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10억엔 적자를 달성한 무인양품, 일본 열도는 이미 무인양품의몰락을 주장했다.
하지만 마쓰이 다다미쓰 재임 이후, 2년만에 적자 탈피,
2005년에는 1410억 흑자라는 창립이래 최고 기록을 달성하게 된다.
무인양품은 1980년 세이유 기업에서 설립된 브랜드로,
처음부터 “합리적인 가격”이라는 브랜드 이념을 걸고
백화점 상품의 퀄리티를 70%의 가격으로 상품을 제공해왔다.
무인양품은 자신만의 가치관이 확고한 브랜드로서,
일본어의 직역 의미는 “나는 내가 보이는, 내가 필요한 제품만을 생산한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인양품의 디자인 및 브랜드 자체도 매우 심플하여,
소비자가 해당 상품이 바로 무인양품 제품임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하고자 하였다.
“제품으로 어필하고, 제품 자체로 경쟁하자”가 무인양품의 철학이다.
1970년대 일본 경제 불황기, 많은 백화점 브랜드는 자신만의 브랜드를 설립했지만
오늘날까지 유지되고있는 브랜드는 무인양품이 유일하다.
무인양품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을 수 있던 이유는 바로 자신만의 포지셔닝과 브랜드 이념때문이 아닐까
무인양품이 성공할 수 있던 또 다른 이유는 일찍이 SPA 개념을 받아드린 데에 있는데,
산매업 이전의 상태를 매장이라 부르는데, 판매품은 다른 브랜드의 제품이라,
입고 후 재판매하는 방식으로이윤이 매우 낮을 수 밖에 없다.
무인양품은 여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브랜드를 판매하고, 이를 직접 디자인하고 가공하였다.
한 산매업 회사가 상매산업의디자인 및 제조에 참여하는 것이 바로 SPA이다.
이럴 경우, 기존 방식보다 이윤이 훨씬 높다.
무인양품이 출시되고 10년 간은 순조로웠으나 10주년 째에 되던 해 처음으로 이윤이 하락세를 기록했다.
위기는 2000년부터 시작되었으나 2001년에 상황이 한층 더 심각해지면서 이윤이 반토막났고,
해당 분기 이윤은 제로에 가까웠다. 그러다가 2001 상반기에 첫 적자를 달성했다.
바로 이때부터 마쓰이 다다미쓰는 제로 상태인 무인양품과 함께 새로운 시작을 예고했다.
(1) 감성과 이성 문화의 충돌
우선 무인양품은 세이유 기업의 브랜드로, 무인양품 외에도
세이유, 세이부, 패밀리마트 등 여러 브랜드를 총괄하고 있는 대형 브랜드이다.
세이유 기업의 사장은 매우 감성적인 사람으로,
그저 일본의 삼류 백화점 브랜드였던 세이부를 일본 일류 기업으로 이끌어낸 장본인이다.
그는 월마트가 세계 일류가될 수 있던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 유럽으로 건너가
유럽의 모든 최상급 브랜드들을 세이부에 들여왔다.
이토록 감성적인 그가 있었기에 기업 문화 자체도 매우 감성적이었다.
하지만 무인양품은 과학성을 기반으로 운영되어야 했던 기업이기 때문에,
모든 제품의 디자인과 운영 이념 모두 과학성을 지녀야 했다.
바로 이런 면에서 세이유 기업과충돌이 일어난 것이다.
게다가 무인양품은 연쇄적인 브랜드를 강조했는데
이 역시 단일 매장 운영을 강조하던 세이유와는 부딪힐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세이유 기업의 문화는 경험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해, 선후배 관계가 엄격하여
무인양품이 지향하는 방향과 많이 달랐다.
(2) 실행력의 차이
세이유 기업은 기획, 전략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기업으로, 방대한 양의 세세한 기획 방안들이 축적되어 있다. 하지만 이 방안들이 축적될수록 실행력은 이를 받쳐주지 못했다.
기획력이 95%라면 실행력은 5%밖에 도달하지 못했다.
결국 이런 기업 문화는 무인양품과 세이유 기업 모두의 성장을 저해하는 큰 요소이다.
(3) 급진적 개혁이 필요한 시스템 구조
회사가 경영 이윤을 얻기 위해선 이전에는 모든 문제를 한 가지로 치부해버렸다.
예를 들면, 의류 부문의 상황이 좋지 않을 경우, 모든 문제를 의류 재료의 문제로 치부했던 것이다.
분석해보니 무인양품의 문제점 중 80%는 바로 이런 시스템 구조 상의 문제였음을 알 수 있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일본의 도요타는 굴지의 기업으로, 도요타의 가장 우수한 문화는 배우고자 하는 문화이다.
도요타는 매출액은 일본 내 기업 중 최고액을 차지하고 있다.
