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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낌 Jun 13. 2017

6일, 언제쯤이면 명확해질까

Estella - Los Arcos

이 날을 떠올리면 포도밭이 떠오른다. 황량하고도 각각 덩어리째 뭉쳐있는 흙, 계속 걸으면 알베르게가 나오기는 할까 싶은 불안감과 의문, 확신이 없는 걸음.


순례를 시작하면서 포도밭을 멍하니 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걷다 보면 실 같은 무언가를 성긴 체에 넣고 물속에 뒤채면 금세 사라지는 것처럼 아무 생각이 없어졌다.



포도나무를 보는 일은 많지 않았다. 강원도로 농활을 갔을 때, 몇 만 평의 포도밭에서 수 백 그루 포도나무의 잔가지를 정리하면서 언덕에서 포도밭을 굽어보았다. 한참을 해도 끝나지 않는 산더미 같은 일에 한숨이 나올 뿐이었다. 그때는 포도나무를 가지를 정리할 대상으로만 보았지, 이 포도밭이 끝나야 내가 숙소에 돌아가서 쉴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 없었다.


포도밭을 그렇게 많이 지났는데도 정작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서 그런지 포도나무를 거의 찍지 않았다. 오히려 포도나무가 가득 들어찬 밭 전체를 찍었을 뿐이었다. 그 덕분에 우리가 지나온 수많은 포도나무의 포도알들이 모여 내가 마시는 스페인 산 포도의 방울방울이 되었구나 생각했다.





여느 때와 같이 어둑한 새벽, 집에서 가지고 온 아버지의 헤드렌턴을 머리에서 쓰고 길을 비췄다. 헤드랜턴을 쓴 내 모습에 J가 웃었다. 너무 잘 어울린다고 한다. 헤드랜턴을 쓸 때마다 웃는 모습에 기쁘기도 하고 의아하기도 하다.

 

별 것 아닌 일이지만 이마에서 나오는 빛으로 길을 밝히는 일은 늘 신경이 곤두선다. 행여나 내가 보지 못한 돌부리에 동행이 걸려 넘어지지 않을까. 새벽 순례나 밤길 운전이나 캄캄한 시간은 긴장되기는 매한가지다. 운전에 비하기엔 너무 작은 일이지만 빛이 어스름하게 얼굴을 드러내는 순간까지 긴장감은 이어진다.

 




원하는 만큼 포도주를 마실 수 있어서 유명해진 이라체 수도원에서 시큼한 와인을 한 잔 마시고, 가다가 해가 떴다. 한국의 여름에는 해가 뜨는 걸 볼 일이 거의 없는데, 스페인에서는 부지런히 출발하면 해 뜨는 장관을 보게 된다.






걷다 보면 분명 아름다운 순간이 많다. 사진으로 보면 한적하고, 여유롭고 찬탄이 나올만한 순간이 이 길에서는 너무 많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끝이 보이지 않는 포도밭, 알알이 맺힌 청포도. 그럼에도 순례하는 순간에 보이는 광경과 실제로 느끼는 건 걸음을 옮길 때마다 등산화를 뒤덮는 흙먼지, 한 점도 없는 구름과 선글라스도 막아주지 못하는 태양, 등줄기로 굴러 떨어져 솜털이 곤두서게 만드는 땀방울이다.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하루에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풍경을 볼 수 있는지, 한 지역에 어떻게 이렇게 다양한 모습이 있는지 놀라게 된다. 밀이란 거, 한국에서는 곰표나 백설이나 등등의 가루로 분쇄된 것이나 조금은 검은 우리밀가루나 이런 것만을 봤는데, 여기에 오면서부터 농산물의 결과물로만 보는 게 아니라 원재료를 보게 되는 게 신기했다. 밀이 자라고 자란 밀을 수확해서 네모나게 쌓아두고, 밀을 잘라낸 밭은 벼를 잘라내고 휑한 밭같이 보이고. 마찬가지로 걸으면서 수도 없이 보는 이 포도나무들이 자라 검붉은 포도가 되고 포도주가 될 것이다. 조금 더 시기가 지나면 해바라기가 피고.






언제쯤 나는 명확해질 수 있을까?


심각한 고민이 있거나 문제가 있어서 이 곳을 온 게 아니었다. 막연하게 답답했고 어딘가 곪아있었다. 이곳에 와서야 비로소 스스로 어딘가 막혀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이 곳에 오기 전, 프랑스에서 만난 애가 나한테 스스로 'Self-honest'해지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게 부끄럽기도 하고 짜증나기도 하고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몇 시간도 제대로 보내지 않은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아무 생각도 들지 않는 길을 걸으면서, 스스로에게 혼자서 질문을 했고 어려운 사람이 물어본 것처럼 내가 스스로 한 질문에 대답하지 못하는 웃긴 상황이 벌어졌다. 내가 내 질문에 대해 했던 생각은 '... 그러게'였다. 나 자신에 대한 고민을 꾸준히 한다고 했는데도 답을 모른다는 건, 보여주기 식으로 했었던지 회피했다는 반증으로도 볼 수 있는 것 같다. 나 스스로도 나를 알 수 없었고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나 스스로 솔직한 답을 한다기보다 내가 평소에 생각해온 대로, 나 스스로를 정의내렸던 대로 대답했다. 대답을 하고서도 겉도는 대답을 한 것 같아서, 솔직하지 않게 대외적인 대답을 한 것 같아서 찜찜했다. 벽에 봉착함과 동시에 의미가 없는 일인 것 같아서 아무 생각 없이 걸었다.






어쨌든 도시에 도착하는 순간은 언제나 기쁘다. 고민을 더 안 해도 되니까! 이 날도 언제나처럼 도착해서 빨래를 하고 소금기에 절여진 몸을 씻어내고 그 어느 때보다(언제나) 값진 식사를 했다. 한 잔의 맥주로 목을 축이고 음식을 먹고 그렇게 고단했던 하루를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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