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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방민경 Aug 09. 2021

환상 성냥_성냥팔이 소녀

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그에겐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있는 거라고는 집세가 잔뜩 밀린 작은방과 몇 끼를 때우면 사라질 푼돈뿐이었다.

  그날은 그 마저도 다 써버리겠다는 심정으로 술을 들이켰다. 술은 괴로운 기억을 지워주는데 특효약이니까.

 독한 싸구려 술을 들이켜고 또 들이켰다. 술집 주인이 내쫓지 않았다면, 아마 그 푼돈도 다 써버렸을지 모른다.

 새벽 거리는 그와 같은 주정뱅이 몇 외에는 아무도 없어 더욱 을씨년스러웠다. 그는 정처 없이 휘적휘적 걸었다. 집으로는 가고 싶지는 않았다. 온기 없는 집은 집이 아니니까.

 

 “아저씨 성냥 사세요.”

 그 소리는 너무 작아서 처음엔 알아듣지 못했다.

 “아저씨 성냥 사세요.”

 두 번째 소리에 그가 뒤돌아섰다. 새벽 거리에 어울리지 않는 어린 소녀가 서있었다.

 소녀는 그에게 다가와 성냥을 내밀었다.

 “아저씨 성냥 사세요.”
  소녀는 같은 말만 반복했다. 그는 소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사람인지 허상인지 헷갈렸다. 고개를 흔들고, 눈을 비비고 다시 눈앞의 소녀를 확인했다.

 “성냥 사세요.”

 여전히 소녀는 앞에 서 있었다. 다른 사람 생각할 처지가 아니지만, 새벽까지 성냥을 파는 소녀가 가엾게 느껴졌다.

 “그래 얼마니?”

 소녀는 그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성냥 값을 말했다.

 마치 그의 주머니 속을 확인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가지고 있는 돈 전부였다.

 “너무 비싼데...”

 그가 우물쭈물하자, 소녀가 한 발짝 다가와 속삭였다.

 “이 성냥은 아저씨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보여줘요.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이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자기도 모르게 성냥 값을 지불했다.

 “성냥을 긋기 전에 보고 싶은 것을 말해요. 불꽃이 꺼질 때까지 그것을 볼 수 있어요.”

 소녀는 이 한마디를 남기고 유유히 사라졌다.

 

 얼떨결에 그는 작은 성냥갑의 주인이 됐다. 성냥갑을 열어보았다.

 붉은색 머리의 성냥 다섯 개비가 단정히 누워 있었다.

 “마지막까지도 사기를 당하다니 나란 인간은... 하.”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성냥 하나를 꺼냈다. 시키는 대로 해본다고 더 손해는 아니다.

그는 무얼 말할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인기 여배우 제나가 좋겠어. 그래 제나. 제나를 보여줘.”

 그는 성냥을 상자 옆면에 그었다.

 화르륵 소리를 내며 성냥에 불이 붙었다. 그와 동시에 눈앞에 제나가 나타났다.

 금발의 푸른 눈, 관능적인 몸매의 여배우 제나.

실제 인물처럼 생생한 제나는 그의 앞에서 갖은 교태를 다 부렸다.

그 모습을 넋 놓고 보다가 저도 모르게 제나의 가슴에 손을 천천히 뻗었다. 풍만한 가슴에 금방이라도 손이 닿을 듯했다.

 “앗! 뜨뜨!”

 제나 가슴에 손이 닿으려고 할 때 그만 불이 다 타들어가 그의 손끝을 달궜다.

 바닥에 떨어진 성냥과 함께 제나도 사라졌다. 그는 열기가 남은 손가락을 입에 쪽쪽 빨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성냥은 진짜다.

 소녀의 말대로 원하는 것을 진짜보다 더 진짜같이 보여주는 마법의 성냥.

 그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다음에 볼 것은 좀 더 신중하게 고르고 싶었다.     

 

 그는 오랜만에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네 개 남은 성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제일 보고 싶은 것이라...

 “남태평양 바다.”

 그는 어릴 때 꿈을 끄집어냈다. 흰색 요트를 타고 온 세상을 누비는 꿈. 그는 후 한숨을 내쉬고 성냥을 그었다.

  화르륵 또 불이 붙었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바다, 그 안에 노니는 알록달록한 물고기, 우아하게 춤을 추는 해초,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고래... 모든 것이 완벽했다. 직접 바닷속을 들여다보고, 항해하는 기분이었다.

 우울은 손톱만큼도 있을 자리가 없을 만큼 벅찬 기분이 가슴을 가득 채웠다.

 천국이라면 이런 기분일까?

 “앗 뜨거워!”

