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어떤 어른이 되고 싶으신가요?

숙소가 점지한 여행지, 영월의 질문

by 은손


이번 여행에서
난생처음
이십 년 후의 나를 상상하게 되었다


영월 5일장

일주일이 넘는 연휴를 본가에서 보낼 자신은 없었다. 자취집에서 자야만 잠이 잘 오니까. 본가에 하루 이틀만 다녀와도 되지만, 중간에 집에 간다고 하면 서운해할 것 같았다. 한 시간밖에 안 걸리니, 다음에 가는 게 낫겠다. 그렇다고 집에 있으면 넷플릭스만 보면서 시간을 낭비할 게 뻔했다. 해외여행 표는 평소에 비해서 몇 배 더 비쌌다. 나에게 남은 유일한 옵션은 국내 여행이었다.


특별히 가고 싶은 곳은 없었다. 단지 독방에서 지내고 싶었다. 도미토리에서 친구를 사귀어 보자는 생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내 마음대로 쉴 수 있어야 했다. 그래서였을까, 전국의 수많은 에어비앤비 중에서 ‘혼자라서 더 자유로운, 나 홀로 여행자의 집’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위치는 강원도 영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여행지지만, 망설임 없이 예약했다.


Pixabay

뭐 하고 놀겠다는 계획 따위는 없었다.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일하고 싶을 때 일하는, 단순한 자유를 누리고 싶었다. 서울에서는 날마다 회사에 맞추어 살았으니, 영월에서는 내 리듬에 맞춰서 살 테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일부러 핸드폰 알람 시계를 꺼버렸다. 덕분에 일어나야 한다는 부담감 없이 개운하게 잘 수 있었다. 어쩐지 묘한 해방감이 들었다. 아침도 든든히 먹었으니, 이제부터 신나게 놀아야지. 때마침 터미널에서 본 10경이 생각났다. 이 중에 선돌 전망대가 가까워 보였다.


10분 만에 신비로운 풍경을 보게 되었다. 70m 높이의 암석이 서로를 마주 보는 형상이었다. 뒤편에는 강이 흘렀고, 그 너머에는 알록달록 논밭이 보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풍경은 처음이라며, 모두가 감탄사를 금치 못했다.


그래서였을까, 맞은편에서 선돌의 앞면을 구경하고 싶었다. 네이버를 확대해 보니, 건너편에 등록된 업체가 한 개 있었다. 더 한옥 헤리티지 하우스 — 호텔이었다.


Pixabay

사흘째 되던 날, 택시를 타고 호텔에 가기로 결심했다. 택시비가 자그마치 20,000원이나 되었지만, 전망대 이용료라고 생각했다. 호텔 투숙객도 아니니, 그 근처 어딘가에 내려서 산책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스태프 몇 명이 내가 택시에서 내리는 모습을 목격해 버렸다. 망했다.


ChatGPT

“어떻게 오셨어요?”

“여기에서 보이는 풍경이 궁금해서 왔어요.

산책해도 되죠?”

“그럼요.”

다행히 허락을 받았다.

나 혼자 선돌이 잘 보이는 각도를 찾아볼 계획이었다.

그런데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ChatGPT

조금 전 대화를 나눈 총지배인이었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호텔 내부를 구경시켜 준단다. “솔직히 선돌 보겠다고 여기까지 택시 타고 온 사람은 처음이거든요.” — 그가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롯데호텔에서 30여 년, 시그니엘에서 10여 년을 일했다니, 한 번 믿어 보기로 했다.


그는 나를 차에 태우고, 호텔부터 연회장까지 꼼꼼하게 보여 주었다.


더한옥헤리티지하우스

기왓장은 대부분 검은색인데, 더 한옥에서는 다른 색감까지 섞었다. 전통과 현대가 적절히 섞인 새로운 장르였다.


더한옥헤리티지하우스

갤러리에서는 매 시즌마다 작품을 바꾸어 가면서 전시하고 있었다. 이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나무 벽면이었다. 디렉터의 아이디어로 탄생한 곳인데, 다양한 크기의 나이테를 겹겹이 쌓은 거란다. 간단하지만, 신선했다.


