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가 사그락 거린다.
‘살려 달라!’고 스텐레스 용기를 긁는 소리가 요란하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게장을 담길래 소리가 이리 오래가는가?
잠 귀 어둔 나에게도 선명하건만 아내에겐 그저 자장가로 들리나 보다.
요즈음 아내는 틈만 나면 중국 마켓에 들러 게를 사 나른다.
처음엔 시장에 연중 나오는 BC(브리티시 컬럼비아)주 특산인 던지너스게(Dungeness crab)를 사서 게장을 담아 보더니 작지만 맛이 더 좋은 Blue crab으로 바꿨다.
이놈들은 겨울철에만 주로 볼 수 있다.
손바닥보다 조금 작은놈이 어찌나 껍질이 단단한지 먹으려면 여간 고생이 아니다.
모국에서 먹던 ‘박하지(일명 돌게)’ 생각이 나지만 달착지근하게 입안을 감도는 맛은 비교할 수가 없다.
더구나 여긴 바다 내음하고는 턱없이 먼 토론토 아닌가?
게장에 감칠맛을 내기까지 아내는 시행착오를 수도 없이 겪었고, 더 나아가 냉동 보관방법을 스스로 찾아내어 사시사철 싱싱한 게장을 먹을 수 있게 한다.
아내는 간장게장을 유난히 싫어했다.
반면, 바닷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소읍에서 자란 나는 간간한 음식에 젖어 있었고 그중에서도 간장게장은 별식이었다.
결혼 초기, 본가의 장독대에 즐비한 옹기들을 아내는 신기한 듯 쓰다듬어 보기도 하고 두들겨 보기도 하더니만, 한 번은 간장, 된장 독에서 꾸물대는 구더기를 발견하곤 기겁을 하였다.
그러고는 식구들이 빙 둘러앉아 게장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떨떠름하게 보더니 한동안 내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구더기 먹은 입을 어찌 쳐다보냐면서 밥도 따로 챙겨 먹었다.
하루는 어머니가 상경하셔서 막내아들을 위한 특식을 준비하셨다.
톱밥 게를 사다가 싱싱하게 살아 있는 놈만 골라 밑이 깊은 용기에 담아 놓고는 간장을 부어 놓았다.
그 날밤, 아내는 스텐레스 용기 안에서 게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며 그 소리가 점점 잦아들어 희미해지는 걸 다 듣느라 잠을 한숨도 못 잤단다.
간장게장이란 것이 참 잔인한 음식이라나?
요즘 아내는 참 잔인하다.
멀쩡히 살아 있는 놈의 발 사이사이를 칫솔로 박박 문지르질 않나, 집게 발끝을 펜치(pincers)로 동강 내질 않나, 등껍질보다는 배로 뜨거운 간장 세례를 받아야 맛이 좋다며 뒤집어 놓고 꾹꾹 눌러 놓질 않나!
게 입장에서 보면 *야차도 그런 야차가 없다.
그렇게 몇 양푼의 게장을 담가 놓고서 사람들에게 퍼 준다.
슈퍼에서 만나는 사람에게 집에 들르라고 하여 주기도 하고, 길거리에 마주 선 채 담는 법을 열심히 설명하기도 한다.
이젠 입소문을 타서 전화로 담는 법을 물어오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로부터 귀한 음식을, 또는 포기했던 음식을 다시 맛보게 해 주어서 고맙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아내의 귓불이 잘 익은 게처럼 빨개진다.
하지만 본인은 아직도 게장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맛을 내기 위해 맛을 볼 뿐이란다.
요즘도 간장 게장을 특식으로 내는 식당에 가면 꼭 맛을 본다. 이젠 자기가 만든 게장만큼 맛있는 것은 없단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쳐다보지도 않던 게장을 낯설고 물 선 나라에서 담느라고 이 야단인가?
이젠 어엿한 성년이 된 큰 녀석이 가끔 별식을 탐하여 가족들을 당황스럽게 하곤 했다.
초등학교 때, 수학 경시 대회에서 큰 상을 받아 온 녀석에게 “뭘 먹고 싶니? 맛있는 거 먹으러 나가자” 하고 신이 나서 밖으로 나오면, 불쑥 “라면이요! 엄마가 끓여 준…”이라고 답하여 가족을 집으로 돌아오게 하는 식이다.
캐나다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는 해당 교육청(Peel District School Board)에서 최고 성적으로 졸업하게 되어 지역신문(Mississauga News)에 난 적이 있었다.
신문 인터뷰하느라 거의 한나절을 보내고 집에 돌아오면서 녀석이 주문한 별식이 간장 게장이었다.
지금도 사람들에게 ‘별식 라면’ 얘기를 하며 웃음을 짓게 하는 엄마가 유별나게 게장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서 농담으로 한 주문이었을 게다.
큰 아들의 치기에 조금은 심각하게 응수해 본 간장게장 담그기가 이젠 가족의 입맛을 돋우는 정도가 아니라 보시공양(報施供養)이 되어 버렸다.
척박한 이민 생활에 답답함을 느꼈던 아내에게 이 간장게장은 ‘소통과 봉사의 도구’인 셈이다.
순한 양이 야차로 돌변할 수 있는 명분 있는 이유이다.
나는 이 게장에 ‘한풀이 간장게장’이란 별명을 붙여주었다.
아내는 한국에서 큰 형님이 왔을 때도 이 비장(秘藏)의 게장을 선보였다.
결과는 대성공. 백 마디 칭찬보다 함축된 한마디에 아내는 어쩔 줄 몰라했다.
“토론토가 바닷가인가요?”
*야차(夜叉, 불교에서 모질고 사나운 귀신을 일컬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