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s Arcos - Viana
28km를 걸을까 고민하는 J에게 18km만 걷자고 했다. J는 순례 이후의 여행이 계획되어 있어 정해진 기간만 걸을 수 있었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보면 J가 짧은 거리를 걸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기도 했다. 18km를 제안한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이미 발에 온통 물집이 잡혔고 걸음을 뗄 때마다 고통스러웠기 때문에 먼 거리를 걷기가 힘들었다. 18km와 28km 사이 10km에 쉴 수 있는 마을이 없다는 점이 치명적이었다. 마지막 10km가 고통스러울 것이 분명한데 정신적으로 체력적으로 힘든 상황에서도 목표지점까지 가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다행히도 J가 내 의견을 받아들여 함께 18km만 걷기로 했다.
첫 번째 마을까지의 거리가 가까웠기 때문에 평소보다 일찍 첫 마을인 산솔에 도착했다.(이 때는 여기가 마을 인지도 몰랐다) 아침을 먹지 않아서 출출해서 지나가는 길에 있는 작은 마트에 들렀다. 바게트를 배달하시는 분이 가게 사장님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고, 그 와중에 갓 배달된 바게트 하나와 커피를 시켰다. 가게 앞에 있는 플라스틱 의자에 J와 마주 앉아서 바게트를 맛있게 먹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니 옷에 흘렸던 바게트 부스러기가 우수수 떨어졌고, 미처 떨어지지 않은 작은 가루는 옷자락 끝을 살짝 잡고 다른 손으로 툭툭 털어냈다.
이 곳을 지날 때, 난 여기가 너무 작아서 마을이라는 생각도 못했다. 마을이 작아서 알베르게가 없다는 건 알았는데 이 정도인 줄은 몰랐지. 나중에 J에게 도대체 마을이 언제 나오냐고 물었더니, 아까 지나왔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마을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작은 곳은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Sansol'은 기억에서 잊히지 않을 이름이 되었다.
땀 한 바가지에 대처하는 방법
새벽부터 점심 나절까지 8시간 정도를 걸으면 온 몸이 땀범벅이 된다. 알베르게에 도착하는 매일마다, 입은 옷은 샴푸를 묻혀서 발로 이리저리 콱콱 밟아 소금기를 뺐다. 빨래를 마치면 물기를 꽉 짜서 햇볕에 널었다. 어제 빨았던 옷은 오늘 마을에 돌아다니면서 입고, 그대로 잠든 후 그대로 그다음 날의 일정을 소화했다. 티셔츠도 레깅스도 속옷도 양말도 매일 빨았는데, 바지가 문제였다. 꿉꿉한 바지를 입고 다니기에는 찝찝하고, 빨자니 마르지 않을 것 같았다. 한국에서는 가끔 운동할 때 입었지만, 여기서는 매일 땀 한 바가지를 흘렸고 빨기엔 마르지 않을 것 같아서 고민이었다.
J가 바지를 입지 말라고 했다. 다른 외국 애들도 다 그러고 다니고, 바지를 입지 않았다고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고. 바지를 입지 않으면 훨씬 시원할 거라고도 했다. 실제로도 바지를 입고 걸으면 바지가 물을 흠뻑 빨아들인 솜처럼 묵직해졌다. 그 말에 수긍했고 별다른 방법이 없어서 레깅스만 입고 다녔다. 생각보다 훨씬 더 가뿐했고 편했다. 순례하는 내내 바지를 입지 않고 다녔고, 심지어 한국에 도착하는 날에도 그 익숙함에 길들여져 바지를 입지 않고 귀국했다. 심지어 입기 싫어질 정도였다. 어떻게 순례하는 내내 바지를 입지 않고 아무 생각 없이 다녔는지 모르겠지만 J의 조언 덕분에 바지를 빨래하는 고민과 걱정을 덜 수 있었고, 편하게 다닐 수 있었다.
포도밭은 그 규모가 엄청나다. 여길 봐도 포도밭, 저 너머를 봐도 포도밭이다. 순례를 하다가 나중에 가서는 저 밭에 심긴 포도나무가 도대체 몇 그루인지 궁금했다. 그래서 한 줄에 몇 그루가 있는지 세고, 몇 줄인 지 세서 두 개의 수를 곱하려고 했다. 그런데 포도밭이 워낙 많다 보니 그 끝이 보이지가 않아서 스무 줄까지 세다가 포기했던 기억이 난다. 그만큼 포도가 많고 풍요로운 지역이다.
내가 걸음이 느린 편이라, 걷다가 친한 사람들을 만나면 거북이라고 장난칠 정도였다. 실제로 같이 걷던 사람들 중에서도 내가 현저하게 느려서 어떻게 부인해보려고 해도 불가능했다. 그래서 대체로 J는 나보다 빨랐다. 아주 드물게는 느리기도 했다. 이기려고 하거나 경쟁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엎치락뒤치락하기도 했고, 목적지에 조금이라도 빨리 가는 일이 가끔은 경쟁심을 불러일으켰다.
항상 나보다 빨리 가던 J보다 내가 빨리 가게 될 것 같으면, 일부러 조금 더 빨리 걸어서 앞장서 가기도 했다. 장난치려고 "부엔 까미노"하며 지나갔다. 약이 올라서인지 내가 그 말을 하며 지난 지 오래지 않아, 똑같이 인사를 하며 지나가곤 했다.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얼마 되지 않았지만, 볼 겨를도 없는) 똑같은 배경이 반복되는 길에서 그런 사소한 장난이 내게는 소소한 재미였다.
등산용 무릎보호대를 하고도 한 걸음 내딜 때마다 무릎이 부서질 것 같았다. J에게 조금만 가자고 말하기를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거의 마을에 도착할 때쯤엔 신나서 J와 사진을 찍었다. 평범하게 사진 찍다가 바닥에 드러누워서도 찍고, 아픈 무릎도 잊고 무릎보호대도 빼고, 햇볕에 까매지는 것도 괘념치 않고 모자를 벗고 점프샷을 찍었다. 신나서 한참 찍다가 너무 더워져서 J에게 빨리 가자고 했다. 그늘이 아니면 뜨거운 햇살은 잠시 쉬는 것도 허락지 않는다. (그 대신 조명이 좋아서 사진은 화사하게 잘 나온다.)
마을로 들어가면서 고도가 낮아졌고, 마을 중심부와 화살표가 이어지는 길은 다시 고도가 높아졌다. 마을에 도착해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H와 셋이 맥주와 클라라를 마시고 식사를 했다. 밥을 먹은 후에는 마을을 구경하고 놀이터에서 그네를 타고 에어 탁구도 쳤다. 소소하게 하루를 즐겁게 보낼 수 있는 게 행복하다.
해가 기울어지면서 도시의 빛이 해안가 도시와 비슷해졌다. 내게는 해안가 도시는 왠지 모르게 씁쓸한 느낌이 있다. 이 도시가 내게 약간은 새침하고 배타적인 느낌을 주었다. 숙소에 도착해선 또 커진 물집을 바늘에 실을 꿰어 진물이 흘러나오도록 두었다. 물풍선 같던 물집은 진물이 빠져나오면 만두소가 빠진 만두 같았고, 흐물흐물한 느낌이 싫어서 손톱깎이로 껍질을 잘라냈다. 내일은 낫기를 바라며 쓰라린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였다. 내일이야말로 정말 조금(10km) 걷는 날이니까 괜찮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