도요타는 여러 자회사로 이루여져있으며, 각 회사의 고위 간부들은 매년 많은 돈을 들여
새로운 지식을 탐구하면서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은 38년간 계속되어 왔다.
무인양품 역시 이러한 대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기업 문화 개혁이 시급했다.
무인양품 개혁의 첫번째는 브랜드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것이었지만
“합리적인 가격”이라는 브랜드 이념 자체는 변함없었다.
무인양품의 지난 20년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소비자의 소비수요가 변화하면서 이에 맞춰 제품 역시 꾸준히 변화해야 만이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 큰 문제가 있었는데, 무인양품의 개발, 전략적인 분야가 이미 완전히 붕괴된 상황이었다.
첫 발자국은 불량 재고들을 처리하는 것이었다.
이 모든 재고들을 불태우는 모습을 공장 관계자들과 제조업자들과 함께 지켜보며 마음을 굳게 다 잡았다.
이를 통해 그들로 하여금 정말 좋은 제품을 생산할 수 없다면 폐품과 마찬가지라는 걸 깨닫게 함이었다.
점포 정리는 직원들을 정리해고하고자 함이 아니다.
정리 해고는 기업에게 진정한 개혁을 가져다줄 수 없다.
진정해야 하는 것은 회사의 구조 조정이다.
회사의 구조를 올바로 재조정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위 두 가지 방법은 충분히 좋은 결과를 가져다 주었지만 이는 기업 위기의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아니었다.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기업 문화에 있었다.
당시 “세계의 무인양품”이라는 슬로건을 내걸며 전세계의 우수하고 창의적인 인재들을 모아
전세계를 타겟을 삼아 도전했다.
전세계의 모든 소비자들이 제품 개발에 참여하도록 함으로써,
일상 속 자주 사용하는 제품을 분석하여 영감을 받아 소비자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유도해냈다.
당시 전세계의 많은 디자이너들과의 콜라보레이션으로,
“디자인을 하지 않는 디자이너”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당시 일상 생활 용품이 무인양품 매출의 55%를 차지하고 있는 주력 상품이었다.
이때 이탈리아의 한 디자이너 작품인 의자가 디자인적인 감각뿐만 아니라
과학적인 감각 역시 뛰어나 함께 콜라보레이션 작업을 진행했다.
제품 개발 부서, 이탈리아 디자이너, 무인양품의 디자이너의 협업의 포지셔닝이
바로 “디자인을 하지 않는 디자이너”였다.
이런 방식을 통해 전세계 많은 디자이너들의 디자인 영감을 통해
자신만의 독특한 디자인 특성을 창조해냈다.
의류분야에서는 요지 야마모토 등 여러 유명 디자이너와의 콜라보레이션으로 많은 관심을 받았다.
패션이란 트렌드에 민감한 분야로, 많은 디자이너들이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하는 분야이다.
무인양품은 특이하게도 유명 디자이너와의 콜라보이션 소식을 홍보하지 않고, 오직 제품으로만 승부하였다.
요지 야마모토와 협업 2년만에 패션업계에서 소비자들로부터 점차 인정을 받게 되었다.
당시 매출 매장에도 큰 문제가 있었다.
10개의 신규 매장을 오픈할 경우, 오직 2곳만이 목표액을 달성할 수 있었다.
분석 결과, 개업 승인 기준이 모호하고 계량화가 되어있지 않다는 걸 알아냈다.
때문에 개업 도시의 평균 수입 지수 등 여러 기준을 세웠다.
이런 계량화 기준을 통해, 확연히 결과를 한눈에 비교할 수 있었고,
그 결과 개업 매장의 90%가 목표액을 달성할 수 있었다.
판매방식과 제품 연구 방식이 변함에 따라, 기업의 경영 방식도 변해야 한다.
그래서 무인양품은 “30% 위원회”를 조직하여 해당 문제를 고쳐나갔다.
30%위원회란 무엇인가?
이는 기업의 운영 비용을 30%까지 절감시키는 것을 목표로,
분자는 운영 비용, 분모는 매출 금액으로 설정하여,
전체적인 운영 원가가 매출 금액의 30%를 차지하도록 설정하는 것이다.
2004년의 운영비용은 전체 비용의 34.1%로, 30%까지 절감해야 했다.
불필요한 출장 감소, 불필요한 야근 감소 등 다양한 방식으로 노력했는데,
각 임원진들을 업무 분야로 이동시킨 점 역시 주목할만 하다.
기업은 신규 매장 오픈, 마케팅 등 많은 업무를 차리해야 하는데,
각 임원진들을 각 업무 분야의 실무에 참여하도록 함으로써
가장 기본적인 곳에서 부터 문제들을 발견하여 운영 비용을 줄여나갔다.
임원진들의 현장 투입은 매우 의외의 결과를 안겨주었는데, 운영 비용이 되려 증가한 것이다.
