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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낌 Oct 09. 2016

말하는 대신,

보여주다

아침을 먹으면서야, 대화다운 대화를 한다. 

옆 테이블에 앉아 큰 소리를 내는 아이를 보고 평소의 생각을 말한다. 할라페뇨가 생각지도 못하게 매운 탓에, 물을 끊임없이 들이켜고 손 부채질하고, 뜨거워지는 볼을 양손으로 감싸면서 죽상을 한다. 그 모습을 J는 걱정하면서도 재미있어하는 눈치다. 우리는 먹고 있는 전복에 관해서도 얘기한다. J는 전복의 알맹이와 껍데기를 분리하고 생선 가시를 발라낸 뒤, 내 앞에 있는 접시에 놓는다. 접시가 비어있는 일이 없도록. J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그렇게 애정을 표현한다.



나를 챙기는 J의 모습에서 그때가 생각난다.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성당으로 가는 길에서 J가 헤어지자고 했을 때, 그 뜻대로 해줄 수 없었다. 피레네에서 만나 2주가량을 함께 걸은 후였다. 내가 칭얼거릴 때나 J의 말대로 하지 않을 때도, J의 눈엔 특유의 장난기가 서렸다. 꽤 가깝다고 생각했다. 마음이 없어서라면 동의했을 테지만, 분명히 애정이 있는데 왜 떠나고 싶어 할까. 이해하지 못했다. 정말 헤어지고 싶다면 헤어지겠다는 말 대신, 명확하게 ‘헤어지자, 그만 만나자.’라고 해야 했다. 나라는 사람을 다루는 방식은 그렇다고, 분명하게 말해달라고 했다. 버림받는 것이 두려워서 붙잡은 것이 아니다.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게 좋았기에 J가 필요했다. 특별한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정적이 흘러도 좋았다. 정적이 흐르지 않는 게 훨씬 더 좋지만.




구좌상회작업실


케이크를 먹을 수 있겠냐고 J가 물었다. 아메리카노 한 잔만 있다면, 혼자서도 홀케이크의 반을 먹을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당당하게 당근 케이크를 흡입하고, 다음 장소로 이동한다.




오름을 가게 되어 있었다.

오름에 가는 걸 몰랐다. 제주에 먹으러 왔기에 두산봉에 간다고 했을 때 그 이름의 식당인 줄 알았다. 막상 실체를 알고 나서, 올라가는 것에 대한 내 의견은 딱 50/50이었다. 놀러 와서까지 움직이고 싶지 않았지만, 안 걸으면 아쉬울 것 같았다. 칭얼대다가, 오름을 앞에 두고 '여기까지 온 김에 가야겠다.' 싶었다. 오늘 하루에만 2만 칼로리 섭취할 예정이라는데 걷자, 걸어야지.


두산봉에서 보이는 성산일출봉


총 15분 정도 계단을 올라 평지를 걸으면, 아름다운 풍광이 펼쳐진다.

귀 옆과 이마를 바람이 스친다. 머리띠를 한 것처럼 이마가 드러난다. 아, 난 M자형 이마가 은근히 콤플렉스인데. 훤히 뚫려있는 경치를 보니 드러난 이마만큼이나 마음도 시원하다. 봉우리와 면한 곳엔 논도 있고 밭도 있는데, 그 경계는 뚜렷해서 자유분방한 몬드리안 같다. 논과 밭을 건너뛰면 바다가, 그 위로 하늘이 보인다.

하나의 바람은, 어디까지가 하늘인지 어디까지가 바다인지 그 경계를 구별할 수 없는 곳을 가고 싶다. 왜 그런 바람을 가지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추측하자면 광활함을 느끼고 싶은 것 같다.



놀리고, 뛰고, 장난치느라 바닥을 못 봐서 말똥 밟고. 똥 밟아서 놀림받고, 

평소처럼, 똥 밟은 그런 일쯤은 아무 것도 아니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풀에 슥슥 문지르고.




해가 쨍했던 두산봉을 내려와서 5분 정도 뛰었더니 등줄기로 땀이 흐른다. 서늘해지는 즈음인데도 땀이 흐르는 게 낯설다. 흐르는 땀방울에 신경이 깨어나고 순간적으로 닭살이 돋아 흠칫한다. 부채질할 종이가 없어서, 손을 파닥거리며 바람을 만든다. 소용이 없자 등허리를 손으로 톡톡 두들겨서, 척추를 타고 미끄러지는 땀을 면 속옷으로 빨아들인다. 창문을 끝까지 내렸기에 바람이 거칠게 들어오는데도 땀이 마를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덥다. 이마에 송골송골 솟아나는 땀방울을 연신 손날등으로 훔쳐낸다.



말수가 적어지고 정적이 흐른다. 조금 더 커진 음악이 공백을 메운다.


소심한 책방


규모가 크지 않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생각보다 앙증맞다. 전체를 한 바퀴 휙 돌아보고, 다시 세세하게 들여다본다. 섬세한 J는 나와 다른 것을 발견한다. 내가 그저 "우와 저거 귀엽다!"하는 수준이라면, J는 섬세하게 살피고 이 공간만의 독특한 특성과 감각적인 부분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을 가졌다. 각기 장단은 있지만, 대체로 가지지 못한 것이 부럽기 마련이다.


소심한 책방


햇빛이 내부로 아늑하게 들어온다.

J는 소심한 책방이 자신의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이 공간에 있는 모든 것이 잘 어울린다. 내부가 넓진 않지만, 손길이 섬세하게 닿아있는 것이 느껴진다. 선반 앞의 의자에 앉아 소품들을 구경한다. 판매하고 있는 상품에도 제주의 상징인 해녀 캐릭터가 수놓아져 있다. 친환경적이고 정겨운 느낌이라 가게와 잘 어울린다. 이 상품은 서울에서 제주로 바다를 건너온 것이라 사뭇 신기하다. 모든 상품은 서울을 거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하더니, 이 또한 마찬가지다.




햇빛 아래에 주차되어 있던 차엔 후텁지근하고 묵직한 공기가 가득하다. 운전대를 잡는 J의 어깨에 피로가 짙게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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