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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낌 Sep 30. 2016

제주의 아침

제주라는 것이 믿기지 않던 시간

제주에 도착해서 차를 빌렸다. 


J는 운전석에, 나는 보조석에 앉았다. 시속 70km로 제한된 제주의 도로를 그 속도에 맞춰 달린다.



아침을 먹으러 가는 길

좌우로는 야트막한 언덕이 있고 왠지 어색한 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서울을 떠나 다른 지역을 다녀온 지도 오래지 않았는데 낯설다. 오히려 스페인이 더 익숙하고 아무렇지도 않을 것 같다. 그 숲길과 수많은 도시를 거쳤을 땐 점차 풍경이 바뀌었으니까. 흙길을 걷고 걸어, 산을 오르고, 야트막한 산등성이에 가만히 서면, 새끼손가락의 손톱달 크기만 한 건물이 콕콕 박인 도시가 내려다보인다. 구불구불한 내리막길을 조심조심 걸어가면, 가끔은 유칼립투스 나무들을 지나면, 키가 작은 건물들이 반갑다. 조금만 더 힘을 내어 걸으면, 고작 몇 킬로미터만 더 가면 배고픔을 달랠 수 있는 숙소가 있고. 그랬으니까.



채도가 낮은, 옅은 회색이 섞인 하늘색과 짙은 초록색의 조화가 어색하다

매일 보는 것들이 낯설 때가 있고, 매일 잠드는 침대가 불편한 날이 있고, 집에 가는 길이 익숙하지만 이질감이 드는 순간이 있고, 가끔은 음악이 없는 정적이 흐르는 방이 어색할 때도 있듯이. 제주에 막 도착한 내 눈은 도무지 자리를 찾지 못한다. 어색함에 익숙해지려고 노력하듯 말없이 바람이 불어 들어오는 창밖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누군가가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을 빼앗고, 억지로 손에 무언가 쥐여준 것처럼 그렇게 망연자실한 느낌이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방황하고 있었다.



공간을 메우려 준비한 음악을 튼다

모든 것에 대해 그렇듯, J는 음악에 대해서도 뚜렷하다. 그 명확함과 분명함이 좋다. 좋으면 좋고, 싫으면 싫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별로야" 하고 굳이 입을 열지 않아도, 언뜻 봐도 충분히 읽어낼 수 있고 짐작하게 하는 그 솔직함이 좋다.




얼마간의 시간을 달려 바다에 이르렀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서울 각자의 집에서 각자 할 일을 하던 우리가 제주의 바다에 와있다. 몽글몽글한 구름이 떠 있는 하늘과 까만 돌이 자리 잡고 있어 짙푸른 바다 앞에 내가 있다. 믿기지 않는다. 이 풍경을 눈으로 보고 있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현장감이 없다. 마치 사진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차에 앉아서 바람결에 흔들리는 강아지풀을 멍하니 바라봤다

아침을 먹으려고 예약한 식당에서 걸려올 전화를 기다리며 차에 앉아있었다. '내가 제주로 여행을 왔지.' 하고 느낀다. 이런 식의 여유는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사치로 느껴진다. 집을 나가는 때는 주로 약속이 있거나 어딘가로 가는 길이거나, 운동을 가는 길이다. 그럴 땐 그저 가려는 방향만을 보고 부지런히 걸어서 버스를 타고, 지하철을 탄다. 내려서도 여유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제시간에 맞춰가야 한다는 생각을 하거나 오랜만에 일찍 가야겠다고 다짐하거나 바삐 걷기 일쑤다. 나 같은 경우는 버스에 있는 시간, 걷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핸드폰을 하거나 책을 읽는다. 멍하니 바람에 흔들리는 풀을 보는 데에 쓸 시간은 좀처럼 없는 것이다.



매일을 살아가다 보면 해야 할 일이 있다

정확히는 반드시 해야 한다기보다는, 하는 것이 유리하거나 '강박'이 생기는 지점이 있다. 새벽에 일어나서 공부해야 한다거나, 직업을 갖기 위해서는 시사 상식도 알아야 한다거나, 다른 사람들과 통하는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공통의 관심사가 될 만한 취미가 있어야 한다거나, 실제로 사용하진 않아도 다른 사람들이 외국어 공부를 하기 때문에 주눅 들지 않고 비교당하지 않기 위해 뒤따라서 해야 한다거나. 그런 부가적인 것들이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불어오는 바람을 느낀다는 건, 주변에 시간이 없어서(쫓겨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을 의식하지 않아야만 가능한 일이다. 그런 사람을 볼 때면 마치 귀중한 자원을 쓸모없이 낭비하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그저 핑계일 수도 있지만.




아침을 먹는다

너무 배가 고팠다. 비행기를 타기 전, 달걀 1개씩을 먹은 것을 제외하고는 11시가 다 되도록 먹은 것이 없었으니 민감해질 법도 했다. 신선하고 탱글탱글한 전복을 한입에 가득하게 넣으며, 굳어져 있던 표정이 풀린다. 딱딱해져 있던 미간 근육에도 긴장감이 사라진다.


명진전복



배가 조금씩 불러오고, 대화가 시작된다. 

역시 뭐든 먹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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