는 시간 맞춰 출근하느라고 바쁘다. 언젠가 나도 디지털 노매드처럼 살 수 있을까. 오늘도 한숨만 나온다.
안 되겠다, 직접 그 비결을 들어야겠다.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치앙마이를 결제했다.
그곳에서라면 그 삶을 실컷 구경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남은 건 그들을 만나는 법.
이왕이면 에어비앤비로 자연스레 연결되고 싶었다.
그렇게 찾아낸 'Reiki Infused Yoga Experience.’
태국에서 자리 잡은 지 꽤 되어 보이는 이탈리아 국적의 호스트였다. 디지털 노매드에 대한 인사이트가 풍부할 것 같았다. 열 끼 식사 값에 가까운 금액이었지만, 망설임 없이 예약했다.
요가원은 치앙마이 중심에서 택시로 20분 정도 떨어져 있었다. 그런데 간판이 보이지 않았다. 호스트에게 전화할까 말까 망설이던 찰나, 뒤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불렀다.
또렷한 이목구비, 탄탄한 근육,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 — 폴리나였다. 그녀는 반갑다는 눈짓과 함께, 내 키만한 대문을 열어 주었다. 마치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처럼.
안에는 동화 속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 잔잔히 숨 쉬는 연못, 수백 년의 시간을 머금은 나무들, 느긋하게 흔들리는 해먹까지. 치앙마이 자연은 원래 유명하지만, 프라이빗한 공간에서 만끽하는 건 처음이었다. 맨발로 천천히 걸으며,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야말로 온전한 명상이었다.
이 가든에서 매일 요가하면 얼마나 행복할까? 나는 마치 이곳의 주인이라도 된 듯이,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꽃에 물을 주고, 연못 속 물고기를 구경한 다음, 요가로 하루를 여는 삶. 몸과 마음이 건강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이런 삶이 가능하구나.
회사 안 다니고 벌고 싶어서 요가부터 팔아본 거예요. 재미도 있는데 돈도 벌렸어요.
지금까지 쭉 해왔어요.
태국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에서 자란 폴리나는 호텔 업계에서 경력을 쌓은 유능한 재원이다. 이후 독일계 제조업 회사로 이직해서 세계 이곳저곳에서 일했는데, 우연히 태국에 파견된 것이다. 여기에서 프리랜서로 일하던 남편을 만나게 되었고, 그녀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함께 여행하고 싶은 도시가 많았어요.
하지만 매번 제 회사 일정이 걸림돌이었죠.
얼마나 눈치 보였는지 몰라요.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는 사이, 그가 이렇게 말했단다.
네 인생, 너무 재미없다.
회사가 허락 안 해주면 여행도 못 가고.
네 하루는 네가 직접 정해야지.
왜 맡기는 거야.
그 말에 큰 충격을 받은 폴리나. 내 하루를 직접 설계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졌다. 그때부터 그녀는 진지하게 고민했다. — ‘회사 밖에서도 나답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막상 회사를 그만두는 건 큰 용기가 필요했다. 월급 없이 버틸 수 있을지, 상상만 해도 심장이 조였다. 밤새 한숨도 못 자는 날이 계속되었다. 그때, 남편이 말했다.
요가로 돈 버는 건 어때?
그게 꽤 좋은 무기가 될 수 있어.
일단 거기에서부터 시작하자.
폴리나는 사실 오랫동안 요가를 수련해 왔다.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움직임이었고, 몇 해 전에는 태국에서 강사 과정까지 수료했으니까. 이미 독립할 무기를 쥔 셈이었다. 남은 건 단 하나, 실천할 용기만 있으면 되었다.
처음에는 이탈리아어로 요가 수업을 열었다. 치앙마이에서 요가하고 싶긴 하지만, 영어가 익숙하지 않은 여행객을 위해서였다. 어느 정도 수익이 안정화되자, 서서히 영어로 시장을 넓혔다. 고객층도 점점 더 다양해졌다.
