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Dani Nov 13. 2018

파도 위의 주문

발리 여행기 Holi-Bali Day 1

파도가 적당히 가까이 오면 엉덩이를 들고 엎드려뻗쳐 자세를 취한다. 곧바로 오른발을 뒤로, 왼발을 앞으로 놓고 똑바로 선다. 

단 두 문장으로도 설명이 가능한 단순한 동작을 2시간째 반복 중이었다. 그런데 제대로 잘 일어 서지도 못했다. 간신히 일어섰다 싶으면 금방 바닷속으로 고꾸라졌다. 스키도, 웨이크보드도, 심지어 자전거도 잘 못 타는 나에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서핑이라니.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이런 걸 배울 생각은 꿈에도 없었지만, '힙'하다는 곳은 다 가보고 싶었던 내가 양양 서피 비치에 간 것이 문제였다. 양양에 가면 너도 나도 서핑보드와 한 몸처럼 붙어 다니는데, 그들은 해변에 그냥 서있기만 해도 보기 좋은 그림처럼 바다와 잘 어울렸다. 나도 그냥 관광객이 아니라 바다 풍경의 일부처럼 자연스러워 보고 싶었다. 마침 나는 다음 달에 발리에 가기로 되어 있었다. 발리는 서퍼들의 파라다이스다, 하필이면. 그러니까 모든 상황이 내가 서핑을 배워야만 한다고 외치고 있었다.
 
발리의 1:1 서핑 강습은 양양보다 훨씬 저렴했고, 현지인 버디들은 몹시 친절했다. 우선 내 이름을 물어봐주고(대니? 다니?), 내 수준에 적당한 파도가 오면 어눌한 한국어로 ‘이러나!’를 외쳐주고, 애매한 자세로 겨우 일어서기라도 하면 뒤에서 ‘짜란다!’하며 과한 칭찬을 해준다. 덕분에 기진맥진하면서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엎어지고 물을 먹으면 아무리 잘 해보려고 해도 제정신이기 힘들다. 몇 번인가 계속 일어서지 못하고 넘어졌을 때, 거의 집채만큼 무겁게 느껴지는 서핑보드를 붙들고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버디에게 소리쳤다. “It’s so hard!” 그는 별 표정 없이 무심히 대꾸했다.
 
“It’s easy. You make it hard.”
 
그때는 그 말이 너무 야속하게 들렸다. 아니 이게 다 내 탓이라고? (물론 내 탓이다…) 만약 회사에서 같은 말을 들었다면 서러워서 그 자리에서 울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곳은 회사가 아니라 발리였다. 적어도 휴가를 온 여행자에게는 천국처럼 느껴지는. 언뜻 보아도 바다는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었고, 주변은 나와 비슷한 사람들이 서핑보드를 붙잡고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아주 잠깐이지만 멈칫했다. 지금이 내 인생에 어떤 깨달음을 주는 순간일지도 모른다는, 이상한 예감이 들었던 것도 같다. 물론 그럴 틈도 없이 다시 곧바로 파도를 맞이해야 했지만. 대니, 쭌비! 이러나!
   
나중에 일기를 쓰면서 당시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It’s easy. You make it hard.” 바다가 아닌 육지에 두 발을 딛고 편안한 상태로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보다 정확한 위로도 없는 것 같았다. 이건 원래 쉬운 일이야. 조금 힘을 빼면, 두 발을 가운데에 놓으면, 조금만 더 앞을 디디기만 하면 너는 할 수 있어. 이 쉬운 걸 왜 못하냐는 질책이 아니라, 아주 약간이지만 발전의 여지를 남겨 두는 진짜 충고였다. 서핑처럼 절대로 잘할 필요가 없는 일에서도 그랬다면, 그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일을 애써 힘들게 만들어 왔던 걸까? 지레 겁을 먹어서, 그저 피하고 싶어서 혼자서 어려운 일이라 단정 지었던 많은 것들이 떠올랐다. 대부분은 그 생각에서 멈추어서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조금만 힘을 빼고 쉽게 생각할걸. 그랬다면 해보기는 했을 텐데. 머릿속에서 정신없이 빙빙 돌던 질문 몇 가지가 자리를 찾은 것처럼 침착하게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기분이 정말, 좋았다. 책을 읽을 때나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을 때 종종 비슷한 느낌이 들긴 했지만 이건 온전히 내가 몸으로 부딪히며 얻은 깨달음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어려운 일을 쉽게 만드는 능력 같은 건 없지만, 적어도 모든 일을 먼저 어렵다고 피하지는 말 것.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이제부터 주문처럼 외기로 했다. 이건 쉬운 일이야. 내가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만 않는다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