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 못 드는 지리산 곰을 생각하며...
폭설이다!
1998년 이후 최대라고 하는데, 그 이후에 캐나다에 랜딩을 했으니 우리 가족에게는 세상에서 처음 구경하는 눈 높이이다.
기상 관측소 말로는 이틀에 걸쳐 50cm가 왔다고 하지만, 우리 집 앞에 쌓인 눈은 그 곱절은 되는 듯하다. 개러지가 담장에 둘려 우묵하다 보니 심술궂은 바람이 동네 눈을 다 몰아다 쌓았나 보다.
그 뭐시기 시절의 곰 아가씨는 동굴에 갇혀 마늘과 쑥으로 견뎌야 인간이 될 수 있다는 확실한 목표가 있었다지만, 곰이 되고 싶은 것도 아닌 우리는 폭설에 갇혀 이동의 자유를 잃었다.
다행히 패밀리 데이 연휴라서 움직일 일은 없다.
곰 동면굴처럼 되어버린 집 안에서 아내와 뒹굴뒹굴하며 냉장고를 파먹는다. 마트에 갈 수도 없다 보니 식탁 위 음식은 의도치 않게 웰빙 밥상이지 뭔가!
아래 글은 십 년도 훨씬 넘은 세월에 캐나다 한국일보에 실었던 글이다.
당시에 나날이 심각해져 가는 지구 온난화에 꽂혀, 환경운동가는 아니지만 경고글이라도 하나 남겨야 되겠다 싶었다.
불행하게도 지금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고, 오늘 폭설도 예외는 아니다.
그때의 글 깜이 되었던 '지리산 반달곰 천왕이'를 다시 끄집어내고, 캐나다 북금 곰의 상황을 덧대어 전체 글을 다시 썼다.
오랜만에 원조글을 읽어 보니 세월이 무상한데, 나도 글만 썼지 여지껏 아무런 실천을 못했으니 내 글에 내가 미안해진다.
글쓴이의 책임? 그런 죄목이 있다면 당장 쇠고랑을 차야 할 것 같다.
그래도 철면피하게 하고 싶은 말은 많다보니, 글이 길어져서 2편으로 나누어 싣습니다.
1편, 잠 못 드는 지리산 곰을 생각하며...
2편, 잠들 곳조차 없는 북극곰을 생각하며...
겨울 한 복판, 1월 하고도 중순.
날 선 높바람은 그 갈기를 더욱 곧추 세워 지리산 수천여 계곡을 할퀴어 내리고 있다.
임걸령 한 모퉁이 바위 굴에 웅크리고 앉은 천왕이(지리산에 방사된 반달곰의 이름)의 귀에도 동굴 입구를 빠르게 훑으며 지나가는 바람소리가 들린다.
몸은 추위에 잦아들어 잘 움직여지지 않고, 선잠 때문에 머릿속은 개미굴처럼 어지럽기만 한데, 이 놈의 바람은 왜 이리 성화인지!
동면 직전인지라 청각이 가뜩이나 예민해져 있는데, 아늑한 잠 터 역할을 해야 할 바위굴이 ‘부웅~붕’ 공명(共鳴) 음을 낸다. 어떤 때는 이놈의 바람소리에 섞여서 사람들의 울부짖는 소리도 들린다.
사람들은 ‘야호~’하고 운다.
이럴 때마다 가뜩이나 심란한 천왕이의 초점 흐린 눈이 곧추 떠졌다가 닫힌다.
따지고 보면 이게 다 사람들 때문이다.
'사람이란 것들이 붉으락 푸르락 형형색색의 옷을 차려입고 여기저기 온 산자락을 싸 돌아다니니 때문에, 지난가을엔 마음 놓고 도토리를 주워 먹질 못했다'.
더구나 작년엔 날씨가 부쩍 심술을 부리는 바람에 도토리 작황도 좋질 않았다.
배 부르게 먹고 몸속 지방을 잔뜩 늘려서 겨울을 나야 하는데, 배를 깔고 동굴 바닥에 누웠지만 뱃속에선 아직도 ‘꼬르륵’ 소리가 난다.
더 추워지고 눈이라도 와서 식량을 마저 덮어버리기 전에 천왕이는 오늘도 먹이 사냥에 나설 참이다.
예전 같으면 벌써 한 달여 전에 겨울잠에 들었을 천왕이지만 올 겨울 지리산은 아직도 덥다.
눈도 거의 오질 않았다. 한 번도 자연을 거슬러 살아본 적이 없는 이 반달곰 총각에게 요즘 세상은 온통 혼란스럽기만 하다. 덩달아 기력도 쇠잔해져 간다. 먼 세상으로 먼저 간 친구들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어렸을 적 큰 소나무 밑 그루터기 속에서 엄마 다리를 베고, 소나무 뿌리 향내를 맡으며 길고도 깊은 겨울잠을 잤던 잠 터가 아련한 꿈처럼 그립다.
그때는 바람도 여물어서 두터운 눈으로 닫혀 버린 굴 입구에 숨구멍을 내주며, 파릇하게 얼은 솔 냄새를 굴 안 가득 들여 넣곤 했었다.
가끔, 아주 가끔씩은 동면 굴에서 나와 가슴 털처럼 하얀 눈을 몇 모금 머금고 하늘 높이 떠 있는 해를 바라보면 졸음이 잠자리 날개처럼 사르르 찾아오곤 했었다.
천왕이는 한국국립공원관리공단이 2004년에 연해주에서 들여와 지리산에 방사한 곰 6마리 중 하나이다.
멸종된 지리산 곰을 되살리기 위해 2001년부터 북한과 연해주에서 26마리를 들여와 풀었는데 이중 10마리는 죽고, 16마리가 자연 상태계에 살아 남아있다.
그간 올무에 걸려 죽고 밀렵꾼에 치이고, 민가에 내려왔다가 횡사하고, 맨 큰형 격인‘장군’처럼 겨울잠을 자는 중에 대사 불균형으로 죽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 이들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매년 눈에 띄게 헐떡대며 올라가는 기온이다.
그 기온에 밀려 대류 공간의 모든 수분이 증발해 버렸는지 눈도 턱없이 적게 온다.
그 영향으로 올해는 16마리 중 11마리가 천왕이처럼 아직 동면에 못 들어갔다고 한다.
지리산 곰 얘기는 곧 우리의 현재 이야기이다.
위기를 좀 더 시각적으로 인지하여야 할 것 같아서 ‘천왕’이가 되어 봤다.
‘천왕’이는 그렇다 치고, 나는 당장 무엇을 해야 할까?
이런 글을 썼으면 지구 온난화를 막기위해 필자부터 모범을 보여야 할 텐데...
이 늦은 밤에 글 몇 자 쓴다고 앉아있는데, 열 받아서 윙윙거리는 컴퓨터부터 꺼야 하지 않을까?
(에필로그)
천왕이는 3년간 야생을 떠돌다 2007년에 보호소에 다시 들어왔다.
동면도 제대로 하지 못하여 몸이 엉망인 데다 사냥은 포기하고 등산객이 던져주는 먹이만 쫓다 보니, 이빨 42개 중 19개가 심하게 썩어서 야생 적응이 불가능했다고 한다.
천왕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등산객이 버리고 간 라면이었고, 결국 라면으로 유인해서 마취총으로 생포한 후 보호소로 이송되었는데, 다시는 야생으로 돌아가지 못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