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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낌 Oct 14. 2016

이 시간이 소중하다

잘그락 소리를 내며 나란히 걷는다

슬슬 힘에 부친다.

한숨도 못 자고 서울에서 제주로 날아와 여기저기를 쉴 틈 없이 돌아다니는데, 계속 운전을 하는 J가 지치지 않을 리 없다. 힘이 드는 걸 해소할 방법이 없기에, 앉아만 있는 게 미안하다. J는 힘들어서 몸이 배배 꼬이고 있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멋쩍어져서 힘드냐고 물었다. 미안할 때나 곤란할 때와 같이 애매하고 난감한 상황에서, 멋쩍어서 입꼬리가 올라가는 습관 -안타까운 습관 중 하나라서 고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이 있다. 곤란한 상황에서 웃는 것으로 보여서 난감했던 적이 종종 있었는데, 이번에도 그랬다.



짧지 않은 이동시간을 음악으로 채운다.




오전에 전화로 예약했던 김밥집에 도착했다. "한 시간 늦게 오셨네요?" 하는 질문에, 능청스럽게 "길이 좀 막혀서요." 하고 대답한다. 거짓말은 아니다. 거리가 멀었던 것이 주요한 원인이지만, 오는 길에 차가 좀 있었으니까. 불편한 상황도 싫고, 거짓말을 하는 것도 싫어서 적당히 중간지대에 있는 대답을 선택한다. 난감하고 불편한 상황을 피하고 싶다.



가끔 인생이 캐릭터 육성 게임 같다. 여러 개의 답안 중에 하나를 선택하면 그다음 이야기가 진행되는 식이다.


A  솔직하게 생각하는 대로 이야기한다.

B  적당히 말하고 싶은 일부만 알린다.

C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현실에는 보기가 없지만, 대체로 이 셋 중에 어떤 걸 고를지 모든 상황에서 갈팡질팡한다. 어떻게 나도 상대도,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을 수 있을까. 동시에 어떻게 내 뜻을 분명하게 전달하고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까. 가끔 생각해보는데도 제대로 된 것은 거의 없다. 예시가 있어도 고르기 어려운 판국에, 일상생활의 대화에서는 정해진 답도 없으니 더 난해하다. 답변을 예상하고 묻거나 대답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상치 못한 대답에 놀라는 경우도 꽤 있다.




오는정김밥


포일을 펼쳤다.

김밥 두 줄이 다소곳이 들었다. '일반 김밥하고 뭐가 다르지?' 김밥 하나를 먹어보고 나서야, 문득문득 이 김밥이 생각난다던 J의 말이 이해가 된다. 어떤 재료 하나의 식감이 독특하고 중독성이 있다. 운전하는 J의 입에 김밥 하나를 넣어주고, 내 입에 하나를 얼른 집어넣는다. 젓가락을 서둘러 내려놓으며 우물우물 씹는다. 우엉 차 뚜껑을 열며, J가 얼마나 먹었는지를 힐끔 보고, 앞의 차를 한 번 보고, 내비게이션으로 앞에 놓여있는 길의 모양을 확인한다. 길이 직선이면 재빨리 우엉 차를 건넨다. 여기저기 힐끔힐끔, 보조도 나름의 역할이 있다. 냠냠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직접 김밥을 싼 것처럼 뿌듯하다.




크로와상만 보였다. 음식에 대한 취향이 뚜렷하다. 맛은 평이했다.


더 심플




조금씩 어두워진다. 박물관과 목장에 가려는 일정을 취소하고 노꼬메 오름에 갔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길옆에 묘지가 많다. 날씨도 흐려 음산하고 황량하고 이 길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가고 싶지 않아졌다. 더는 들어가지 않고 돌아 나온다. 잠깐이지만 J와 걷는 이 시간이 소중하다.



친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 뚜렷하다. 가까워지는 건 어렵다. 혼자 앞서 나가는 것 같은 감정에 두렵고, 거절당하는 것도 겁이 난다. 사소한 말에 혼자서 속 끓이고 고민하고 어떻게 비쳤을지 수백 가지 수만 가지 생각을 하는 내가 지나치게 소심하다. 인간관계에서 얼마나 더 아프고 얼마나 더 힘들면 익숙해질지 모르겠지만, 아마 죽을 때까지도 익숙해지지 않을 거다. 매번 일어나는 상황도, 같은 맥락인 줄도 모르고 멍청하게 처음과 같은 상흔이 남을 것 같다.



함께 걸으면 더 가까워지는 것 같다. 친근감 동심원의 가장 안쪽에서, 가장 가까운 지인들과 관계하는 그 경계에서, J는 예상치 못하게 한 발자국만큼 가까이 들어온다. 더도 말고 딱 그만큼. 두려우면서도 급물살을 타듯 순응한다. 울퉁불퉁한 돌바닥을 잘그락 소리를 내며 나란히 걷는다. 눈을 바라보고 싶은 마음을 참는다.





몽상 드 애월에 갔다. 큰 인상을 받지 못했고 저녁을 먹으러 갔다. 날씨가 점점 흐려지고 빗방울이 한 방울씩 떨어진다.



오후 다섯 시가 채 되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이 꽤 있었다. 고기를 먹고 소주를 마시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들이 마시는 게 한라산 소주가 아닌 것은 조금 의외였다. 온종일 눈을 붙이지 못했더니 하품할 땐 눈물이 가득 고였다. J가 차에서 눈을 좀 붙이는 건 어떠냐고 했지만, 괜찮다고 하며 촉촉한 눈을 빛냈다. 반짝반짝. 35% 정도 정신이 가출한 상태였다.


돈사돈


고기가 신선해서 맛있었다. 비계도 부들부들 탱탱했다. 고기를 찍어 먹는 장에 들어있는 고추가 매워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침에 전복을 먹을 때 할라페뇨가 매워서 정신이 혼미했는데 의도치 않게 다시 전철을 밟았다. 매운 고추 때문에 혀가 수난당하는 하루다. 정신을 못 차리는 나(약간 과장한다)를 보고 J는 아까처럼 걱정하면서도, 눈길에 웃음이 배어있다. '아유, 얘는 왜 이렇게 손이 많이 가'라고 말하면서 다 챙겨주는 사람 같았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이 표정과 느낌이 좋다. 사람을 잘 챙긴다는 말을 종종 듣는데, J는 평소에도 내가 손이 많이 간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멍하든 손이 많이 가든 어떻든 간에, 즐겁게 웃었으면 그 자체로 충분하다.



이른 저녁까지 먹으니 '벌써 하루가 끝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시간이 잘 간다. 눈을 붙이지도 않았는데 깨어 있은 채로 어떻게 온 하루가 지났나 싶기도 하다.




각출한 자금이 조금 남아서 집에 가져갈 빵을 사고(!) 마지막으로, 망고빙수를 먹으러 갔다.


망고홀릭


빙수를 받자마자 생각보다 작아서 왠지 아쉽고 허무했다. 신선로 빙수라고 해서 엄청 큼지막한 줄 알았는데 그렇진 않다. 눈대중으로 지름이 20cm 안팎일 것 같다. 배가 굉장히 불러서 더 이상 들어갈 공간이 없는 것 같은데도, 빙수 크기가 조금 작다는 생각을 하는 내가 이질적이다. 이 생각을 하는 게 나뿐만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위대(胃大)할 수도 있지만,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게 안심이 된다. J와 마주 앉아 빙수를 아무렇지도 않게 다 먹었다. 고기를 먹고 난 후보다 이상하게 덜 배부르다.




이제 집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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