 천국 여행은 너무나 짧았다. 서둘러 다시 성냥을 그어 남태평양 바다로 갔다. 영원히 그곳에 머무르고 싶었다.

 불이 천천히 꺼지길 바랬지만, 야속한 성냥은 그의 마음을 전혀 헤아려 주지 않았다.

 그가 막 바다로 뛰어들려고 할 때 그의 여행도 끝이 났다.

 

 그에게 남은 건 이제 단 두 개.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딱 두 명이 떠올랐다.

 그의 모든 것을 가져간 그녀와

 그에게 모든 것을 준 그녀.

 “미미”

 성냥 하나를 그었다. 갈색 곱슬머리에 주근깨가 있는 하얀 얼굴, 웃으면 보조개가 패는 보드라운 뺨.

 그녀다.

 그녀가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처음 만난 그날처럼. 그 미소를 보고 있자니 모든 원망이 사라졌다.

 그녀와 사랑에 빠졌던 그 순간만이 기억났다.

 환상은 너무나 선명해서 그는 그만 또 팔을 뻗었고, 다 타버린 성냥개비와 그녀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가슴이 터질 듯이 아파왔다. 두 번 다시 이런 아픔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이제 성냥은 딱 하나 남았다. 그는 크게 심호흡하고 입을 열었다

 “어... 어... 어머니.”

 눈앞에 그의 어머니가 나타났다.

 병으로 초췌해진 마지막 모습이 아닌, 그 옛날 건강한 모습의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걱정 어린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어머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내 아들, 힘들지?”

 그는 어머니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잠시도 떨어져 있고 싶지 않았다. 주변에 불꽃을 살릴만한 것들을 찾아보았지만, 그 흔한 몽당초 하나 보이질 않았다. 어영부영하는 사이 어머니는 사그라져버렸다.

 그는 다 타버린 성냥개비를 꼭 쥐고 엎드려 한참을 일어나질 못했다.     

 

 다음날부터 그는 소녀를 찾아다녔다. 소녀를 만났던 골목 주변을 샅샅이 뒤지고 거리의 모든 사람들에게 소녀의 행방을 물었다.

 어느 곳에도 소녀는 없었고, 누구도 소녀를 알지 못했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온종일 거리를 헤맸다. 몇 날 며칠을 정신병자처럼 골목을 헤맸다.

 눈이 밤새도록 내린 어느 날 아침, 그는 신발이 벗겨진 줄도 모른 채 소녀를 찾고 있었다.

 “신발은 어디 있어요?”

 누군가가 그에게 물었다.

 소녀였다. 그는 대답 대신 소녀의 양 어깨를 감싸 안았다. 쓰러질 것 같이 피곤했지만, 정신은 더 또렷해졌다.

 “성냥을 더 줘.”

 소녀는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저었다.

 “성냥은 한 사람에게 한 갑만 팔 수 있어요.”

 “한 번만 딱 한 번만!”

 소녀가 고개를 또 저었다. 남자는 억지로 소녀의 팔을 비틀어 뺏는 상상을 했다. 그러다 고개를 저었다.

 어머니의 얼굴이 아른거렸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결코 그런 모습을 원하지 않을 것이다.

 남자는 무릎을 꿇었다.

 “딱 한 개비만 딱 한 개비만 부탁할게.”

 소녀는 잠시 말이 없더니 성냥 한 개비를 내밀었다.

 “정말 마지막이에요. 이건 환상일 뿐이에요. 여기에 더는 빠지지 마세요.”

 남자는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며 성냥개비를 받아 들고 집으로 뛰었다.

 그리고 곧 어머니를 만났다.

 “어머니! 어머니!”

 그는 어린 소년이 된 것처럼 기뻐하며, 울며 어머니를 맞았다.

 그러다 소녀의 말이 떠올랐다.

 “이건 환상일 뿐이에요.”

 그는 반쯤 타버린 성냥개비를 보았다. 그의 마음도 타버리는 것만 같았다.

 어머니를 또 이대로 보낼 수는 없었다.


 그는 침대 위로 옷가지들을 모았다. 그리고 성냥개비를 그 위에 던졌다.

 화르르륵

 불꽃은 몇 만 배나 더 커져 그의 앞에서 일렁거렸다. 그 가운데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서 있었다.

 아니라고 이건 아니라고 고개를 저으며 서 있었다.

 “아니에요. 엄마 나는 엄마 곁에 있을 때가 제일 행복했어요.”

 뜨거운 기운이 그를 감싸 안았다. 차가웠던 몸이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그는 양팔을 벌렸다.

 그리고 천천히 어머니에게 쓰러져 안겼다.


- 끝-



그림 : 이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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