더한옥헤리티지하우스

야외 정원은 부지를 개간하면서 파낸 돌로 꾸밀 예정이라고. 무엇 하나 이야깃거리가 없는 공간이 없었다.


ChatGPT

우연히 호텔 디렉터도 만났다. 슬리퍼를 신고 환하게 웃으며 젊은 직원들과 농담을 던지고 있었다. 60대 초반의 남성이었다. 어떤 사람이 이 호텔을 지었는지 궁금했는데, 마침 기회가 찾아왔다.


중앙일보

“호텔이 고급스러워요.

선돌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덕분에 잘 구경했어요.

이거 준비하는데 얼마나 걸리셨어요?”

“공사는 5년 걸렸지만, 총기간은 13년인 것 같아요.

무엇을 짓고 싶은지부터 생각했으니, 할 게 많았어요.

지금도 진행 중이에요.”


조선일보

숙소에 돌아와서 검색해 보니, 디렉터는 KONA I 창업주였다. 버스와 지하철 통합 교통카드시스템을 국내 최초로 개발했으며, IC칩 부문에서도 글로벌 4위를 달리는 업체였다. 본업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일구었는데도, 새로운 분야에 계속 도전하는 열정에 놀랐다.


조선일보

“이 부지를 고른 이유가 있어요?”

“다 돌아다녀도 여기만 한 곳이 없었으니까요.

풍경도 멋진데, 주변에 민가가 없어서 조용하거든요.

쉬고 가기에 최고예요.”

"그런데 왜 한옥이었어요?

"그냥 좋아서요.

우리 건축이 얼마나 멋진지 알리고 싶었어요.

옛날 그대로가 아니라, 현대 스타일로 해석해 봤어요.”


조선일보

그는 거창한 사명감을 말하지 않았다.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만들고, 그것을 나누고 싶었을 뿐이다. 어쩌면 그게 더 순수한 이유가 아닐까. 하지만 처음 이곳을 발견했을 때에는 공사 차량이 다닐 만한 길도 없었다. 이 산도 거의 돌덩이나 마찬가지였다. 나였다면 호텔 기획을 포기했을 텐데, 그는 13년 동안 꿋꿋이 달려왔다.


더한옥헤리티지하우스

숙소에 돌아가는 내내, 하루를 곰곰이 되돌아보았다. 우연히 찾아온 곳에서 호텔 도슨트를 받았던 경험도 신기한데, 디렉터까지 만났다. 물론 이곳저곳 구경하느라 이곳에 온 목적인 뷰 포인트는 발견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소중한 시간을 보냈다.


더한옥헤리티지하우스

특히 디렉터와 나눈 대화가 맴돌았다. 열심히 부를 쌓았으니, 죽기 전까지 쓰기만 해도 되었을 텐데, 그는 새로이 도전했다. 한옥을 고급스럽게 재구성한 사례를 만들고, 영월이 유명해지는 데 한몫했을 테다. 명상하지 않아도 명상이 되는 곳에서, 진정한 리트릿 여행이 무엇인지 보여 주었다. 벌써부터 외국인 고객 문의가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이제야 내가 멋지다고 생각한 어른의 조건이 보이는 듯했다. 바로 사회와 행복을 나누는 품격이다.


십 년 이십 년 후에는 나도 이 디렉터처럼 멋있는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문득 선돌이 떠올랐다. 각자 서 있지만, 서로를 마주 보는 관계. 디렉터와 영월도 각각의 존재이지만, 서로가 서로를 지탱해 주는 중이었다. 나 역시 언젠가 아티스트가 마음껏 창작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내가 좋아했던 인디 가수들이 서서히 무대에서 사라져 갔던 순간을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았다. 후원 시스템을 만들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구체적인 방법은 아직 모른다. 언젠가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 여행 덕분에 내 노년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닮고 싶은 어른을 만나게 해 준 여행지, 영월.


‘어떤 어른이 되고 싶으신가요?’

— 그곳에서 가장 값비싼 질문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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