요즘에는 호텔과 식당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서, 숙박과 요가 수련을 결합한 리트릿도 운영하고 있다. 참가자는 그녀의 가든에서 며칠간 느긋한 휴식을 경험한다. 입소문을 타고 예약이 끊이지 않는다. 그간 찍어온 점들이 선이 되어, 삶을 지탱하고 있었다.
1. 나만의 영역을 찾아라
그녀가 본인의 영역을 찾은 비결은 단순했다.
답은 지나온 과거에 있다는 것.
요가도, 식당도, 호텔도 — 전부 다 제 과거였어요.
이제야 그것들을 하나로 꿰매어봤을 뿐이죠.
그게 저만의 색을 단단히 만들어 준 것 같아요.
나 역시 과거를 더듬어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손에 잡히는 키워드는 단 하나, 여행뿐이었다.
큰일이었다.
여행 가이드는 내향인인 나에게 맞지 않았고,
여행사 운영은 더 자신 없었다.
여행으로 먹고사는 것, 과연 행복할까.
그녀는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본인이 모든 업무를 다 하지 못해도 괜찮아요.
나는 마케팅에 소질이 없지만, 남편은 소셜미디어를 잘해요. 반대로 그는 요가 초보자예요. 그래서 제가 수업을 기획하고, 그가 홍보해요.
저처럼 파트너를 만나게 될 수 있으니, 우선 몸 담고 싶은 영역부터 찾아보세요.
그제야 알았다, 꼭 혼자 다 해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걸. 그간 막막해 보였던 여행사 운영이 가볍게 느껴졌다. 나는 상품 기획만 맡고, 나머지는 잘 맞는 파트너에게 맡기면 되니까. 일단 이것도 독립 플랜 중 하나로 담아둬야지.
2. 무기를 갈고닦는 데 집중하라.
뿌리내릴 곳을 찾았다면,
다음 숙제는 나만의 무기를 갈고 다듬는 것.
그녀만의 공식이었다.
팬데믹 때 어쩔 수 없이 요가원 문을 닫았는데, 규제가 풀리자마자 바로 예약이 들어왔어요. 이탈리아어로 수업하는 강사는 드물거든요. 가든도 마찬가지예요. 대체 불가능한 서비스를 제공하면 손님이 꾸준히 찾아와요.
3. 일하는 리듬을 정해라.
하지만 수입이 안정적이라고 무조건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녀는 지금도 행복을 찾아다니는 중이었다. 자연환경이 풍부한 외곽으로 이사한 것도 이 여정의 일부다.
사람들이 온라인 수업도 열어 달라고 하는데, 저는 오프라인이 더 재밌어요. 수업도 적당히만 해요. 많이 할수록 더 많이 벌겠지만, 제가 소진될 수도 있으니까요.
일하는 리듬을 직접 정해야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다며, 그녀는 또 한 번 독립을 권했다.
아직 나만의 영역을 못 찾았다고 했죠?
꾸준히 고민하다 보면, 한순간에 갑자기 보일 거예요.
그때부터 시작인 거죠.
그녀는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주는 동시에, 꿈을 지키는 노력도 필요하다는 사실도 잊지 말라고 했다. 겉보기엔 평화롭고 여유로워 보여도, 실제로는 하루 10시간 넘게 일하는 날이 대부분이란다. 단 하루라도 가든을 관리하지 않으면 금세 지저분해 보이기 때문에, 새벽에는 무조건 여기에 시간을 쏟아야 한다. 게다가 리트릿 때마다 식사에 수업에 숙소 관리까지, 모두 직접 진행한다고. 수입이 불규칙한 부분도 감당해야 할 몫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폴리나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모든 게 자유의 대가라면,
나는 기꺼이 지불할 수 있어요.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폴리나에게 얻은 인사이트를 일기장에 옮겨 적었다. 인생의 방향이 흐릿해질 때마다 펼쳐볼 커닝 페이퍼. 7만 원짜리 요가 수업에서, 7년을 이끌 인생 수업을 받았다.
인생의 파도에 올라탈 준비, 다 되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