판매 업적이나 매출 금액은 꾸준히 증가하였는데, 운영 비용 역시 함께 증가한 것이다.
이는 대부분의 임원진이 세이유 기업 출신으로,
무인양품이 추구하고자 함에 대해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 임원진 중 2명 외의 임원들은 예상 목표치를 채우지 못했다.
그렇다고 임원진을 전부 갈아치우기엔 인원수가 너무 많았다.
그래서 선택한 방안은 바로 다른 우수한 기업들의 사례를 참고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무인양품 매장에는 화물 수납장이 많은데,
당시 대부분의 도구들은 일본 생산품으로, 가격대가 높았다.
하지만 월마트 등 많은 동종 업계들이 자체제작을 통해 자신의 매장에서 직접 조립하고 인테리어하였다.
이를 참고하여 무인양품 역시 중국으로 넘어가 제작하고 난 뒤,
직접 조립한 결과, 비용이 40%이상 절감하였다.
당시, 참고할 기업 1순위는 Boss형태(전문 경영인 없이 설립자가 운영하는 기업)의 기업으로,
2순위는 중소기업, 3순위는 소비층 기업(판매 원가가 매우 낮은 기업)이었다.
이 3가지 기업의 운영 효율은 매우 높아, 무인양품에게 많은 모티브가 되어주었다.
무인양품의 매장이 많은 편이기 때문에, 똑같은 문제가 반복되어 인력이나 시간을 낭비하는 종종 발생했다.
그래서 회사 내부 커뮤니티에서 모든 직원들이 다함께 완성해나가는 근무 수칙을 완성해나갔다.
이 근무 수칙은 실제로 매장 운영에 참고하였다.
직원들은 이 커뮤니티를 통해 자신의 의견을 표출할 수 있고,
승인을 통과하면 근무 수칙에 새로 추가되는 방식이었다. 근무 과정 역시 이에 근거하여 조금씩 변화했다.
무인양품은 글로벌 기업으로, 일본에서 시작된 수칙이지만 전세계적으로 활용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국가에서 자신만의 근무 수칙을 작성해야 한다.
무인양품은 종신 계약제로, 인재위원회라는 시스템이 있다.
대학교 졸업생 1명이 입사 후, 회사에서 40여 년간 근무한다는 전제하에
직업 교육, 실습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인재를 양성하는데, 이는 모두 인재위원회의 관리 하에 이루어진다.
교육의 10%는 업무 수칙에 대한 교육으로, 가장 기본적이고 간단한 내용이다;
80%는 회사 부서 관련 교육이데, OJT(On the Job Training)을 실무 교육을 통해 이루어진다;
마지막 10%는 직원들에 대한 전문 교육으로, 회사 내무 방침이다.
그렇다면 무인양품의 리더층은 어떻게 배출되는 걸까?
신입사원 중 단 20%만이 리더층의 자격이 주어진다.
기업에서는 매우 중요한 부서마다 후계자를 끊임없이 양성하는데, 이를 인재 비축이라고 한다.
제1류 인재는 업무 능력이 뛰어나고, 가능성이 넘치며 사내 평가 점수가 훌륭한 인재를 일컫는다.
제2류 인재는 업무 능력이 다소 떨어지지만 평과 결과가 뛰어난 인재들이다.
이런 인재들은 기업의 중요한 중간층으로, 부장급에 걸맞는 인사들이다.
제3류 인재들은 능력이 우수하고, 업무 태도도 무난하여 과장급에 어울리는 인재들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직원들은 제4류 인재에 속하는데, 이들은 매우 평범하지만 또 매우 중요하다.
제5류 인재는 개선이 필요한 직원들로, 기업에서 5~10%의 비율로 적은 편이다.
인재 위원회의 가장 중요한 점은,
20대의 신입사원이 갓 졸업 후 무인양품에 취직하면 그 후의 진로나 전망이
그에게 가장 적합할 수 있기 때문에 본인과 회사 모두가 win-win하는 좋은 방법이다.
회사의 고위층도 모두 변화해야 한다. 하지만 고위층의 변화 여부와 상관없이 성실함은 불변의 법칙이다.
당시 무인양품이 해외에서 빠르게 성장하는 추세로,
해외 매장 수와 국내 매장 수가 비슷한 가운데 해외 운영에 관해 참고할만한 기업이 없었다.
이에 인재위원회의 기능 중 한 가지가 바로 20% 가량의 중위층 간부들을
3개월간 해외로 파견하여 관련 경험을 쌓고 노하우를 배워오도록 하는 것이었다.
전세계를 겨냥함에 있어서 이는 필수 조건이었고 결과적으로 매우 성공적이었다.
각 나라의 매장들과 무인양품 본사의 인터랙션이 더욱 끈끈해졌으며,
중위층 간부들의 관리 능력을 더욱 더 성장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